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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추천 테마여행

서귀포 작가의 산책길 이중섭 현중화 변시지

by 구석구석 2024. 7.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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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 펼쳐진 예술의 빛깔 서귀포 작가의 산책길 A

 

 

[제주 아트 로드] 길 위에 펼쳐진 예술의 빛깔 서귀포 작가의 산책길 A - 여행스케치

[여행스케치=서귀포] 서귀포를 사랑한 예술가들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길. 한 걸음 뗄 때마다 영원을 사는 작가들의 이야기가 하나둘씩 펼쳐진다. 작가의 산책길은 개설된 지 10년이 훌쩍 넘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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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서귀포] 서귀포를 사랑한 예술가들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길. 한 걸음 뗄 때마다 영원을 사는 작가들의 이야기가 하나둘씩 펼쳐진다. 작가의 산책길은 개설된 지 10년이 훌쩍 넘었지만 강산이 변한다는 세월에도 그 가치는 변함이 없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예술과 그들의 삶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 보자.

제주도 서귀포를 사랑한 예술가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트레킹 코스를 소개한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서귀포시 작가의 산책길은 한국 미술계를 대표하는 예술가 3인의 흔적을 쫓는 아트 로드 (Art Road)이다. 이중섭 화가와 서귀포가 고향인 현중화 선생, 변시지 화백이 산책길의 주인공이다. 이들과 더불어 길을 따라 걷는 동안 문화예술의 향기가 봄바람처럼 퍼져 나간다. 이 중 A코스는 이중섭 화가와 현중화 선생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길이다.

작가의 산책길 A코스는 이중섭 거리, 소암기념관, 서복전시관, 자구리공원, 서귀진성 등을 돌아볼 수 있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막은 내려도 무대는 계속된다
작가의 산책길 A코스에서 가장 먼저 지나게 되는 장소는 이중섭거리에 있는 (구)서귀포관광극장이다. 요즘 보기 힘든 타일 외벽에 담쟁이넝쿨이 늘어진 건물은 오래된 시간만큼 사연이 많아 보인다.

작가의 산책길 종합안내소. 이곳에서 출발해 원점 회귀하는 코스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서귀포관광극장은 1963년 문을 연 지역 최초의 극장으로 수많은 명화들을 상영했으며 안익태 선생의 연주와 혜은이의 공연이 열리기도 한 곳이었다. 어려웠던 시절에 유일한 오락거리로 사람들을 웃고 울게 만들었던 추억 어린 장소였지만 안타깝게도 영화 상영 중 화재로 인해 무기한 영업정지 처분을 받고 1999년에 폐업하고 만다.

그 후 오랫동안 흉물로 방치되다 2013년에 서귀포시가 임차해 지역 문화공간이란 새로운 역할을 부여했다.

안내소에는 코스 곳곳에 설치된 예술 작품들의 미니어처가 전시되어 있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화재와 태풍으로 천장이 사라져 버린 노천 무대이지만 지역 문화 단체나 동아리들이 갈고닦은 솜씨를 자랑하고 주말이면 이중섭 작가의 은지화 체험이 진행된다. 건물 안쪽에 있는 상영관은 한 번쯤 가보기를 권한다.

하늘이 천장을 대신하고 있는 무대 벽면에 초록빛 잎사귀들이 무성하게 뒤덮여 있는데 그 어떤 무대 장식보다 근사하고 아름답다. 해가 지면 미디어 파사드도 상영된다니 저녁에 다시 찾아보기로 하고 바로 옆에 자리한 이중섭미술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과거의 모습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서귀포관광극장.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비운의 천재 화가 이중섭을 만나다
이중섭은 박수근과 함께 대한민국 근·현대 미술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화가이다. 역동적인 소의 모습을 담은 <흰 소>, <황소>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사후의 명성과 달리 그의 생애는 극심한 가난과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점철된 삶이었다.

생활고로 인해 가족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낸 뒤 영양실조와 간염에 시달리다 40세의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었는데, 그가 가장 행복하게 여겼던 시간이 바로 서귀포에서의 나날이었다.

