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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경상북도

경주 송선리 단석산국립공원 금척리고분군

by 구석구석 2007.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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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 전설 서린 신라 국방 요충지 '단석산'

상인암 마애불상군. ㄷ자형의 거대한 자연암벽위에 지붕을 덮어 만들었던 신라최초의 석굴사원이다.  경주에서 가장 높은 산이면서 국립공원에 속하는 단석산(827m). 옛백제인들이 지리산을 넘어 함양, 청도를 거쳐 경주로 들어오던 길목에 자리잡고 있어 신라에서는 국방의 요충지 역할을 했던 곳이다.

 


 
건천 송선저수지

 

건천톨케이트에서 내려 산내방면으로 약 6㎞를 가면 왼쪽으로 송선저수지가 나온다. 저수지가 끝날 때쯤 좌회전해 들어가면 송선 2리 마을이다. 여기서 단석산 입구 우중골까지는 약1㎞. 승용차는 올라갈 수 있으나 대형차는 단석산장휴게소에 세워두는게 좋다.

공영 주차장이 마을 입구에 설치되어 있는 것은 사람들이 거주하는 동네 안으로 차를 끌고 들어오지 말라는 뜻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랑곳없이 먼지를 일으키며 국보 199호 마애불이 있는 신선사(神仙寺)를 향해 차를 몰아댄다. 신선사라면 신선이 되기 위해 도를 닦는 사찰이라는 뜻이고, 여기서 신선이란 곧 미륵불을 의미하는데, 저렇듯 중생이 사는 마을 한복판을 홍진(紅塵)을 일으키며 질주하는 경지라면 신선사에는 가면 무엇하리.
 
우중골에서 마애불상군까지는 약2.3㎞로 40여분 가파른 길을 올라야 한다. 그리 멀지 않지만 맑은 물줄기가 소리를 내며 흘러내리는 계곡을 끼고 줄곧 가파른 오르막을 걸어야 하기 때문에 온몸은 충분히 땀으로 젖는다. 산에 오면 정신의 노폐물이 사라진다고 하지만 이렇듯 땀까지 나서 몸의 찌꺼기마저 없애주니 이만하면 요산요수의 경지가 따로 없다. 다만 사찰 지근거리까지 오가는 지프차들 때문에 맑고 향기로운 산 속 기운이 반감되는 것은 진정 아쉬운 일이다.
 
 
신선사 가는 길목의 우측편에 있는 독립운동가 김대지 옹의 묘소. 풍경 하나가 나무에 매달려 주위를 오가는 사람들의 귀에 맑은 소리를 들려준다. 1917년 만주의 길림, 봉천 등지를 왕래하면서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결사를 계획하다 체포되어 1918년 5월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4월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19년 상하이로 망명하여 김동삼·조소앙·이시영·이회영 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초대 임시정부 의정원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그 후 임시정부 내무위원을 역임하였다.

신선사 옆에 거대 하게 서있는 ㄷ자형의 상인암은 신라최초의 석굴사원으로 토함산 석굴보다 앞선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 석굴사원은 깊이 10m, 높이 8m, 입구폭이 3m인 거대한 자연암벽위에 지붕을 덮어 이른 바 석굴법당을 만들었다. 지금은 옛지붕 대신 보호지붕으로 덮혀 있다.
 
신선사는 지금은 대웅전이란 건물이 있지만 예전에는 작은 관음전이란 건물이었다. 건물 옆으로 몸은 조금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나 머리는 근래 만들어 복원한 좌상이 있고 옆으로 보호각이 있고 그곳에 국보 제199호로 지정된 불상군이 있다.
 
 
단석산의 상인암, 옛날에는 기와가 얹어졌다한다. /정만진

신선사는 아주 자그마하다. 오래된 고찰의 느낌도 없다. 절의 이름이 신선사인 것으로 보아 이곳 단석산은 옛날 신라 때 화랑들이 수도를 하던 곳이었던 듯하다. 단석산이라는 이름이 그 첫 번째 증거이지만, 신선사 바로 옆에 있는 마애불상군은 그 두 번째 증거이다. 높이 8m, 입구 폭 3m, 깊이가 10m의 거대한 ㄷ자형 암벽 틈으로 들어가면 삼면에 불상이 새겨져 있다.

 

어마어마한 암벽 사이로 들어가는 느낌도 대단하려니와, 김유신이 중악(단석산)에서 수도를 했다는 바로 그 연대인 7세기 전반기 불상이라는 1구의 부처상과 8구의 보살상을 눈앞에서 대하노라니 비록 불신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누군들 저절로 엄숙해지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법하다. 

 

 
남쪽 바위면 보살상 안쪽에 새겨진 30행 약 200여자의 명문과 불상군/김환대

마애불상군이 새겨진 이 암벽의 이름은 상인암이다. 전문가들은 이 상인암을 신라 최초의 석굴(石窟) 사원으로 인정하고 있다. 토함산 석굴과, 흔히 제2 석굴암이라 불리는 경북 군위의 삼존불보다도 200~300년 앞선 시대의 석굴 사원으로 보는 것이다.

 

석굴의 바위면에 모두 10구의 불·보살상을 새기고 있다.

본존 미륵불은 둥근 동안 얼굴에 U자형 모양을 이루는 법의(法衣)안에 내의를 묵은 띠매듭 등 배리석불입상(보물 제63호)과의 양식적 연관이 있으며, 목의 삼도(三道)는 나타나지 않으며 수인(手印)은 시무외인(施無畏印)과 여원인(與願印)을 맺고 있는 통인(通印)을 하고 있다.

