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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서울 한강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미술관 역사관 기증품

by 구석구석 2023.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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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www.museum.go.kr

국립중앙박물관 - 역사관&야외전시장

전시관 1층 문에서 시작되는 1층 역사의 길에는 고달사 쌍사자석등과 경천사 10층 석탑이 있고, 왼쪽에 역사관이 있다. 경천사 10층 석탑의 아름다움과 기구한 역사를 이해하고, 야외전시장에서는 한국식 정원 속에서 보물 제2호인 보신각 종과 석등, 석비 등을 찾아본다. 역사관에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대동여지도를 비롯해 사료적 가치가 큰 문서 등 모두 2800여 점이 있다.

 

1. 경천사 10층 석탑 / 고려, 전시실 1층 역사의 길, 국보 제86호

1348년 만들어진 고려 후기 대표적인 석탑이다. 기단부터 3층까지는 네 면이 튀어나와 있고 4층부터는 네모난 형태를 취하고 있는 매우 특이한 형태의 탑이다. 총 13m에 달하는 모습에서 위엄이 느껴지지만 탑 전체에 조각된 불상이 화려함을 더하고 있다. 화강암이 아닌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조각하기가 좀더 쉬웠던 듯하다.

1층 탑신의 서면에는 영취산에서 부처님이 제자들을 모아놓고 설법하는 영산회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를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자 한 것이겠다.

2. 전 흥복사 염거화상탑 / 통일신라, 야외 전시장, 국보 제104호

통일신라 말기의 승려, 염거화상의 사리탑이다. 염거화상은 도의선사의 제자로, 설악산 억성사에 머물면서 당시로서는 생소했던 선(禪)을 알리는 데 힘썼다. 탑은 아래위 각 부분이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였다. 기단에는 사자·향로·연꽃 등이 소박한 자태로 장식되어 있고, 탑신의 사천왕은 입체감과 사실적 표현이 여실하며, 지붕돌은 당시의 목조건축 양식을 따르고 있다. 사리탑 중에서 가장 오래된 이 탑은 규모는 크지 않으나 단아한 기품과 깨끗한 솜씨가 잘 어우러져 있다. 이후 대부분의 사리탑이 이 양식을 따르고 있다.


3. 서울 보신각종 / 
조선, 야외 전시장, 보물 제2호

세조 14년인 1468년에 주조된 종이다. 제작 당시에는 신덕왕후정릉 안에 있는 정릉사에 있었으나 원각사, 숭례문 등으로 옮겨졌으며 임진왜란 이후 종루에 보관했다. 고종 32년인 1895년 종루에 보신각이라는 현판을 걸게 되면서 보신각종이라고 불리었다. 높이 3.18m, 지름 2.28m, 무게 19.66t의 큰 규모이며 음통이 없고 용 두 마리로 표현된 용뉴 등 조선 초기의 종 형식을 따르고 있다. 광해군 때에는 새벽 4시에 33번(파루), 오후 10시에 28번(인정)을 울려 도성 문을 여닫는 등 하루의 시간을 알렸으며 1985년까지 서울 종로 보신각에서 제야의 종을 칠 때 사용되다가 현재에 이르렀다.

4. 무구정광대다라니경 / 통일신라, 역사관 인쇄실, 국보 제126호

세계 최초로 목판으로 인쇄한 불교경전,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다. 이 경전은 751년에 세워진 불국사의 석가탑 안에서 발견되었는데 인쇄된 시기 역시 그즈음으로 추정하고 있다. 책의 크기는 너비 8cm, 전체 길이 약 620cm이며 한 행이 여덟에서 아홉 자의 다라니 경문을 두루마리 형식으로 제본해놓은 것이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는 죄를 없애고 수명을 연장하는 방법이 제시되어 있다. 우리나라가 인쇄문화의 종주국임을 입증하는 귀중한 자료다. 

