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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제주시

제주 건입동-국립제주박물관 사라봉 별도봉

by 구석구석 2012.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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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주터·국립박물관 등 근처 볼거리도 많아

모충사 만덕관

김만덕은 나눔과 베품을 실천한 조선시대의 진정한 CEO로 불린다. 허나 이에 앞서 김만덕은 제주사람 모두의 할머니이며 믿음이고 신앙이다. 그의 선행이 도민 모두의 핏속에 유유히 흐르고 있다.

그의 뜻은 200년이 흐른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전국적으로 '나눔 쌀 만섬쌓기'가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추진중이다. 제주출신 국민여배우 고두심씨가 그 중심에 서 있다.

도내에서도 몇년전부터 많은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제주자치도와 제주시 건입동이 주민센터 북쪽 50m지점에 만덕 객주터를 만들고 있다. 또 객주터 서편인 산지천을 주변에 객주거리를 조성해 관광객을 유도하고 구도심권을 활성화하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 이 주변 거리를 '만덕로'로 지칭한 것도 눈에 띈다.

 

국립제주박물관 064-720-8000

2001년 6월 제주시 사라봉 자락에 문을 연 국립제주박물관은 제주의 역사와 문화유산을 전시·보존·연구하는 고고·역사박물관이다. 11곳에 이르는 지방의 국립박물관중에서 10번째로 생겨났다.

 

 

 

 

 

 

 

 

 

제주 전통민가 형상의 외관이 두드러지는 국립제주박물관은 제주의 토착 역사·문화를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고고역사박물관으로 2001년에 개관했다.

개방적인 해양문화와 제주문화의 형성 과정을 문화사 발전 단계별로 보여줄 뿐만 아니라 제주국제공항 내에 작은 박물관을 운영한다. 전시실 입구 대공간전시실에는 제주읍성 축소 모형을 설치해놓아 제주의 성곽, 건물, 민속을 한눈에 알 수 있도록 했다.

관람 코스에 따라 자연사 전시실로 들어서면 제주의 해양생물, 고도별 식물 분포, 제주의 각종 조류와 포유류 등을 볼 수 있다. 해안지역, 중산간지역, 산간지역 등으로 구분해 제주의 전통생활 모습을 볼 수 있도록 꾸며놓은 민속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특히 해안마을의 해녀와 고기잡이, 중산간지역의 방목과 농업 형태 등이 모형으로 꾸며져 있어 관람의 재미를 더한다. 조선시대 약 200명의 유배자들이 남긴 서책과 더불어 유배자들의 섬이라는 역사적 특성만으로도 제주만이 가진 다양한 볼거리를 접하게 된다.

 

 

 

 

▲관람객들이 삼양동유적 전시물을 둘러보고 있다. 국립제주박물관 상설전시실은 고고학 자료로 제주역사를 선명히 꿰어놓았다. 사진=한라일보 이승철기자

 

지루하고 딱딱한 곳으로 인식됐었던 국립제주박물관이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제주도민과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제주와 관련된 문화 체험을 할 수 있도록 전시실내 ‘상설체험코너’를 운영하기 시작한 것이다. 재료비 1천원(한지 3장)만 지불하면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다.
제주 수정사지 출토 석탑부재 탁본(拓本)하기, 대동여지도 중 제주도 지도 목판(木板)인쇄, 관덕정과 불탑사 5층석탑 만들어 보기, 박물관 방문기념용 낙관(3종) 찍기, 씨름 벼타작 등풍속화 퍼즐맞추기 등등이다.
돌이켜 보면 대부분 학창시절 배웠던 내용일게다. 지금은 그 내용이 가물가물 희미해졌겠지만.... 아이들 또는 가족과 게임을 즐기듯 프로그램에 참여해 보자. 처음부터 배운다는 자세로 체험에 임한다면 함께한 자녀들보다 오히려 뿌듯한 마음으로 박물관을 나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상설체험코너는 연중운영되며 모든 관람객이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다. 단 탁본, 목판인쇄 체험시 필요한 체험재료(한지 3종 1천원)는 참가자가 부담해야 한다.

