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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전라남도

순천 낙안읍성

by 구석구석 2024.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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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천 낙안읍성(順天 樂安邑城)

낙안(樂安)! 고을 이름 그대로 즐겁고(樂) 편안함(安)이 느껴진다. 멀리 있을 남쪽 바다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서니 바로 뒤 북쪽으로 해발 667.9m의 금전산이 등을 받쳐주듯 든든하다. 서쪽 백이산(584.3m)과 동쪽 오봉산(591.5m)이 있어 왼쪽, 오른쪽 걱정이 없어 보인다.

그리 높게 느껴지지는 않는 성(城), 낙안읍성은 그렇게 높지도 낮지도 않은 산에 둘러싸인 평지에 자리해 있다.  

■ 임경업 장군이 다시금 고쳐 쌓았다

우리나라의 성곽은 산에 지은 산성이 주류를 이루지만, 이런 평야 지대 또는 평야에 연해서 고을마다 백성과 관리가 함께 삶을 영위(행정)하면서 적을 막도록(군사) 건립된 읍성(邑城)도 수 백을 헤아린다. 대부분 훼손되었지만,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 300여 곳에 이른다.

낙안읍성은 방어를 위해 성 밖으로 파놓은 수로나 못, 즉 해자(垓子)를 파지 않았다고 하는데, 금전산에서 내려오는 냇물인 동내(동천)가 성곽 바깥 북동쪽에서 동문을 거쳐 남문 앞까지 돌아서 흘러간다. 서내(서천)은 서문에서좀 떨어져 들판을 지나 동내와 합류한다. 낙안읍성의 정문 격인 동문이다. 낙풍루(樂豊樓)라고 부른다. 문루는 2층 다락으로 되어 있다.

600여 년의 역사와 전통 민속문화, 낙안팔경이 조화를 이루는 낙안읍성은 옛 자취가 비교적 잘 보전되어 복원된 성으로 현재 일반인들이 성내에서 거주하는 곳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마을에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조선 시대 임경업 장군이 하루 만에, 더욱이 누이와 내기까지 하며 이 성을 쌓았다고 한다. 전설 속에는 지혜로운 임 장군 누나의 아우 사랑 이야기가 곁들여 전해오고 있다. 

남문은 옹성을 두고 있는 개거식 성문으로 문루를 쌍청루 또는 진남루라고 부르는데 현재는 쌍청루 현판이 걸려 있다. 옹성은 성문 앞쪽을 둥글게 감싸는 형태가 많지만 낙안읍성 남문 옹성은 ㄱ자형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지는 않다.

고려 말부터 왜구가 이곳으로 자주 침입하자, 조선 태조 6년(1397)에 이 고장 출신 절제사 김빈길 장군이 흙으로 읍성을 쌓았다. ‘세종실록’에는 1424년 9월부터 성을 돌로 다시 더 크게 쌓았다고 한다. 그리고 인조 4년(1626)에 이르러 낙안군수로 부임한 임경업 장군이 다시금 고쳐 쌓았다. 성의 둘레는 1,410m에 직사각형 형태이며 성벽의 높이는 4m이다.

낙안읍성의 위치와 주변 지형 등을 그린 조선시대 지도로 ‘전라좌도 낙안군 지도’라고 쓰여 있다.

■ 이순신, 명량해전 앞두고 이곳 찾아

낙안읍성 축성 목적은 왜구를 막고자 하는 군사적 기능에 있었다. 성곽으로서 읍성이 방어적 역할을 충분히 수행했는가 하는 문제는 차지하고, 군사와 관련된 기록과 전설이 몇 가지 전해온다.

낙안읍성은 북문이 없이 동문에서 서문으로 성벽이 연결되어 있다. 사진 중앙에서 보이듯 동쪽 성벽면과 북쪽 성벽면이 만나는 자리에 치성이 앞으로 툭 나오게 설치되어 있다. 치성은 본래 6곳이 있었으나 현재 4곳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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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중에는 군수와 병졸들이 관아를 비우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따라 전투에 참여했는데, 그 사이를 일부 백성들이 관아를 습격하여 노비 문서를 불태웠다고 한다. 실제 이순신 장군이 낙안읍성을 찾은 건 1597년 8월 9일(양력 9월 19일)이었다. 명량대첩을 앞둔 시기, 조선 수군을 재건하면서 보성으로 가는 길이었다.

정유재란 때에는 후퇴하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 왜군들이 낙안에서 가까운 순천에 왜성을 치고 장기전을 펼친 영향으로, 많은 주민들이 피난을 떠나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고 한다. 동학혁명 때에도 고흥, 보성, 순천 일대의 동학군들이 읍성을 점령한 후 농민들을 수탈하던 아전들을 징계하면서 재물을 징발당하고 많은 집이 불탔다. 현재 남아있는 읍성의 모습은 성벽의 축조나 적대의 존재 등에서 조선 초기 성곽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준다.

성 밖에서 성벽으로 오를 수 있는 곳은 서문 왼쪽 옆 한 곳뿐으로 암문 역할을 한다.서문은 성문과 문루를 현재 복원 준비 중이다.성벽 밖과 안쪽.

■ 98세대 230여 명 실제 거주하는 고풍 마을

민가 지역에는 1977년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아홉 채의 가옥을 포함하여 성내에는 98세대 230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농사도 짓고, 여행객을 대상으로 음식과 기념품 판매도 한다. 가을걷이 체험 가옥 등 조상들의 옛 생활을 체험해볼 수 있는 가옥들이 지정되어 있다. 민박도 한다. 겉은 초가집이지만 방은 현대적이다. 밤에는 각 가정에서 나오는 불빛이 성을 둘러싸고 있는 어두운 산색과 어울려 더없이 조용하고 평화스럽다.

성내 마을은 좁은 골목길 ‘고샅’으로 아주 천천히 돌아볼 일이다. 안마당이 다 들여다 보이는 높지 않은 돌담, 흙벽이 정겹다.

성 주위에는 느티나무, 팽나무 등 오랜 세월을 산 나무가 32그루나 자라고 있어 고풍스러움을 더해준다. 이 가운데 15그루는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이순신 장군은 1597년 명량대첩을 앞두고 조선수군을 재건하면서 보성으로 가는 길에 이곳에 들러 백성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당산나무에도 술 한 잔 부어 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객사 뒤에 비스듬히 누운 푸조나무는 이순신 장군이 직접 심었다는 설도 있다.

임경업장군 선정비다. 1626년 낙안 군수로 봉직하며 선정을 베푼 장군을 기리기 위해 군민들이 세운 것이다. 마을사람들은 장군을 수호신으로 여겨 매년 음력 정월 보름에 장군을 기리는 제사를 지낸다. 비각은 팔작지붕의 대문을 갖춘 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큰샘이라고 불리는 우물이다. 낙안읍성은 성내에서 우물을 파는 것을 금지했다. 풍수지리적으로 낙안읍성은 배가 막 출발하는 ‘행주형(行舟形)’이어서 우물을 파는 것은 배의 밑을 뚫는 것과 같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때문에 자연스레 솟아오르는 여러 옹달샘을 그대로 사용했다. 이것은 배 안으로 들어온 물을 퍼낸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 출처 국방일보 이경원의 성곽순례 . 편집 = 이경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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