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티모르 상록수부대 창설
동티모르 상록수부대는 1999년 9월 29일 창설해 같은 해 10월부터 2003년 10월까지 약 4년간 당시 국제분쟁지역이었던 동티모르에서 활약했다. 1991년 우리나라가 유엔 회원국이 된 이후 최초의 전투부대 파병이었다. 1999년 10월 파견 시에는 오스트레일리아(호주)가 주도하는 다국적군의 일원이었고, 이듬해 2000년 2월 유엔 평화유지군으로 전환돼 지역안정과 치안 유지 등 평화유지활동(PKO)을 계속 수행했다.
△ 1999년 9월 29일 동티모르 상록수부대가 창설식을 하고 있다. 부대는 10월 4일과 9일 두 차례로 나눠 현지로 출국했다. 국방일보 DB
인도네시아와 티모르섬 일대는 과거 유럽 열강의 식민지였다. 처음에는 포르투갈이 지배했고, 이후에는 네덜란드가 세력 다툼에서 승리하며 인도네시아와 티모르섬 서쪽을 차지했다. 포르투갈은 티모르섬 동쪽으로 밀렸다. 1949년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하면서 서티모르는 자연스럽게 인도네시아 차지가 됐다. 포르투갈이 계속 지배하고 있던 동티모르에서도 독립 요구가 계속됐으며 1970년대 들어 더욱 거세졌다. 포르투갈은 1975년 동티모르의 요구를 받아들여 주민선거에 의한 과도정부를 출범시켰다. 그해 12월에는 동티모르민주공화국이 수립됐다. 하지만 정부 수립 열흘여 만에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를 무력 점령하며 분쟁이 시작됐다.
우리나라는 1999년 9월 7일 유엔으로부터 다국적군 참가에 대한 문의를 받았다. 인도네시아가 유엔의 제안을 수용하기 전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유엔의 질의에 신중한 입장이었다. 유엔의 파병 요청은 전투부대를 의미해 위험이 뒤따르고, 경제적으로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인도네시아와 관계가 악화될 우려도 있었다. 또 인도네시아에 거주하는 재외국민 2만여 명의 안전도 고려해야 했다.
상황은 9월 12일 인도네시아가 유엔의 제안을 수용한다고 발표하면서 바뀌었다. 우리 정부는 6·25전쟁 시 유엔의 도움을 기억해 유엔 회원국으로서 국제적 사명과 의무를 다하는 것임을 명분으로 세웠다. 또 인도네시아 정부 요청에 의한 평화 중재자의 임무를 수행하며, 전투부대를 보내는 것이 오히려 안전하다고 판단했다.
정부가 동티모르 파병을 잠정 결정한 직후 군은 신속하게 파병 준비에 매진했다. 9월 17일 부대 편성안을 마련해 본부, 지원대, 3개 지역대 등 419명으로 편제를 결정했다. 같은 달 28일까지는 기초교육훈련을 마무리했고, 이튿날 창설식을 진행했다. 부대명은 동티모르 상록수부대로 정했다. 임무는 동티모르의 평화와 안전을 회복하고 안전한 환경을 구축하는 일이었다. 유엔 동티모르파견단의 임무 수행을 지원·보호하는 것과 난민 호송 등 인도적 구호 활동도 포함됐다.
상록수부대 본대는 10월 4일과 9일 두 번에 나눠 출국했다. 그보다 앞서 9월 30일에는 선발대가 먼저 현지로 떠났다. 목적지는 호주 타운스빌 공군기지였다. 다국적군을 주도하는 호주의 제안에 따라 약 2주간 현지 적응훈련을 했다. 동티모르에 대한 많은 정보를 가까이에서 확보하고, 신속한 파병으로 미비한 부분을 보완하는 시간이었다. 이후 10월 16일 선발대가 먼저 부대 임무 지역인 동티모르 로스팔로스에 전개했다. 22일에는 본대가 이동을 완료했다. 동티모르 상록수부대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 국방일보 서현우 기자
선발대의 사명 - 소영민 육군 중장 (1999년 동티모르 상록수부대 당시 1진 선발대장)
1999년 9월 15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인도네시아와 분쟁을 겪는 동티모르에 대한 국제 평화유지군 파병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인도네시아가 유엔의 파병 방침을 수용한 지 사흘만이었다. 16일에는 유엔이 우리 정부에 파병을 요청하는 공식 서한을 보냈다. 우리 정부는 유엔 회원국으로서 국제사회의 책무를 다하고, 나아가 평화의 중재자로서 국제평화협력을 이어가는 노력으로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같은 달 28일 파병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고, 29일 부대 창설식이 진행됐다. 창설식 이튿날에는 소영민 소령(당시 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선발대가 급히 현지로 출발했다.
동티모르 상록수부대는 파병 결정에서 출국까지 한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동티모르 현지 상황이 긴박했던 만큼 유엔은 부대의 빠른 전개를 요청했고, 우리 정부 역시 사안의 중대함을 고려해 신속하게 준비를 이어갔기 때문이다. 그 과정은 녹록하지 않았다. 이제까지와는 성격부터 다른 전투부대 파병이었고 밀림·정글·산악지역이 혼재한 낯선 기후·지형 지역으로의 파병이었는데, 준비 기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앞선 소말리아·앙골라·서부사하라에 대한 파병은 아프리카에서 공병·의무 병과를 주축으로 하는 지원부대였다.
국내에서는 기본소양교육, 병 공통훈련, 주특기교육, 전술훈련 등을 했다. 특히 전술훈련에서는 수십여 개의 상황 조치 모델을 작성해 집중적으로 숙달했다. 현지 적응훈련은 호주군 교육단 프로그램을 반영했고 자체 적응훈련을 추가 편성해 부대원들의 역량을 높였다.
선발대 출발은 1999년 9월 30일이었다. 56명의 선발대원은 C-130 수송기를 타고 호주 북동부 타운스빌 공군기지로 향할 것이었다. 부대에서 공항으로 이동하는 버스 안은 대원들의 비장함으로 가득했다. 자신감, 자부심, 두려움, 긴장감. 적막한 공간에 대원들의 수많은 감정만이 차곡차곡 채워졌다.