5. 목판으로 찍은 초조(初雕)본 대보적경 / 고려, 역사관 인쇄실, 국보 제246호


11세기 초 고려 현종 때에 거란족의 침입을 받자, 부처님의 공덕으로 위기를 극복하고자 대대적으로 경판 조판 사업을 벌인다. 이때 만든 경판을 처음 만들었다 해서 초조 대장경판이라고 하는데 대보적경은 그 경판본 중 하나다. 모두 120권의 방대한 분량인데 이 책은 제59권에 해당한다. 대보적경은 보살이 여러 가지 수행방법을 통해서 불법을 터득하고 깨달음을 얻어 마침내 부처가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6. 북한산 진흥왕순수비 / 신라, 역사관 금석문실, 국보 제3호

6세기 중엽 신라 진흥왕대에 나라의 영토가 크게 확장된 이후 그 위세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이 비는 555년 무렵에 북한산 비봉에 세워진 것으로 삼국 간의 요충지였던 한강 유역까지 신라의 영토가 된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건립 후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가 19세기 초반에 금석학자인 김정희의 발견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비문에는 진흥왕이 신하를 데리고 이 지역을 방문한 목적과 비를 세우게 된 까닭, 진흥왕의 치적을 찬양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역사적 사실을 증거하는 귀중한 비석이라 하겠다.  

7. 대동여지도 / 조선, 역사관 지도실

고산자 김정호가 1861년에 제작한 우리나라의 전국지도다. 대동여지도는 그때까지 전해 내려오는 모든 지도와 지리지를 총망라한 것으로 산과 강, 행정구역, 도로망, 교통, 군사시설까지 자세하게 표시해놓아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게 했다. 이는 오늘날의 지도와 비교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정확하고 우수한 것이다. 김정호는 대동여지도를 목판에 새겨 지도를 널리 보급할 수 있게 했으며,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책자 모양으로 만들어 사용하기에 편하게 하는 등 실용적인 지도의 확산에 큰 기여를 했다.

8. 이성계 호적 / 고려, 역사관 왕과국가실, 국보 제131호


조선 태조로 등극하기 2년 전인 1390년, 고려 공양왕 때 작성된 이성계 호적이다. 이성계의 고향인 함경도 영흥에서 작성되었다. 수록된 내용에는 태조의 당시 관직은 물론, 가족들 이름과 노비까지 전부 기록돼 있으며 훗날 태종 임금으로 등극한 이방원의 이름도 볼 수 있다. 이 호적은 조선 왕조 때에도 영흥 준원전이라는 곳에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어서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보관 상태가 아주 좋다.

9. 진충귀에게 내린 조선 개국원종공신 녹권 / 조선, 역사관 왕과국가실, 보물 제1160호


조선 태조 4년(1395년)에 공신도감에서 당시 의주목사였던 진충귀에게 발급한 기록 문서다. 조선 개국에 공을 세운 진충귀를 개국원종공신으로 임명한다는 내용이다.

공신은 나라를 세우는 일을 돕거나 나라 안팎의 변란을 막고 왕실의 안정에 큰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내리는 칭호였다. 공신에게는 공신임을 증명하는 문서로서 교서 또는 녹권을 하사한다. 이 녹권에는 총 106명의 개국공신의 이름과 각 공신에게 전답 30결, 노비 3구를 하사한다는 임금의 명령이 기록되어 있다.

10. 대한제국 황태자 책봉 금책 / 조선, 역사관 왕과국가실

왕세자였던 척을 황태자로 책봉한다는 내용의 금책이다. 황태자 척은 훗날 순종황제가 된다. 조선시대에 왕이 왕비나 세자, 세자빈을 책봉하는 임명장을 ‘간책(簡冊)’이라고 한다. 간책은 대나무를 비롯한 나무, 돌, 금속을 길쭉한 직육면체로 만들어 그 위에 글씨를 쓴 책 형식의 문서다. 왕실에서 만든 간책은 신분에 따라 만드는 재료가 달랐고 명칭도 달랐는데, 금으로 만든 금책에는 대개 황제나 황후의 임명장이나 말씀이 담겼다.

11. 고려 인종 시책 / 고려, 역사관 왕과국가실

고려 인종 임금 능 안에 있었던 시책이다. 시책이란 죽은 왕이나 신하의 은덕을 칭송하며 시호를 적은 책이다.

고려 17대 왕인 인종은 성품이 어질고 너그러웠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예에 밝았다. 재위 중에 묘청의 난 등 어지러운 일이 많았으나 곧 이를 평정하고 태평성대를 이끌었다. 원래 시책은 주인공이 돌아가신 뒤에 만드는데 통상 상여가 산으로 떠나기 전에 완성한다. 묘 안에 있던 인종의 시책은 일제강점기에 도굴된 탓에 알려지게 되었다.