 

안쪽에 반가사유상이 얕은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는데 정면을 한 상으로 갸름한 얼굴에 머리에는 삼산 보관을 썼고 원형을 두광을 갖추고 있으며, 연꽃무늬의 높고 둥근 대좌를 갖추고 있는 등 삼국시대 반가사유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이 반가사유상은 삼국시대 유행한 양식이나 마애불에 새겨진 경우는 드문 예이다.

 

이 불상군의 조성연대는 조각들의 수법들로 보아 6세기 말 7세기 전반기로 추정된다. 건천 일대에는 선덕여왕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하는 여근곡, 금척리 고분군 등 이외에도 많은 볼 거리가 있다.

 

 

상인암 마애불상군을 본 후 곧장 30분가량 오르면 단석산 정상.

 

▲ 억새평원인 단석산 정상은 삼각점을 비롯해 크고 작은 바위와 돌무지가 어지럽다. 부산일보

길은 숲 속으로 이어져 있고 그늘이 많아 심한 경사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편안하게 해준다.
등산길에는 경주소방서의 '구조지점'팻말이 있으며 단석산3번구조지점부근에 다다르면 거대한 바위 덩어리들이 뒤엉킨 듯이 말려서 올라가며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다. 흰눈이라도 내리면 암벽 등반 훈련을 하기에 아주 적격일 듯싶은 거대 암벽이다. 그 암벽 사이로 희미하게 길이 보인다.
 
왼쪽 바위덩어리 위에 누군가가 쌓아 놓은 작은 돌탑이 보인다. 아직은 새끼 돌탑이다. 저기를 어떻게 올라갔을까, 하고 바라보니 큰 소나무 한 그루가 휘영청 굽은 채 온몸을 암벽 쪽으로 비스듬히 하고 누워 있다. 손으로는 저 소나무를 붙들고 발로는 저 암벽을 디디면서 저기까지 올라갔겠군.
 
맞은편의 더 커다란 암벽을 노려본다. 꼭대기로 사람을 끌어올리려는 듯이 교차로 튀어나와 있는 암벽의 돌출부들이 눈에 들어온다. 무릇 암벽이 저처럼 가로세로로 갈라져 있으면 그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있는 법이다. 나는 슬그머니 다가가 암벽의 자태를 훔쳐본다. 과연 암벽은 사람이 올라갈 수 있도록 적당한 간격으로 틈을 만들어주고 있다. 나는 약간 끙끙대기도 하고 엎드리기도 하면서 암벽 꼭대기로 올라선다.
 
암벽 꼭대기는 기이하게도 편편하다. 마치 누군가가 산신제 같은 제사를 지내려고 일부러 돌을 납작하게 다듬어놓은 것만 같다. 나는 그 위에 올라서서 몸을 벌떡 일으켜 본다. ‘영남의 알프스’라고 부르는 가지산(1240m), 운문산(1181m) 등이 한눈에 들어와 산의 정상에 오른 사람의 기개를 한껏 부추겨준다. 이 맛에 산을 오르는 것이다.

 

 
단석산 정상에서 보는 영남알프스

 

경주시가지, 남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방을 둘러봐도 가까이 보이는 모든 산들이 발아래로 보여 가슴이 탁 트인다. 정상부근에 군락을 이룬 진달래를 보노라면 봄에 한번 더 와야겠다는 마음도 든다.


단석산은 옛 신라에서 중악이라 불리웠으며 김유신이 15세에 화랑이 된 뒤 17세에 삼국통일의 포부를 안고 입산하여 난승(難勝)이라는 나이많은 도사한테 전수받아 체득한 신술로 큰 바위를 단칼에 자른 뒤부터 단석산이라 이름붙여졌다고 전한다.
 
정상의 반석은 오랜 세월 동안 그 틈으로 흙이 들어가고 낙엽이 쌓여 얼핏 하나의 바위인 양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한가운데가 날카롭게 반 토막 나 있는 단석이다. 엉금엉금 기어서 바위의 가장자리까지 가보니 아니나 다를까, 이 거대 바위가 아래로 끝까지 반으로 쫙 갈라져 있다.
 
김유신을 비롯한 화랑들이 수도했다는 내용의 글이 상인암에 불상군과 함께 새겨져 있다. 지금은 마모가 심해 일부만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다. 입구 단석산장휴게소에서 수제비, 묵, 두부 등으로 시장기를 달랠 수 있으며 송선리에서 산내쪽으로 가면 한우단지 식당들이 즐비하다.
 
자료 - 매일신문 / 오마이뉴스2008 정만진, 김환대
 

건천읍 금척리192-1 금척리고분군

 경주 근교 금척리 평지에 있는 신라의 무덤들로, 크고 작은 30여기의 무덤이 모여 있다. 아직 본격적인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1952년에 파괴된 무덤 2기를 조사하였다. 무덤 내부는 직사각형의 구덩이를 파고 덧널(곽)을 설치한 신라 특유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이다. 유물은 금귀고리와 굽은 옥 등이 수습되었다. 이곳의 무덤들은 모두 경주시내의 평지 무덤들보다 규모가 작아 신라의 낮은 귀족들의 무덤으로 짐작된다. 

 

 

 이곳은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하늘에서 받은 금으로 만든 자(금자)를 숨기기 위해서 40여 개의 가짜무덤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곳으로 지금도 이 무덤들 속에 묻혀 있을 것이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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