 

탁본이란 돌, 목재, 금속 기와등에 새겨진 그림이나 문양, 글씨 등을 먹을 가지고 원형 그대로 종이에 본을 뜨는 방법을 말한다. 범종이나 비석등의 면을 먹으로 더럽히지 않고 직접 종이를 대어 그 위에서 먹물로 가볍게 두들기듯이 하여 문자나 문양을 뜨기 때문에 도드라진 부분은 까맣고 그 외의 부분은 하얗게 떠진다.
먼저 탁본할 면을 솔로 깨끗이 청소한 후 스프레이로 물을 골고루 뿌려준다.
한지를 탁본할 대상물에 정확하게 얹어놓고 가볍게 물을 한번 더 뿌려 밀착시켜 준다.
마른 수건을 덮고 손으로 가볍게 구석구석 눌러준다. 솔로 전체를 골고루 두드린다.
솜방망이에 먹을 묻혀서 탁본할 대상에 가볍게 ‘톡톡’ 친다. 완성이 되면 원판에서 띄어낸다.
주의할 점은 물을 골고루 뿌리돼 너무 많이 뿌리지 말고, 솜방망이로 탁본대상을 칠때 역시 가볍게 톡톡 두드려야 한다. 간단한 과정이지만 가족이 서로 도와주면 더 빨리 작품을 완성시킬 수 있다.

 

목판인쇄란 목판을 사용하여 책이나 그림을 찍어내는 인쇄방법이다. 이전까지는 직접 쓰거나 베껴야 했지만 다량의 인쇄가 필요하고 베낄때의 실수나 변화를 줄이기 위해 이러한 기술이 개발됐다. 1966년 경주 불국사 석가탑의 보수공사 중에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751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써 현존하는 것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이다.
탁본체험과 마찬가지로 맨 처음엔 목판면을 솔로 깨끗이 청소한 후 목판의 수분이 완전히 말랐는지 확인한다. 그림이 새겨진 목판면에 롤러(먹솔)를 이용해 골고루 칠한다. 칠할때는 중간에 멈추지 말고 한번에 쭉 밀어준다. 아이들에게 요령을 설명해 주면 처음 몇 번은 부모와 같이 하지만 나중엔 나혼자 하겠다며 롤러를 놓지 않는다.
한지의 부드러운 면을 먹물 바른 목판위에 얹어 놓는다. 그 다음엔 먹물이 묻지 않은 깨끗한 롤러를 이용해 한지에 먹물이 스며들도록 골고루 문지른다. 양각된 부분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제주시 번화가에 위치한 관덕정은 보물 제322호로 조선시대 세종 30년에 병사의 훈련과 무예수련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립했다.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중수 및 개건됐는데 과거 관덕정 광장은 활쏘기 시합이나 과거시험, 진상용 말점검, 역사적인 사건 등이 벌어진 유명한 장소이다. 건물의 구조는 앞면 5칸, 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때 여덟 팔 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건물은 사방이 탁 트이게 뚫려 있고 지붕처마를 받치기 위해 새부리 모양으로 뻗쳐나온 재료를 기둥 위에 두개씩 짜놓았다.
관덕정 전체는 아니지만 일부를 조각조각 분리해 놓고 순서에 따라 하나하나 조립해 보는 체험코너다. 조립순서는 다음과 같다.
기둥-창방-초익공-주두-소로-첨차-이익공-화반-재주두-장여-운공-퇴량-도리-추녀-서까래.크게 이런 과정을 거쳐 관덕정이 완성되는데,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도록 모형부재에 조립순서가 새겨져 있으니 부담없이 도전해 보자. 관덕정 주요 부재가 사진과 함께 설명돼 있어 모르는 이름이나 옛말은 설명서를 읽어보거나 박물관 직원에게 도움을 청하면 된다.
예를 들어 ‘첨차’는 기둥머리나 소로 위에 얹히어 윗 부재를 받쳐주는 것이고 ‘추녀’는 지붕의 귀에 대각선 방향으로 거는 경사진 부재이다. 많이 들어본 ‘서까래’는 비탈진 지붕면을 만들려고 도리 위에 촘촘히 설치하는 부재이다.