선발대는 호주 타운스빌 공군기지에서 약 2주간 적응훈련을 진행한 뒤 10월 16일 동티모르 로스팔로스 주둔지에 도착했다. 당시 소 소령은 상록수부대가 한국에서 호주로 떠날 때와 다시 호주를 출발해 동티모르에 이동할 때 두 번 모두 선발대였다. 숙영시설 준비와 현지 기관과의 업무협조 등을 모두 담당했다. 주둔지는 인도네시아군이 부대로 사용하다가 떠나면서 방치된 곳으로 했다. 주변 일대가 모두 파괴된 상태였다. 선발대는 24인용 텐트 24동을 비롯해 각종 시설을 신속하게 설치했다. 본대가 도착하면 즉각 임무를 수행할 것이었다. / 국방일보 서현우 기자
국가가 우리를 불렀다 - 소영민 육군중장 (1999년 동티모르 상록수부대 당시 1진 선발대장)
상록수부대의 첫 주둔지가 있던 동티모르 동부 지역에는 지역 주민들과 대립하는 1000여 명의 무장 민병대가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유엔 다국적군 전개 소식에 대부분 도주하거나 은밀한 곳으로 숨어들었다. 상록수부대 선발대는 1999년 10월 16일 전개 직후 제한된 치안 유지 작전에 나서 지역 주민이 억류하고 있던 50여 명의 민병대를 석방해 귀향 조치했다. 지역 주민과 민병대의 화해를 이끌기 위한 목적이었다. 본대가 주둔지에 도착한 22일까지 약 일주일 동안 선발대는 빠른 현지 적응을 위한 작전에 집중했다.
동티모르 상록수부대가 1999년 10월 당시 주둔했던 로스팔로스는 동티모르 동부 지역 라우템(Lautem)의 중심도시다. 도시를 중심으로 외곽을 연결하는 도로들이 나 있었고 대형 항구와 공항이 인접했다. 반면 다국적군 사령부가 있는 수도 딜리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어 우리 군의 독립작전이 가능했다. 아울러 지역 내 무장 민병대 등 적대세력이 비교적 미약해 교전이 벌어지는 다른 지역보다 안정도가 높았다.
△ 동티모르 상록수부대 1진 파병 당시 소영민(오른쪽) 중장(당시 소령)이 동티모르 독립운동을 이끈 사나나 구스마오(Xanana Gusmao)와 악수하고 있다. 구스마오는 이후 선거를 거쳐 동티모르 초대 대통령이 됐다. 사진 제공=소영민 중장
상록수부대 선발대가 전개한 이후 민병대와 주민 간 직접적인 교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민병대와 상록수부대의 충돌도 다행히 발생하지 않았다. 다국적군의 동티모르 도착 소식에 민병대는 대부분 티모르섬 서쪽 인도네시아 영토로 이동했고, 남아 있는 세력도 빠르게 도주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위협이 없지는 않았다. 안정화 작전에는 늘 위험이 존재했다. 불발탄과 부비트랩을 제거하는 현장에는 긴장감이 가득했고, 정글·밀림과 건기·우기의 지역적·기후적 특성은 작전 수행을 어렵게 했다.
상록수부대는 전개 초기 작전지역 분석을 토대로 치안 유지 작전개념을 구체화했다. 작전 활동의 효율성을 높이는 전략이었다. 순찰, 검문, 경계 등 작전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무장 세력 간 접촉을 차단·분리하고, 살인·방화·약탈 등 범죄 행위를 저지했다. 또 난민 호송과 특정 인원·지역 보호 임무를 수행했다. 동티모르에 조금씩 평화가 찾아오고 있었다. 상록수부대의 우수한 작전 활동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들의 마음을 얻는 노력 역시 빠르게 지역의 안정과 평화를 이루는 데 보탬이 됐다.
본대 전개 완료 - 최광국 예비역 원사(동티모르 상록수부대 1진 통신운영관)
동티모르 상록수부대는 현지 전개에 앞서 호주 북동부 타운스빌에서 약 2주간 현지 적응훈련을 하며 다국적군사령부와 부대 운영에 관한 구체적인 협조를 이어갔다. 동티모르 다국적군 활동을 주도하는 호주의 요청을 반영했던 것. 동티모르에 파견되는 각국 병력을 단계적·체계적으로 작전지역에 투입해 발생 가능한 혼란을 사전 방지하고, 이들의 협조·운영체계를 효과적으로 유지하려는 조치였다.
최광국 예비역 원사(당시 상사)는 동티모르 상록수부대 1진 통신운영관이었다. 선발대원으로서 부대 전개의 선두에 섰으며, 현지에서는 부여된 통신 임무뿐만 아니라 부대 지원업무 전반에 걸쳐 다양한 역할을 했다. 최 예비역 원사가 1999년 10월 1일 당시 호주 타운스빌에 도착해 제일 먼저 한 일은 통신장비 개통·점검이었다.
최 예비역 원사를 비롯한 1진 부대원들은 호주군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으며 현지 적응훈련과 동티모르 작전 활동에 관한 구체적인 계획을 계속해서 점검·확인했다. 특히 동티모르 문화·정세와 현지언어 같은 기본소양을 포함해 교전규칙, 다국적군 접촉 시 행동요령, 도심지역 수색, 매복전투와 같은 전술훈련은 큰 도움이 됐다. 또 호주군과 함께 훈련하면서 그들의 장단점을 파악해 선취 습득하기도 했다.
약 2주간의 현지 적응훈련을 마친 상록수부대는 선발대와 본대로 나눠 임무 지역인 동티모르 동부 라우템 지방으로 전개했다. 라우템 전체를 책임 구역으로 하고, 라우템 중심도시인 로스팔로스에 부대 본부를 두기로 했다. 선발대는 10월 16일, 본대보다 약 일주일 앞서 다국적군 수송기를 타고 라우템 인접 공항으로 이동했고 다시 헬기를 통해 로스팔로스 시가지 외곽 주둔지 부지에 도착했다. 또 일부는 물자·장비를 실은 선박이 입항하는 항구로 전개했다.