이중섭 화가의 가족들이 살았던 초가집. 오른쪽에 불 켜진 방 한 칸이 그들의 보금자리였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평안남도가 고향인 이중섭은 6·25 전쟁의 화포를 피해 아내와 두 아들과 피란을 떠나온 서귀포에서 약 1년간 머물렀다. 비록 비좁은 단칸방에서 네 식구가 잠을 청해야 하는 궁핍한 생활이었지만 온 가족이 모여 오손도손 웃음꽃을 피우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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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미술관에는 일본으로 떠난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리움으로 가득한 글자들을 따라가다 보면 눈시울이 점점 뜨거워진다. 일본인 아내에게 이남덕이란 한국 이름을 지어주었던 애정 어린 마음이 편지마다 가득 묻어 나온다.

이중섭미술관에서 이어진 작가의 산책길.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이중섭 화가의 예술혼이 담긴 은지화에는 그림에 대한 끝없는 열정이 깃들어 있다. 종이조차 살 수 없는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그리기를 멈추지 않았던 그는 담뱃갑의 은박지까지 이용했는데 그것이 바로 ‘은지화’이다. 하지만 1955년 열었던 개인전에서는 당국이 춘화로 여겨 전시 작품을 강제 철거하기도 했다.

그 가치를 먼저 알아본 건 대구 미공보원장을 지낸 아서 맥타카트(Arthur. J. Mctaggart)였다. 전시회에서 은지화 3점을 구매해 뉴욕현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 MoMA)에 기증했는데 작품성을 인정받아 지금까지 공식 소장하고 있다. 국내보다 해외에서 먼저 이중섭 화가의 예술 세계가 알려지게 된 셈이다.

이중섭미술관 외관.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부인인 이남덕 여사가 기증한 유일한 유품인 팔레트와 서귀포에서의 날들을 그린 <섶섬이 보이는 풍경> 앞에서도 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가 늘 꿈꿨던 것들이 모두 그림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미술관을 나서면 길은 이중섭과 가족들이 살았던 초가집으로 이어진다. 피란민인 그들에게 기꺼이 방을 내준 건 동네 반장이었던 고(故) 송태주, 김순복 부부이다. 어렵지만 서로 돕고 살던 따스한 마음이 오고 갔던 시절이었다.

이중섭 화가의 작품과 편지,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단칸방을 들여다보는 관람객마다 ‘여기서 네 가족이?’라는 놀라운 눈빛이다. 하지만 가족을 떠나보낸 그에겐 늘 그리운 추억의 장소였을 것이다. 지금은 건물에 가려 옛 풍경이 사라진 지 오래지만 그땐 너르게 펼쳐진 바다를 보며 미소 지었을 그의 모습이 떠올려진다.

Info 작가의 산책길 종합안내소  064-732-1963 / 서귀포시 중앙로4번길 13
시간 10:00~17:00
매주 화, 목, 토, 일요일마다 해설사 탐방 프로그램이 진행되며 오후 1시에 종합안내소에서 출발한다.

작가의 산책길을 걷는 동안 다양한 작품들을 관람할 수 있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힘찬 붓글씨에 담긴 소암의 마음
소암기념관으로 가는 길에는 독특한 예술품이 놓여 있다. 앞면에는 한글 자모음을, 뒷면에는 제주어 속담을 새겨 넣은 김구해 작가의 작품 <문자향-탐라>이다. 작가의 산책길에는 곳곳에서 벽화와 설치미술 등 다양한 예술 작품들을 관람할 수 있어 걷는 길이 지루하지 않다.

서귀포 출생인 소암 현중화 선생은 국전 초대작가와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며 20세기 한국 서단을 이끈, 일생을 서예와 함께한 진정한 예술인이었다. 소암기념관에서는 그가 쓴 많은 글씨들을 볼 수 있는데 서예에 문외한인 내게도 작품 하나하나가 범상치 않음이 느껴졌다. 고향인 제주에서 자연과 술을 벗 삼아 끊임없이 글씨를 써온 선생의 일생이 기념관을 꽉 채우고 있다.

