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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전남 섬

진도 801번지방도 진도8경 삼벌초유적 용장산성 남도석성

by 구석구석 2022. 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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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

 

배종순과 김방경의 전투가 벌어진 삼별초의 요새 '용장산성'

 

몽골과의 항쟁에서 삼별초(三別抄)는 빼놓으려야 빼 놓을 수가 없는 존재다. 삼별초는 야별초인 좌별초와 우별초, 그리고 신의군이 합쳐져 만들어 진 집단이다. 사실 무신정권의 최우가 자신들의 권력 보호 및 치안유지를 위해서 만든 사병집단이라고 할만한 게 삼별초이다.

이들은 쉽게 생각해서 오늘날의 경찰과 비슷한데, 본래는 도둑을 잡고 남폭을 금하는 게 사명이나, 죄인을 체포하고 투옥하는 것도 가능하여, 도둑 뿐 아니라 반역죄인까지도 관할하였다고 한다. 엄밀히 따져보면 이들은 사병집단으로서의 경찰이었기에, 최씨무신정권의 권력을 다지는데 앞장섰다고 할 수 있다.

몽골과의 항쟁 당시, 강화도로 천도 할 때 이들도 최씨 무신정권과 함께 옮겨갔다. 삼별초는 여기에서 왕실과 무신정권과 함께 웅거하고 있었다. 그런데 1259년, 고려 태자 전이 부왕을 대신에 몽골에 입조함으로서 몽골과의 전쟁이 종식되었다. 이때 최씨정권이 타도되어 왕정이 복구되었으나 실권은 무신들이 잡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왕실과 무신측은 서로 등을 돌리고, 원종 11년(1270년), 왕실은 개경환도를 강행하게 된다.

삼별초가 몽골과 싸우게 된 첫 번째 원인은 사실 고려 왕실과의 분란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위의 인용대로 김지저가 삼별초를 공격하고 그들의 명단을 가지고 돌아갔다. 삼별초는 개경으로 돌아가면 모두 죽임을 당하게 되는 위기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에 삼별초는 고려의 정부와 몽골에 대항하려는 의지를 품게 된다. 3번째 이유는 바로 몽골과의 대응의식이었다.

 

삼별초는 강화도에 남은 후 고려조정 및 몽골과의 항쟁을 결심한다. 그리고 배중손(裴仲孫)은 여러 사람들을 모아놓고, “몽고병(蒙古兵)이 크게 이르러 인민(人民)을 살육하니 무릇 나라를 돕고자 하는 자는 다 모이라”라고 외친다. 이는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밝히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그 정당성을 밝히기 위한 외침에서 몽골에 대한 대항의식을 드러냈다는 것이 중요하다.

삼별초가 그동안은 수중전의 이유로 진도와 제주로 옮겼다고 하지만, 이는 사실 역사적으로 옳다고 하기엔 약간 힘들다. 삼별초의 상대는 고려 조정과 몽골이었기 때문이다. 고려의 해상력은 이미 세계적인 수준이었기에 단순히 수중전을 이유로 들기보다도 그들의 세력을 더 뻗히기 용이한 곳으로 갔다고 하는 편이 적당하다고 하겠다.

삼별초가 진도로 옮긴 상황에서 그들의 중심지가 되었던 곳이 용장산성(龍藏山城)이다. 용장산성은 지금은 옛 자취를 잃어버리고 석축의 흔적들만 남아 있으나, 과거 삼별초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중요한 유적지이다.

 

용장산성 초입의 홍보관은 용장사 옆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그 옆에는 행궁터가 있다. 용장산성 홍보관은 당연 삼별초에 그 코드가 맞춰져 있다. 삼별초가 몽골에 대항하게 된 배경과 그 당시의 역사적 상황, 그리고 용장산성의 전체적인 모습 등이 홍보관에 있다. 그리고 홍보관 영상실에서는 용장산성에 관련된 영상물을 틀어 놓았는데, 삼별초의 대몽항쟁과 용장산성에 대해서 알기 쉽게 구성해 놓았다.

