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7.31:대한민국 PKO 첫걸음 / 장비 하역 지연 등 본진 출국 미뤄져 / 국방부 경계 보강하며 즉각적 대응
수도서 북방 30㎞ 위치 발라드 주둔 / 도로 보수·유지 등 재건 작업 주 임무
소말리아 상록수부대는 당초 1993년 7월 13일 출국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먼저 출발한 선발대 장비·물자의 현지 하역작업이 지연되자 21일로 출국이 연기됐고, 급작스러운 현지 정세 악화에 30일로 재차 미뤄졌다. 우여곡절을 겪은 뒤 마침내 7월 31일 소말리아 모가디슈에 내린 상록수부대는 우리나라 유엔 평화유지활동(PKO)의 첫발을 뗐다.
1993년 3월 당시 육군 189중건설공병대대 대대장이었던 장정훈 중령(당시 계급)은 육군공병감실로부터 호출을 받았다. 도로조성사업 임무에 투입돼 경기 남부 일대에서 작전을 진행하던 중이었다. 장 중령은 당시 원형재 공병감을 만난 자리에서 파병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파병에 대한 장 중령의 의사를 묻는 것이었다. 장 중령의 답변은 간단했다.
“국가가 임무를 부여하면 어디든지 가야 하는 것이 군인인 저의 사명입니다.”
그날 이후 장 중령은 상록수부대 1진 부대장으로 파병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파병에 자원해 선발된 부대원들과 함께 임무 수행교육 및 현지 적응훈련에 매진했다. 첫 유엔 PKO 파병이었기에 수개월간 이어진 파병 준비는 강도 높게 진행됐다. 이윽고 모든 준비를 마쳤고, 출국만이 장 중령과 부대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1993년 6월 15일 부대의 장비·물자가 유엔이 제공한 선박에 실려 소말리아 현지로 출발했다. 이어 18일에는 연락장교가 유엔 소말리아 임무단(UNOSOM-Ⅱ) 등과의 연락 임무를 위해 먼저 한국을 떠났다. 또 29일에는 장교 10명, 부사관 10명, 병사 40명으로 구성된 선발대가 항공편으로 출국했다. 그보다 일주일 앞선 22일에는 부대 연병장에서 파병 신고식이 거행됐다. 7월 12일에는 대통령에 대한 파병 신고가 이어졌다. 이 자리에는 부대장인 장 중령을 포함해 지원과장, 건설중대장, 시설중대장, 주임상사, 심정반장, 도저운전병, 통역병 등 8명의 장병이 참석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하지만 현지에 도착한 장비·물자의 하역이 지연되며 출국일이 갑작스레 연기됐다. 덩달아 현지 정세가 불안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무장군벌의 무차별 공격으로 유엔임무단 소속 PKO 병력과 민간인 피해가 발생했다. 유엔임무단과 갈등을 빚은 이탈리아군은 현지 병력 철수를 거론하고 있었다. 이탈리아군은 상록수부대의 경계를 담당할 계획이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다.
국방부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현지 주둔지 방호시설의 경계 보강 및 자체방호능력 강화에 나섰다. 아울러 유엔임무단에 파견된 연락장교와 선발대 등을 통해 상황을 보고받으며 즉각적인 대응을 이어갔다. 이후 안정을 되찾아가자 상록수부대 본대의 출국이 마침내 7월 30일 이뤄졌다. 그리고 이튿날 새벽 장 중령과 부대원들이 소말리아 모가디슈에 발을 내디뎠다.
“본대는 선발대 출국 후 보름 뒤를 전후해 출발할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현지 정세가 안정되지 못해 지연되다가 7월 31일 소말리아에 도착해 임무를 개시했습니다. 우리나라 PKO의 첫걸음이었다는 점에서 이날을 잊지 못합니다.”
상록수부대의 주둔지는 소말리아 수도 모가디슈에서 북방 30㎞ 지점에 있는 발라드였다. 처음 우리 군은 모가디슈를 전개 지역으로 고려했지만, 부족 간 무력 분쟁이 치열해 자칫 인명 손실의 우려가 있었다. 우리 장병들의 안전이 최우선이었다. 반면 발라드 지역은 상대적으로 위험 요소가 적었고 주 임무 장소와도 인접해 있었다. 또 유사시 모가디슈 항만을 이용한 철수가 용이한 곳이기도 했다. 또 우리 부대를 경계·경호할 이탈리아군이 전개해 있어 숙영여건에도 유리했다.
