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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전라남도

강진 남성리 영랑생가 사의재 고성사 보은산 청자골종가집

by 구석구석 2007.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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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랑 김윤식의 시 세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남성리 '영랑생가'

 

 

강진군 강진읍 남성리에 있는 영랑 생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등의 시로 유명한 서정시인 영랑 김윤식(1903~1950)의 시 세계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지난 93년 지방기념물 제89호로 지정돼 복원된 영랑 생가에 들어서면 왼쪽으로 영랑의 시에 등장했던 우물과 마당 가득 심어져 있는 모란이 보이고, 살림을 하던 안채 옆으로 장독대와 어우러진 대숲도 한눈에 들어온다.

 

강진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상경했던 영랑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문을 갖고 내려와 독립운동을 주도하다 옥고를 치렀다.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하고 귀국해 1930년 ‘시문학’지를 통해 등단한 영랑은 일제강점기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거부한 채 이곳에 머물며 60여 편의 시를 썼다고 한다.

 

생가 장독대를 지나면 영랑이 주로 작업을 하던 사랑채가 보이는데, 약간 비뚤게 지어진 이 건물은 영랑의 시 ‘사개틀린 古風(고풍)의 퇴마루에’의 배경이 됐다. “사개틀린 古風의 퇴마루에 업는 듯이 안져 아즉 떠오르는 긔척도 업는 달을 기둘린다”라는 시구처럼 사개(사방의 보나 도리가 기둥 위에서 맞춰지도록 기둥머리를 네 갈래로 파낸 것)가 맞지 않는 툇마루에 등을 대고 앉아 영랑이 올려다봤을 하늘을 보니, “아모런 생각업시 아모런 뜻업시” 달을 기다렸을 시인의 마음이 생생히 전해져오는 듯하다. 사랑채 안에는 영랑이 생전에 글 쓰던 모습을 본떠 만든 모형도 있다.

 

  

 

영랑의 생가를 둘러본 뒤엔 담장을 따라 올라가면 바로 보이는 ‘금서당’에도 들르자. 영랑이 5세 무렵 한문을 배우며 공부한 장소로, 강진 신교육이 시작된 곳이다. 일제강점기 보통학교로 운영되다가 반파된 집을 50년대 중반 고 김영렬 화백이 구입해 보수한 뒤 사용해 왔다고 한다. 이 때문에 건물 반쪽은 한옥, 나머지 반쪽은 양옥인 독특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지금은 그의 부인 박영숙 여사가 지키고 있는데, 고인의 화실과 작품을 그대로 보존해두어 작은 화랑으로 보기에 손색이 없다. 이곳 마당에서 내려다보이는 강진 풍경도 일품이다.  자료 - 여성동아

 

찾아가는 길 서해안고속도로 목포IC에서 강진으로 이어지는 2번 국도를 따라 강진으로 들어간 뒤 강진군청·영랑 생가 이정표를 따라가면 된다. 강진군청 담장을 끼고 돌아가면 바로 영랑 생가가 나온다.

 

 다산 정약용의 첫 유배지, 사의재

전남 강진에 가면 다산 실학의 4대 성지가 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 유배 생활 18년 중 1801년 낯선 땅 강진에서 머문 동문 밖 주막이 그 첫 번째 성지인 사의재다. 또한 1805년 겨울부터 1년여를 머문 강진읍 보은산 고성사의 보은산방, 1806년 가을부터 2년 가까이 머문 이학래의 집, 도암 귤동마을의 다산초당이 그것이다.

 

 

 

 

“북풍이 흩날리는 눈처럼 나를 몰아 남쪽 땅 강진의 한 밥집에 이르게 했네.”

조선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1762~1836)이 1801년에 쓴 시 ‘객중서회(客中書懷)’는 이렇게 시작된다. 약관 22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한 뒤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벼슬생활을 하다 당쟁에 휘말려 강진에 유배된 다산이 쓸쓸한 소회를 밝힌 글이다.