 

제주시 삼양동 원당봉에 위치한 불탑사오층석탑.
보물 제1187호 불탑사5층석탑은 원당사 터(현재 불탑사)에 있는 현무암으로 된 제주도내 유일의 고려시대 석탑이다. 원당사는 원제국의 마지막 황후인 기황후가 아들을 얻기 위해 세운 사찰로 전해지고 있는데 17세기 이후 폐사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 자리에는 현재 불탑사가 자리하고 있다. 탑은 1단의 기단 위로 5층의 탑신을 두고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 모습이다.
탑은 본래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묘에서 유래한 것으로 하늘을 숭배하여 제사를 지내는 제천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한다. 높은 것과 무한한 것에 대한 종교적 공경심에서 세우게 된 것이다. 14조각으로 이루어진 불탑사5층석탑을 쌓으면서 탑의 진정한 내력도 공부해 보자.
참, 올해 10월까지 매주 토요일에는 저녁 9시까지 개관할 예정이며 야간시간엔 무료(18:00-21:00 입장객)로 관람할 수 있다고 하니 시간이 되면 자주 들러 제주의 역사를 제대로 배워보자.


。개관시간 : 평일 오전 9시~ 오후 6시, 주말 오전 9시~오후 7시(공휴일 포함)
。휴관일 : 매주 월요일, 1월1일
。관람 요금 : 일반 400원(25~64세), 할인 200원(19~24세, 30인 이상 단체), 초중고생·65세 이상 무료, 매월 첫째 일요일 무료
。주요 소장품 : 목관아지출토 명문암키와, 곽지리식토기
。홈페이지 : jeju.museum.go.kr

자료 - 주간동아/보보스제주 강은정기자

 

 

 

 

제주 고유의 무속문화인 칠머리당굿

 

 

 

 사라봉과 별도봉이 갈라지는 곳에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71호인 제주칠머리당굿은 제주시 건입동의 본향당 굿을 말한다. 제주의 무속에서 본향당이란 한 마을의 신앙민의 출생에서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활을 도맡아 보는 수호신의 거처임과 동시에 제단을 뜻하는 말이다.
본향이란 본디의 고향, 선조의 고향이란 말로써 사람이 태어난 곳을 말하며 따라서 만물생성의 시원을 뜻하는 것이다. 당은 크고도 신비로운 집을 뜻하는 말이다. 이 당이 위치한 건입동 동쪽 즉 제주항과 사라봉 중간의 바닷가 언덕을 속칭 ‘칠머리’라 일컬어 ‘칠머리당’이라 칭하게 된 것이다.
칠머리당의 신(神)은 ‘도원수감찰지방관’과 ‘요왕해신부인’이라는 신이다. 이 두 신은 부부신으로서 남편인 도원수감찰지방관은 마을 전체의 토지, 주민의 생사, 호적 등 생활전반을 차지해 수호하고 부인인 요왕해신부인은 어부와 해녀의 생업 그리고 외국에 나간 주민들을 수호해 준다고 한다.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71호인 제주 칠머리당 영등굿의 기능보유자인 김윤수 심방이 9일 오전 제주시 사라동에 있는 칠머리당에서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 등재를 기념해 굿을 벌이고 있다/제주일보

 

예전부터 칠머리당에서는 1년에 두 번 큰 굿을 하는데 음력 2월1일의 영등 환영제와 음력 2월 14일 열리는 영등 송별제다. 영등환영제는 영등신을 맞아들이는 굿이요, 영등송별제는 영등신을 치송하는 굿으로 어느 것이나 영등굿이다.

 

영등할망이라 불리기도 하는 영등신은 바다농사를 주업으로 하는 어부와 해녀에게 해상안전과 생업의 풍요를 주는 매우 귀한 신이다. 건입동에서는 본향당인 칠머리당에서 굿을 벌이면서 영등신을 주신(主神)으로 하여 위하는 영등굿을 하고 있다. 물론 칠머리당굿 전체가 영등신에게만 바치는 굿은 아니다.
그 일부 제차(祭次)로 본향당신을 청해 위하는 부분이 있지만 굿의 대부분이 영등신에게 어부와 해녀의 해상안전과 어업의 풍요를 위해 비는 굿으로 짜여져 있다. 본향당신에 대한 굿은 일부 곁들이는 것뿐이요, 실은 영등굿을 하고 있는 셈이다.
영등신을 중시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사면이 바다인 제주도는 바다밭을 일구며 생존하는 해녀와 어부 등 해상활동을 주로 하는 어촌마을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영등굿은 건입동 뿐만 아니라 제주의 어촌마을이면 어디서나 전주민이 참가한 가운데 해상안전을 기원하며 부락제로서 성대히 치러졌다.