상록수부대의 임무는 소말리아 중부지역 도로 건설을 중심으로 시설·건물을 설치·구축하고 유지·보수하는 재건 작업이었다. 부수적으로는 급수 지원, 심정 개발, 비행장 보수, 대민 지원 등이 포함됐다. 장 중령은 “도로 보수·유지가 중요한 임무 중 하나였는데, 발라드와 벨레트웬을 잇는 430㎞ 길이의 주보급로와 모가디슈 전투 이후 긴급히 요구된 아프고이-발라드를 연결하는 도로가 그것이었다”고 덧붙였다. / 국방일보 2021 서현우 기자
선발대의 시간
장교·부사관·병사 등 선발대 60명 / 모가디슈 항 들어온 장비·물자 / 하역·수송 마치고 시설 공사 착수
적 침투 대비 부대 방호 특히 신경 써 / 치명적인 독사 등 파충류 출몰하자
1m 높이 모기장 설치 유해동물 차단 / 악명 높은 독사 모기장에 걸리기도
김영삼 대통령, 부대에 격려 전화 / 국민 성원 보답고자 임무 더욱 매진
선발대는 본대보다 먼저 파견돼 주둔지 조성과 행정업무 처리 등의 제반 준비 임무를 한다. 부대가 본격적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첫 단추가 되며, 그 역량에 따라 부대의 성패가 갈린다. 소말리아처럼 황량하고 척박한 낯선 이국의 땅에서는 특히 더 막중한 책임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상록수부대 1진 선발대는 1993년 6월 29일 서울공항을 출발해 이튿날 소말리아 모가디슈에 도착했다. 앞서 같은 달 15일 부대의 장비·물자를 싣고 먼저 떠난 선박이 현지에 도착하는 시점을 맞춘 일정이었다. 본대는 7월 31일 합류할 것이었다. 남은 시간은 한 달여. 이제부터는 선발대의 시간이었다.
선발대는 장교·부사관·병사 등 60명으로 구성됐다. 선발대장은 부대 운영과장 정장수 소령(당시 계급)이 맡았다. 부대 장비·물자를 실은 선박이 7월 9일 모가디슈 항에 들어오자 이튿날부터 하역작업을 시작했다. 이틀간 진행된 작업에는 유엔이 제공한 트레일러, 크레인, 지게차 등이 동원됐다. 주둔지로 수송을 마친 선발대는 주둔 시설 공사에 본격적으로 들어갔다.
주둔지는 모가디슈 북동쪽 약 40㎞ 지점, 이탈리아 여단 본부 울타리 내에 자리했다. 이탈리아 여단 예하 공수연대와 군수지원대대가 부지를 남북으로 나눠 각각 주둔했고, 우리 군은 그 중간에 약 3만㎡ 규모의 주둔지를 조성하기로 했다.
선발대장 정 소령은 선발대원들과 함께 본대가 오기 전까지 기존 네 개 동의 건물을 보수해 본대 도착 즉시 임무 수행이 가능하도록 준비했다. 또 장병들의 안전을 최우선 사항으로 주둔지를 구성했다. 허허벌판 같은 맨땅에 조금씩 부대의 모습이 갖춰지기 시작했다. 한 번은 조성 중인 주둔지를 혼자 둘러보고 있는데 멀리서 이탈리아군 여단 장교 아쿠카 중위가 정 소령을 향해 달려왔다. 아쿠카 중위는 선발대 도착 때부터 도움을 주던 우리 군 담당 장교였다. 아쿠카 중위는 곳곳에 도사리는 파충류들을 조심해야 한다며 부대 안에서도 혼자 움직이면 안 되며 바짝 경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본대가 도착하자 8월 1일부터 9월 10일까지 잔여 공사를 함께 진행해 컨테이너 50동과 텐트 47동을 비롯해 사무실, 공동시설, 급식·위생시설, 주둔지 방호벽 등을 완성했다. 본격적인 임무 수행이 가능해진 것이었다. 때를 맞춰 이튿날 대통령이 부대에 전화를 걸어왔다.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부대장 장 중령과 통화하며 부대원들의 현지 적응과 건강 여부를 확인했다. 또 작전 준비상황을 보고받으며 장병들의 노고를 격려했다. 특히 장병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강조하며 임무 수행할 것을 주문했다. 약 8분간의 전화통화 내용은 1993년 9월 11일자 국방일보 지면에도 실린 바 있다.
상록수부대를 보는 시선
신속 정확한 공병 능력 타국군 귀감 / 심정 개발 등 대민지원 현지 큰 호응
유엔임무단서 ‘최고 모범 부대’ 평가 / 각국 연락장교 사이에서도 늘 인기
PKO의 교과서적인 부대로 불려 / CNN “소말리아인들의 영원한 친구”
소말리아 상록수부대는 주 임무인 작전도로 건설 외에 관개수로 건설, 심정 개발, 건물 복구, 의료·기술·교육 대민지원 등을 펼치며 현지 주민들로부터 큰 환영을 받았다. 뛰어난 공병 능력과 함께 헌신적인 활동을 인정받은 것. 이를 바탕으로 상록수부대는 현지 유엔임무단 내에서 가장 모범적인 부대로 평가받았으며, 그 활약은 각국 매체를 통해 세계에 알려지기도 했다.
40㎞ 우회로 미군공병과 사흘 만에 개통
상록수부대의 실력을 보여주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빠르고 정확하게 공병 임무를 수행하는 모습은 타국 군 장병들에게 놀라움을 주기에 충분했다. 상록수부대가 파병 초기 진행한 주보급로 ‘ORANGE’ 보수공사 제1공구 60㎞ 구간은 두 달여 만에 완료했다. 또 모가디슈 동북방에서 유엔군과 소말리아 적대세력의 교전으로 지역 도로가 차단되자 긴급하게 우회도로 ‘RED’ 건설에 나서 약 40㎞의 도로를 미군 공병과 함께 사흘 만에 개통시켰다.
