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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충청북도

보은 법주사 문장대 망개나무 대휴선원 복천암 동암 보현재

by 구석구석 2007.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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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보은 속리산 법주사의 암자들


 

 

 

탈골암 가는 길의 망개나무서식지오마이뉴스 안병기

 

 비구니 선객들의 도량 탈골암

 

탈골암으로 가는 길은 속리산 주 등산로에서 벗어나 있다. 세조가 목욕을 하고 피부병이 나았다는 목욕소 가기 직전 삼거리에 이정표가 있으며 0.9km가량 올라가야 탈골암이 나온다.

 

법주사의 산내 암자인 탈골암은  비구니 스님들의 도량이다. 닦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길이 몹시 깔끔하다. 조금 걸어 들어가자 계곡이 나온다. 계곡 옆에는 천연기념물 제207호 망개나무 특별보호구역이라 쓰인 안내판이 보인다.

 

갈매나무과에 속하는 망개나무는 넓은 잎을 가진 낙엽관목이다. 잎 표면이 아주 진한 초록색이다. 6월에 연노랑 꽃이 피고 가을에 노란빛을 머금은 팥알만한 열매가 달려 점차 암적색으로 익어간다.

 

특별보호구역 안내판 바로 위에서 자라는 망개나무는 키 13.6m, 가슴 높이에서 잰 지름이 42cm 정도로 나이는 약 100가량 된 나무라고 한다. 

 

탈골암은 서기 720년(신라 성덕왕 19) 창건했으며 서기 776년(혜공왕 12) 진표 율사가 중건했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에 벽암 대사라는 분이 한 차례 더 중건했다고 하는데 6·25 때 불타버린 채 한 동안 빈터로 버려져 있다가 1954년 두기 스님의 원력으로 다시 복원했는데, 본격적으로 불사를 일으킨 것은 1967년 영수스님이 주석하면서부터라고 한다. 

 

 탈골암전경(좌), 법당인 약사전과 요사채인 연화당(우) / 오마이뉴스 안병기

 

암자의 중심을 이루는 법당은 약사전이다. 안에는 약사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음보살, 지장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은 대개 아미타여래상을 협시하는 보살인데 약사여래를 모시고 있다는 건 이례적이다. 어쩌면 김알지의 전설을 암자 복원의 원력으로 삼고 싶은 매우 인간적인 배려가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게 아닐까.    

 

약사전 앞에는 석탑 1기가 서 있다. 이곳에서 동남쪽으로 약 200m가량 떨어진 옛 탈골암터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대휴선원으로 가고자 요사인 운하당 앞을 지나서 계단을 올라간다. 운하당 위 축대에 놓인 장독대가 무척이나 정갈하다.

 

약사전내부(좌), 석탑부재를 모아 만든 3층탑(우) / 오마이뉴스 안병기

 

대휴선원은 1990년에 문을 열었고 조계종 총무원장과 법주사 주지를 지내시다 지난 1997년에 입적하신 월산스님이 건물명을 지었고 대휴선원이 생김으로써 비로소 탈골암(脫骨庵)은 제 이름에 걸맞은 암자가 된 것이다.

 

대휴선원(좌), 대휴선원과 나란히 있는 삼성전 / 오마이뉴스 안병기

 

'대휴(大休)'란 크게 쉰다는 뜻이다. 선방에 든 선객은 밖으로는 욕망을 쉬고 안으로는 금방이라도 깨침을 얻으려는 조급한 마음을 쉬며 수행에 임하라는 뜻이 아닌가 싶다. 번뇌로 타는 육신의 뼈와 살을 여읜다는 게 어디 호떡 뒤집듯 쉬운 일인가. 1977년에 지은 삼성전은 탈골암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이다. 안에는 칠성탱화, 산신탱화, 독성탱화 등이 봉안되어 있다. 

 

'이뭣고'다리에서 성철스님이 수행했던 '복천암'까지는 10여분 걸리며 복천암 입구에는 3~4백 년은 됐음직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길손을 맞는다. 마치 사천왕 중의 한 분처럼 당당한 체구로 암자 입구를 지키고 섰다. 이 느티나무 천왕은 아마도 복천암의 흥망성쇠를 낱낱이 지켜봤으리라. 담장 너머로 힐끔 복천암을 넘겨다보자 '호서제일선원'이란 현판이 얼른 눈에 들어와 박힌다.