 

현재까지 민간에 전승되는 영등굿과 관련한 내용을 몇가지 소개한다.
“2월이 되면 바닷가의 보말이 다 속이 비는데 이는 영등할망이 돌아다니면서 다 까먹었기 때문이다.”
“영등이 들어오는 날 날씨가 추우면 옷좋은 영등이 왔다 하고, 비가 오면 우장 쓴 영등이 왔다 한다.”
“이 기간에는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지 말아야 하고 빨래를 해서도 안된다. 빨래를 하여 풀을 먹이는 집에 구더기가 인다.”

 

풍어제를 겸해서 열리는 환영제는 2시간이면 끝나지만 송별제는 하루종일 치러진다. 여유가 된다면 굿판이 벌어지는 송별제 현장을 방문해 심방이 풀어내는 사설에 귀기울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 같다.

보보스제주 /강은정기자

 

 

 

음력 2월 초하룻날 '영등환영제'를 열어 맞아들인 영등신을 떠나보내는 '영등송별대제'가 10일(음력 2월 14일 사라봉 칠머리당 본향당에서 열렸다/제주일보 2009.3 정이근기자

 

산지포구

건입동은 제주시 구시가지 동쪽 외곽에 위치한 지역으로 탐라국시대 이래 제주와 육지부를 잇는 관문이자 대표적인 교역항이었다. 이는 건입동의 지리적 환경에 따른 것으로 제주도의 수부(首府)인 제주시의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산지포(건입포)를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옛 산지천 줄기는 지금의 중국 피난선이 위치한 남쪽에서 사라봉쪽을 향해 90도로 휘어져 산지포구로 흘러갔다. 남쪽에는 금산기슭에 영은정이 세워져 있었다. 강부언 화가의 산지천포구 그림으로 산지천에서 포구를 향해 바라본 전경이다. /그림=강부언(한국화가)


산지포구는 탐라개벽 설화에 등장하는 고을나 15세손인 고후 등 세 형제가 처음으로 신라에 입조한 뒤 신라왕으로부터 국호와 작위 등을 받고 귀환한 포구로도 알려지고 있다.

최근들어 고고학적 발굴과 각종 문헌자료에 관한 연구가 진척되면서 고대 탐라는 주변지역과 활발한 교류를 하며 동북아시아의 환황해권(環黃海圈)에서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궤적을 그렸던 존재로 재조명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단서의 하나가 산지항 축항공사 때 인근 용암동굴에서 출토된 한대(漢代)의 유물들이다. 이들 유물은 동거울을 비롯하여 동검자루, 60여점의 화폐 등으로 이루어졌다. 이들 화폐는 전한(前漢)시대에 사용됐던 것으로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2세기 무렵의 교역인들이 남긴 유적으로 보고 있다.

 

 

▲1890년대 제주시 산지포구. 포구에서 산지천쪽을 향해 바라본 전경./사진=제주100년 사진집

 

이처럼 산지포는 제주와 육지부의 문물이 오가는 거점으로서 교역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져 왔다. 조선시대 거상으로 이름을 날렸던 의녀 김만덕의 객주가 있었던 곳도 산지포구 주변이었다. 산지포구는 늘상 사람들이 붐비는 곳이었다. 만덕은 이곳에 객주를 차려 일약 거부가 되었으며 1792년부터 4년간 흉년이 들어 도민들이 굶주리자 그동안 모은 재산을 털어 육지에서 양곡을 사들여 구제했다. 이 공로로 만덕은 임금을 알현하고 금강산을 구경하는 특전을 누리기도 했다.

고 김석종 옹이 남긴 '포구의 악동들'에는 산지포에 1930년대까지만 해도 해상업으로 살아가는 선주들이 거느린 중선(中船) 30여척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이른 봄부터 가을까지 7~8개월동안 남해안을 거쳐 군산-인천-연평도-해주-신의주를 오가며 해상업을 벌였다고 한다. 탐라국시대 이래 해상활동을 벌였던 탐라인들의 잔영(殘影)이라 할 것이다.