 

이 시에 등장하는 ‘밥집’이 바로 사의재. 다산이 강진에 처음 도착했을 때 강진 사람들은 죄인 신분인 그를 받아주었다가 무슨 화를 당할지 몰라 하나같이 그를 피했는데, 동문 밖 주막에서 밥을 팔던 노파 하나만 방을 주며 그를 맞아들였다고 한다.

그 작은 곁방에서 4년을 머문 다산이 그곳에 지어 붙인 이름이 ‘네 가지를 마땅히 해야 할 방’이라는 뜻의 ‘사의재(四宜齋)’다. 다산은 후에 이 이름에 대해 “생각은 마땅히 맑게 하고, 용모는 마땅히 엄숙하게 하며, 말은 마땅히 과묵하게 하고, 동작은 반드시 더디게 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엉으로 이은 조그마한 정자와 동천정 연못, 사의재 집으로 이어진 나무다리가 정겹다. 사립문 사이 길을 지나 도로에서 바라보면 사의재와 동문주막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사의재 건물과 동문주막은 서로 엇갈린 채 마주하고 있다. 지붕에는 기다란 넝쿨 없는 박이 말라가고 있다.

 

 

사의채 안채의 대살문과 뒷마당의 장독대/조찬현

 

부엌 바람벽에 매달린 멍석과 조그마한 키, 바닥에 놓인 절구통이 눈길을 붙든다. 부엌도  잘 정리되어 있다. 뒤란에는 장독대가 자리하고, 뒷벽에는 시래기가 봄바람에 꼬들꼬들 말라간다.

 

사의재는 세월이 흐르는 사이 사라져 오랫동안 찾을 수 없었는데, 강진군이 각계의 고증을 통해 정확한 위치를 찾아낸 뒤 최근 복원해 지난 5월부터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이곳에 가면 당시 주막으로 쓰이던 건물과 다산이 머물던 방, 작은 연못과 우물 등을 볼 수 있다.

 

 

주막집인 동문매반가로 현대판 주모가 토속적인 음식으로 주막을 운영한다.  

 

찾아가는 길 영랑 생가에서 좌회전해 강진세무서 방향으로 가면 세무서 옆에 사의재가 있다.

자료 - 여성동아/ⓒ 2008 OhmyNews조찬현

 

남성리 353 고성사 061-434-3710

고성사(高聲寺)가 자리한 보은산은 강진읍을 굽어보고 있는 강진의 진산이다.제일봉은 멀리서 보면 소가 풀을 뜯어먹고 있는 형상을 닮았다 해서 우두봉이라 한다. 고성사에 오르는 길을 따라 산속으로 들어가면 좌ㆍ우측에 천연 녹차나무와 리기다 소나무 숲이 펼쳐진다. 강진 사람들이 가장 즐겨 찾는 절로 가는 길은 충혼탑에서 돌샘에 이르는 오솔길로 이른 아침 그윽한 솔내음이 그만이다.

강진은 봄철 보리 싹이 돋아 오를 때 가족과 함께 찾으면 더할 나위없는 경치를 만끽할 수 있다고 한다. 주변에 모란향내 그윽한 영랑생가와 금곡사, 다산 정약용 선생이 보은산방에서 머물렀던 고성사 등이 답사객들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는 여느 어촌처럼, 사람들이 농업 반 어업 반의 생활을 이어가는 소읍에 지나지 않았다. 먼 타지 소식이라야 어쩌다 광주나 목포, 여수를 갔다 오는 사람을 통해 듣는 것이 전부일 정도였다. 오죽했으면 다산의 18년 동안 유배지였을까? 이 평화롭고 조용한 마을이 옛날에는 금릉이라 불렸다고 한다.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은 이 풍광좋고 살기좋은 마을 금릉의 여덟 가지 아름다운 자랑거리를 만들어냈는데, 백련사의 누각에서 굽어보는 구강포보다도, 무위사에서 올려다보는 월출산보다도, 제일 먼저 꼽은 것이 바로 고암모종 즉, 백성들이 아침저녁으로 듣던 고성사 종소리였다고 한다. 고성사는 <천불산화엄사사적비>에 1211년(고려 희종 7) 백련결사를 이끌었던 원묘국사 요세(了世: 1163∼1245)스님이 인근에 있는 만덕산 백련사를 중창할 때 함께 지은 말사라고 기록되어 있다.