주둔지는 과거 인도네시아군 대대가 주둔했던 터였다. 하지만 인도네시아군이 철수하면서 시설 대부분을 파괴해 사용이 불가능했다. 최 예비역 원사와 선발대원들은 주둔지에 천막을 설치해 숙영을 준비했다. 또 연병장에 본대 인원을 수용할 24인용 천막도 20동 설치했다. 아울러 로스팔로스 시내에 주둔 중이던 영국군 소대로부터 책임 지역을 인수하는 동시에 주민들에게는 한국군 주둔 사실을 알리며 협조를 요청했다. 본대가 도착하는 즉시 본격적인 임무 개시가 가능하도록 준비를 이었다.
국가가 있어야 나도 있다 - 최광국 예비역 원사(동티모르 상록수부대 1진 통신운영관)
유엔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는 동티모르 치안 상태가 악화하자 1999년 9월 인도네시아의 동의를 거쳐 다국적군 파병을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다국적군 파병은 동티모르 사태의 심각성을 고려해 병력을 신속하게 현지로 전개하려는 방안이었다. 이후 우리나라를 비롯한 다국적군의 작전이 성공적으로 이어지며 치안이 빠르게 회복하자 유엔안보리는 다국적군을 평화유지군으로 전환해 안정적인 평화유지활동(PKO)을 이어가도록 했다.
동티모르에 파병된 다국적 부대들은 순차적·단계적으로 유엔평화유지군으로 전환됐다. 가장 먼저 전환된 부대는 우리나라 상록수부대였다. 상록수부대는 1999년 10월 로스팔로스를 중심으로 하는 동티모르 동부지역에 파병된 이후 신속하게 현지 치안을 안정시켰다. 지역 상황을 빠르고 정확하게 파악·분석한 전략, 지속적이고 강도 높은 수색·정찰 활동, 적극적인 갈등·분쟁 해결 노력이 바탕이 됐다. 또 지역 주민의 신뢰를 얻으며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했던 점도 주효했다.
△ 1999년 10월 동티모르 상록수부대 1진 장병들과 지역 어린이들. 부대는 완벽한 작전 수행과 진정성 있는 신뢰 구축 노력으로 빠르게 현지 치안을 회복시켰다. 국방일보 DB
상록수부대 1진 통신운영관으로 당시 임무를 수행한 최광국 예비역 원사(당시 상사)는 파병 초기 부대원들과 함께 지역 안정화 작전에 집중했다. 악화한 갈등·분쟁 상황을 신속하게 진정시켜야 사태가 장기화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 점진적 평화를 위한 발판을 마련하는 데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초기 작전이 중요한 이유이기도 했다.
상록수부대는 다국적군사령부의 지시와 국방부 지침에 따라 작전을 수행해나갔다. 작전은 크게 세 개로 구분됐다. 지역 주민과의 우호적 관계 구축이 첫 번째였고, 책임 지역 안정 유지와 자위권 행사가 두 번째와 세 번째였다. 이를 위해 상록수부대는 먼저 지역 내 주요 거점 및 활동 범위를 통제하고 강도 높은 순찰·검문·경계를 수행했다. 그러면서 지역사회와 신뢰 관계를 구축하고자 주민들에게 먼저 다가가며 의료·식량 지원을 이어갔다. 아울러 지역 민병대와 주민들을 개별 설득해 충돌 방지를 이루며 양측이 점차 대립각을 순화하도록 했다.
상록수부대는 단본부와 지원대, 3개 특전지역대로 구성됐다. 단본부와 지원대는 작전 구역인 라우템 지방의 중심 도시 로스팔로스 외곽에 주둔했다. 또 3개 특전지역대는 라우템 지방을 중심부인 로스팔로스와 외곽 4개 지역 등 다섯 권역으로 나눠 분산 배치했다. 단본부 경계와 로스팔로스 전담에 각각 1개 지역대를 투입하고, 나머지 1개 지역대는 외곽부 4개 지역을 관할하도록 했다. 또 3주 단위로 각 지역대 임무를 교대했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최광국 예비역 원사(동티모르 상록수부대 1진 통신운영관)
동티모르 상록수부대에 주어진 최우선 임무는 분쟁·충돌로 무너진 치안 질서의 빠른 안정과 회복이었다. 이를 위해 상록수부대는 강한 전투력과 임무 수행능력을 바탕으로 완벽한 작전을 해나갔다. 동시에 지역주민에게 실질적 도움을 주는 다양한 대민지원을 아낌없이 펼쳐냈다. 주민들의 심리적 동요를 막고 적대행위를 방지해 평화를 이루려는 방편이었다. 또 주민들과의 신뢰 구축과 우호 형성으로 부대원들이 안전하게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처음 상록수부대 1진이 동티모르에 도착했을 당시에는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 예측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적대 세력의 위협이 곳곳에 있었고, 주민들 역시 부대원들을 환영하면서도 한편으로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이 때문에 부대 파병 초기에는 치안을 회복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상록수부대 1진이 작전을 3단계로 구분해 처음 1개월은 구체적인 책임 지역 분석과 빠른 치안 회복에 집중하고, 이후 2개월은 잠재적 위협요소 제거에 임무의 중점을 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리하여 부대 전개 3개월이 지난 시점인 2000년 2월 1일 평화유지군 체제로 전환하면서부터는 본격적인 민사작전·활동을 수행해 나갔다. 상록수부대 1진 통신운영관으로 당시 현장에 있었던 최광국 예비역 원사(당시 상사)는 파병 초기 치안 유지에 집중하면서 지역주민들과의 교감을 통해 공감대를 만들었던 점을 기억하고 있다.