 


용장산성터/여행작가 정철훈

 

행궁터는 계단식으로 펼쳐져 있으며 계단식 밭을 석축으로 메우면서 위로 주욱 올라간 형태이며 일반적인 건물지와는 달리 험준한 곳에 위치하고 있어 약간 의아한 감이 드는데, 이 행궁터는 절이 있었으나, 삼별초가 이곳으로 세력을 옮긴 후, 왕궁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여러 공사가 있었다고 전해지며, 이곳에서는 아직도 건물지가 확인된다.

행궁터의 군데군데에 주춧돌의 모습이 보이는데, 이를 유추하여 이곳에 여러 건물이 들어섰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홍보관에서도 이에 대해서는 복원을 하며 그 모습을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행궁터의 아래는 넓게 펼쳐져 있으며, 우물이 하나 있다. 아래가 넓게 펼쳐져 있는 것은 이곳에 민가들이 모여 살았거나, 연병장으로 활용하지 않았을까란 생각이 든다.

석축은 아직도 그 의연한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데, 복원되어서 그런지 원래 그런지는 몰라도 튼튼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갑작스런 천도(?)로 인하여 임시적으로 조정을 세웠기에 약간의 시늉만 해 놓았다는 느낌도 드는데, 행궁터의 뒤편은 높은 산들이 있다. 그리고 그 산에는 성벽이 있어서 적에게 최대한 방어를 하기 용이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용장산성 산성벽으로 올라가는 길은 생각보다 험준하지는 않았지만 시간은 좀 걸렸다. 올라서서 보니 산등성이를 따라서 성벽이 형성되어 있었다. 석축이며, 높이는 4m 정도 되는 곳도 있다고 한다.

이곳에 오르면 진도가 한눈에 보인다. 마을과 논밭도 한눈에 보이며, 바다까지 내려다보인다. 이곳에서 삼별초는 고려 조정과 몽골에 대항한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세력을 형성하여 남해안을 잠식해 갔으니, 이는 고려 조정에 막대한 타격을 입히고, 삼별초로서도 그들의 세력을 유지하는데 좋은 버팀목이 되었다.

이러한 성벽은 현재 12.85km 정도가 남아 있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모든 지리지에서는 이 용장산성의 길이를 둘레 38,741척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를 영조척으로 환산하면 12.1km, 포백척으로 환산하면 18.1km이다.

성돌을 가만가만 살펴보면 채석흔이 남아 있다. 즉 성벽을 쌓기 위해서 돌을 깬 흔적인데, 드문드문 그 흔적들이 보였다. 내가 오른 곳은 현재 복원한 성벽으로 길이는 420m정도라고 한다. 본래는 석심토축성이라고 하는데, 석심토축성이란 속은 돌, 겉은 흙으로 되어 있는 외유내강형의 성벽이다.

용장산성은 남고북저형으로, 육지와 마주보고 있으면서도 방어벽을 형성하였고, 산등성이를 따라 성곽이 이어져 있다. 크게 보면 3면이 바다인 형태인데, 궁궐(행궁터)과 마을과 군사시설 등이 모두 이곳에 있었다는 점을 쉽게 연상 할 수 있다. 길다란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인데, 자연지세를 이용한 점은 용장산성의 장점이고, 큰 규모도 스스로 새로운 고려를 자칭하였기에 그렇다고 생각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큰 규모이다.

삼별초가 진도에서 항전하다가 적에게 진 이유 중 하나를 대라면 지나치게 큰 용장산성의 구조 때문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방어선이 크고 방어망이 잘 짜여져 있으면 적으로부터의 방어에 용이하나 수많은 병사들이 필요하며 이러한 병사들이 고루 배치되어야 한다.
성벽에서 진도의 북측이 훤히 보인다/송영대

 

고려사』를 보면 당시 고려군을 이끌었던 장수는 김방경(金方慶). 김방경은 그 이후 일본정벌까지 활약한 장군으로서 꾀를 잘 쓰는 자였다. 김방경이 애초에 아해와 함께 진도에서 삼별초와 싸울 때에는 해전을 하였다. 삼별초는 이때 강성한 세를 보이면서 배와 성에서 북과 징을 치면서 기세를 드높이면서 여몽연합군을 위협하였다. 