12. 손으로 쓴 화엄경(상지은니대방광불화엄경정원본 권 제4) / 고려, 역사관 전통사상실, 보물 제1137호

흔히 화엄경으로 불리는 대방광불화엄경을 옮겨 적은 사경이다. 모든 글씨는 손으로 쓴 것인데 은박가루를 접착제에 갠 은니로 한자 한자 써 내려갔다. 엄청난 집중력과 지극한 정성을 바탕으로 하는 사경 제작은 부처님의 공덕을 쌓고 간절한 소원을 빌기 위해 이루어졌다. 이 화엄경은 심오하고 방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한국 화엄종의 근본사상이기도 하다.

 

13. 조선의 학자와 중국의 사신이 주고받은 시 (봉사조선창화시권 奉使朝鮮倡和詩卷) / 조선, 역사관 대외교류실, 보물 제1404호

세종 32년인 1450년에 명나라 사신인 예겸이 새 황제인 경제가 등극한 사실을 알리러 우리나라에 왔다. 예겸 선생은 인품이 훌륭한 학자였는데 학문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 그를 맞이하고 접대한 이들은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과 같은 집현전 학자였다. 학문을 사랑하는 마음이 서로 통한 이들은 시를 지으며 친분을 다졌는데 그때 오간 시를 엮은 것이 ‘봉사조선창화시권’이다. 이들은 의형제를 맺고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이후에도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으레 시를 지으며 가까이 지내는 게 관례가 되었다.

14.명나라로 가는 바닷길 (항해조천도 航海朝天圖) / 조선, 역사관 대외교류실

조선 인조의 책봉을 요청하기 위해 1624년, 중국 명나라에 파견된 이덕형 일행의 사신 행차길을 담은 그림이다. 당시 사신 행차에 동행했던 궁중화가가 그린 것으로 보이는데 모두 25점이다. 사행길은 바닷길과 뭍길을 모두 이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뭍길만 이용했던 이전의 상황과 달라진 것이다. 이는 명의 세력이 약화되고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가 요동을 장악했던 당시의 국제 정세를 보여주는 것이다.

15. 부처의 큰 깨달음에 대한 가르침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 언해 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 諺解) / 조선, 역사관 한글실, 보물 제970호

한글로 언해한 불경이다. 한글은 많은 백성이 쉽고 편하게 문자를 쓰고 읽게 하기 위해 국가사업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한글이 만들어진 뒤 한동안은 왕실에서 적극적으로 한글 보급 사업을 벌였다. 그중 하나가 한자로 된 책을 한글로 번역하는 언해였는데 이 작업은 개화기까지 계속 이어졌다.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 언해’는 당시 가장 많이 읽히던 불경을 언해한 것으로 부처와 보살의 대화를 통해 불교 수행의 기본 방향을 알려주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16. 태조 이성계 별급문서 / 조선, 역사관 문서실, 보물 제515호

태조 이성계가 그의 딸에게 집을 주는 내용을 담은 재산상속 문서다. 태조는 새로운 시대를 연 위대한 왕이었으나 그의 나이 70세가 되자 어린 딸의 장래에 대한 걱정이 앞섰던 듯하다. 문서의 내용에는 완성된 집을 주는 것이 아니라, 빈 터에 목재와 돌 등을 구입해서 새롭게 집을 지어준다고 되어 있다. 조선 최초의 가옥 상속 문서인 이 별급문서는 당시 가옥, 토지 등 재산에 대한 상속이나 매매의 법제도가 엄격했던 것을 알려주는 귀한 사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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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주먹도끼 / 구석기시대, 고고관 구석기실

한 주먹에 잡기 좋게 생긴 이 돌은 구석기시대의 다용도 칼이다. 손으로 쥐는 부분은 다치지 않도록 둥글게 하거나 홈을 파서 잡기 좋게 만들었고, 도끼로 쓰는 부분은 날카롭게 다듬어놓았다. 주먹도끼는 대개 이처럼 끝이 뾰족하고 아래는 둥근 모양이다. 사냥할 때 동물을 내리치거나 뼈를 깎고 나무를 자르는 등 그 쓰임새가 다양해서 구석기시대에 널리 사용된 돌 도구 중 하나다. 이 외에도 구멍을 낼 때 쓰는 뚜르개, 나무에 홈을 팔 때 쓰는 새기개, 화살대를 다듬을 때 쓰는 홈날과 같은 많은 돌 도구가 사용되었다.