대민지원 활동도 소말리아 국민에게 감동을 주었다. 물이 부족해 어려움을 겪는 주민들을 위해 수로와 심정을 건설하고 의료지원과 기술교육을 이어가며, 그들 스스로 안전한 상태에서 자립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탰다.
당시 유엔특사로 소말리아에 대한 유엔 평화유지활동(PKO) 및 정책과제를 추진한 조너선 하우(Jonathan T. Howe·미 해군대장) 제독은 1993년 8월 한국 취재진과 기자회견을 하면서 상록수부대 공병 능력의 우수성을 특히 강조했다. 그는 “한국 공병은 잘 조직되고 훌륭한 능력을 갖췄다”며 “특히 심정 개발 같은 인도적 능력 확보에 매우 고맙게 생각한다”고 부대 역량을 높이 평가했다. 또 “한국 공병은 소말리아에서 활동하는 유엔국가 중 가장 의미 있는 공헌을 남길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기대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가장 활발하고 적극적인 활동 펴는 부대
그해 11월에는 미국 CNN 방송이 상록수부대를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CNN은 소말리아 유엔임무단 사령부를 구축하는 30여 개국 군대 중 상록수부대를 ‘가장 활발하고 적극적인 활동을 펴는 부대’로 선정하며, 우수한 기량과 인도적 사업 활동이 그 배경이라고 소개했다. CNN은 방송에서 “현재 소말리아 평화유지활동을 벌이는 각국 군 중 헌신적인 활동으로 소말리아 재건에 심혈을 기울이는 군은 한국의 ‘에버그린 유닛(Evergreen Unit)’ 즉 상록수부대”라며 “이 부대가 이같이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에서의 교육·훈련과 더불어 한국의 국력·국격이 세계 속에 자리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소말리아에 파견된 각국 군 중 규모 면에서 가장 적은 250여 명으로 편성됐음에도 주 임무 수행은 물론 부대 관심 사항으로 진행하고 있던 대민 의료지원·기술교육과 심정 개발 등 주민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활동을 높이 평가한 것. CNN은 또 “아마 한국군은 소말리아 사람들의 영원한 친구가 될 것”이라는 현지 주민의 말을 인용하며 소말리아 국민 사이에서 오가는 한국군에 대한 호평도 함께 소개했다.
유엔임무단 사령부 내 각국 연락장교 사이에서도 상록수부대는 늘 인기였다. 매일·매주 진행되는 참모부 회의에서 상록수부대의 활약은 단골 이야깃거리였으며, 모범 사례이자 PKO의 교과서적인 부대로 불렸다. 이 때문에 각국 연락장교들은 우리 군 연락장교를 찾아가 상록수부대의 현지 활동을 구체적으로 소개해 달라며 단기간에 확보한 유엔 PKO 노하우 제공을 요청하기도 했다. / 국방일보 2021.2 서현우 기자. 사진 제공=정장수 당시 상록수부대 운영과장
몸은 멀리 있어도 마음은 가까이에
장병 노고에 국민들 아낌없는 박수 / 추석에 맞춰 위문품과 편지 전달 / 위성전화로 가족과 통화 큰 위로
섭씨 35도를 웃도는 무더위와 폭풍처럼 이는 모래 먼지 속에서도 상록수부대원들은 국위 선양의 책무와 임무 완수를 향한 투지로 제 역할을 꿋꿋이 해냈다. 장병들의 노고에 우리 국민은 아낌없는 박수와 함께 정성의 마음을 보내기도 했다. 한국과 소말리아를 잇는 마음의 거리와 깊이는 결코 멀지도, 얕지도 않았다.
1993년 9월 27일 국방부는 건군 45주년 및 추석 명절을 맞아 상록수부대에 위문대 300개를 보냈다. 국민의 온정으로 채워진 위문대는 위문편지 2600여 통을 비롯해 화장품, 양말, 면장갑, 서적, 필수 일용품 등으로 구성됐다. 또 같은 달 28일까지 위문품과 위문편지를 접수하는 창구를 추가 마련, 편지 2000여 통과 위문품을 받아 공군수송기 편으로 전달하기도 했다. 아울러 부대원들이 국내 가족과 안부를 나눌 수 있도록 위성전화를 연결해 통화를 제공했다.
1993년 소말리아 현장에 파견됐던 본지 기자에 따르면 상록수부대원 중에는 특이한 이력과 사연을 가진 장병도 여럿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신혼을 포기하고 파견을 선택했거나 전문기술, 높은 희생정신을 가진 장병들이 그들이었다.
당시 시설중대 김관수 대위와 김진일 중사는 신혼의 단꿈을 뒤로하고 평화유지 활동에 참여했다. 결혼한 지 각각 10개월과 7개월 된 두 사람은 신혼의 첫발을 내딛자마자 파견을 자원한 것. 두 간부는 “군인이기에 어려움도 참을 수 있는 것”이라며 임무 활동에 전력을 다했다고 한다. 같은 중대 진길재 상병은 입대 전 세계 각국을 다녀 본 경험이 있는 병사였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선원이 되고자 수산계열 학교로 진학했고, 외항선원으로 곳곳을 누비며 많은 경험을 했다. 아프리카는 그에게 낯설지 않은 땅이자 운명 같은 곳이었다.