1799년(조선 정조 23)에 편찬된 <범우고>에는 고성암(高聲庵)이라 되어 있다. 특히 1805년(순조 5) 가을 강진군에 귀양 온 정약용이 머물며 혜장선사와 교우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1805년 다산정약용은 주역 연구 자료가 담긴 경함을 고성사로 옮겼으니, 여기에는 그를 위한 혜장선사의 깊은 배려가 스며 있었고 이로부터 두 사람의 인연은 날로 깊어갔다. 건물로는 대웅전과 칠성각·요사가 남아 있다. 이 중 대웅전에는 조선시대 말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목조삼존불상이 모셔져 있다. 후불탱화로는 영산회상도와 지장탱화·감로탱화·신중탱화가 있다. 이 중 지장탱화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1933년 제작된 것이다. 칠성각에는 4점의 탱화가 모셔져 있다. 고성사 목조삼존불상중에 한 분은 십여 년 전, 일본으로 팔려갈 뻔한 기구한 운명을 맞기도 했다.


도굴꾼들이 그때 돈 350만원에 일본에 팔아 넘기기로 하고 부처님을 부산까지 옮겼었다고 한다. 이틀만 늦었어도 영영 일본으로 가버렸을 텐데 다행히도 발각되어 다시 모셔지게 되었다. 고성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성보인 부처님마저 없어질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고성사는 일찍이 금릉팔경의 첫 번째로 꼽혔던 저녁 종소리를 잃었다. 3∼40년 전까지만 해도 들을 수 있었던 종소리가 언젠지 모르게 종이 사라지면서 함께 사라진 것이다. 그때 종이 없어진 것을 가장 아쉬워 한 사람들은 강진의 백성들이었다고 한다.


강진이 발전하려면 고성사의 종소리가 끊이지 않고 울려야 한다고 예부터 전해오는 이야기를 가장 잘 기억하는 사람들이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이유서 깊은 절 고성사는 행정구역상으론 강진읍내에 있다. 30리 밖 구강포 바다에 떠 있는 배에까지도 은은하게 울려 퍼졌을 종소리를 들으며 강진 사람들은 고성사를 마음의 안도를 얻는 영원한 귀의처로 삼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직도 읍내의 연세 많으신 분들 가운데서는 강진의 대표적인 사찰로 고성사를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고성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다산 정약용에 얽힌 일화다. 고성사가 발전해야 강진도 발전한다는 말이 강진에는 스스럼없이 회자되고 있다 산신각 자리가 바로 다산 선생이 보은산방이라는 초당을 짓고 기거했던 곳이라고 한다. 다산의 두 번째 기거처가 되었던 고성사. 지금의 산신각 자리가 바로 다산 정약용 선생이 보은산방이라는 초당을 짓고 기거했던 곳이라고 한다. 산세가 소가 누워 있는 모습인 보은산, 꼭대기는 소의 머리에 해당하는 우두봉이고, 고성사가 자리잡은 곳은 소의 목 아래 방울을 다는 부분에 해당된다. 근래에 새로 주조한 종이 다시 강진 읍내에 울려 퍼지고 있다. 강진의 희망과 중생들의 발원을 담은 종소리가 도솔천의 그것보다 더 아름답게 들릴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강진읍 동성리 ~ 군동면 파산리 보은산

강진읍 버스 터미널에서 걸어서 20분정도 거리에 위치 

 

보은산(해발 439.0m)은 강진읍을 굽어보고 있는 강진의 진산이다. 멀리서 보면 소가 풀을 뜯어먹고 있는 형상을 닮았다 해서 우두봉이라 한다. 충혼탑에서 오르는 길을 따라 산속으로 들어가면 좌ㆍ우측에 천연 녹차나무와 리기다 소나무 숲이 펼쳐진다. 강진 사람들이 가장 즐겨 찾는 산으로 충혼탑에서 돌샘에 이르는 오솔길은 이른 아침 그윽한 솔내음이 그만이다.