산지포구를 거슬러 올라가면 동쪽 기슭에 금산언덕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었다. 한라산에서 뻗어내린 지맥이 사라봉을 휘돌아 서쪽으로 내려오며 산지천가에 우뚝 멈추어 선 지형이다. 금산은 소나무가 울창했던 곳으로 성안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천혜의 조망처였다. 그러다보니 많은 유적들이 생겨났다. 금산 남쪽 기슭에는 삼천서당(三泉書堂)이 있었다. 김정목사가 1736년 제주의 유생들을 길러내기 위해 세운 것이다. 원래 인조 때 이각이 제주판관으로 재직(1626 ~1628) 때 못을 파서 연꽃을 심고 그 위에 연당(蓮堂)을 지은 것인데, 다시 이 터에 삼천서당을 세운 것이다. 노봉 김정목사는 역사문화는 물론 당시로서는 드물게 자연생태에도 놀라운 안목과 관심을 가진 선각자였다. 그는 금산언덕을 호반병, 중장병, 용린병으로 나눠 이름을 짓고 그 의미를 부여했다. 또 샘터마다 깨끗이 정비해 그 뜻을 정리한 명(銘)을 남겼다. 또 서당 경내에 있는 산저천, 급고천, 감액천 주변에 유생들이 붓글씨연습을 할 수 있도록 천롱석이라는 넓은 바위를 갖추고 세심단(洗心壇)을 세워 항상 곧고 맑은 마음을 갖도록 했다.

 

▲일본 마쓰다 이지치가 남긴 산지천유역도로 산지천 원모습이 그려져 있다.

 

심천서당 북쪽 금산기슭에는 금산물, 광대물, 지장샘이 용솟음쳤다. 여기에서 솟는 샘물은 약샘이라 부를 정도로 효험이 있다고 전해진다.

금산 주변에는 1905년 홍종우목사에 의해 영은정(泳恩亭)이 세워졌다. 홍종우는 한말의 대신 김옥균을 상해에서 암살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가 제주목사로 오게 된 것은 1901년의 이재수란으로 프랑스와의 배상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는 홍 목사가 프랑스에서 유학한 경력을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영은정 남동쪽에는 공덕동산이 있다. 당시 산지사람들은 동쪽에 가로막힌 높은 절벽을 넘어 밭으로 나갔는데 길이 험준해 위험이 따랐다. 이에 지역유지인 고서흥이 조 삼백석을 내놓아 석수와 일꾼들을 거느려 암반을 뚫고 길을 만든 것을 기리기 위해 길가에 공덕비를 세웠다. 지금도 남아 있다.

금산기슭에서 용출하는 샘물들은 산지천과 합류하며 산지포구로 흘러 들어갔다. 기묘사화를 입어 1520년 제주에 유배온 뒤 다음해 사약을 받은 충암 김정이 남긴 '제주풍토록'에는 산지천의 옛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가락천과 산지천이) 바닷가에 이르러 못을 이루니 물이 맑고 깊은 곳에 사람이 가지 못함에 배를 띄우는데 은순(은어)이 가장 많고 곁에는 갈대밭이 있어 강호(江湖)는 자못 고요하고 깊숙한 정취가 있다. 물고기는 그물로 혹은 낚시로 낚는다"는 구절이 그것이다. 영주십경의 하나인 산포조어(山浦釣魚)라는 이름이 여기에서 유래한 것은 아닐까 싶다.

 

▲지금의 산지천 /사진=강경민기자

 

지금 산지천은 동문교-광제교-북성교-산지교-용진교를 거쳐 바다로 들어간다. 그러나 원래 산지천은 산지교에서 거의 90도 정도로 급히 꺾여 동쪽으로 흘러갔다. 지금 중국피난선 모형이 세워진 곳에서 20~30m정도 남쪽에서 사라봉 방향으로 수로가 이어졌다. 이는 일본의 지리학자로 '제주도의 지리학적 연구'를 펴낸 마쓰다 이지치가 남긴 1932년의 '제주성내음료수등가지역권' 지도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이 지도와 한말의 산지포구 사진을 보면 포구는 길이 약 150~200m, 폭은 30~40m 정도 남짓한 규모이다. 현장을 찾아보면 옛포구의 흔적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면 산지포구는 어떻게 사라진 것일까. 한말에 이르면서 1897년(광무1) 제주에도 기선이 취항하게 된다. 이에 따라 수심이 깊고 대형선박이 접안할 수 있는 양항이 필요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제는 1920년 조선총독부령 41호로 산지항을 지정항으로 고시한데 이어 1927년에는 상선을 취항시키기 위한 축항공사에 착수하게 된다. 축항공사가 시작될 무렵 또 하나의 사건이 발생한다. 1928년 대홍수로 남수각 홍예교와 북성홍문이 무너진 것이다. 이 홍수는 산지교를 거쳐 포구로 연결되던 유로를 바꾸며 바로 바다로 넘쳐 '졸락코지'로 이어지게 된다. 이에 일제는 일주도로를 기점으로 북쪽에 위치한 제주읍성을 허물어 산지항축항 골재로, 산지포구 남쪽의 금산절벽도 깨어 포구 매립골재로 투입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탐라시대부터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간직했던 터전은 물론 제주성안의 초고 경승지로 이름 높던 금산 주변의 풍치도 함께 사라지게 된 것이다.  한라일보 2009.1 강봉규기자