1진은 평화유지활동(PKO) 체제로 전환된 이후 난민 복귀 지원과 의료·방역 지원을 중심으로 빠르게 안정된 치안에 힘을 보태는 노력을 펼쳤다. 2진은 유엔기구 및 비정부단체와의 협조 체제를 강화하며 구호품 분배와 구난·구조 활동 등을 했다. 또 3진은 사회 기간시설 복구 활동을 이어갔으며, 4진은 체육행사, 영화 상영, 오지 마을 지원 등 주민과 함께하는 각종 행사를 통해 주민 친화 활동을 펼쳤다.
이후 5진부터 8진까지도 인도주의적 구호 활동과 지역주민 친화 활동을 이어가며 그들을 돕는 동시에 상록수부대와 대한민국의 우호적인 분위기를 이끌었다. 특히 지역 청소년을 대상으로 태권도를 교육해 상처 난 몸과 마음의 수양을 돕고, 농법교육과 경작지 조성 등으로 주민들의 자립·자조에 힘을 보탰다.
유엔군사령부 창설에 참여하다 -임종권 예비역 대령 (동티모르 유엔평화유지군사령부 정책보좌관)
1999년 10월 상록수부대를 비롯한 각국 병력이 동티모르에 전개한 이후 현지 분쟁 상황은 빠르게 안정을 찾아갔다. 이에 유엔은 이들 병력의 파견 형태를 다국적군에서 평화유지군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하고 이듬해 2월 동티모르 유엔군사령부를 창설했다. 안정돼가는 치안을 더욱 확고히 해 지역의 평화를 회복하려는 단계적 조치였다.
동티모르 유엔군사령부 창설일은 2000년 2월 28일이었다. 유엔은 사령부 창설에 앞서 그달 초부터 동티모르 각지에서 활동하는 각국 병력을 순차적으로 평화유지군으로 전환했다. 지역별 치안 유지·안정 상태를 고려해 전환 시기에는 다소간 차이를 뒀다. 상록수부대는 책임 지역이었던 동부 라우템 일대가 신속하게 안정을 되찾아 가자, 2월 1일부로 다국적군 부대 중 가장 빨리 평화유지군으로 전환했다.
△ 동티모르 상록수부대 주둔지 모습. 직전 주둔 부대가 사용한 건물은 모두 파괴됐으며, 그나마 사용 가능한 6개 동은 참모부와 식당 등으로 활용했다. 국방일보 DB
임종권 예비역 대령(당시 소령)은 동티모르 유엔군사령부 창설 작업을 위해 1999년 12월 동티모르에 파견됐다. 당시 야전에서 임무 수행 중이던 그는 캐나다 피어슨 평화유지센터(PPC)와 한미연합사령부 등에서 근무하며 평화유지활동(PKO)의 정책적 발전에 관한 연구를 진행한 바 있었다. 동티모르 유엔군사령부 창설에 우리 군 파견 인원이 필요함에 따라 급히 차출 명령을 받았다.
사령부 본부는 동티모르 수도 딜리에 뒀으며, 우리나라를 비롯해 호주, 태국, 포르투갈, 요르단, 뉴질랜드, 필리핀 등 24개국이 참여했다. 또 사령관과 참모장을 중심으로 본부에는 작전·지원 임무를 수행하는 참모부를 두고, 중부·동부·서부 등 각 지역에는 지역사령부를 예하 부대로 뒀다. 아울러 항공지원단, 공병단, 군수지원단은 사령부 직할부대로 편성했다. / 국방일보 서현우 기자
한국군은 유능함과 성실함의 대명사 - 임종권 예비역 대령 (동티모르 유엔평화유지군사령부 정책보좌관)
동티모르 유엔평화유지군사령부는 작전의 중점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눴다. 하나는 동티모르 서부 인도네시아와의 국경선에 걸쳐 주민과 민병대 등의 충돌을 방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동티모르 내 잔류하는 독립반대파 등 위협 세력으로부터 치안과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임종권 예비역 대령(당시 소령)은 동티모르 유엔군사령부 정책보좌관으로 1999년 12월부터 2001년 2월까지 임무 수행했다. 이 기간 임 예비역 대령은 유엔군사령부 창설에 직접 참여해 유엔의 평화유지 정책적 접근을 토대로 사령부 운영 개념·방향을 정립하는 데 기여했다. 또 사령부 창설 이후 동티모르에 전개한 각국 평화유지활동(PKO) 병력이 안정적인 작전 활동을 하는 데 역할을 했다.
유엔군사령부에서 임 예비역 대령을 비롯한 우리 군 참모장교들은 열정적인 임무 수행으로 타국 군 장병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중요한 과제 앞에 밤을 지새우는 일은 다반사였으며, 타국 군을 존중해 그들과 함께 동티모르의 평화를 이루고자 힘썼다. 또 모든 일에 앞장서서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실제 행동으로 뒷받침했다. 그들에게 한국군은 성실함과 유능함을 가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모범적 존재였다. / 국방일보 서현우 기자
동티모르 방위군의 창설 - 임종권 예비역 대령 (동티모르 유엔평화유지군사령부 정책보좌관)
동티모르 유엔평화유지군사령부는 2000년 2월 창설 이후 치안 유지와 평화 회복을 위한 임무에 집중했다. 앞서 다국적군 부대들이 동티모르에 신속하게 전개해 작전을 펼치면서 대규모 무력 충돌·갈등은 사라진 상태였다. 여전히 곳곳에서 각국 유엔군 부대와 무장세력 간 산발적인 충돌은 계속됐지만, 동티모르 정국은 빠르게 안정을 찾아갔다. 사태의 당사자 격인 인도네시아가 유엔의 신뢰를 회복하고, 동티모르와의 관계를 정상화했던 점도 영향을 미쳤다.
△ 1999년 11월 동티모르 상록수부대 장병들이 책임 지역 일대에서 수색·정찰을 하고 있다. 상록수부대는 완벽한 작전수행과 세심한 민사활동으로 주민들로부터 큰 신뢰를 받았다. 국방일보 DB
동티모르에서 유엔평화유지군 활동이 효율적으로 이어지며 1년 새 현지 상황이 빠르게 안정되어가자 유엔은 평화유지군 감축 계획을 본격적으로 검토했다. 총 3단계에 걸친 계획이었는데, 동티모르 정부 수립과 함께 2002년 5월까지 평화유지군 병력의 약 30%를 감축해 5000여 명 규모로 유지하는 것이 1단계였다. 또 2단계는 2002년 말까지 이를 다시 절반 수준으로 줄이고, 3단계에서는 2003년까지 다시 한 번 감축한 뒤 최종적으로 2005년까지 모든 임무를 동티모르 방위군에 인계하는 것이었다.
