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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충청남도

금산 13번국도-석동리 보석사~영천암~진락산

by 구석구석 2007.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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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고속도로에서 대진고속도로로 갈아타서 금산 IC로 나간다. 금산읍에서 795번 도로를 이용하다가 725번 도로가 나오면 곧바로 우회전한다. 이곳에서 석동리까지 10km쯤 달리면 보석사다.

 

싱싱한, 보석사 가는 길
신라의 조구대사가 886년에 세운 사찰이다. 절을 창건할 때 조구대사가 사찰 앞산의 금광에서 금을 캐어 불상을 만들었다고 해 보석(寶石)이라 이름 붙었다. 만약, 하늘에서 보석사를 내려다본다면, 금산의 진산 진악산에 안긴 모양새가 영락없이 초록 융단에 깔린 보석 같을 게다. 한 때 33개의 말사를 통괄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저 작고 소담한 사찰로 남았다.

  

사실 보석사는 가을에 운치가 있다. 일주문에서 경내까지 이어진 250미터의 숲길에 낙엽이 쌓이고, 그 낙엽을 밟으며 ‘바스락’ 소리를 들으며 걸어야 한다. 산새 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가지 소리에 장단을 맞춰 걸어야 흥이 난다. 그리고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의 은행나무를 봐야 한다. 노란 은행잎을 펄럭이는 웅장한 모습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보석사 진입로의 전나무 숲길

 

하지만 봄이라고 해 아쉬울 것은 없다. 봄의 보석사는 젊은 여인처럼 싱싱해서 좋다. 게다가 가을에 비해 찾는 사람이 적다. 조용히 걷기에 제격이다. 청솔모가 뛰어가는 소리, 바람에 잔디가 일렁이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니까 말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쪽빛 하늘로 뻗은 전나무가 도열한다. 숲길 옆으로 연둣빛 싹을 틔운 잡목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전나무 숲길보다 운치가 있다. 온몸을 연둣빛으로 치장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가면 커다란 2층 누각이 길손을 맞는다. 단청을 칠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걸로 보아 근래에 지은 건물 같다. 누각 2층 처마 아래 걸린 '보석사'라는 현판 글씨는 어디선가 본 듯한 낯익은 서체다. 근대 서화가인 해강 김규진(1868~1933)의 글씨가 분명하다. 

 

보석사와 범종루현판이 같이 걸려있는 종각 / 안병기

 누하를 통과한 후 돌계단을 밟고 오르니 곧바로 절 마당이다. 맞바라기에 등운선원이라는 현판을 단 선원 건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역시 지은 지 얼마되지 않아 보이는 건물이다. 통상적으로 보면 2층 누각 아래를 통과한 후 가장 먼저 맞게 되는 전각은 대웅전이다. 그런데 왜 이곳에선 대웅전 우측으로 한참 비켜선 곳에다 이렇게 출입문을 겸한 누각을 세운 것일까. 

 

충남 문화재자료 제29호인 의선각, 현재 종무소로 사용중 / 안병기

등운선원 맞은 편엔 의선각이 있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조헌과 함께 청주성 탈환의 공을 세운 의병승장 영규대사가 머물던 가람이다. 본래 맞배지붕에 정면 3칸 측면 한 칸 크기의 전각이나 언제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옆으로 3칸 정도를 더 달아내 지금은 'ㄴ' 자형 건물이 돼 있다.

 

의선각 측면을 돌아들면 곧바로 대웅전 등이 있는 법당 영역이다. 보석사 대웅전은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영규대사의 영정을 보신 기허당과 대웅전(충남유형문화재 제143호)/안병기

대웅전 기단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비로소 아까 지나온 누각의 비밀이 드러난다. 대웅전 정면 마당에는 끝에 서 있는 작은 맞배지붕 건물. 그곳이 바로 원래 보석사의 출입문이 있었던 곳이었던 것이다.

 

이 맞배지붕 건물은 구조로 보아 천왕문 건물이 틀림없었다. 이 건물을 통해 안으로 들어오면 바로 정면에 대웅전이 바라다보이게 돼 있었던 것이다. 언제였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한참 떨어진 곳에 새로 범종루를 지으면서 이 출입문을 폐쇄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왜 범종루를 이곳에다 짓지 않고 멀찌감치 자리를 옮긴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천왕문 뒤에 자리 잡은 승방을 외부와 철저히 차단하기 위한 조처가 아닌가 싶다.