소암기념관에서 흰 종이와 검은 먹으로 이뤄진 작품들이 무언의 감동을 준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도 그만의 필법으로 써 내려간 ‘惟心(유심, 오직 마음)’과 ‘山中無曆日(산중무력일, 산속에서 날짜를 모른 채 살다)’은 글귀에 담긴 의미가 마음을 울린다. 어디 이뿐일까.

유려하게 이어진 곡선에서는 가뭄 끝에 온 단비를 맞는 반가움이 흘러나오고, 무심히 찍어 놓은 듯한 점과 선에는 티끌 하나 없는 간결함이 배어 나온다. 무언의 감동이 가슴을 들뜨게 하는 뜻밖의 시간을 보낸 후 바닷가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진시황의 불로초 이야기가 담긴 서복전시관.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길을 따라 이어진 예술의 향연
전설 같은 진시황의 불로초 이야기 중에는 서귀포가 등장하는 부분이 있다. 황제의 명에 따라 불로초를 찾아 떠난 서복(서불)이 정방폭포를 지나다 ‘徐市過之(서불과지)’란 마애명을 새겼고 서귀포(西歸浦)라는 지명이 여기서 유래했다는 설이 전해진다.

서복전시관에는 이러한 이야기들이 전래동화처럼 술술 흘러나온다. 실내 전시를 가볍게 둘러본 후에 야외로 나서면 푸른 바다와 섶섬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인다. 잔디광장 무대에서 때때로 지역 예술가들의 버스킹 공연과 플리마켓 행사가 열리니 기왕이면 주말에 걷기를 추천한다.

서복이 정방폭포에 '서불과지'란 마애명을 새겨 서귀포 지명이 유래했다는 설이 전해진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해안 절벽에 이어진 산책길은 소남머리 전망대를 거쳐 자구리공원에서 잠시 쉬어간다. 이중섭 화가가 가족들과 게를 잡으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던 곳이다. 그는 이곳 풍경을 화폭에 고스란히 담아내기도 했다.

공원 곳곳에 예술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정미진 작가의 <게와 아이들-그리다>는 섶섬이 바라보이는 자리에서 화가가 스케치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만든 것이다. 인생이라는 큰 짐을 지고 무리 지어 가야 하는 삶을 형상화 한 송필 작가의 <실크로드-바람길>도 일부러라도 찾아봐야 할 작품인데 찬찬히 곱씹어 볼수록 많은 상념에 젖게 한다.

자구리공원에서 섶섬이 보이는 풍경. 이중섭 화가의 시선이 이러했을까.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마을길과 솔동산 문화의 거리에 접어들면 더욱 다채로운 예술의 향연이 펼쳐진다. 군부대 담장에 꾸민 제주의 풍경을 비롯해 돌하르방 테라코타를 하나하나 벽에 붙여 만든 부조 벽화들이 자꾸만 걸음을 멈추게 한다. 길은 다시 종합안내소로 이어지지만 이중섭거리에서 산책을 마쳤다. 예술가들이라면 이쯤에서 응당 다방(?)을 찾아 나섰을 테니 말이다.

자구리공원에 설치된 송필 작가의 '실크로드-바람길'.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출처 : 여행스케치 2024 정은주 여행작가

그와 걸었던 모든 길이 예술이었네, 작가의 산책길 B코스

 

[제주 아트 로드 ②] 그와 걸었던 모든 길이 예술이었네, 작가의 산책길 B코스 - 여행스케치

[여행스케치=서귀포] 따스한 봄날, 내내 아껴 두었던 작가의 산책길을 마저 걸었다. 연둣빛 새순이 돋아나기 시작한 오솔길에는 아지랑이처럼 예술의 향기가 피어오르고 숨어 있던 이야기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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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서귀포] 따스한 봄날, 내내 아껴 두었던 작가의 산책길을 마저 걸었다. 연둣빛 새순이 돋아나기 시작한 오솔길에는 아지랑이처럼 예술의 향기가 피어오르고 숨어 있던 이야기들이 튀어나와 귓가에 재잘재잘 속삭여댔다. 변시지 화백이 평생 마음에 품었던 고향 서귀포에도 새 봄이 시작되고 있었다.