근무지원중대 윤종삼 중사는 부대 내 정밀기계에 이상이 발생하면 가장 먼저 찾게 되는 인물이었다. 관련 분야 전공자였던 그는 부사관으로 명칭이 바뀌기 전이었던 시기 ‘하사관(현 부사관) 시험’에 합격해 통신무선정비 교육을 받았다. 정밀기기와 통신장비 수리에 관해서는 부대 내 일인자로 활약했다. 같은 중대 김진관 병장은 부대 내 병사 중 최선임으로 항상 앞장서서 솔선수범했다. 특히 장병들의 이발을 도맡아 하며 부대원들이 언제나 산뜻한 마음으로 작전에 임할 수 있도록 도왔다. / 국방일보 2021.2 서현우 기자
국방일보 기자가 본 소말리아 상록수부대
수개월간 근거리서 장병 활동상 취재 / 핫라인 이용 기사전송 종종 문제 발생 / 기사 마감 시간이면 늘 긴장감
이탈리아 장병들도 한국군 노력 인정
국방일보는 1993년 소말리아 상록수부대 취재를 위해 당시 취재부 정순훈 기자를 포함 세 명을 현장에 파견했다. 이들은 수개월 동안 부대원들과 함께 생활하며 부대의 다양한 활동상을 취재해 국민에게 알렸다. 기자가 바라본 소말리아와 상록수부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정 기자 등은 소말리아 수도 모가디슈에서 북동쪽으로 약 40㎞를 달려 상록수부대가 있는 발라드에 도착했다. 발라드는 크기로 치면 우리나라의 읍·면 정도쯤 되는 작은 도시였다. 상록수부대 주둔지에 다다르자 처음 눈에 띈 것은 바람에 펄럭이는 태극기였다. 1993년 9월 22일 자 국방일보에 실린 ‘상록수부대 취재기자 방담(放談)’에서는 정 기자를 비롯한 기자들의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실렸다.
“기지 건설작업에 들어가면서 게양한 태극기였습니다. 지평선이 보이는 발라드 지역 어디를 가더라도 쉽게 눈에 띄었는데, 소말리아에 한국을 심어놓았다는 사실은 분명 역사에 기록될 것으로 믿습니다.”
이들이 현지 주둔지에서 첫날을 보내며 느꼈던 것은 부대원들을 괴롭히는 환경이었다. 한낮에 섭씨 40도를 기록했던 기온은 저녁이 되자 22도로 떨어졌다. 정 기자는 큰 일교차에도 장병 중에 감기에 걸리는 환자가 없었다는 점은 다행이라고 여겼다. 모래바람도 부대원들을 힘들게 했다. 늘 불어대는 탓에 건설장비의 수명을 단축할 수 있다는 점이 문제로 보였다. 부대원들은 일일·주간정비 등으로 이를 극복하며 장비 가동률 100%를 유지했다.
“하루의 일과에는 오후 1시부터 2시30분까지 오침 시간도 포함돼 있습니다. 무더위를 피하기 위한 운용이었고, 그 외 전문특기 교육과 정비 활동에 전력을 기울이는 등 완벽한 임무 수행에 차질이 없도록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정 기자는 부대가 장병들의 안전에 특히 신경 쓰고 있다는 점을 곳곳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부대는 주야간 철저한 주둔지 경계는 물론 작전 수행 간 발생할 수 있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도 대비하고 있었다. 또 꾸준하고 철저한 교육·훈련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장정훈 상록수부대장은 “자위력 향상과 적절한 긴장감 조성을 위해 부대 울타리 주변에 3선 배치로 모래언덕을 조성하고, 철조망과 고가초소를 활용해 경계를 강화하고 있다”고 했다.
반면 기자들의 취재 활동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힘들었다. 유엔임무단 사령부가 있는 모가디슈와 상록수부대가 주둔 중인 발라드를 동시 취재하려는 이들의 최초 계획은 소말리아 도착 첫날부터 수포로 돌아갔다. 유엔군과 적대세력 간에 충돌이 잦아지며 행동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부대원들의 안전도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장병들이 물자 등을 공급받기 위해 모가디슈 시내로 움직이면 이탈리아군이 경계해야 했다. 상록수부대는 공병이었고, 이탈리아군은 전투병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상황에 이탈리아군이 상록수부대의 경계지원을 늦추는 경우가 발생하곤 했다. 취재진에 대한 경계·경호는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다.
“안전상 부대 밖 멀리 나갈 수 있는 날이 적었고, 근거리에서 장병들의 활동상 취재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려움은 부대 안에서도 있었다. 부대와 본국을 연결하는 핫라인을 이용한 기사전송이 제때 이뤄지지 않을 때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기사 마감시간을 앞두고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긴장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또 한국과의 시차 역시 매일 밤 기자들에게 고단함을 선사했다. 낮에는 취재하고 밤에는 기사를 작성·전달하는 일의 반복이었다.