 

범종루에서 바라본 승방(좌)과 천왕문(중앙), 대웅전에서 바라본 모습 / 안병기

마당가에 서서 개울 건너편에 서 있는 천연기념물 제365호로 수령 천년이 넘은 보석사 은행나무를 바라본다. 보석사 창건할 무렵 조구대사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나무다. 높이가 40미터, 가슴높이의 주목 둘레가 10.4미터에 이른다. 위로 뻗은 가지가 자라 땅으로 늘어졌고, 늘어진 가지에서 다시 새로운 가지가 자란다. 하늘로 치솟은 중심 기둥의 모습이 장엄하고 위압적이다.

옛날, 마을에 변고가 있거나, 나라에 큰 재난이 일어날 징조가 보이면 은행나무가 울음소리를 냈다고 전해진다. 이 소리를 듣고 사람들은 재난에 대비를 했단다. 그래서 은행나무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겨졌다. 보석사 신도들은 매년 은행나무 앞에서 대신제를 지내는데, 올해에는 6월 19일 날 행해질 예정이다.

 

가장 높은곳에 위치한 산신각과 그곳에서 보는 보석사 전경 / 안병기

기허당 왼쪽으로 난 나무 계단을 오르면 보석사에서 가장 높은 전각인 산신각에 이른다.  산신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 크기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산신각 안에는 소나무 아래 두 마리의 호랑이를 거느린 산신이 앉아 있는 산신탱화가 걸려 있다.

 

이곳에선 보석사의 전각들이 고스란히 내려다보인다. 들어오는 길에 줄지어 선 전나무들도 그렇고 크지 않은 전각들도 그렇고 보석사는 촌색시처럼 소박하면서 아름다운 절집이다.

 

툇마루에 앉아 잠시 땀을 식힌다. 산신각 옆에는 오래된 목교(木橋)가 있다. 가을이면 사진작가들의 단골 소재가 됐는데, 지금은 심하게 부식돼 건너다닐 수 없게 된 것이 안타깝다.


/ 자료 -

  editor 최갑수 writer 손미경 photographer 안천호 /ⓒ 2008 OhmyNews 안병기

 

트래킹하기 좋은 영천암 

보석사에서 영천암까지 약 1km에 달하는 숲길은 트레킹에 적합하다. 왕복 1시간 거리다. 중간 중간 숲 속으로 산책로가 있다. 정비가 덜 된 것이 조금 아쉽다. 마지막 약 200미터 정도를 제외하면 경사가 완만하다. 영천암은 진락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암자로 가는 길은 꾸불꾸불 길다. 마치 땅에 누운 아지랑이 같이 아른거리는 길이다.

 

눈앞에 바라다 이는 높다란 축대. 산지형 가람이 가진 전형적인 형태다. 그렇지만, 영천암의 축대는 정말 어마어마하다. 어떻게 저렇게 많은 돌을 이곳까지 날라와서 축대를 쌓았을까. 축대 아래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암자로 올라간다. 이윽고 천 년 세월을 견뎌온 영천암의 측면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영천암은 단 두 채의 건물뿐인 조촐하고 고즈넉한 암자다.

 
영천암 들머리 / 안병기

영천암의 보석사의 산내암자로 역사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저 아래에 있는 보석사를 창건한 이듬해인 신라 헌강왕 12년(886년)에 조구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지만, 믿을 건 못 된다. 암자 이름은 암자 뒤에서 솟아나는 석간수가 병자에게 특효가 있는 영험한 샘이라 하여 영천암이라는 했다는 것.

 
 
인법당인 무량수각 / 안병기

정면 6칸, 측면은 3칸 크기의 법당은 요사와 법당이 한 건물에 포함되어 있는 인법당 형태이다. 조선시대에 지어진 인법당 형식의 건물은 대부분 사라져 남아 있는 건물이 별로 없다. 해인사 홍제암 건물이 보물 1300호로 로 지정된 이유가 그것이다.

 

영천암 무량수각은 아직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건물을 찬찬히 살펴보면, 조선 말기에 유행했던 익공계의 건물구조를 엿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인법당 건축물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있는 매우 소중한 자료임이 틀림없다.

 

 

툇마루 위 처마 아래에는'영천암'이라는 현판과 '무량수각'이라고 쓴 두 개의 편액이 걸려 있는데, 영천암이라는 현판 끝에는 '금산(錦山) 12세 신동 고금석(高錦石) 서'라고 부기돼 있다. 만일 저 글씨를 12살 어린 아이가 쓴 게 맞다면 참으로 엄청난 필력이 아닐 수 없다.