 

강진읍 주민들이 새벽 4시부터 등산과 산책을 겸할 수 있는 운동코스로 하루에도 5백여명 정도의 주민들이 찾고 있고 이른 새벽 돌샘 약수물은 그 맛이 일품이다. 돌샘에서 약수를 한 통 담아 정상으로 올라가면 강진만의 비릿한 바다내음과 강진읍내가 한 눈에 펼쳐진다. 특히 봄철 보리싹이 돋아 오를때 가족과 함께 찾으면 더할 나위없는 경치를 만끽할 수 있다. 주변에 모란향내 그윽한 영랑생가와 금곡사, 다산 정약용 선생이 보은산방에서 머물렀던 고성사 등이 등산로 길목에 자리하고 있어 역사기행을 겸한 산행코스로 적격이다.

 

충혼탑에서 시작하여 약수터(돌샘)를 경유, 소나무 숲을 지나 우두봉 정상에 오르면 강진의 드넓은 갯벌이 펼쳐지고 뒷편 북쪽으로 국립공원인 월출산의 웅장한 위용이 눈앞에 다가서게 된다. 정상에서 일봉산, 산태봉을 거쳐 금곡사에 이르는 코스와 삼거리에서 돌샘을 거쳐 고성사를 경유하여 우두봉 정상에 오른 다음 군동면 파산리 장미산장으로 가는 코스가 있으며 경사가 급하기는 하나 위험한 곳은 없으므로 어린이와 부녀자들도 충분히 오를 수 있는 부드러운 길이다. 산행시간은 3시간 정도 소요됨으로 가족과 함께 오전 산행을 한 다음 그 유명한 강진 한정식 집을 찾아 맛깔스런 음식을 즐겨 먹을 수 있어 가족산행으로 권장할 만하다.

 

* 1코스 : 서성리 → 헬기장 → 삼거리 → 우두봉 → 일봉산 → 산태봉 → 금곡사
* 2코스 : 충혼탑(정수장) → 헬기장 → 삼거리 → 돌샘 → 고성사 → 우두봉 → 장미산장
* 3코스 : 충혼탑(동문) → 헬기장 → 삼거리 → 우두봉 → 고성사 → 돌샘 → 충혼탑 (원점회귀형)
※ 5.79km, 3시간

 

후한 인심에 상다리 휘어지겠네, 청자골 종가집
인심 좋기로 ‘동에 순천, 서에 강진’이라는 말이 있다. 이처럼 강진 인심은 예로부터 유명했다. 한상 거하게 차려낸 한정식은 강진만의 후한 인심을 느끼게 해주는 메뉴다.      
 
‘청자골 종가집’에 가면 강진 한정식을 제대로 맛볼 수 있다. 두 사람이 겨우 들고 들어오는 교자상을 보면 입이 딱 벌어진다.  “아가씨 같은 사람은 들지도 못하지라우.” 언뜻 보아선 가짓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삼합, 게장, 굴비, 바지락 등 찬 수가 대략 40가지에 이른다. 수많은 찬 가운데 주인이 자랑스럽게 내놓는 것은 3년 묵은 김치. 김치에 들어가는 재료가 다양하다. 갈치, 돼지고기, 각종 젓갈에 특별 양념까지 더해진다. 빨갛게 물든 배춧잎은 냄새부터 시큼하다.
김치를 한 젓가락 입에 넣으면 톡 쏘는 새콤한 맛에 입 안 가득 침이 고인다. 김치 맛을 제대로 보려면 홍어와 돼지고기를 곁들인 삼합이 제격이다. 잘 삭은 홍어와 부드러운 돼지고기는 묵은 김치와 찰떡궁합을 이룬다.