18. 낚싯바늘 / 신석기시대, 고고관 신석기실

강가나 바닷가에 정착하게 된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수산물을 중요한 식량으로 삼았다. 따뜻해진 날씨 덕분에 해수면이 높아지고 물고기의 양도 늘어났기 때문이다. 부산시 범방 조개더미 유적에서 발견된 이 낚싯바늘은 몸체와 바늘을 따로 만든 뒤 끈으로 묶어서 사용한 이음낚시의 부품이다. 바늘 끝은 사슴뿔이나 멧돼지 이빨·동물의 뼈로 만들고, 몸체는 돌을 갈아 만들어 물속에 가라앉게 했다. 낚싯바늘치고 크기가 큰 것은 대구나 다랑어같이 큰 물고기를 잡는 데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19. 덧무늬토기 / 신석기시대, 고고관 신석기실

신석기시대에 썼던 그릇이다. 인류 최초의 발명품으로 꼽히는 토기는 농사로 거둬들인 곡물을 보관하기 위한 저장 용기나 냄비와 같은 조리 용기로 쓰였다. 그중 덧무늬토기는 가장 이른 시기에 쓰였던 그릇으로, 겉면에 따로 진흙 띠를 덧붙이거나 겉면을 손가락으로 맞집어서 도드라진 모양을 냈다. 무늬를 덧댄 방식은 그릇이 단단하지 않아 끈으로 감아 쓰던 것에서 착안한 듯하다.

20. 빗살무늬토기 신석기시대, 고고관 신석기실

신석기시대에 한반도 전역에서 사용한 그릇이다. 빗같이 생긴 무늬새기개로 비스듬한 줄무늬를 촘촘히 새겨넣어서 빗살무늬토기라고 한다. 그릇의 모양은 요즘 그릇들과 달리 밑 부분이 뾰족하거나 둥글다. 바닥에 그냥 세워놓지 않고 땅바닥을 조금 파거나 토기 주위에 돌 같은 것을 받쳐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릇의 겉면을 정확히 구획하여 점과 선을 새겨넣은 것에서 일상 용기를 아름답게 꾸미고자 했던 당시의 의식을 엿볼 수 있다.

21. 반달돌칼 / 청동기시대, 고고관 청동기실

반달처럼 생겨서 반달돌칼이라고 부르는 농경 도구다. 곡식의 이삭을 따는 데에 쓰였다. 가운데에 뚫려 있는 두 개의 구멍에 끈을 끼워 손잡이로 사용했다. 이삭을 따는 돌칼은 반달 모양뿐 아니라 세모 모양, 네모 모양도 발견되고 있다. 청동기시대에 벼농사가 활발해지면서 수확량이 늘어난 이후에는 아예 볏단을 자를 수 있는 낫이 등장하여 수확의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22. 얼굴 모양 조가비 신석기시대, 고고관 신석기실

사람의 눈과 입을 본떠 만든 듯한 얼굴 모양 조가비다. 탈처럼 생겼지만 크기가 아주 작은 것으로 보아 다른 용도로 쓰였으리라 여겨진다. 아이들의 장난감일 가능성도 있지만, 원시 신앙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주술용 액막이의 일종으로 보인다. 홍수나 태풍 같은 자연재해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거나, 조가비라는 자연물의 영혼을 이어받아 그 채집의 양을 늘려 풍요로운 삶을 기원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추측된다.

23. 잔무늬거울 / 청동기시대, 고고관 청동기실

청동기시대 후기에 썼던 청동거울이다. 앞면은 광을 내서 거울로 쓰고, 뒷면에는 갖가지 무늬를 새겨 장식하고 꼭지를 달아 끈을 매달 수 있게 했다. 중앙에 꼭지가 하나 달린 중국식 거울과 달리, 한국식 거울은 두 개의 꼭지가 거울의 위쪽으로 살짝 비껴 자리하는 특징이 있다. 동심원과 사방으로 퍼지는 직선 모양의 잔무늬는 태양과 햇살을 표현한 것이다. 잔무늬거울은 일상 용구보다는 청동기시대의 제사장이 태양빛을 비추기 위한 의식용 도구로 쓰였다.