 

 

 

산지천축제. 첫날 개막퍼레이드를 시작으로 박물관마을 탐사대회와 백일장 및 그림잔치, 종이배 만들기, 산지천 테우체험, 마차체험 등 다양한 체험프로그램이 선보인다.

 

산지등대 산지항로표지관리소 064-722-5707

행정구역상 제주시 건입동에 속하는데도 이 곳을 왜 “산지등대”로 부르게 되었는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한다. 산지란 명칭은 1702년(조선 숙종 28년) 제주목사 이형상이 순력중 화공 김남길로 하여금 제작토록 한 「탐라순력도」에 의하면 산지촌(山 地村)으로 기록되어있다. 그 밖의 문헌 「제주도 통권 42호 1969년」에 의하면 처음에는 산저(山低)였던 것이 나중에 산지(山地)로 되었다 한다.

 

 

즉 한라산에서 발원한 “산지천” 상류의 가락쿳물(오현단 동쪽)이 건입포를 지나 바다로 흘러들었기 때문에 산저(山底)라고 하였던 것이 “산지”로 바뀌게 되었다는 설과 한라산 줄기인 사라봉이 북으로 뻗어 내려오다 해안가에 이르러 다시 높이 솟아올라 “산지”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는데 이런 이 곳의 옛 지명을 따서 산지등대라고 부르게 되었다. 제주시민의 대표적 공원인 사라봉 중턱 언덕 위에 탐라의 관문인 제주항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하얀 건물 하나가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해안 절벽과 바다가 어우러져 한 폭의 수채화를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해안선의 모습을 한 눈에 감상할 수 있는 곳! 그 곳에 “산지등대”가 있다.

1916년 10월 무인등대로 처음 점등된 산지등대는 1917년 3월에 유인등대로 변경되었고, 1999년 12월에 현재의 모습으로 새롭게 등탑을 신설하였고 기존 등대는 83년간 밝혀오던 희망의 빛을 동생에게 물려주고 옆에서 묵묵히 지켜주는 형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산지등대의 등탑은 백색 원형콘크리트 구조로 높이는 18m이다. 2002년 12월에 순수 국내 기술로 개발한 고광력 회전식 대형등명기로 교체되었고 불빛은 15초에 1번씩 반짝이며 그 빛은 48㎞ 떨어진 곳까지 도달한다. 산지등대 주변은 넓은 바다와 사라봉이 펼쳐진 주변광경이 뛰어나고 도심지와 가까운 위치에 있어 유치원생부터 고등학생까지 등대 탐방을 겸한 체험 학습장으로 각광을 받고 있으며 등대 역할 뿐만 아니라 관광 자원으로서도 제 몫을 톡톡히 하고 있다. 태양이 지쳐 바닷속으로 빠져들어 붉은 빛이 채워질 때 쯤 생활터전으로 향하는 어선들을 반기는 파도의 하얀 포말이 노을을 벗 삼아 만들어내는 옥빛의 향연이 등대 앞쪽 바다에 펼쳐지고 등대의 불빛이 어둠을 향해 길을 만들기 시작할 때부터 바다는 수백 척의 고기잡이배들이 수놓는 환상의 불꽃 잔치가 펼쳐진다.

 

사라봉에서 바라보는 일몰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영주12경의 하나인 '사봉낙조' 

제11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 시민의 숲 부문 어울림상 수상 

 

 

 

도심속 시민공원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사라봉 해송숲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 으로 선정됐다.