“시차는 6시간입니다. 본국 마감시간 전에 기사 송고작업을 하느라 현지시각 저녁 12시부터 새벽 3시까지는 늘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면 밤을 새우기 일쑤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에게 밤낮이 바뀌는 생활도 또 수면시간이 부족한 일상도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장병들의 소식을 목놓아 기다리는 고국의 가족들에 대한 사명감이 먼저 들었다.
장병들이 운영하는 ‘사랑의 학교’도 이들에게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지역 아이들에게 어학, 음악, 산수 등을 가르쳤던 사랑의 학교는 부대원들과 주민들의 유대관계를 돈독히 만드는 연결고리였다. 운영 초기 손에 꼽을 정도의 적은 참여 인원으로 시작한 사랑의 학교는 한 달여가 지나자 200여 명에 가까운 아이들이 출석하기도 했다.
또 이들은 취재를 통해 상록수부대가 주둔하는 발라드 외 지역의 소말리아 주민들도 한국군의 존재를 잘 알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상록수부대가 자신들을 위해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부대원들이 낯선 지역으로 도로 정찰 나갈 때면 주민들이 장병들에게 반가움을 표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때때로 급변하는 일부 주민의 행동은 경계해야 할 첫 번째 대상이었고 장병들을 긴장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록수부대와 소말리아인들의 신뢰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단단해졌다. 주기적으로 구호품을 전달하며 의료지원을 펼치는 장병들을 볼 수 있었고, 이를 감사하게 여기며 엄지를 치켜드는 주민들과 마주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군 장병들은 기자들에게 이 같은 부대의 노력을 인정하며 “상록수부대의 세심한 관심과 노력을 배워야겠다”고 말했다. 자랑스러움과 뿌듯함을 느끼는 순간들이었다. / 국방일보 2021.2 서현우 기자
PKO 참모장교로서의 첫발 - 이종봉 예비역 중령
우리나라 최초의 PKO 참모장교 / 소말리아서 공병부대 참모 활동 / 다양한 국가 장교들과 임무 펼쳐
의사소통·문화 차이 과제였지만 / 시간 지난수록 이해하며 ‘척하면 척’ / 협업·화합·소통 속 완벽 임무수행
우리나라는 1991년 9월 유엔 정회원국 가입 이후 1993년 소말리아에서 유엔 평화유지활동(PKO)을 처음 시작했다. 당시 대대급 공병부대인 상록수부대를 소말리아에 파견했고, 현지 유엔임무단 사령부에도 연락장교와 참모장교를 보냈다. 이종봉 소령(당시 계급, 예비역 육군중령)은 우리 군 최초의 PKO 참모장교였다.
1993년 8월 한미연합군사령부에서 근무 중이었던 이 소령은 소말리아 파견을 명받았다. 군은 상록수부대 파병에 이어 유엔임무단 사령부에서 근무할 참모장교를 모집했고, 이 소령은 이에 자원해 치열한 과정을 거쳐 선발됐다.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해 외국어에 능통했고, 이를 바탕으로 연합·합동 임무를 능숙하게 수행하고 있던 점이 선발 요인이었다. 강도 높은 교육이 이어졌고, 준비를 마치자 즉시 현지로 출국했다.
대규모 인원이 전세기를 통해 떠난 상록수부대와 달리 통신병과 단둘이 민간 항공기를 이용해 떠나는 조용한 여정이었다. 직항노선은 고사하고 환승도 만만치 않았다. 총 4개국을 거친 이동에는 일주일에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항공시스템이 지금처럼 편리하게 갖춰지지 않은 때였다. 인도와 에티오피아는 더욱 그랬다. 환승을 위해서는 정확한 시간과 장소가 필요했는데, 공항에는 그 흔한 시계조차 걸려 있지 않아서 현지시각을 파악하는 데 애먹기도 했다. 제대로 된 영어 방송이나 게이트 안내는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제 시각에 출발한다는 보장도 없어 어렵게 환승구를 찾으면 비행기를 놓칠세라 무작정 기다리기를 반복했다. 힘든 여정이 계속될수록 소말리아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진다는 사실은 그나마 위안이었다.
이 소령은 소말리아 수도 모가디슈의 유엔임무단 사령부에서 1993년 8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약 7개월간 근무했다. 상록수부대 1진과 2진의 본대 교대 시기가 1994년 1월경이었으니, 이 소령은 1·2진 모두의 임무 수행 활동을 현장에서 본 셈이다. 소말리아에 공병부대를 파견한 국가는 우리나라 외에 미국, 독일, 이탈리아, 인도, 파키스탄이 있었다. 공병참모부에는 이들 국가에서 온 참모장교들이 있어 함께 임무를 펼쳐냈다. / 국방일보 2021.2 서현우 기자. 사진 제공=이종봉 예비역 중령
평화 재건의 이름으로 - 이종봉 예비역 중령
이종봉 소령(당시 계급·예비역 육군중령)은 소말리아 유엔임무단(UNOSOMⅡ) 공병참모부 소속으로 상록수부대와 미국 공병대대, 독일·이탈리아·인도·파키스탄 공병중대에 대한 참모 활동이 주임무였다. 이들 부대·장병에게 공병 임무를 할당하고 그 수행 과정을 확인하며 평가·보고를 거쳐 임무를 재할당했다. 소말리아를 재건하는 유엔의 노력이 유의미한 성과로 이어지도록 하는 일이었다.