24. 농경무늬 청동기 / 청동기시대, 고고관 청동기실

농사짓는 모습이 새겨진 청동기다. 벌거벗은 한 남자가 따비로 네모진 밭을 갈고 있고 맞은편의 남자는 항아리에 담아온 씨를 뿌리고 있다. 이는 입춘 날 옷을 벗은 남자가 밭을 갈고 씨를 뿌리며 풍년을 기원했던 ‘입춘나경’의 의식과 같은 장면으로, 농경을 중요하게 여겼던 당시의 생활 모습을 고스란히 나타낸 것이다. 청동기를 뒤집으면 갈라진 나뭇가지에 새가 앉아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풍년의 기원을 하늘에 전해주기를 바라는 듯하다.


25. 팔주령 청동기시대, 고고관 청동기실, 국보 제143호

아기들이 가지고 노는 딸랑이처럼 생긴 이 청동기는 제사장이 의식을 진행할 때 쓰던 청동방울이다. 여덟 개의 방울이 달려 있어서 팔주령이라고 하는데, 방울 안에 구슬이 들어 있어 흔들면 소리가 난다. 제사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소리를 통해 신성한 분위기를 자아내기 위해 쓰인 듯하다. 늘 쌍으로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양손에 쥐고 흔들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독특한 모양의 팔주령은 오로지 한반도에서만 발견되고 있다.

 

26. 요령식 동검 / 청동기시대, 고고관 청동기실

청동기문화를 대표하는 동검이다. 중국의 요령 지방을 중심으로 분포되어서 요령식 동검이라고 하는데, 중국의 악기인 비파를 닮아 비파형 동검이라고도 한다. 요령식 동검은 검 몸과 손잡이를 한꺼번에 만드는 중국의 동검과 달리 각각 따로 만들어 연결하는 독특한 제작 방식을 특징으로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 고조선의 대표적 유물인 요령식 동검은 요령 지방과 한반도 서북한 지방에서 고루 출토되어 고조선의 중심 위치를 가늠하게 해준다.

 

27. 고리자루 칼 / 백제, 고고관 백제실

지배자의 무덤에서 발견되는 쇠칼이다. 손잡이 끝에 둥근 고리가 달려 있어서 고리자루 칼이라고 한다. 이 칼은 전쟁터에서 실제로 쓰였던 무기라기보다 금관처럼 신분이나 지위를 드러내주는 장신구 구실을 했다. 그래서 둥근 고리와 손잡이를 금과 은으로 아름답게 꾸몄다. 칼의 무늬는 표면을 파고 그 홈에 가느다란 은실을 박아넣는 은 상감기법으로 만들었다. 둥근 고리 안은 용, 봉황, 나뭇잎 모양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여 신분의 차이를 나타내기도 했다.

28. 산수무늬 벽돌 백제, 고고관 도입부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외리 절터의 바닥에 깔려 있던 산수무늬 벽돌이다. 오늘날의 보도블록과 같은 것인데 한 폭의 산수화처럼 회화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얕은 부조 형식으로 산, 나무, 기암괴석, 흐르는 시냇물, 하늘가의 구름 등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평화로운 분위기가 감돈다. 오른쪽 아래에는 기와집 한 채가 자리하고 그곳을 향해 가는 사람이 있는데 전체적으로 백제시대 사람들의 이상향을 엿보는 듯하다.

29. 오리 모양 토기 / 원삼국시대, 고고관 원삼국실


의식이나 제례용으로 쓰인 오리 모양 토기다. 고대인에게 새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하늘로 인도하는 상서로운 동물로 여겨졌다. 이런 이유로 고대의 무덤에서는 새 깃털이나 새 뼈, 혹은 새 모양의 토기가 자주 발견된다. 몸통은 속이 비어 있고 등과 꼬리 부분에 구멍이 나 있는 것으로 보아 액체를 담거나 따를 수 있는 장례식 용기인 듯하다. 진한, 변한 지역이 청둥오리의 서식지였는지 특히 오리 모양과 관련된 제기가 많이 출토되고 있다.

30. ‘호우’ 글씨가 새겨진 그릇 / 고구려, 고고관 고구려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장례 1주년에 만든 청동 그릇 중 하나다. 사후 이듬해인 414년에 성대한 제사를 올리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가마솥 비슷한 청동 그릇을 만들었는데 그중에서 이 청동기는 열 번째 그릇이다. ‘호우’란 그 의미를 나타낸다. 특이한 것은 고구려의 청동 그릇이 신라 지역에서 발견된 것인데, 이는 고구려의 문화가 당시 신라와 가야, 백제 등에 전해졌던 시대 상황을 증거하는 것이라 하겠다.

