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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경기한강유역

고양 북한동 상운사 노적사 무량사 국녕사 태고사 북한산성

by 구석구석 2008.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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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양구 북한동 370번지 상운사 02-387-4731

북한산성 내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직할사찰이다. 
 

 

‘상서로운 구름 속의 사찰’이란 이름의 상운사는 북한산의 대표적인 사찰 가운데 하나로 원효봉, 영취봉, 백운대, 만경대, 노적봉 등 수려한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친 곳에 세워져 있다. 전하는 얘기에 의하면 상운사는 신라시대에 원효스님이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다시 돌아오는 길에 북한산에서 잠시 수행을 할 때 창건할 때 창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할 만한 자료가 없어, 현재로서는 여기에 관계된 내용은 설화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상운사의 실질적인 창건은 1722년(경종 2)에 승장 회수스님에 의해서이다. 1745년에 성능스님이 편찬한 북한산성의 지리지인 북한지에 의하면 북한산성 안에는 중흥사, 태고사, 용암사, 보국사, 보광사, 부왕사, 원각사, 국녕사, 상운사, 서암사, 진국사, 봉성암, 원효암 등 모두 13개의 사찰이 있었으며, 이중 중흥사와 태고사를 제외한 나머지 사찰들은 북한산성을 축성한 이후 산성의 수비와 관리를 위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창건이후 상운사는 승군이 주둔하는 사찰로 그 명맥을 이어왔던 것이다. 현재 상운사는 사찰의 규모는 그다지 큰 편이 아니지만, 한때는 130여 칸에 달하는 건물이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북한산성 안의 많은 사찰들이 흔적 없이 사라져버린 상황 속에서도 상운사는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며 남아 있는 것이다. 북한산에서 3번째로 높은 곳에 위치한 사찰, 경내에 있는 오래된 향나무는 아이를 못 낳는 분에게 아이를 낳게 해 주고, 영험있는 약사부처님이 있는 절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빼어난 주변 경관으로 인해 불자들뿐만 아니라 많은 등산객들이 즐겨 찾은 곳이기도 하다.

 

북한산국립공원 주차장에 주차하고 도보로 올라간다. 서문안 삼거리에서 왼쪽 길을 따르면 예전 고양군이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맞기 위해 지었다는 등운각(현 보리사)을 거쳐 계곡길을 따라 400m 정도를 오르면 상운사에 이르게 된다.

 

북한동 332 노적사 02-353-5016

 

서울 연신내나 구파발에서 송추 쪽으로 가다보면 북한산성 입구가 나온다. 여기서 우회전하여 200m 정도 가면 북한산국립공원 주차장이 나온다.

 

 "노적봉이 더없이 깨끗하여 티끌하나 없고
만고의 청풍이 노적봉을 불어와 맑고 밝은 기운 돌아오는구나.
산영루를 던지고 험악한 산길을 이리저리 찾아 북으로 가면
세 길쯤 되는 돌에 “백운동문”이라 새겨져 있어
돌길을 따라 진국사 절문에 당도하니
붉은 나무와 흰 돌이 구렁을 이루며 물소리 맑게 들리어라"
조선후기의 실학자 이덕무(李德懋)가 노적사의 전신(前身)인 진국사(鎭國寺)를 읊은 것이다.

 

 요즘 노적사로 가는 길은 많이 평탄화되고 포장이 되어 이덕무의 시에서처럼 그리 어렵지 않은 편이다. 그렇다고 해서 쉽게 갈 수 있는 길은 아니다. 수 백 년 전의 여정에 비해 다소 수월해 졌을 뿐, 길은 여전히 험난한 편이다. 산허리에 굽이치는 길을 따라 오르다가 평탄한 듯하고, 다시 비탈길을 오르기를 몇 번 해야 닿을 수 있다. 그렇지만 발걸음을 옮겨 놓을 때마다 눈앞에 다가오는 산천의 웅장하고 오묘한 모습은 절로 감탄사가 나오게 한다.

 

진국사(노적사)는 1712년(숙종 38) 당시 팔도도총섭이었던 계파성능스님이 창건한 사찰이다. 당시 북한산성에는 산성을 축조하고 관리하는 많은 승군들이 머무르고 있었는데, 성능스님은 중요시되는 요충지에 11개의 사찰을 창건하고 승군이 머물게 하였다. 진국사는 이 때 창건된 11개의 사찰 가운데 하나이다. 그 후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소실되어 빈터만 남게 되었는데, 1960년 무위스님과 창암 유흥억거사, 박금륜행, 김진공성, 불자 등이 복원하여 노적사라 이름 하였다.