동티모르 방위군은 2001년 2월 1일 창설했다. 창설 당시 인원은 약 600명 규모였다. 방위군을 창설하고 나서는 실전 배치에 앞서 교육·훈련을 이었다. 이후 1년여가 지났을 무렵에는 4개 보병대대와 1개 독립중대를 비롯해 군수지원대대, 통신부대, 방위군훈련소 등의 초기 편제를 완성했다. 또 포르투갈로부터 해안 순시선을 인수해 50명 규모의 해군도 창설했다.
상록수부대의 민사활동
민사활동은 현지 주민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민사활동의 목적이 단지 주민들에 대한 지원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주민들의 심리적 동요와 적대행위를 방지해 치안을 회복·유지했고, 주민들과의 신뢰 관계를 형성해 부대원들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었다. 또 지속적인 우호 증진의 역할을 하며 상록수부대와 대한민국의 이미지를 높이는 효과를 만들었다.
1999년 10월부터 2003년 10월까지 총 8진에 걸친 동티모르 상록수부대에서 민사활동은 진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진행됐다. 진마다 활동 시기와 작전 구역이 달랐고, 치안 상태와 현지 환경도 상이했다. 초기 1진이 치안 유지·회복을 위한 난민복귀·의료지원·방역지원 등의 활동을 주로 전개했다면, 2진은 유엔행정기구 및 비정부기구와 협조체계 강화를 통한 구난구조 활동에 중점을 뒀다. 또 3진·4진은 사회 기간시설 복구 활동을 펼쳤고, 5진부터는 주둔 지역을 옮겨 더욱 체계적·종합적으로 민사활동을 확장했다.
상록수부대 파병 초기 민사활동은 치안 질서·유지를 위한 군사작전 지원에 가장 큰 목적이 있었다. 이를 위해 상록수부대는 지역 내에서 활동하는 국제기구 관계자 및 주민들의 사소한 의견 하나도 경청했다. 이를 작전 활동에 적극 반영해 유기적인 협조체계를 이루며 지역사회의 신뢰를 구축해 나갔다. 이 시기 부대의 책임 지역으로 귀환하는 난민의 복귀를 도와 정착 마을까지 안전하게 수송하는 데에도 힘썼다. 또 이들 중 위협 세력을 색출·관리하고, 지속적인 계도 교육을 병행해 원주민과의 화합을 유도했다.
상록수부대 2진과 4진이 각각 활동했던 2000년 5월과 2001년 6월에는 동티모르에 대홍수가 일어나 도로가 유실되고 지반이 침하하며 다수의 이재민이 발생하기도 했다. 엄청난 피해에 동티모르 유엔군사령부에서도 구체적인 대책을 세우지 못할 때 상록수부대는 먼저 고립주민 구출과 이재민 수용에 앞장섰다. 또 빠르게 피해 상황을 확인해 지원계획을 수립하고, 교량·도로 등 보급로를 단기간에 복구하며 빠른 수습을 이끌었다. 이후에도 자연재해와 사건·사고를 대비해 상시출동태세를 유지했다.
작전명령 08-01호, 오에쿠시 지역책임을 인수하라 - 남인우 예비역 대령 (동티모르 상록수부대 5진 단장)
상록수부대는 1999년 10월 동티모르 동부 라우템 지역에 배치돼 성공적으로 작전을 수행한 뒤 2002년 1월 작전지역을 태국군에 인계했다. 이후 서티모르 고립지역인 오에쿠시-암베노(Oecussi-Ambeno) 지역으로 이동해 2003년 10월 철수할 때까지 작전을 계속했다. 남인우 예비역 대령(당시 대령)은 동티모르 상록수부대 5진 단장으로 당시 부대 이동·임무전환 작전을 지휘·완수했다.
상록수부대가 지역을 이동하게 된 배경에는 유엔의 동티모르 평화유지군 감축 정책이 있었다. 유엔 평화유지활동(PKO) 이후 동티모르 치안이 빠르게 안정되자 유엔은 2001년부터 병력 감축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유엔의 예산 지출을 줄이면서 동시에 궁극적 목표인 동티모르 자치를 단계적으로 이루기 위함이었다. 병력을 감축한다면 치안 상황이 가장 좋은 동부 라우템 지역부터 줄여나가는 것이 좋다는 게 유엔군사령부 대다수 참모장교의 의견이었다. 유엔 역시 이에 동의해 라우템 지역 치안을 책임지고 있던 상록수부대의 철수를 먼저 논의했다.
유엔은 상록수부대의 철수 대신 요르단 부대를 철수하기로 했다. 또 요르단 부대가 맡고 있던 서티모르 고립지역에서의 임무를 상록수부대에 부여하기로 했다. 평화유지군 재편에 따른 상록수부대 운용 재검토였으며, 한국군의 책임 지역 전환 배치였다. 이때가 2001년 10월 15일이었다. 남 예비역 대령은 5진 단장으로 같은 달 19일 동티모르 주둔지에 도착했다. 상록수부대의 책임 지역 전환 결정이 확정된 지 나흘 뒤였다.
남 예비역 대령은 4진과 임무 인수인계를 마친 직후인 10월 27일 책임 지역 전환을 위해 오에쿠시 일대에 지형 정찰을 나섰다. 부대 주요 직위자들이 동참했다. 오에쿠시 지역은 다국적군 투입 초기 무장세력의 극렬한 저항이 있던 곳이었다. 물론 상록수부대가 배치될 당시에는 위협 세력이 상당수 소멸했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무장세력과 주민들의 소요사태가 일어나면 대규모 무력충돌로 이어질 수 있었다.
