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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전라남도

보성 851번지방도 오봉리 오봉산 강골마을 전통한옥

by 구석구석 2007.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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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에서 갈 경우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가 동광주나들목에서 나간다. 29번 국도 따라 화순 거쳐 보성으로 간다. 보성읍내에서 2번 국도 타고 벌교·순천 쪽으로 가다 군두사거리에서 득량 쪽으로 우회전(845번 지방도)한다. 득량 삼거리 주유소 앞에서 좌회전(851번 지방도)한 뒤 1킬로미터쯤 가다가 오봉역전에서 강골마을 팻말 보고 좌회전해 들어가다 작은 네거리 만나 직진(강골마을 팻말이 있다)한다. 좁은 시멘트길 따라 오르다 산밑에서 좌회전, 녹슨 철문 앞에서 우회전, 좁은 대나무숲길로 들어서면 강골마을이다.

 

군두사거리에서 득량으로 들어섰는데 등산로 입구를 안내하는 표지는 없다. 대충 산아래 어디쯤이겠지 하고 무작정 마을로 들어섰다. 기차길 옆 하작천마을이다. 마을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고, 돌담길이 아름답다.

 

오른쪽으로 돌아 마을을 벗어나고 논두렁을 지나 밭이 끝나는 곳에는 작은 나무들로 가려진 좁은 산길이 보인다. 산길은 정비되지 않아 잡목을 헤치고 가야하는 곳도 있다.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아서 그러겠지’ 하고 계속 올라가다보니 널찍한 등산로와 만난다.

 

정리가 잘 된 등산로는 리기다소나무의 밝은 초록색과 어울려 시원시원하다. 경사가 진 길에 갈지자로 만든 길을 따라 올라갔다. 뒤를 돌아보니 파란 보리가 돋아나는 예당 들녘이 펼쳐져 있다.

 

 

오봉산/전용호

 

그렇게 30분을 올라가니 커다란 바위와 만났다. 지름 5미터 정도의 돌들이 줄줄이 붙어있는 바위. 지네가 꿈틀거리고 있는 것 같다. 참 신기하기만 하다. 어떻게 바위가 이렇게 놓여졌을까? 애들은 바위 위를 징검다리 건너듯 뛰어 다닌다.

 

 

잠시 쉬었다가 산정을 향해 올라가니 너무나 큰 바위산이 막고 있다. 등산로는 바위 위를 걸어가게 되어있다. 커다란 바위를 걸어서 올라가는 것이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다. 정상 근처 커다란 바위 사이 평평한 곳이 있다. 바로 아래 득량역에는 화물열차가 지나간다.

 

 

오봉산의 바위들/전용호

 

올라오던 반대편으로 길을 잡고 내려섰다. 내려가는 길을 막아서고 우뚝 솟은 바위. 커다란 바위 위에 위태롭게 작은 바위를 이고 있다. 어찌 보면 사람 같기도 한 것이, 커다란 팔을 펼치고 안기기를 바라는 모습이다.

 

돌아 나오는 길에 강골마을 표지판이 보인다. 들렀다 가기로 하였다. 구불구불 농로를 따라 들어가니 마을입구에는 느티나무가 있고 마을회관이 자리 잡고 있다. ⓒ 2008 OhmyNews 전용호

 

▷개흥사 터

두 오봉산 사이쯤에 도촌저수지가 있다. 저수지 보를 건너 좌회전해 물길을 따라 오르면 빽빽한 삼나무숲 사이로 무수한 돌담 흔적이 흩어져 있다. 고려 초기의 절터로 알려지는데, 기록으로 전하는 것은 없다. 골짜기 쪽에 쌓아진 높이 7~8m에 이르는 석축은 고색창연한 성곽의 모습이다. 계곡 물길을 사이에 두고 돌담 흔적들과 깨진 기왓장, 사기그릇 들이 무수히 발견된다. 압권은 골짜기 물길의 한 지류에 쌓아올린 석축이다. 골짜기 물길에 돌을 쌓아 위에 평지를 만들고 밑에 하수구와도 같은 물길을 만들었다. 이 주변에서도 무수한 기왓장과 그릇 파편들이 발견된다. 이 절터에서 일제 강점기 때 순금불상 등 불상 3기와 철마 2기, 돌 도가니 등이 발견됐다고 전해진다.