이렇게 다시 시작된 노적사는 성능 스님의 호국의지가 담긴 호국도량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노적봉의 웅장한 자태는 사찰을 옹호하고 있는 신장의 위신력을 보여주고 있고, 끊이지 않는 국태민안의 발원기도는 성능스님의 뜻을 이어가는 노적사의 크나큰 원력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북한동 464-1 무량사 02-385-7777

 

이중환은 땅의 기운이 가장 승한 곳으로 나라 안에서 네 곳을 꼽았다. 개성의 오관산, 한양의 삼각산(북한산), 진잠(대전)의 계룡산, 문화의 구월산을 정기가 빼어난 명산으로 보았다. 그 가운데서도 삼각산을 으뜸으로 꼽았다. 북한산은 수도 서울의 주산이요 진산이다. 삼국시대 이래 한국사의 중심이 되어 온 이 지역은 한민족의 문화와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온 불교와도 밀접한 연관을 가지며 조선시대까지 이어 왔다.

 

 

 북한산에 자리한 무수히 많은 절들 중의 하나인 무량사는 산성 초입에 자리하고 있으며, 창건 연대는 그리 올라가지 않으나 절의 창건과 관련한 흥미로운 일화가 전하고 있다. 고종의 후궁인 순빈 엄씨가 이곳에 산신각을 짓고 약사불과 산신탱화를 모신 뒤 백일기도를 올려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들이 바로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인 영친왕 이은(李垠: 1897∼1970)이다.

 

그 뒤부터 이 절은 백일기도를 올리면 소원을 들어주는 사찰로 알려져 순빈의 원당(願堂)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경내에 약수가 있어서 처음에는 약수암(藥水庵)이라고도 불렀다가 1980년에 무량(無量)스님이 주지로 부임한 뒤에 절 이름을 무량암이라 하였다가 다시 무량사로 바꿨다. 지금도 약사전에는 순빈이 모시고 백일기도를 올렸다고 전하는 약사불좌상과 산신탱화가 남아 있다. 무량사는 경기도 전통사찰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북한산국립공원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 절까지는 걸어서 가거나, 대서문까지 운행하는 서틀버스를 이용하여 대서문에서 하차한 뒤 계곡을 따라 조금 걷다보면 머지않아 무량사에 이르게 된다.

 

북한동 산1 국녕사 02-2011-1857

북한산성 안에 자리했던 주요 사찰들은 대부분 1712년 성능스님이 북한산성 도총섭이 된 이후에 승병이 머무르는 군영으로서 창건되거나 중창이 되었다. 북한산성 가사당 암문 아래에 자리한 국녕사도 1713년 승병(僧兵)의 군영이라는 목적으로 창건된 사찰이다. 당시 승군들은 북한산성 수비와 관리를 책임지는 막중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승군이 머무를 수 있는 도량은 필수적이었다.
 

 

창건 이후 국녕사는 갑오경장으로 의승군이 폐지 될 때까지 존속하였다. 그러나 이후 노역에 지친 많은 스님들이 떠나게 되어 한국전쟁 이후까지 폐허로 남게 되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국녕사가 편안하면 나라가 편안하다”고 한다. 이는 도성의 외곽에서 수비를 책임지는 막중한 임무를 띠고 있던 국녕사의 역할을 잘 표현한 말인 듯하다. 한국전쟁 이후 보경스님에 의해 법등을 다시 밝히게 된 국녕사는 1991년 화재로 소실이 되는 불운을 겪기도 하였다.



지금의 국녕사는 1998년 폐허를 딛고 가람을 중창한 것이어서 예전의 모습은 찾을 길 없다. 그러나 사찰의 역사 속에 면면히 흐르는 호국의 의지는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이다. 

 

 

 

 

 

북한동 15번지 태고사  02-384-5589

구암봉 기슭의 긴 계단 위에 대웅전이 서향으로 서 있고, 그 옆에 1385년(고려 우왕 11)에 세운 높이 2.3m, 너비 1m, 두께 24cm의 태고사 원증국사탑비(보물 611)와 비각이 서 있다. 비석은 널찍한 사각 지대석 위에 귀부를 안치하고 그 위에 비신을 세운 뒤 단부에 이수를 놓았는데, 태고사를 세운 보우의 내력이 기록되어 있다. 비각 왼쪽에 돌로 지은 산신각이, 산신각 뒤에는 부도탑 3기가 남아 있다.

 

 경내에는 원증국사 사리탑인 태고사 원증국사탑(보물 749)이 보존되어 있는데, 하대가 넓어서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고 단정하다. 문양과 조식이 고려 후기의 뛰어난 제작 솜씨임을 단적으로 알게 한다. 부도탑은 넓은 석단으로 이루어진 부도전에 세워졌는데, 사각형 지대 위에 사각형 하대를 놓고, 8각 꽃모양을 조각한 중대와 귀꽃문을 새긴 상대를 놓아 탑신을 받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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