본대까지 모두 이동을 마친 상록수부대는 2002년 1월 13일부로 책임 지역을 인수했다. 약 사흘간 요르단군과 합동 근무를 진행한 뒤였다. 이날 상록수부대는 유엔군사령부로부터 “한국대대는 2002년 1월 13일부로 요르단대대로부터 오에쿠시 지역 책임을 인수해 사령관의 직접 지시를 받는 독립대대로 운영하라”는 작전명령 08-01호를 접수했다.
헌신적 임무 수행이 곧 평화로 가는 길 -남인우 예비역 대령 (동티모르 상록수부대 5진 단장)
동티모르 상록수부대는 2002년 1월 유엔군사령부의 임무전환·부대이동 지침에 따라 서티모르 고립지역인 오에쿠시-암베노(Oecussi-Ambeno)로 이동했다. 이어 상록수부대는 임무와 지역이 지닌 특성에 맞춰 기본적인 치안 유지 활동을 비롯해 국경통제소 설치, 내륙지역 작전중대 운용, 민사 작전·활동 등 더욱 독립적인 작전을 펼쳤다.
오에쿠시 지역으로 이동한 상록수부대는 먼저 지역의 중심도시 외곽에 주둔지를 구축했다. 직전까지 해당 지역에서 임무를 수행한 요르단 부대의 시설을 인수해 보수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기존 시설이 매우 낡고 열악해 대부분 철거한 뒤 새로 건설하는 방법을 택했다. 보수작업보다 시간을 아끼며 부대원의 안전도 확보하는 조치였다. 당시 상록수부대 5진 단장으로 임무를 수행한 남인우 예비역 대령(당시 대령)은 부대 이동 초기 주둔지 구축에 집중했다.
주둔 시설이 정비되자 본격적인 임무를 수행해 나갔다. 적응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지만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이전 책임 지역인 동부 라우템과는 지형·기후부터 달랐다. 산악·협곡지형이 대부분이었고, 북쪽 해안을 제외한 내륙은 모두 인도네시아와 국경을 이루고 있었다. 동티모르 수도 딜리에서는 200㎞, 동·서티모르 국경에서도 약 70㎞ 떨어져 있었다. 주둔지 구축, 지역주민과의 관계, 작전지역 분석·파악 등 모든 일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상록수부대는 오에쿠시 지역 중심에 본부와 지원대를 두고, 지역 내 4개 읍·면 규모 단위를 2개씩 묶어 2개 작전중대가 각각 맡도록 했다. 작전중대는 자신의 책임 지역을 순회하며 기동·도보 순찰을 진행했다. 이와 함께 국경선을 따라 5개 국경통제소를 설치하고, 14명 규모의 특전 팀을 각각 배치했다. 국경통제소는 유엔 상주기구와 협조체계를 유지하며 자체 방호, 출입인원 통제, 경계 지원 등을 수행했다. 특히 국경통제소 임무는 서티모르 국경관리를 책임지는 인도네시아군과 마찰이 발생할 수 있어 세심한 관리가 필요했다.
교감(交感), 마음을 주고받다-남인우 예비역 대령 (동티모르 상록수부대 5진 단장)
동티모르 상록수부대는 1999년 10월부터 2001년 12월까지는 동티모르 동부지역 라우뗌에서, 이어 2002년 1월부터 2003년 10월까지는 서부 고립지역 오에쿠시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임무 범위와 작전 환경은 시기·상황에 따라 달랐지만, 지역과 주민의 평화·안정을 위한 일에는 변함이 없었다.
△ 동티모르 상록수부대 장병들은 민사 활동의 하나로 오에쿠시 지역 주민들의 농기계를 수리하고(왼쪽 사진) 주민 의료지원을 진행했다. 국방일보 DB
상록수부대의 주된 임무는 치안 회복·유지였다. 유엔이 부여한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하지만 타국 군처럼 단지 순찰을 강화해 지역을 통제하거나 위협 세력을 경계하는 일에 그치지 않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양한 민사 작전·활동을 펼쳤다. 치안 회복·유지는 주민들의 안정과 협조에 달린 일이었으며, 이를 위해서는 주민들과의 신뢰 형성·구축이 제일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시 상록수부대 5진 단장으로 활동했던 남인우 예비역 대령은 무엇보다 동티모르 주민을 먼저 생각했다.
마침표 그리고 쉼표 -김사진 예비역 준장 (동티모르 상록수부대 8진 단장)
동티모르 상록수부대는 2003년 4월 마지막 8진 장병들이 앞서 파견된 1~7진까지의 성과를 이었다. 8진은 유엔의 동티모르 평화유지군 감축 계획에 따라 기존 병력의 절반 수준인 240여 명으로 편성됐지만 4년여의 동티모르 상록수부대 활동을 완전하게 마무리하고 철수하는 것을 주요 임무로 했다.
2002년 5월 동티모르 독립 정부가 출범하자 유엔은 동티모르 평화유지군 감축을 서둘러 진행했다. 독립 정부의 자주적 역량을 높이고 유엔의 예산 지출을 줄이기 위해서다. 유엔은 2002년부터 본격적으로 4단계에 걸친 감축 계획을 실행했다. 상록수부대 역시 2003년 말께 철수하기로 했다. 최종 철수·귀국 일정은 유엔군사령부와의 협의와 현지 상황을 고려해 10월로 결정했다.
2003년 4월 현지에 파견된 상록수부대 8진은 기존 치안 유지와 국경선 관리 임무를 계속 수행하면서 안전하고 완전한 부대 철수 임무를 함께 진행했다. 당시 8진 단장으로 작전을 지휘한 김사진 예비역 준장(당시 중령)은 성공적인 부대 철수를 위해 유엔 및 현지 정부와 유기적인 협조를 이어갔다.
동티모르 상록수부대 ⑮ -다국적군의 왕 / 김사진 예비역 준장 (8진 단장)
상록수부대는 강한 전투력을 바탕으로 본연의 임무인 치안 회복·유지 작전을 완벽히 수행하며 동티모르 내 다른 어느 곳보다 가장 먼저 책임 지역을 안정시켰다. 또 다양하고 실질적인 민사 활동으로 동티모르 주민들로부터 가장 모범적인 부대로 평가받았다.