이 때문에 이 소령은 건설 작전이 펼쳐지는 각국 공병부대 임무 현장을 자주 찾아 장병들을 독려하는 일도 빼놓지 않았다. 그중 상록수부대는 가장 모범적인 부대였는데, 빠르고 정확한 것은 물론 성실함과 세심함으로 사소한 작업 하나 허투루 하지 않았다. 유엔임무단 사령부 각국 참모들이 상록수부대의 활약에 놀라워하며 건설기술 전수를 요청했던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소말리아 국민도 상록수부대를 비롯한 각국 공병부대 장병들에게 감사했다. 자신들을 위한 수고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공사가 이뤄지는 현장에서는 적대세력 등으로부터의 위협 상황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지역 주민들은 공병 장병 돕기를 자청하기도 했다.
간혹 일과 후 미군 캠프를 방문해 실내에서 탁구 시합을 벌이거나, 모래밭에서 각국 장병들이 모여 배구 게임을 하는 일이 사소한 즐거움이었다. 아울러 영상 40도 가까운 한낮에 실외 활동은 엄두를 내지 못했고, 야간에도 안전을 이유로 실내에 있는 시간이 많았다.
물론 일과 이후라고 해도 위협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여유를 부릴 수 없었다. 적대세력과 교전이 이어지는 현장이었다. 복지시설이 갖춰지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TV와 인터넷은 물론이거니와 휴대전화도 세상에 없었던 1993년이었다. 열악하고 위험한 상황을 견디고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이 땅에 평화를 심는다는 사명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한국을 대표한다는 자부심은 책임감이 돼 스스로 더욱 힘을 내도록 만들었다. / 국방일보 2021.2 서현우 기자
전우애에는 국적이 없었다-이종봉 예비역 중령의 회고
일과 후 한국군 캠프 종종 방문 / 보급품 넉넉지 않았지만 한식 외교
자국 음식 가져와 함께 나눠 먹기도 / 열악한 환경에도 사명과 의지 빛난 시간
1993년 소말리아는 폭력과 갈등으로 혼란스러운 공간이었지만 유엔의 깃발 아래 뭉친 각국 장병들은 서로를 격려하며 검은 땅의 평화와 재건에 힘을 모았다. 업무에서는 의사소통에 특히 신경 쓰며 협업과 공유를 이뤘고, 일과 후에는 교류를 이어가며 전우애를 다졌다. 피부색과 생김새는 달랐지만, 모두 유엔의 임무를 수행하는 평화유지군이었다.
이종봉 소령(당시 계급, 예비역 육군중령)에게도 낯선 환경은 적응을 어렵게 만들었다. 날씨, 음식, 언어 등 어느 것 하나 만만치 않은 생활이었다. 게다가 처음 사령부에 도착했을 당시 사령부 내 한국인이라고는 연락장교로 먼저 와 있던 김광우 소령이 유일했다. 타국 군 장병들과의 교류는 업무와 생활 모든 면에서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타국 군 장병들은 이 소령과 한국에 큰 관심을 보였다. 독일·이탈리아·인도·파키스탄 등 다양한 국가에서 온 장병들이 이 소령을 찾았다. 특히 한국에서의 근무 경험이 있는 미군이나 아내가 한국인인 장병들은 이 소령을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친구처럼 대했다.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하는 탓에 서로 격려하고 챙기려는 노력은 국적을 가리지 않았다. 타국 군 장병들도 자국의 음식을 가져와 이 소령 등과 함께 나눴다. 또 음식을 즐기면서는 소말리아의 평화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다. 김치와 라면으로 쌓은 전우애였다. 자리는 누추할지언정 그곳에서 모두의 사명과 의지는 밝게 빛났다.
이 소령은 약 7개월의 임기를 마친 뒤 1994년 3월 귀국했다. 무사히 임무를 완수하고 귀국해 가족을 만난 일은 감사했지만, 소말리아 근무 당시 포탄 소음에 쉽게 노출된 이유로 한동안 큰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 국방일보 서현우기자
소말리아 상록수부대의 철수
소말리아 내부 상황 점점 악화 / 미국·독일 등 서방국 속속 철수 / 장병 안전 고려 조기 귀국 결정
소말리아 상록수부대는 1994년 3월 철수를 결정했다. 직전 해 7월 말 파견된 이후 약 8개월 만이었다. 소말리아 내부 상황이 점점 악화하자 미국과 이탈리아를 비롯한 국가에서 먼저 철수를 시작했고, 우리 역시 상록수부대 장병들의 귀국을 결정했다. 소말리아 국민의 안타까운 상황 앞에 쉽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우리 장병들의 안전이 무엇보다 먼저였다.