강진의 특산물인 꼬막과 바지락도 꼭 맛봐야 할 음식이다. 꼬막과 바지락은 청정 지역에서만 자라는 해산물. 강진만의 깨끗한 갯벌에서 자란 꼬막과 바지락은 살이 알차고 맛이 부드럽다. 바지락은 양념 없이 삶은 채 나온다. 씹는 맛이 쫄깃하고 감칠맛이 난다. 고풍스러운 한옥에서 식사할 수 있는 것도 만족스럽다. 주인이 수소문 끝에 광주까지 가서 한옥을 구입한 뒤 분해해 이곳으로 옮겨왔다. 꼬박 4년간의 작업이었다. 그 덕분에 한정식 맛이 배가된다.

061-433-1100  |  한정식 1상 (특) 15만원, (중) 10만원, (보통) 8만원  |  강진읍 종합운동장 뒤편 

자료 -   editor 김성환, 신정희 photographer 김연지, 안천호 

 

터미널부근 해태식당 한정식 061-434-2486

원래 남도의 한정식이라는 음식이 상 받는 사람의 눈부터 놀라게 하지만, 강진만 갯벌과 탐진강, 그리고 주변의 들녘 등 바다와 산과 들에서 구한 제고장 재료로 온갖 요리를 내는 것이 강진 한정식의 특징이다. 강진엔 한정식으로 잘 알려진 식당이 적지 않다. 그중 강진터미널 근처에 자리한 해태식당(대표 이영자)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한정식 전문식당.

 

다리 휘어질 정도의 상에는 회, 자연산 굴, 세꼬막, 조기구이, 소라, 문어, 해파리, 멍게, 해삼 등의 해산물은 기본이고, 참숯에 구워낸 맛좋은 고기와 육회 등 육류, 김치류와 나물류, 그리고 돔배젓·토하젓 같은 토산젓갈도 나오고, 매생이국·된장찌개 등의 국도 당연히 곁들여진다.

 

생선회와 찌개 등은 철마다 메뉴가 달라지는데, 어느 계절에 가든 말 그대로 산해진미를 모두 맛 볼 수 있다. 기본 2인상에 40,000원. 3인은 45,000원, 4인은 60,000원이다. 식당과 30m쯤 떨어진 곳에 주차 시설을 마련해놓았다. 수용인원은 70여 명.  

 

동해식당 짱뚱어요리
짱뚱어는 이색적인 이름처럼 가슴지느러미를 이용해 뛰고 걷는 바닷고기다. 11월 첫서리가 내릴 때부터 봄꽃 만발하는 4월 초까지 동면한다 해서 잠둥어라 했다. 짱뚱어는 방광염과 변비에 좋고, 소화 기능도 뛰어나고 즙을 내어 마시면 감기 몸살에 큰 효능이 있다고 한다.

 

읍내 동해식당은 처녀 때부터 ‘짱뚱어박사’로 이름 날렸던 짱뚱어잡이 경력 40여 년의 이순임씨가 그 날 그 날 막 잡아온 짱뚱어로 요리를 하므로 신선도가 아주 뛰어나다. 짱뚱어는 오염되지 않은 갯벌에서만 잡히는 생선이며 양식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요즘 같은 계절엔 가을에 잡아 냉동보관해 놓은 짱뚱어를 쓴다.

 

짱뚱어전골은 짱뚱어와 해물을 기본으로 넣고, 국물 맛을 내기 위해 마른고사리, 호박, 감자, 팽이버섯, 무, 콩나물, 다대기 등 각종 양념을 쓴다. 짱뚱어는 다른 물고기와는 달리 비린내가 전혀 없는 담백한 생선이므로 후추나 산초 등을 첨가하지 않는다.

 

점심식사로 적당한 짱퉁어탕, 짱뚱어전골. 얇은 대나무를 몸통에 꽂아 소금으로 간을 해서 익힌 짱뚱어구이와 회를 뜨면 색깔이 소고기처럼 빨갛게 변하는 짱뚱어회. 수용인원 120명, 인근 지역에 주차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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