변시지 화백의 흔적을 볼 수 있는 작가의 산책길 B코스를 마저 걷는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작가의 산책길 A코스에 이어 걷는 B코스는 폭풍의 화가로 유명한 우성 변시지 화백의 흔적을 찾아가는 길이다. 기당미술관과 곳곳에 설치된 작품들을 관람하고 숲과 바다에 젖어드는 힐링 테마로 A코스와 마찬가지로 종합안내소에서 출발해 원점 회귀하게 된다.

작가의 산책길 출발점과 도착점인 종합안내소.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안내소에서 운영하는 해설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약 2시간 30분 소요되며 작품을 감상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해설사와 동행하면 작품 감상에 큰 도움이 된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깊이 들여다보면 더욱 아름답다
종합안내소에 도착하니 해설사 두 분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지난 A코스는 셀프 투어로 다녀왔지만 이번 B코스는 일부러 해설 시간에 맞춰 방문했다. 작가의 산책길에 관한 좀 더 깊고 풍부한 이야기들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작가의 산책길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듣고 난 후 곧바로 산책길에 나섰다.

한라산 고사목을 활용해 제주 조랑말을 형상화 한 이승수 작가의 '영원한 생명'.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이 길에는 2013년 마을 미술 프로젝트 사업으로 설치된 공공 미술작품들이 20여 개가 있습니다. 여기 이 돌담이 그중 하나인데요, 자세히 보면 일반 돌담하고는 다르게 빈틈이 없죠. 원래는 바람이 통하도록 성글게 쌓아야 하거든요. 제주와 서귀포를 상징하는 예술 작품으로 보시면 됩니다.”

공원처럼 잘 가꿔진 숲길을 따라간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작가가 만들었다고 하지만 원래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돌담은 주변 풍경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었다. 이러한 설명이 없었다면 별의미 없이 지나쳤을 터이다. 돌담이 이어진 샛기정 공원은 천지연 폭포를 거슬러 가는 길이다.

공원 아래쪽에 있던 울창한 숲 속 오솔길은 과거에 주민들이 물을 길어 다니던 곳이었는데 마침 그와 관련한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이광진 작가의 <샛기정, 구름으로 살다>였다. 구름에서 비가 내려 물허벅에 담기는 것을 표현한 설치 작품으로 수많은 여인들이 물허벅을 지고 오고 갔을 시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비록 지금은 사라져 버린 옛 시간이지만.

물이 쏟아져 나오던 분수터에 비눗방울이 퍼져가는 모습을 표현했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사실 사라져 버린 건 따로 있다. 샛기정 공원 터는 과거에 호텔이 있던 자리였다.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었다면 아마도 서귀포 최고의 전망을 자랑했을 터다. 무성한 수풀 너머로 서귀포 앞바다가 훤하게 보일 테니 말이다. 과거의 영광을 엿보게 하는 건 정민호 작가의 <물의 축제>이다.

건물은 모두 허물어졌지만 앞마당에 있던 인공폭포는 그대로 남아 작품을 위한 캔버스가 되었다. 수직적인 관계로만 여겨지던 어른과 어린이가 허물없이 비눗방울 놀이를 하며 즐거워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건 바로 이 같은 ‘소통’이 아닐까.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하는 작품이다.

제주색이 물씬한 이승택 작가의 '제주 돌담'.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INFO 작가의 산책길 종합안내소 / 064-732-1963(지역주민협의회)
주소 제주 서귀포시 중앙로4번길 13
시간 10:00~17:00
* 매주 화, 목, 토, 일요일마다 해설사 탐방 프로그램이 진행되며 오후 1시에 종합안내소에서 출발한다.

황톳빛과 먹색, 폭풍 전야의 제주
발길이 어느새 기당미술관에 닿았다. 변시지 화백의 작품을 상설 전시하는 곳이다. 미술관에선 또 다른 해설사가 도슨트 역할을 맡아주었다. 나선형 통로를 따라가다 온통 황톳빛 투성이인 그림들 앞에서 멈추더니 “이 작품들이 바로 변시지 화백이 독창적인 기법으로 그린 제주화입니다.”라며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해주었다.