용장산성의 방어선은 길다. 이는 관군에 비해서 적었던 삼별초에게는 최대의 약점이었다. 자고로 적과 싸울 시 군사가 적으면 적의 군사를 아군과 비슷하거나 적게 해서 싸워야 승산이 있다. 그렇지 않고 군사가 적으면 당연히 전쟁에서 불리하게 된다. 그래서 손자는 전쟁에서 군사가 적은 것을 경계한 것이다.

군사가 많을 경우 그 당시의 전쟁에서 쓰는 방법은 크게 3가지이다. 모든 군사가 적과 한꺼번에 싸우는 작전과, 군사를 일정한 패턴으로 교대하면서 적과 싸우는 방법, 군사를 크게 여러 부대로 나눠서 적들을 분산시켜서 공격하는 방법이 바로 그것이다. 김방경과 흔도는 바로 세 번째 방법을 사용하였다.

삼별초는 애초에 군사의 다수를 벽파정으로 보내고, 나머지는 일부 병력만 주둔시켰을 터인데, 또 다른 곳에서도 전선이 형성되니 그곳에서 군사를 급파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그 당시는 오늘날처럼 군사가 많지 않아서 군사의 운용에 있어서 모든 방어진에 군사를 파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즉 중요한 부분에는 일부를 배치하고 본격적인 싸움터에 다수의 군대를 파견하는데, 삼별초의 예상과는 달리 2곳에서 격전이 벌어지니 할 수 없이 본래의 병력에서 둘로 쪼개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 경우 전투력은 당연 절반으로 떨어지고, 갑작스런 명령으로 인하여 혼란에 빠지게 된다.

 

용장사전경/ 송영대

이로서 삼별초는 패배하게 되고 일부는 후퇴하여 탐라로 도망가게 된다. 삼별초는 용맹하였으나, 그들을 진도에서 무너지게 한 원인은 바로 이 오만이라고 하겠다. 사병집단으로서 언제나 최고임을 자부하고, 연합군을 자신보다 약하다고 생각한 방심이 허를 찌르게 만들고 이는 자신들의 멸망으로 이어지게 된다. 용장산성에 올라 그 당시 상황을 생각해보며 많은 상상을 하였다. 이곳에서 죽어갔을 여러 군사들과 희생된 백성들……. 그들의 넋을 잠시라도 느낄 수 있었다.  자료 - 오마이뉴스2007 송영대

 

용장사에는 유형문화재 제 17호로 지정된 용장사 석불좌상이 있다. 이들은 용장산성을 쌓을 때 조성된 것이라고 하는데, 민중들의 삶의 애환과 바람이 깃들지 않았을까? 이 석불좌상은 약사여래라고 하는데, 약사여래에게 기도를 올리면서 자신의 병과 함께 몽골로 인하여 골병이 든 고려에 대한 애환에 눈물을 흘렸을 민중들도 있었을 터……. 자료 - 오마이뉴스2007 송영대

 

고려의 자주를 꿈꾼 삼별초의 피 맺힌 항쟁

한국관광공사추천 7월에 가볼만한 곳

 

용장산성에서 탈출한 삼별초의 퇴로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뉘었다. 이는 삼면에서 밀고 들어오는 여몽연합군의 기세를 분산시키기 위함이었는데, 승화후 온을 위시한 김통정과 유존섭 등 간부 일행은 남쪽의 왕무덤재를 넘어 갑포로 방향을 잡았으며, 총참모장이었던 배중손장군 일행은 서쪽의 임회를 바라고 남도포로 방향을 잡았다.