 

복천암 들어가는 '이뭣고'다리와 복천암전경/오마이뉴스 안병기

 

복천암 선원은 금강산 마하연, 지리산 칠불암과 더불어 구한말 3대 선방 가운데 하나로 꼽히던 곳이다. 동산 스님, 성철 스님, 고암 스님 등 내노라하는 선승들이 모두 몇 철씩 머물다 갈 정도로 선수행으로 이름난 암자다. 성철 스님 행장기를 보면 1943년에 이곳에서 하안거를 난 것으로 돼 있다. 1936년에 출가했으니 출가한 지 7년째 되던 해에 이곳에 온 것이다.

 

복천선원 마당의 주목(좌), 복천선원(우) / 오마이뉴스 안병기

 

선원 뜰 앞에는 상당히 밑동이 굵은 주목 한 그루가 서 있다. 태백산이나 소백산 주목 가운데 가장 큰 나무와 맞먹을 정도로 굵은 나무다. 이곳에서 꽤 오랜 세월을 머무르면서 숱한 선객들을 지켜보았을 산 증인이다.

 

암자로 들어오는 길에 본 '속리산복천암선원복원기념비'에 따르면 이 복천선원 건물은 1980년에 지은 것이다. 지금 선원 건물은 해제 철을 틈타 수리 공사가 한창이다. 'ㄴ' 자 형으로 된 건물 중 '호서제일선원'이라는 현판을 단 가장 좌측 부분들은 그야말로 '환골탈태'를 겪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수각과 장독대(좌), 극락보전(우) / 오마이뉴스 안병기

 

선원 뒤 극락전으로 가려면 수각(水閣) 앞을 지나야 한다. 300여년 전, 선비 정시한이 기이하다고 했던 그 샘물을 보호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 바로 수각이다. 복천암이란 암자 이름도 이 샘에서 유래한 것이다. 조선 세조가 복천암에 머물면서 피부병을 치료했다는 얘기도 필시 이 샘과 연관이 있을 터.  

 

당시 이곳엔 신미와 학조라는 두 고승이 주석하고 있었다. 바로 동쪽 기슭에 있는 부도의 주인공들이 그들이다. 두 스님과 함께 3일 동안 기도를 드리고 나서 산  아래 있는 목욕소에서 목욕을 하고 나자 세조를 괴롭히던 피부병이 나았다고 한다. 그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세조는 암자를 중수케 하고 '만년보력(萬年寶曆)'이라고 쓴 사각 옥판까지 하사하였다고 한다.

 

극락보전은 복천선원 뒤편 높은 축대 위에 있다. 극락보전은 정말이지 손바닥만한 마당도 없다. 부족한 공간을 축대를 쌓아 넓혀서 건물을 짓다 보니 마당을 둔다는 것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 했을 것이다. 

 
 

요사채뒤로 나한전이 보인다. /오마이뉴스 안병기

 

법주사 오른쪽 담장을 끼고 걸어가면  법주사 선방이 나온다. 동암은 법주사 선방의 맞은 편에 있는 암자다. 동암은 법주사 창건 당시 함께 지은 암자로 알려졌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전소하여 오랫동안 빈터로 남아 있었다. 이곳에 복원 불사가 시작된 것은 1977년이었다. 한갑진이라는 거사의 시주와 신성도 스님의 원력이 합쳐져 성사된 불사였다.  

  

법주사 담당을 끼고 북쪽으로 올라가자, 삼거리가 나오고 '동암'이라 새긴 돌이 보인다. 암자 입구로 들어서려는데 '노각나무 자생지'라 쓰인 안내판이 나그네의 눈길을 붙잡는다.  '충북의 자연환경 명소'로 지정되었다고 안내판은 강조한다.  

 

동암으로 가는 길(좌), 동암의 요사(우), 동암에서 가장 먼저 길손을 맞는 것은 요사다. 이 요사는 특이하게 맞배지붕으로 돼 있다./오마이뉴스 안병기

 

동암, 오십굴암, 대암, 상사자암, 상고암, 본속리암 등을 돌아본 17세기 선비 정시한은 "대부분 비어 있고 폐허가 되어 있었다 "라고 쓰고 있다. 수정암은 법주사로 들어가는 들머리,  개울을 낀 암자다.

 

정시한이 돌아보았던 암자들은 그렇게 폐허로 방치되다가 모두 시간 속으로 흔적없이 사라졌다. 그래도 동암은 이렇게나마 복원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정오선당(좌), 또다른 선당(우)/오마이뉴스 안병기

 

암자의 맨 끝에 이르자, 맞배지붕 형태의 관음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서쪽 수정봉을 향하고 있다. 규모가 작아서 장중하다기보다는 얌전하게 보이는 건물이다. 조심스럽게 불전의 띠살문을 열자, 관음보살이 미소로써 객을 반긴다. 풍만하고 후덕한 얼굴이다.