(사)생명의 숲 국민운동본부와 유한킴벌리, 산림청이 공동주최한 제11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사라봉 해송 숲이 아름다운 시민의 숲 부문에서 어울림상(장려상)을 수상한 것이다.

제주시 도심 속에 자리해 있으면서 서울의 남산에 비교되곤 하는 사라봉(고도 148m)의 경관적 아름다움이 전국적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사봉낙조, 봉수대 등 역사 문화적 가치가 뛰어나고 바다와 인접한 지역으로 독특한 자연경관과 생태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 수상 이유다. 또한 지역주민의 숲에 대한 관심과 보호노력이 높은 평가를 받아 올해의 아름다운 숲에 선정됐다.


사라봉 해송 숲은 면적이 30h에 이른다. 50여년 된 해송으로 숲이 우거져 있어 사시사철 쾌적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그래서 사라봉과 별도봉 산책로를 즐기는 마니아들도 많다. 접근성이 좋은데다 산과 바다를 한꺼번에 조망이 가능하다는 점이 큰 매력이다. 오르기 시작해 10분이 채 안돼서 정상부에 다다르면 탁 트인 바다와 남쪽의 한라산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정상부에 있는 팔각정에서 잠시 숨고르기를 하다보면 일상에 지친 심신의 피로가 어느새 사라진다. 사라봉은 그렇게 시민들의 벗으로 늘 함께 한다.

 

 

사라봉은 경관적 아름다움 뿐 아니라 역사문화자원이 풍부하다는 점에서 또다른 매력이 있다. 사라봉에서 바라보는 해가 지는 광경은 예부터 영주십경(瀛州十景)의 하나인 사봉낙조(紗峰落照)라 표현했을 정도로 매우 아름답다. 오름 정상부에는 망양정(望洋亭)이란 현판이 달린 팔각정이 있으며, 제주도기념물 제23호인 사라봉수가 정비돼 있다. 사라봉수는 국가사적 제380호인 제주목관아와 가장 가까운 봉수대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사라봉 북쪽 기슭에는 1916년에 세워진 산지등대가 가을의 호젓함을 더해 준다.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된 제주칠머리당 공연장이 위치한데다, 조선시대 거상인 의녀반수 김만덕과 의병항쟁기념탑 등이 있어 제주역사를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사라봉에는 또한 태평양전쟁 시기 일제가 구축한 갱도진지 8곳이 있다. 갱도의 총 길이는 약 500m에 이르며 현재 국가 등록문화재 306호로 등록돼 있다. 이처럼 사라봉은 곧 제주역사 그 자체이기도 하다.

 

별도봉이 함께 있어 더 빛나는 가치

 

사라봉은 별도봉이 있어 그 가치가 더욱 빛난다. 사라봉과 별도봉은 현재 장수산책로로 연결돼 있다. 한시간 남짓이면 두 오름과 바닷가까지 둘러볼 수 있다. 별도봉 역시 주변에 풍부한 역사자원이 있다.

정상부에 서면 조선시대 제주의 관문이었던 화북포구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제주에 부임한 관리는 화북포구에서 옛 화북남문을 통해 큰길(현 삼사석로)을 거쳐 제주목관아가 있는 제주동문에 이르렀다. 일반인의 경우는 화북포구에서 북서쪽으로 난 곤을동~화북비석거리를 통해 제주동문에 다다랐다.

 

1976년 제주도기념물로 지정된 화북비석거리에는 조선시대 제주에 파견된 목사나 판관들의 치적 등을 담은 비석 11기가 있다. 4·3 당시 마을전체가 불탄 잃어버린 마을 곤을동은 지금도 집터 등이 온전히 남아있어 다크투어리즘의 명소 가운데 하나가 됐다. 산책로를 따라가다보면 태평양전쟁 시기 일제가 파놓은 갱도진지(사진)들을 만날 수 있다. 별도봉은 봉건왕조시대의 역사뿐만 아니라 제주의 아픈 역사까지도 온 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조금만 여유를 갖고 선사시대부터 근현대 제주고고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국립제주박물관까지 둘러볼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한라일보 2010

. 10. 16

 

 

뒤로 보이는 별도봉

 

사라봉 들머리에 위치한 보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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