부대의 철수 배경은 1993년 10월에 벌어진 소말리아 적대세력과 미군의 교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미군 특수부대는 적대세력의 무장해제 작전을 수행하며 시가전을 벌였는데, 게릴라 공격을 받아 1개 중대 규모의 사상자를 냈다. 게다가 미군 헬리콥터 블랙호크가 박격포 공격에 추락하기까지 했다. 미국 정부는 국민과 국회로부터 강한 철수 압박을 받았고, 당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이듬해 초 소말리아에서 미군을 완전히 철수하기로 했다.
당시 현장에서 미군 헬기 추락 상황을 지켜본 김광우 당시 소말리아 유엔임무단 연락장교는 “멀지 않은 거리에서 헬기가 날아다니고 소총과 박격포 사격이 이뤄졌는데, 그날의 포격 소리는 평소와 달리 무슨 일이 날 것처럼 심상치 않았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소말리아에서 각국 군이 철수하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1994년 초 미국의 뒤를 이어 독일, 노르웨이, 이탈리아, 터키 등 서방국가들이 연속적으로 철수를 결정하자 소말리아 평화유지활동(PKO)의 국제적 이해·공조가 점점 줄어들었다. 아울러 유엔 평화유지군의 병력 구성이 아프리카와 이슬람국가 중심으로 조정되면서 작전의 완성도 역시 저하됐다. 우리 군은 이 같은 급격한 환경 변화에 따라 긴급하게 현지 정세를 파악·판단했고 같은 해 3월 말 조기 철수를 최종적으로 결정했다.
다만 상록수부대가 철수해도 소말리아 유엔임무단(UNOSOMⅡ) 사령부에서 근무 중인 우리 군 참모장교는 그대로 남아 업무를 지속할 계획이었다. 당시 유엔임무단 사령부에서 인사과장으로 활동했던 장삼열 예비역 대령은 이에 대해 우리 군의 안전과 전략을 추구한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 국방일보 2021.3 서현우 기자
소말리아 상록수부대 귀국과 성과
현지인 신뢰 받으며 성공적 임무 완수 / 타국군과 끈끈한 유대 형성·적극 협업
첫 PKO 파병부대 완벽하게 실전 경험 / 다양한 軍 국제평화활동 든든한 기초
상록수부대는 우리 군 최초의 유엔 평화유지활동(PKO)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1994년 3월 18일 서울공항에 도착했다. 부대원들은 국군 최초의 유엔 PKO 파병부대라는 자부심으로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며 일치단결해 주어진 임무를 완벽히 수행했고, 우리나라의 국제평화 기여 이미지를 고양하며 국위를 선양했다.
상록수부대 장병들의 환영 행사는 귀국 당일 국방부 장관 주관으로 열렸다. 행사에는 장병 가족뿐만 아니라 각 군 참모총장과 민·관·군 관계자들이 대거 참석해 장병들을 격려했다. 이튿날에는 1, 2진 대대장을 포함한 35명의 장병 대표가 청와대를 찾아 김영삼 당시 대통령과 오찬을 가졌다. 김 대통령은 상록수부대 장병들을 격려하며 파견 중의 소감을 물었다.
“상록수부대의 노고를 치하합니다. 그동안 아프리카에서 고생 많았습니다. 유엔군의 일원으로 훌륭하게 평화유지활동을 수행해 국위를 선양했습니다. (중략) 여러분의 평화유지활동에 대한 소감을 듣고 싶습니다. 먼저 1진 대대장 장정훈 중령!”
“대통령님, 저희 상록수부대원에게 성원을 보내주시어 감사드립니다. 저희가 소말리아에서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한 것은 저희의 노력이라기보다는 국민 모두의 성원과 무사 귀환을 바라는 염려 덕분이었습니다. 소말리아 유엔임무단 사령부로부터 임무를 부여받고 소말리아 주민들의 신뢰를 쌓는 데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자리에 참석한 장병들의 소감이 이어졌다. 장병들은 적대세력의 위협과 환경적 어려움을 이겨내고 이뤄낸 성과를 이야기했다. 또 소말리아 주민들과 신뢰를 쌓고 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줬던 기억들을 회상했다. 이에 대통령은 다시 한 번 장병들의 헌신에 감사를 전하며 앞으로 주어질 어떤 임무에도 그 뜻을 품고 계속해주기를 당부했다.
“소말리아에서 여러분들이 보여준 노력으로 현지인들이 다른 나라는 모두 철수하더라도 한국 공병부대는 남아서 계속 소말리아 재건을 도와달라고 했다는 말을 듣고 여러분들이 자랑스러웠습니다.”
이 같은 상록수부대 장병들의 청와대 오찬 중 대담 내용은 당시 합동참모본부 보고서를 통해 기록됐다. 상록수부대원들은 이후 4월 14일 해단식을 갖고 한국군 최초의 유엔 PKO를 종료했다.
상록수부대 파병을 통해 얻은 두드러진 성과는 소말리아 유엔 임무 참여국 중 가장 모범적인 국가로 인정받으며 우리나라의 국제평화 기여 이미지를 높였다는 점이다. 주 보급로인 작전도로 건설을 통해 유엔군의 보급 문제를 해결하고 주민들의 교통여건을 크게 개선했다. 지역 주민들의 숙원이었던 관개수로를 정비해 농경지 경작이 가능토록 하면서 그들의 자립과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도움을 줬다.