변시지 화백의 작품을 상설 전시한 기당미술관.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변시지 화백은 1926년 서귀포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적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마음 한 구석에 늘 간직하고 있었다. 일찍이 미술에 재능을 보였는데 일본 최고 권위의 미술전 광풍회전에서 최연소인 23세 나이에 수상하면서 화가로 명성을 얻었다.

이후 서울대의 초청으로 1957년 영구 귀국했으며 서귀포로 귀향해 삶의 마지막 순간을 맞을 때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그에게 그림은 운명이자 삶 그 자체였던 것이다.

기당미술관에서 바라보이는 한라산 풍경도 예술이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마음에 품고 있던 자신과 고향의 이미지를 그림에 투영하기 시작한 것도 고향에 돌아온 때부터였다. 전과는 완전히 다른, 황톳빛과 먹색만으로 표현한 그림을 두고 사람들은 ‘제주화’라는 이름을 붙여주었고 그를 ‘폭풍의 화가’라 불렀다.

독창적인 그의 그림을 먼저 알아본 건 미국 스미소니언박물관이었다. 동양인 최초로 그의 작품 2점이 박물관에 2007년부터 10년간 상설 전시되었다.

황톳빛과 먹색의 조화가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변시지 화백의 그림은 예전부터 보아왔지만 해설사의 설명이 더해지니 또 다르게 느껴졌다. 폭풍 전야와도 같은 기이한 적막감이 감도는 바다, 그 한 구석엔 전에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작은 배가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던 화가의 마음이 여기에 깃들어 있었구나. 아는 만큼 보인다고 전보다 더욱 깊은 감동이 몰려왔다.

잠시 쉬어가는 공간. 작품이지만 앉아도 된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2013년 별세한 그는 생전에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그림 속에는 모든 것이 짝이 없다고 했는데 그림을 보는 이와 그림 속 피사체가 서로 생각을 나누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고 한다. 그 마음이 와 닿은 걸까. 사람도, 말도, 까마귀도 모두 홀로였지만 단지 고독할 뿐, 외롭지 않게 느껴졌다.

하늘로 비상하는 느낌을 주는 작품.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모든 것이 예술이 되는 시간
변시지 화백도 종종 나섰을 산책길, 칠십리 시 공원에서도 영감이 넘치는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공원이 조성되기 전에는 수풀이 무성해 우범지대로 여겨졌다는데 여기에 시가 더해지고 예술이 덧입혀져 지금 같은 근사한 공간이 되었다.

징검다리를 건너면 거울 문이 스르르 열리며 또 다른 길이 나타난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전종철 작가의 <경계선 사이에서>이다. 연못 가운데 거울 문을 세워 놓았는데 가까이 가면 저절로 열리면서 문 밖의 세계가 드러난다. 문을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안팎을 사색하게 만드는 이색적인 작품이다. 징검다리를 건너면 거울 문이 나와 걸어온 길을 비춘다. 이내 스르르 열린 문 사이로 또 다른 징검다리가 보인다. 저 길은 어떤 세계로 나를 이어줄까. 징검다리로 걸음을 내딛자마자 망설일 틈도 없이 문이 다시 굳게 닫혀버렸다.

칠십리 시 공원 전망대에서 작품처럼 걸린 서귀포항의 풍경.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숲과 바다, 감귤 등 제주의 색에서 모티브를 따온 돌 의자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했다. 고개를 젖히고 멀리 바라보니 파란 하늘에 한라산이 담겼다. 사람과 자연이 함께 빚어낸 합작품이 그곳에 있었다. 내려오는 길에 바라보이던, 섶섬을 어깨 너머에 걸친 서귀포항도, 새섬에 걸쳐진 새연교도 모두가 작품이었다. 변시지 화백이 걸었을 그 모든 길이, 그 길에서 만났던 모든 것들이 예술이나 다름없었다. / 출처 : 여행스케치 2024 정은주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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