 

보성군에 따르면 사유지인 이곳에 45만평 규모의 골프·승마·레저 단지인 ‘시니어 타운’ 건설이 추진돼 논란이 일고 있다. 강골마을 이정민씨는 “숙박시설만 900세대가 들어선다는데, 이 석축 유적들이 제대로 발굴도 되지 않은 채 흔적도 없이 사라질 판”이라고 말했다.

 

옛 전통과 삶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강골마을

 

강골마을은 전남 보성군 득량면 오봉리에 있다. 유명한 관광지도 아니고 그렇다고 현대인들에게 딱히 잘 알려진 곳은 더더욱 아니다. 그렇다면 전형적인 이 시골마을이 요즘에 와서 왜 세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걸까.

 

이 마을에는 예전의 전통과 삶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길모퉁이 돌담길에는 담쟁이덩굴과 수백 년 묵은 이끼가 뒤덮여있다. 조선시대부터 사용해온 삶의 흔적들이 잘 보존되어 있는 전형적인 살아 숨 쉬는 시골마을이다. 잊혀져가는 가장 한국적인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 우리가 고향을 쉽게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이유와 어쩌면 일맥상통하는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강골마을은 오랜 전통에 걸맞게 산세 또한 매우 수려하다. 전국 어느 명산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오봉산 용추골은 용추폭포와 칼바위로 유명하다. 용추폭포가 쏟아지는 깊은 계곡의 조용한 호수, 산자락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기암괴석,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원시림 그대로의 모습이 잘 간직되어 있다.

 

전통 한옥마을인 강골마을은 광주 이씨 집성촌으로 30가구 중, 26가구가 삶을 일궈가고 있다. 숲이 우거지고 야트막한 동산에 가려져 마을 집들은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자리 잡고 있다. 대숲 우거진 골에 고즈넉한 고샅길 사이로 실개천이 졸졸거리며 흐른다. 흙돌담이 고스란히 보존된 포근한 마을길을 걷고 있노라면 잠시잠깐 내가 건너온 세상을 깜빡 잊고 만다.  

 

마을길에는 토란대가 줄지어 널려있고, 논가에는 부들과 갈대가 어울려 가을노래를 부른다. 마을회관 정자에 어르신 서넛 모여 정담을 나누고, 아낙들은 씨 마늘을 쪼개며 깔깔깔 신명이 났다.

 

집들은 자연 속에 숨어들었다. 산새, 들새, 농가 주변에 사는 다양한 새들이 공존하며 살아간다. 닭이 제일 먼저 새벽을 알리면 산비둘기가 울고 산까치도 따라 운다. 방에 누워있으면 바로 곁에서 우는 황조, 호랑지빠귀, 휘파람새…. 이들 새들의 소리는 전혀 색다르게 다가온다. 밤에는 소쩍새와 부엉이의 슬픈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소촌댁가옥

 

산에 가면 산새가, 들에 가면 들새가 우는 게 상식인데, 강골마을에서는 온갖 새들의 소리를 한곳에서 다 들을 수 있다. 자연의 조화로움 속에 파묻혀 자연의 소리를 듣노라면 마음은 편안해진다. 또한 정겨운 강골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여행에 대한 기본 생각마저 바뀌게 한다.  

하룻밤 묵어가는 체험객 대부분은 “친척집에 온 건지, 여행을 온 건지 분간이 안 간다. 친척집이나 외갓집에 온 듯 포근하고 편안하다”고 했다고 이정민(46) 강골정보화마을 운영위원장은 전한다.  