 

정면 6칸 중에서 좌측 2칸은 부엌이며, 중앙의 3칸은 법당,  우측에 있는 한 칸은 방이다. 건물 정면에는 툇마루가 놓여 있다. 법당과 방을 신발을 신지 않고 출입할 수 있도록 연결한 것이다. 무량수각의 좌측 북쪽에는 2칸의 방이 있다. 1999년에 무량수각을 중수할 때 달아낸 것이 아닌가 싶다.

 

 
칠성각 / 안병기

인법당 죄측엔 칠성각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 크기의 자그마한 전각이다. 칠성은 원래 우리나라 민간신앙의 대상이었다. 불교가 토착신앙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절집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빈랑성·거문성·녹존성·문곡성·염정성·무곡·파군성을 칠성이라고 한다. 칠성각의 주존은 치성광여래이다. 북극성을 부처로 바꾸어 부르는 이름이 치성광여래이다. 칠성각 안 중앙에는 칠성탱화가 봉안되어 있으며, 그 왼편에는 호랑이를 탄 산신의 모습이 그려진 산신탱화가 걸려 있다.

 

칠성각 뒤편으로 올라가면 암굴 속에서 솟아나는 영천이라는 샘이 있다. 이 암자의 존재 이유가 되고, 이 암자를 지탱해주는 샘이다. 무슨 이유에선지 모르지만, 현재 샘은 유리로 덮여 있다.

 

/ ⓒ 2008 OhmyNews 안병기

 

 산내 암자인 영천암을 지나면 본격적인 산길이 이어진다.

 

 지금 진락산은 천이 과정을 겪고 있다. 침엽수인 소나무 숲이 오랜 시간이 흐르면 활엽수인 참나무 숲으로 변하게 되는 것을 가리켜 숲의 천이라고 부른다. 이 신갈나무는 숲의 천이 과정 중에서 마지막 단계인 극상을 이루는 나무다. '극상'이란 안정된 숲을 이뤘다는 뜻이다.

   
첫 번째 도구통바위가 있는 고개에 도착한다. 이정표가 맞다면 보석사에서 2.1km 올라온 지점이다. 도구통은 절구통의 전라도 사투리이다. 바위가 정말 도구통 같이 생겼는지 살펴보지만, 감각이 무딘 탓인지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
 
바위 옆에 서 있는 나무판에는 '내 죽으면 한 개의 바위가 되리라'로 시작되는 청마 유치진의 시 '바위'가 새겨져 있다.
 

완만한 능선 길을 바람만 바람만 따라가다가 갑자기 가파른 길을 만난다. 숨을 할딱이며 길을 올라 마침내 사방이 탁 트인 봉우리에 올라선다. 지도를 보니, 아마도 이곳이 진락산의 실제 정상인 737m봉인 모양이다. 

 

정상표지석에서 보는 상봉(737)과 상봉에서 바라보는 남쪽풍경/안병기

남쪽을 바라보니, 눈앞에 수많은 연봉들이 파도처럼 펼쳐진다. 시계가 별로 맑지 않아 딱히 어느 산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긴 하지만, 장엄하기 짝이 없다. 이 맛을 보려고 사람들은 산을 오르는 것이다. 땀을 닦아 주는 한 줄기 산들바람, 한 모금의 시원한 약수, 그리고 저 장엄한 산줄기가 주는 시원함이 우리가 애써 산을 오르는 이유의 전부인 셈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산을 오르는 것은 정신의 청량함을 맛보려는 것이라고나 할까.

 

암릉길과 정상표지석 / 안병기

정상 표지석이 있는 곳까진 1.3km 정도 더 가야 한다. 서서히 암릉지대가 시작된다. 금산 쪽으론 더욱 깎아지를 듯한 낭떠러지로 돼 있다. 좁은 암릉길을 지나갈 때는 마치 공중을 걷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암릉길은 자칫 긴장을 풀면 미끄러질 수도 있기 때문에 조심조심 발을 디디며 지나간다.

 

전망바위에서의 조망 / 월간산 정정현 부장

정상 표지석이 있는 곳까진 1.3km 정도 더 가야 한다. 서서히 암릉지대가 시작된다. 금산 쪽으론 더욱 깎아지를 듯한 낭떠러지로 돼 있다. 좁은 암릉길을 지나갈 때는 마치 공중을 걷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암릉길은 자칫 긴장을 풀면 미끄러질 수도 있기 때문에 조심조심 발을 디디며 지나간다.

 

진악산 주능선은 바위가 많아 조망이 좋다/월간산 정정현 부장

이곳에 서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수십 길이나 되는 깎아지른 절벽이다. 바라만 봐도 아찔할 지경이다. 산에 둘러싸인 낮은 분지에 들어앉은 금산 읍내가 마치 요람 안에 든 아이처럼 얌전히 잠들어 있다. 앞으로 가야할 북서쪽 능선을 바라보니, 그곳 역시 만만치 않은 산세를 지니고 있다.