▲ 왕온의 묘 <사진 제공 : 여행작가 정철훈>

 

남쪽으로 방향을 잡아 퇴각하던 승화후 온 일행은 지금의 진도군 의신면 침계리 부근에서 여몽연합군과 첫 번째 격전을 치른다. 이 격전에서 승화후 온과 그의 아들 항이 몽고의 장군 홍다구에게 죽임을 당하는데, 이곳이 바로 ‘왕온의 묘’가 있는 ‘왕무덤재’이다.

 

현재 왕무덤재에는 왕온의 묘 외에도 비교적 규모가 있는 5~6기의 묘가 더 있지만, 온의 아들 항의 묘는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승화후 온이 타던 말의 무덤으로 알려진 ‘말 무덤’이 왕온의 묘로 오르는 길 우측 숲에 자리해 있다.

승화후 온을 잃고 계속 남하하던 김통정 일행이 여몽연합군과 다시 맞닥뜨린 곳은 ‘돌아온 백구마을’로 유명한 진도군 의신면 돈지리 부근이다. 이곳에서의 격전도 삼별초에게는 쉽지 않은 전투였다.

 

승화후 온의 목을 벤 여몽연합군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 했고 그에 반해 왕을 잃고 패주만을 계속하던 삼별초의 사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이곳에선 아직도 처참했던 당시의 흔적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데, 마을 앞 군데군데 남아 있는 작은 봉분들이 바로 그것이다. 돈지리 마을 앞 들판에 흩어져 있는 이 작은 무덤들을 마을사람들은 ‘떼무덤’ 혹은 ‘대분통’이라 부른다.

 

진도군 신의면 돈지리에 있는 ‘삼별초 궁녀 둠벙’도 돈지벌 전투의 연장선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곳은 돈지벌 전투 중 피난길에 나선 삼별초의 궁녀들이 창포리에서 만길리로 넘어가는 만길재에서 우황천이라 불리던 이곳 웅덩이로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곳이다.

 

▲ 삼별초 궁녀 둠벙 <사진 제공 : 여행작가 정철훈>

 

이는 몽고군에게 자신의 몸을 더럽히지 않기 위한 것으로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망할 당시 3천 궁녀가 부여 낙화암에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는 내용과도 흡사한 사건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 지금은 우황천의 대부분이 메워졌지만 진도군 신의면 돈지리 마을 입구에는 아직도 ‘삼별초 궁녀 둠벙’이라는 이름의 자그마한 웅덩이가 남아있다.

밀리고 밀리던 김통정 일행이 제주로 가기 위해 마지막으로 거쳐 간 곳은 금갑선착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진도군 의신면 금갑리 북문재 정상의 금갑진이었다. 더 이상 밀릴 곳이 없었던 김통정 일행은 고심 끝에 진도를 버리고 제주로 그 본거지를 옮길 것을 결정하게 된다.

 

최근 북문재 정상에선 김통정 일행의 최후 방어선이었던 금갑진에 대한 발굴공사가 한창이다. 그래서 아직까지 그럴 듯한 탐방로는 없다. 하지만 금갑리 마을회관이 있는 금갑슈퍼 앞 공터에서 금갑교회를 끼고 도는 작은 길을 따라가면 어렵지 않게 금갑진에 오를 수 있다.

한편 서쪽으로 퇴로를 잡은 배중손장군은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에 위치한 남도석성(사적 제127호)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 퇴각 내내 여몽연합군의 집요한 추적을 어렵사리 뿌리친 배중손장군이었지만 끊임없이 밀려드는 연합군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은 말 그대로 중과부적이었을 터다.

 

▲ 남도석성 <사진 제공 : 여행작가 정철훈>

 

삼별초 항쟁의 주역이었던 배중손장군의 죽음으로 삼별초의 아홉 달에 걸친 짧은 영광과 10일간의 치열한 전투도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배중손장군이 최후를 맞은 남도석성은 삼국시대 쌓은 성이지만 지금의 남도석성은 조선시대에 왜구를 막기 위해 증ㆍ개축한 것으로 둘레 610m의 석벽이 원형 그대로 잘 보존돼 있다.