동티모르 상록수부대 16 -철수와 귀국/김사진 예비역 준장 (8진 단장)
부대 대표로 보람·아쉬움 등 전해
불도저 등 장비·물자 3만여 점 기증
실질적 도움되게 운용자 교육도 진행
2003년 10월 4년여 활동 마무리
귀국 후 환영행사…청와대 초청 받아
1999년 10월 동티모르에 파병된 상록수부대는 2003년 10월까지 약 4년에 걸친 활동을 통해 동티모르 독립정부 탄생에 큰 역할을 했다. 적극적인 임무 수행으로 책임 지역의 치안을 빠르게 회복·유지했고, 다양한 민사활동으로 주민들에게 실질적 도움을 제공했다. 주민에게는 ‘다국적군의 왕’, 유엔에서는 ‘모범 부대’라는 평가를 받았다. 김사진 예비역 준장(당시 중령)은 당시 8진 단장으로 상록수부대의 철수·귀국 작전을 이끌었다.
상록수부대는 철수 준비가 마무리되자 출국 전날이었던 10월 22일 동티모르 유엔 평화유지군사령관 주관으로 철수식을 진행했다. 행사에는 동티모르 총리를 비롯한 중앙·지방 정부 관계자와 유엔 주요 직위자들이 참석했고, 본국에서는 특수전사령관이 찾아와 장병들의 노고를 격려했다. 동티모르 주민들도 찾아와 상록수부대의 헌신에 박수를 보냈다.
△ 동티모르 상록수부대 8진 장병들이 2003년 10월 육군특전교육단 연병장에서 열린 귀국신고 및 환영행사에 참석해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국방일보 DB
당시 김 단장은 부대기(유엔기)를 유엔군사령관에게 반납한 뒤 부대를 대표해 연설에 나섰다. 연설은 한국어나 영어가 아닌 동티모르어로 진행했다. 그는 초기 상록수부대 파병의 실무·협조 업무를 했고 1진 지원대장으로 임무를 수행한 바 있다. 그리고 8진 단장으로 다시 동티모르를 찾았다. 그러면서 꾸준하게 현지 언어를 익혔다.
“동티모르 주민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들은 우리 말이나 영어에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동티모르에서 많은 시간 활동하며 현지 말을 익힐 기회가 있었기에, 이를 바탕으로 한마디 한마디 꺼냈습니다.”
내용은 특별할 것이 없었다. 단지 진심을 전하고자 했다. 그동안의 시간을 되돌아보며 느꼈던 감정들을 차분히 들려줬다. 기쁨, 슬픔, 아쉬움, 뿌듯함, 아픔, 행복, 안타까움, 보람. 부대원 모두의 수많은 감정을 전부 전할 수는 없었지만, 주민들은 충분히 김 단장의 복잡한 감정을 이해했다. 마음으로 이해하고 가슴속에 새겼다.
“이곳을 떠나게 된 이야기부터 시작했습니다. 행복했고 아쉬웠던 이야기를 전했어요. 행사장 곳곳에서 주민들이 제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모습에 감정이 차올라 저 역시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연설은 중간중간 끊어지기를 수차례 반복한 후에야 겨우 마칠 수 있었습니다.”
철수식에서는 한국군 장비·물자 기증식도 함께 진행됐다. 지침에 따라 전투 장비·물자를 제외한 나머지를 동티모르 정부에 기증하는 행사였다. 모든 물자·장비의 상태와 재고를 파악하고 감가상각을 확인해 유엔의 경비보전 업무도 마친 상태였다. 군수 업무는 부대 철수 작전에서 중요한 일이었다.
“8진은 임무 시작과 동시에 철수 작전에 돌입했습니다. 보유 중인 장비·물자를 목록화했어요. 철수 또는 기증 여부를 판단해 보고하고 지침을 받았으며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추진했습니다.”
이때 기증한 장비·물자는 총 330종 3만2000여 점에 달했다. 불도저, 중장비, 구급차 등 일반·통신·공병·의무 장비부터 유지물품·의약품·취사용품 등 물자도 포함됐다. 상록수부대는 단지 장비·물자를 전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에 대한 운용자 교육도 진행했다. 부대의 장비·물자를 인수해 효율적으로 운용해야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약 한 달간 계속된 집체교육에는 동티모르 정부에서 선정한 공무원을 포함해 40여 명이 참여했다.
“상록수부대 철수 이후에도 정상적으로 장비를 운용하는 것을 교육 목표로 했습니다. 운용 및 정비요령 등 종합교육이었고, 교육 종료일에는 평가도 했습니다. 교관으로서 교육을 진행한 부대원들도 주민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 2003년 10월 동티모르 상록수부대 철수식에서 당시 김윤석(오른쪽) 육군특수전사령관이 알카트리 마리 동티모르 총리에게 상록수부대의 장비·물자 기증서를 전달하며 악수하고 있다. 국방일보 DB
모든 준비와 일정을 마친 상록수부대는 철수 행사 직후 동티모르 중북부 바우카우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하루를 묵은 상록수부대는 이튿날 오전 유엔이 제공한 항공기를 이용해 동티모르를 출발, 당일 서울공항에 도착했다.