 

 
빈대바위와 아래의 모조리 삼포들녁

조금 아래로 내려서자, 우뚝 솟은 바위가 나온다. 빈대 모양으로 생겼다 해서 빈대바위라고 부르는 바위다. 바위에 올라서니, 정말 장관이다. 특히 금산읍 근방에 까만 바둑알처럼 산재한 인삼밭들이 무척 인상적이다. 왜 금산이 인삼의 고장인지 알 것 같다.  

 

수리넘어재의 장승 / 안병기

그리 넓지 않은 공터가 있는 고갯마루에 도착한다. 이 안부가 바로 실제 수리넘어재이다. 옛 금산읍내와 남쪽 마을을 연결했던 길목이다. "그 옛날 울고 넘었던 수리넘어재"는 이제 등산객들의 산행 기점이 되어 있다. 2기의 장승이 날리는 허허로운 웃음을 뒤로 한 채 산길을 내려선다. 음지리 쪽으로 하산하기 위해 고개를 내려서자, 노랫말이 새겨진 까만 비석이 서 있다.

 

음지리에서 바라보는 진락산 / 안병기

그 옛날 나뭇꾼들이 부르던 신세타령인 지게 '어사용'을 적어 놓은 게 아닐까 싶다. 작대기로 지게 목발을 두드리며 수도없이 이 고개를 넘어다녔을 나무꾼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음지리 마을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진락산을 올려다본다. "산은 물을 안아주지만 물은 산을 버리고 갈 뿐'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 ⓒ 2008 OhmyNews 안병기

 

 

산행길잡이

수리넘어재에서 시작하는 것이 무난해진악산 산행은 해발 370m인 수리넘어재에서 시작하는 것이 정석이다. 금산읍에서 수리넘어재로 가는 길은 노선버스가 없기 때문에 택시로 접근한다. 고개를 넘기 직전 주차장 입구에 등산로 안내판이 있다. 산행은 주차장 건너편의 샘터 왼쪽의 급경사 바위를 오르며 시작된다. 이 산길을 따라 20분 가량 오르면 안부에 닿는다. 실제 옛 사람들이 넘던 수리넘어재는 이곳이라고 한다.

 

이 안부에서 오른쪽 능선길로 10분쯤 오르면 가파른 진악산 북사면이 잘 보이는 전망대에 닿는다. 계속해 5분 가량 오르면 작은 공터가 있는 봉우리에 선다. 여기서부터 북서쪽 산줄기들이 조망된다. 이어 암릉을 타고 30분 거리에 이르면 계진리 선공암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난다. 이곳에서 5분 거리에 ‘빈대굴 130m, 원효암 650m, 정상 60m’ 안내판 삼거리가 나온다. 이 안내판에서 서쪽 바위 아래로 약 50m 밧줄이 설치되어 있다.

 

안내판 앞에서 주능선을 타고 10분 더 가면 넓은 헬기장인 진악산 정상에 오른다. 하산 코스는 남동쪽으로 뻗은 주능선을 타고 40분 거리의 상봉(737m)을 경유해 석동리 보석사로 잡는다. 상봉에서 10분 거리에 높이 6m, 폭 2m 가량의 도구통바위가 있다. 도구통은 충청도 말로 절구를 일컫는다.

 

도구통바위를 뒤로하고 남쪽 급사면을 내려서면 100여 평 공터에 무덤이 있는 곳을 만난다. 무덤을 지나 숲속 계곡길로 10분 거리에 이르면 산중 암자인 영천암이 나타난다. 영천암을 거쳐 시멘트길을 따라 20분쯤 내려서면 고찰 보석사가 나온다. 

 

/ 월간산 2007 김기환

 

숙식 금산읍내 황금장(041-753-2828), 세종장(041-751-2400), 이화장(041-752-1580), 거북장여관(041-752-1107), 궁전장(041-753-3457) 등 장급여관 이용.

금산읍내 식당에서 한정식, 삼계탕, 추어탕 등 인삼을 테마로 한 특색있는 음식을 맛볼 수 있다. 금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금강변에는 어죽 전문집들이 많다. 가장 유명한 곳이 금산군 제원면 천내리에 위치한 원골식당(041-752-2638)이다. 작은 민물고기를 양념과 함께 튀겨 낸 도리뱅뱅이와 동자개를 갈아 만든 어죽만 판매한다. 어죽 1인분 5,000원, 도리뱅뱅이 1접시 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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