또 경찰서와 급수시설 같은 필수 시설을 보수·재건하고 의료·방역 지원을 계속했으며, 사랑의 학교와 기술 학교를 운영해 젊은이들의 꿈을 지켰다. 부대 철수 시에는 장비·물자 처리 지침을 세워 약 60만 달러 상당의 장비·물자 일부를 현지 유엔임무단 사령부와 지역사회에 기증했다. 무엇보다 소말리아 국민의 신뢰를 얻으며 실질적 도움을 줬던 상록수부대 장병들의 땀방울은 척박한 땅에 희망의 싹을 틔우는 소중한 자양분이었다.
당시 상록수부대장으로 우리 군의 첫 유엔 PKO 부대를 지휘한 장정훈 예비역 대령은 소말리아 주민들을 이해하고 진심으로 도움을 제공하려고 노력했던 그때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전 부대원이 유엔군의 일원으로서 인류애를 갖고 분쟁으로 상처 난 소말리아인들의 마음을 진정으로 위로하고자 했습니다. 주민들의 문화와 관습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먼저 다가가려 했던 점, 유엔군과 적극적으로 협업하며 끈끈한 유대를 형성했던 점 등이 성공적인 파병의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함께 우리 군의 첫 PKO 활동을 완벽히 마친 실전 경험은 이후 군의 다양한 국제평화 활동에도 도움을 줬다. 또 다국적 외국군과의 활발한 교류를 이어가며 연합작전을 수행한 점 역시 우리 군의 작전 수행능력을 한 단계 높이는 계기가 됐다.
상록수부대 운영과장으로 임무를 했던 정장수 예비역 대령 역시 이를 최대 성과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다.
“최초의 유엔 PKO로서 열악한 근무 여건 가운데서도 한 건의 안전사고나 불미스러운 사고 없이 성공적으로 임무를 마무리하며 우리의 PKO 활동 참여의 든든한 기초가 됐습니다. 당시 현지에 대한 사전 정보가 미흡했음에도 우리 군과 부대원들이 한마음 되어 최선을 다했기에 오늘의 한국 PKO로 발전하는 기틀을 마련했다고 생각합니다.”
/ 국방일보 2021.3 서현우 기자/사진 제공=정장수 예비역 대령
개인 임무자 파견… 유엔 소말리아임무단 장삼열 중령
적대 세력 공격에 안전 보장 힘든 상황 / 우리 군, 파견 중단 고려하며 고민
파견 늦게 결정돼 2주 만에 급히 출국 / 1994년 8월 사령부 인사과장 배치
불편하고…
엄지만 한 바퀴벌레와 도마뱀 출몰 / 좀도둑 많아 현금·물건 도난 잦아 / 사라진 카메라 중고시장서 되찾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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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복조와 교전 직전 긴박한 순간 / 코브라 무장헬기 투입 공격 피해가
1993년 소말리아에는 상록수부대가 아닌 유엔 소말리아임무단(UNOSOM-Ⅱ) 소속으로 파견된 우리 군 간부도 있었다. 1993년 8월부터 1995년 2월까지 연인원 15명의 장교·부사관이 개인 임무를 부여받아 현지에 파견됐는데, 이들은 유엔임무단사령부의 주축으로 인사·작전·정보·공병 분야 참모 역할을 했다.
당시 소말리아에서 유엔의 활동은 세 개의 기간으로 나뉜다. 1992년 4월 유엔 안보리 결의에 따라 처음 창설한 ‘UNOSOM-Ⅰ’이 첫 번째였고, 이어 내전 상황이 더욱 악화하자 이를 강제 중지시키기 위해 1992년 12월 미 해병대 중심의 다국적군을 투입한 ‘UNITAF’가 두 번째였다. 이후 소말리아 정국이 안정을 찾아가자 인도적 지원, 치안 유지, 재건작업을 주 임무로 1993년 3월 만들어진 UNOSOM-Ⅱ가 세 번째로서, 우리 군이 처음으로 유엔 평화유지활동(PKO)에 참여했던 때가 바로 이 시기였다.
UNOSOM-Ⅱ는 유엔 사무총장의 지휘·통제 아래 특사를 두고 예하에 군사부와 정치부를 뒀다. 또 군사부에는 인사·정보·작전·군수·민사·통신·공병 등 7개 참모부로 조직된 사령부와 이탈리아·인도·파키스탄·이집트의 4개 기계화보병여단, 미국 6개 보병대대, 한국 1개 공병대대 등으로 구성된 단위부대가 편성됐다. 대대급의 상록수부대는 단위부대의 한 축이었고, 개인 파견자들은 사령부 참모부에서 근무했다.
장삼열 중령(당시 계급)은 UNOSOM-Ⅱ 사령부 인사과장 겸 한국군 선임 장교로 1994년 8월 현지에 배치됐다. 상록수부대와 함께 앞서 1진으로 투입된 참모 요원들의 뒤를 이었으며, 정보·작전·공병 참모부에 걸쳐 표적획득장교, 작전상황장교, 전투공병계획장교, 자료관리담당관, 제도담당관과 함께 파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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