 

관음전앞 3층석탑과 관음전/오마이뉴스 안병기

 

동암에서 문장대로 올라가는 길은 없다. 문장대로 갈려면 법주사쪽으로 다시 내려가야 한다.

 

복천암을 지나 문장대로 가는 길을 따라 산을 오르다 보면 얼마 걷지 않아 보현재에 이른다. 속칭 '할딱 고개'라 부르는 곳이다. 할딱 고개가 필연적으로 할딱 고개가 될 수밖에 없는 까닭은 고개에 자리 잡은 '주막' 때문이기도 하리라. 이곳에서 음료수 삼아 한 잔  들이켠 사람들은 다시 산행에 나설 때면 달아오르는 술기운 때문에라도 당연히 할딱거리지 않을까.

 

 

보현재휴게소와 문장대진입로 / 오마이뉴스 안병기

 

문장대 1.3km라 쓰인 이정표가 있는 곳에서 중사자암은 좌측에 있다. 중사자암으로 가는 길로 접어들자마자, 삐쭉솟은 큰 바위가 있고 몇 백 년 묵은 느티나무 고목이 마중을 한다. 중사자암으로 가는 오솔길은 나그네의 마음을 아늑하게 하면서 한없이 걷고 싶게 한다. 

 

 

법당 마당에 있는 암대(좌), 중사자암(우) / 오마이뉴스 안병기

 

중사자암이 언제부터 이 자리에 있게 되었는지 알려진 바 없다. 전해오는 말로는 신라 성덕왕 19년(720년)에 의신 조사가 문을 열었다고 한다. 탈골암과 같은 시기다. 아무튼 중사자암은 조선시대에 들어 원종의 원당으로 지정되는 등 크게 번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암자 역시 6˙25라는 민족적 비극을 피해갈 수는 없었던가 보다. 암자 전체가 불타버렸으니. 현재의 암자는 1957년 이후에 중건한 것이다.


법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 크기다. 중앙의 3칸은 법당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좌우 2칸은 요사로 사용하고 있다. 마당에 잇대어 있는 넓은 암대는 모양이 감투를 닮았다고  '감투바위'라고 불리는 바위다. 바위에는 군데군데 인위적으로 판 작은 홈이 있다. 여기에 꽃을 꽂고 기도를 하면 관직에 오른다고 하는 속설이 전해진다 한다.

 

드디어 문장대가 바라다 보이는 고개 마루에 올라선다. 경상북도와 충청북도가 다툼없이 만나는 지점이다. 문장대휴게소를 중심으로 여기저기 사람들이 앉아 있다. 라면을 시켜놓고 기다리는 사람들, 집에서 가져온 점심을 들기 위해 펼쳐놓는 사람들…. 다양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사람들의 군상이 바위에다 울긋불긋 꽃을 피운다. 이곳에서 먹는 라면 맛은 무슨 맛일까. 물어보나 마나 '쥑이는' 맛일 테지.


 
사람들을 뒤로 하고 문장대를 향해 간다. 눈들어 올려다 보는 문장대가 아찔하다. 문장대 자체의 높이만 1000m가 넘는다고 한다. 미끌어질세라 조심조심 철제계단을 올라간다. 송대관이 그랬던가. "인생은  세 박자"라고. 인생만이 세 박자가 아니라 계단도 한 번에 오르는 계단은 없다. 한 번 꺾어지고, 또 한 번 꺾어지고, 세 번을 꺾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문장대에 오른다.  

 
 

 문장대(좌)와 문장대에서 보는 신선대와 입석대(우)/오마이뉴스 안병기

 

문장대의 높이는 1054m. 아깝게 4m 차이로 천황봉에 정상 자리를 내주었다. 바위 군데군데 웅덩이가 움푹 파여 있고,  그 안엔 물이 가득 고여 있다. 산 아래를 굽어본다. 왼쪽 가까이엔 관음봉이 있고 오른쪽엔 신선대와 입석대가 있다. 그 중간엔 상주 화북으로 뻗은 봉우리들이 내려가고 있고. 참으로 절경이다.

 

속세를 떠난다는 말을 곧이 곧대로 해석한다면 사람 사는 세상을 등진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말의 속뜻을 살피면 시방 자신이 있는 곳이 '절경'이라는 것을 에둘러 말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자료출처 : 보은군 문화관광과 / 오마이뉴스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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