 

 

 

"전통한옥이 있고, 숲이 우거지고... 복 받은 동네여"

 

이 운영위원장과 마을구경에 나섰다. 멀리서 손님이 왔다는 기별이 와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소촌댁이 살고 있는 집이다. 순천 교직원 ‘우리문화 바로알기’회원 일행들이 먼저 와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소촌댁 가옥은 마당의 잔디가 잘 손질되어 있고 한옥 집은 단아하고 기품이 서려있다. 방 대들보를 살펴보니 1939년에 지은 집이라 표기되어 있다. 방마다 서까래가 겉으로 드러나 있다. 2층 다락방과 중천장이 특징이다.

 

콩밭에는 수수가 익어가고 울타리에는 탱자의 노란 열매 익어간다. 들에 다녀온 마을 이장이용실(67)씨를 소촌댁 가옥을 구경하고 나오는 길에 만났다. 마을 평균나이가 70인 강골마을에서 67세인 이장은 젊은 측에 속한다. 36년째 장기집권(?)중인 이장은 “전통한옥이 있고, 숲이 우거지고, 아늑하고 경관이 좋은 것이 우리 마을 자랑이여~ 6·25 때도 피해를 본 집이 한집도 없어, 복 받은 동네여”라며 자랑을 늘어놓는다.

 

이식래 가옥(중요민속자료 제160호)

 

이식래가옥은 초가집이다. 사랑채 지붕에는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헛간이 달린 대문을 들어서자 지난해 10월부터 집주인의 개인사정으로 집을 비워뒀다는데 안타깝게도 안채의 지붕이 벌써부터 내려앉고 있다. 곳간은 기와집이고 안채는 초옥이다. 장독대도 기와를 얹었다. 이집은 곡식과 장을 중시하는 남도의 특징이 여실히 들여다보인다. 초가가 더 자연친화적이기 때문에 안채를 초가집으로 했을 거라는 설도 있다고 박 총무는 덧붙인다. 남도 쪽에서는 가장 큰 5칸 집이다. 뒤란의 대문을 통과하면 꽃밭이 조성되어있다. 

 

탱자나무 고목에는 주렁주렁 매달린 노란 탱자가 익어간다. “이거(탱자나무) 나이가 나보다 더 먹었어. 이건 잘 크도 안 한당께” 한참을 마을 자랑을 늘어놓던 이장은 바삐 마을길을 따라 사라진다. 
 

이용욱 가옥(중요민속자료 159호)

 

이용욱가옥은 넓은 평야와 해안이 가까워 강골 마을에서 가장 아름답고 풍수지리상 터가 좋은 곳이다. 솟을대문을 삐이걱 열고 들어서자 “이리 오너라” 외침이 절로 나온다. 조선시대 영감 호칭을 받은 정3품 이상의 벼슬을 얻어야 세울 수 있었다는 솟을대문은 집의 기품을 한껏 고조시킨다. 안채, 사랑채, 곳간채, 문간채가 규모 있게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에는 이진만의 한시가 기둥마다 쓰여 있다. 안채는 코스모스가 먼저 반기며 손님을 맞이한다. 마당의 감나무는 잎이 지고 덩그마니 남은 감하나 빨갛게 익어가고 있다. 좌측에는 곳간채, 중앙에 안채, 오른쪽에는 종가집 제실이 있다. 제실 앞마당에는 돌로 쌓아올린 우물이 있다. 

 

마을한가운데 있는 이용옥가옥전경/전용호

 

안방마님 방에서 밖을 보면 솟을대문으로 드나드는 사람들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밖에서는 안방마님 방을 볼 수가 없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경관은 정말 아름답다. 행랑채 앞에 마을동산이 있고, 그 뒤로 오봉산이 바로 눈앞에 놓여있는 듯 보인다. 땅을 돋아 원근감을 살려 지었다는 이집의 조경이 경이롭다.