귀국 환영 행사는 10월 24일 경기도 광주 육군특수전교육단에서 군 관계자와 장병 가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또 29일에는 청와대 초청 행사가 이어졌다. 아울러 각 해당 부대는 임무를 마치고 원대 복귀한 장병들에 대한 환영을 진행하면서 그간의 수고와 헌신을 격려했다. / 국방일보 서현우 기자
동티모르 상록수부대 17 - 파병의 성과
강한 전투력 바탕 무장세력 활동 저지
다기능 민사활동 ‘블루엔젤작전’ 전개
의료 지원.시설 보수 등 자립.재건 도와
주민 전폭적 신뢰 ‘다국적군의 왕’ 찬사
△ 동티모르 상록수부대 8진 장병들이 오에쿠시 지역 동티모르-인도네시아 국경선 근처에서 수색 정찰 활동을 하고 있다. 국방일보 DB
상록수부대는 우리나라 유엔 회원국 가입 이후 파병된 최초의 전투부대였다. 유엔 평화유지활동(PKO)으로 약 4년간 임무 수행하며 국제평화와 지역안정을 이루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동티모르 정부 수립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도 큰 도움을 줬다. 아울러 부대원들은 다양한 환경에서 새로운 작전을 펼치는 기회를 통해 해외 임무 수행의 의미 있는 경험을 가졌다.
치안 빠르게 안정시켜
상록수부대의 가장 큰 성과는 분쟁·갈등으로 위기 상황에 내몰린 동티모르 치안을 빠르게 안정시켰다는 점이다. 1999년 10월 상록수부대가 처음 동티모르에 도착했을 당시 현지 상황은 매우 심각했다. 동티모르 독립에 반대하는 무장세력의 공격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도로와 건물은 파괴되고 무너졌다. 도시는 폐허가 됐고 치안은 붕괴한 상태였다.
무엇보다 치안 회복이 급선무였다. 상록수부대는 신속하게 책임 지역을 분석해 세부적·구체적 작전개념을 세웠다. 또 강한 전투력을 바탕으로 무장세력의 활동을 저지하며 통제를 펼쳤다. 동시에 지역주민들과도 지속적인 관계를 형성해 신뢰를 만들어나갔다. 이 같은 활동으로 상록수부대의 책임 지역이었던 동부 라우템은 다른 어느 곳보다 빨리 안정을 찾아갔다.
파병 1년 2개월여 만인 2002년 1월에는 서부 오에쿠시 지역으로 이동해 임무를 이어갔다. 오에쿠시는 북쪽 해안을 제외한 내륙이 인도네시아 영토에 고립돼 무력 충돌이 우려되는 지역이었다. 게다가 앞선 타국 군 주둔부대와 주민 간 마찰이 있어 동티모르 유엔군사령부의 고심이 큰 곳이었다. 전략적 요충지로 평화유지 임무를 수행하면서 주민과의 신뢰 관계를 쌓아야 했다.
오에쿠시 지역에서 상록수부대는 기존 치안 회복·유지 임무에 더해 국경선 관리·통제의 임무를 추가 수행했다. 유엔 평화유지군으로서 중립적인 자세를 견지했다. 특히 학술적 연구와 실천적 노력으로 인도네시아와 동티모르의 국경선협상·획정에도 힘을 보탰다. 갈등·분쟁이 전혀 없는 임무 수행으로 인도네시아와 우리나라의 우호 증진에도 큰 힘이 됐다. 유엔군사령부와 동티모르 독립정부는 이 같은 상록수부대의 노력에 아낌없는 감사를 보냈다.
장병들의 희생과 헌신
하지만 상록수부대의 눈부신 활약 뒤에는 안타까운 희생도 있었다. 2003년 3월 임무 수행 중이던 장병들이 사고로 숨진 것이다. 고(故) 민병조·박진규 중령, 백종훈·김정중·최희 병장(순직 후 전원 1계급 특진) 등 5명이 그들.
당시 국경통제소(소초)의 발전기가 고장 났다는 보고에 지원대장 민 소령(이하 당시 계급)은 운전병 백 상병과 예비 발전기를 차에 싣고 길을 나섰다. 중간에 해당 지역대장 박 소령, 운전병 김 상병, 통역병 최 상병 일행을 만나 함께 국경통제소로 향하던 중 에카트강을 건너다 갑자기 차가 멈추는 상황에 직면했다. 지역대장 일행이 차를 견인해 끌어내는 찰나 급류가 이들을 휩쓸었다.
에카트강은 우기를 제외하고는 물이 흐르지 않는 간헐천이었는데 상류 지역 폭우로 물이 불어나 순간적으로 급류가 형성된 것이었다. 지역대장 일행을 구하기 위해 망설임 없이 물에 뛰어든 민 소령과 백 상병마저 희생됐다. 사고 이후 현지에서 진행된 영결식에는 마을주민 등 1000여 명이 참석해 애도했으며, 우리 국민 역시 고국에서 고인들의 투철한 사명감과 전우애를 기리며 크게 슬퍼했다.
다양한 민사활동으로 주민과 가까이
상록수부대의 민사활동은 소말리아와 앙골라 등 직전 PKO 파병지에서 펼쳤던 수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다기능 종합 민사활동으로 발전한 것. 주민들에게 꼭 필요한 실질적 도움을 주면서, 치안 유지와 지역 안정을 위한 역할로도 활용했다. ‘블루엔젤작전’으로 이름 붙여진 민사활동을 통해 지역 마을을 순회하며 의료·방역 지원, 농기구 수리·교육, 시설물 보수 등을 진행했다. 열악한 위생 상태를 보완하고, 자립과 재건을 돕는 활동이었다.
특히 분쟁으로 가족을 잃은 주민을 대상으로 상담을 통해 심리를 치료하고, 영화 상영·문화 행사를 펼쳐 지친 정신의 계몽·순화를 이끌었다. 또 태권도·어학 교육·체육 행사 등을 이어가며 심신을 단련하는 데 힘을 보탰다. 이 같은 민사활동 대부분은 주민들과 직접 마주하고 어울리며 함께 만들어가는 모습이었다. 동티모르의 평화를 주민들이 직접 만들어가도록 묵묵히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창의적이고 종합적인 민사활동이 동티모르 주민들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으면서 상록수부대는 ‘다국적군의 왕’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유엔 역시 상록수부대의 활동을 높게 평가했다. 상록수부대의 조기 철수를 막고 주요지역에서 중요 임무를 수행토록 했던 배경이었으며, 동티모르 파견국 군대 중 가장 인상적인 활동을 펼친 부대로 꼽히는 바탕이었다. 서현우 기자
/ 국방일보 서현우 기자 < lgiant61@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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