 

남도석성의 특이한 점은 성내에 사람들이 실제로 생활하고 있다는 점인데, 성내에는 현재도 20여 가구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이외에도 성내에 있었던 객사에 대한 복원도 진행 중이다.

▲ 세방리 일몰 : 여행작가 정철훈

 

삼별초의 행적을 좇아 남도석성까지 발걸음을 했으면 진도군 지산면 세방리도 놓칠 수 없다. 진도의 서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이 마을은 몇 해 전 기상청이 우리나라에서 일몰이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선정한 뒤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곳으로 촘촘히 떠 있는 다도해 너머로 떨어지는 낙조가 일품인 곳이다.


 

 

::::: 여행정보

○ 관련 웹사이트 주소
- 진도군청 : http://tour.jindo.go.kr
 
○ 문의전화 

- 진도군청 문화관광과 : 061)544-0151 
- 진도관광안내소 : 061)542-0088
- 용장산성홍보관 : 061)543-8522
 
○ 대중교통 정보

[기차]
- 서울-목포/ 용산역에서 1일 무궁화열차 6회(5시간 10분소요), 새마을열차
  2회 운행(4시간 30분소요)
- 서울-광주/ 용산역에서 1일 무궁화열차 4회(4시간 35분소요), 새마을열차
  3회 운행(4시간 05분소요)
- 부산-광주/ 부산역에서 1일 12회 운행
[KTX]
- 서울-목포/ 용산역에서 1일 6회 운행(2시간 58분소요)
- 서울-광주/ 용산역에서 1일 7회 운행(2시간 55분소요)
[항공]
- 서울-목포/ 아시아나항공 1일 1회 왕복
- 서울-광주/ 대한항공 1일 5회 왕복, 아시아나항공 1일 6회 왕복
  (아시아나항공 : 1588-8000 / 대한항공 : 1588-2001) 
[버스]
- 서울-진도/ 동서울 터미널에서 1일 4회 왕복(5시간소요)
- 광주-진도/ 광주 종합버스터미널 1일 35회 왕복 (2시간 30분소요)
- 목포-진도/ 1일 20회 왕복 (1시간소요)
  (시외버스 : 061)544-2141/ 군내버스 : 061)544-2062)

○ 자가운전 정보

[서울-진도]
서울 -> 서해안고속국도(서울→대전→호남고속국도→광주) -> 목포IC -> 영산호하구둑 -> 영암방조제 -> 금호방조제 -> 77번 국도 -> 우수영 -> 진도
[부산-진도]
부산 -> 남해안고속국도 -> 광양 -> 2번 국도 -> 강진 -> 18번 국도 -> 진도

○ 숙박정보

- 남강모텔 : 진도군 진도읍 성내리 061)544-6300
- 보은모텔 : 진도군 진도읍 남동리 061)543-0123 
- 진도관광모텔 :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 061)542-2123  
- 로즈파크모텔 : 진도군 진도읍 동외리 061)544-7181  
- 등대모텔 :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 061)542-4340

○ 식당정보

- 문화횟집 : 진도군 진도읍 남동리, 활어회 061)544-6007  
- 옥향식당 : 진도군 진도읍 교동리, 설렁탕 061)544-2061  
- 우래식당 : 진도군 진도읍 남동리, 해물탕 061)544-2120  
- 조은농장숯불갈비 : 진도군 진도읍 남동리, 소고기등심 061)544-0061  
- 오리마당 : 진도군 진도읍 쌍정리, 오리생구이 061)544-7007  
- 큰집회관 : 진도군 진도읍 남동리, 뻘낙지비빔밥 061)544-8144 
 
○ 축제 및 행사정보

- 진도아리랑축제 2007. 11월 중 진도군청 문화관광과 061)540-3045
    http://tour.jindo.go.kr

○ 주변 볼거리 - 신비의 바닷길, 운림산방, 첨찰산 봉수대, 접도 웰빙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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