강골마을에는 박홍주(34)문화지킴이가 있다. 항일 투쟁한 양반 이관회 선생에 반해 이 마을에 들어왔다는 요즘 젊은이치고는 좀 생뚱맞은 그는 무보수로 8년째 강골마을 총무 일을 자청해 맡고 있다. 농민운동을 하기도 했다는 그는 본인의 일보다는 우리 농민들에게 자신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작은 소망을 실천하기 위하여 정보화마을에서 일하고 있다.

 

 이용욱집담장과 접한 우물터

 

마을사람들의 빨래터이기도 한 이 우물은 여론의 창구역할을 했다. 이용욱 가옥의 담장에 네모난 구멍 하나 뻥 뚫려있다. 양반은 담장에 뚫린 이 구멍을 통해 마을 사람들의 얘기를 엿듣고, 마을 사람들은 대감 집을 엿보고, 하는 양반과 마을주민들과의 의사소통공간이었다고 한다. 우물에는 거미가 집을 짓고 푸른 수초가 자라고 있다. 현재 이금재 가옥에서 모터를 이용해 우물물을 사용하고 있다.

 

 

 

 이금재가옥

 

이금재 가옥(중요민속자료 제157호)이다. 아늑하고 섬세해 여성스럽다. 남향집으로 오봉산을 바라보고 있다. 안채는 1900년 전후에, 광채는 이보다 앞서며, 나머지는 20세기 초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안채는 7칸 ㄷ자 집으로 날개가 뒤로 덧달아져 있으며  뒤뜰과 후원이 짜임새 있게 조성되었다.

 

흰나비 나풀대며 따라온다. 마을길 곳곳에 실개천이 졸졸 흘러내리고 뒷산에서 부엉이 울음소리 들려온다. 고샅길 담장에는 감이 빨갛게 익어간다. 아름다운 새소리, 발밑에 바스락대는 나뭇잎소리에 잠시 한눈팔다 고개들어보니 대숲이다. 

 

열화정

 

열화정(민속자료 제162호)이 바로 눈앞이다. 1845년(조선 헌종 11년) 이진만이 지역 동량들을 길러내고자 마련한 정신수양의 도장이었던 열화정은 이관회가 수신했던 곳이기도 하다. ‘일섭문’이라 새겨진 일각대문에서 바라보는 열화정은 울울창창한 대숲과 연못, 수백 년 된 고목에 휩싸여 적막감이 감돈다. 연못속의 오동나무를 바라보며 서성이는데 누마루에 앉아 수행하던 이관회의 모습이 언뜻 스치고 지나간다.

 

역사와 자연이 어우러진 열화정은 은근한 아름다움이 있다. 마을 숲 깊숙한 곳에 자리한 열화정은 강골마을의 백미다. 정자는 앞면 4칸, 옆면 2칸으로 ㄱ자형의 누마루집이다.대나무 숲길을 걸었다. 대숲에서 산비둘기 푸드덕 난다. 곧게 뻗은 대나무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하다. 마을 곳곳에는 태풍의 생채기가 남아있다. 문화인의 쉼터는 태풍에 한쪽 지붕이 아예 내려앉았다. 간디 초상화만이 빈집을 쓸쓸히 지키고 있다.

 

 아치실댁

 

아치실댁이다. 현 이용훈 대법원장이 수학했던 곳이다. 메밀을 빻는 도구, 반닫이, 경대, 호롱불 등잔 등의 진기한 물건들이 마루에 가득 보관되어 있다. 갓을 담아 놓은 갓집도 보인다. 좌측 방은 나무 장판이 깔려있고 뒤편에는 침실 방이 놓여있다.

 

강골마을에 가라. 강골마을 구경과 체험, 너무 재미있고 유익하다. 개울에서 고기 잡고, 소탈한 시골밥상 맛보기와 자연에서 날아오는 장수풍뎅이 잡기는 그 어디에서도 쉽게 접할 수 없는 진기한 체험이다. 마을 주민들이 직접 빚은 전통주 한잔에 삽날에다 삼겹살을 담아 장작불에서 순간 구워낸 삼겹살구이의 맛은 그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무쇠솥과 갓집

 

전통한옥에서 꿈꾸고 새벽안개 자욱한 보성 녹차 밭과 해안도로를 달려보라. 득량만 갯벌에서의 갯벌체험 또한 결코 잊을 수 없다.  꿈결 같은 소중한 체험을 할 수 있는 아름다운 강골마을. 전통과 현대가 함께 살아 숨 쉬는 강골마을 체험은 평생 잊혀 지지 않는 소중한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강골마을 이정민씨댁

전통 한옥마을인 강골마을은 광주 이씨 집성촌으로 30가구 중, 26가구가 삶을 일궈가고 있다. 숲이 우거지고 야트막한 동산에 가려져 마을 집들은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자리잡고 있다. 대숲 우거진 골에 고즈넉한 고샅길 사이로 실개천이 졸졸거리며 흐른다. 흙돌담이 고스란히 보존된 포근한 마을 길을 걷고 있노라면 잠시 잠깐 내가 건너온 세상을 깜빡 잊고 만다.

 

강골마을 체험은 숙식과 보성 녹차 밭 구경은 기본이고 계절에 따라 바지락 구이, 팥죽 쑤어먹기, 대밭에 놓아먹인 닭백숙까지도 간식으로 등장한다. 겨울철에는 모닥불에 구워낸 굴구이와 삼겹살 삽구이가 별미다. 맛에 취하고 정에 취해 다른 일정을 취소하고 하루 더 눌러앉는 이가 많아 예약손님 체험일정에 차질을 빚는 일도 다반사다.

 

체험객이 꺼리를 만들어 오면 이후의 일은 이 위원장이 대부분 해결한다. 동네 아무 밭이나 들어가 토마토 서리를 하다 들켜도 만사 오케이, 줄행랑을 치거나 여의치 않으면 이 위원장을 찾으면 된다. 두레박으로 우물물 퍼 올리기, 마당에 기어다니는 두꺼비, 제비 둥지를 가까이서 볼 수 있다. 그의 농촌에 대한 애정은 끝이 없다.

 

어둠이 깃든 강골마을에 산새 소리 가득하다. 세월도 멈춰선 곳, 강골마을에 고요가 찾아든다. 부엌에서 강골아줌마는 밥상을 차려내느라 분주하다.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다 어느새 텃밭으로 달려가 푸성귀를 따온다.

 

▷강골마을 체험

1박에 2끼 식사, 체험비, 여행자보험 포함해 어른 1인 4만원, 어린이 3만7천원. 조미료를 일체 쓰지 않는 식사를 하고, 방바닥은 뜨끈하고 ‘우풍’은 센 낡은 한옥에서 잠을 잔 뒤 새벽 녹차밭 감상, 갯벌 체험을 즐길 수 있다. 정보화마을 홈페이지(dr.invil.org)나 전화로 예약해야 한다. 하루 3~4인 가족 10가구까지 수용할 수 있다. 이중재 가옥, 이용욱 가옥, 소천댁, 아치실댁 등에서 묵을 수 있다. (061)853-2885. 이정민 위원장 010-6211-5777.

 

 

찾아가는 길     순천 - 목포 방향 2번국도 - 예당 - 득량면 군두사거리 - 군두농협(주유소) 좌회전 - 845번 지방도를 따라서 약 200m - 최대성 장군의 신위를 모신 충절사 - 1㎞지점 851번 지방도와 갈라지는 삼거리 - 월평, 노계 방향으로 좌회전 1㎞지점 - 강골마을  

 

출처 : 오마이뉴스 조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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