31. 왕비 관 꾸미개 / 백제, 고고관 백제실, 국보 제155호

무령왕릉에서 나온 왕비의 관 꽂이이다. 백제에서는 왕뿐 아니라 왕비도 비단으로 만든 모자를 쓰고 양 옆에 관 꽂이를 꽂아 위엄을 나타냈다. 왕비의 머리맡에서 발견된 이 꾸미개는 얇은 금판을 오려 만든 것이다. 가운데 작은 꽃병과 아래위로 연꽃잎과 넝쿨무늬가 새겨져 있어 활짝 핀 꽃이 꽃병에 꽂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왕의 관 꽂이는 왕비의 것보다 좀더 화려한 불꽃 모양인데 꽃가지마다 둥근 달개가 달려 있다.

32. 금동대향로 / 백제, 고고관 백제실, 국보 제287호


의식을 올릴 때 향을 피우던 금동대향로다. 백제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던 불교와 도교 사상을 바탕으로 우주의 이치를 아름답게 표현한 걸작이다. 향을 피우는 그릇은 활짝 핀 연꽃 모양으로 불교적 이상을 나타냈고, 향로의 뚜껑은 신선과 상서로운 동물들이 가득한 도교의 이상세계, 박산을 나타냈다. 받침대 구실을 하는 용은 물 밑 세계와 음을 상징하고, 뚜껑 위의 봉황은 하늘 세계와 양을 상징하여 음양의 조화를 보여준다. 향을 피우면 뚜껑 위의 산 뒤쪽과 봉황의 가슴에 난 구멍 사이로 신성한 기운이 올라와 환상적으로 보일 것이다.

33. 갑옷과 투구 / 가야, 고고관 가야실

전사의 몸과 머리를 보호하기 위한 갑옷과 투구다. 이 장비들은 경상북도 고령 지산동 무덤에서 출토된 것으로 실제 전쟁터에서 착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무덤의 껴묻거리용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갑옷은 어깨가리개·판갑옷으로 이루어졌는데, 철판을 인체의 곡선에 맞게 가로 세로로 구부려 연결한 고도의 제작 기술이 엿보인다. 투구는 오늘날의 모자처럼 앞쪽으로 튀어나온 각진 모양인데 정수리 부분에 깃털 등을 꽂아 장식하기도 했다.

34. 황남대총 금관 / 신라, 고고관 신라실, 국보 제191호

경주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된 금관이다. 지금까지 출토된 6개의 신라 금관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금관은 왕족의 힘과 권위를 상징하기 때문에 화려하면서도 정교하기 이를 데 없다. 둥근 관테에는 나뭇가지 모양의 세움 장식 세 개와 뒤쪽에 사슴뿔처럼 휘어진 장식 두 개가 달려 있는데 모두 금못을 박아 붙였다. 나무와 사슴뿔 모양은 하늘과 소통하는 신령한 상징물을 형상화한 것이다. 세움 장식마다 달려 있는 둥그런 달개와 곱은옥은 열매와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흔들릴 때마다 반짝여서 금관을 더욱 화려하게 보이도록 했다. 그러나 이런 금관은 일상용이 아니라 부장용으로 특별히 만든 것이다.

35. 귀걸이 / 신라, 고고관 신라실, 국보 제90호

신라 금속공예 기술이 집약되어 있는 귀걸이다. 고리의 표면에 수백 개의 금 알갱이를 열을 가해 붙여서 거북등처럼 면을 나누고 그 안을 나뭇잎 모양으로 꾸몄다. 아래의 샛장식은 금줄을 꼬아 속이 보이지 않도록 빽빽하게 연결하면서 나뭇잎 장식을 매달아 정교하게 완성했다. 이 귀걸이는 고리가 굵어서 무거워 보이지만 속은 텅 비어 있으며 착용할 때는 귓불에 끼우기보다 실을 묶어서 금관이나 비단모자 양옆에 매단 것으로 보인다.

36. 허리띠와 드리개 / 신라, 고고관 신라실, 국보 제192호

여러 가지 모양의 드리개를 매단 허리띠다. 허리띠에 드리개를 달아 장식했던 것은 북방 유목민족들이 부싯돌, 침통, 귀이개 등의 생활용구들을 허리띠에 달고 다니던 관습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 관습이 한반도에 전해지면서 생활용구들은 주술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상징물들로 대체되었다. 약통, 물고기, 숫돌, 손칼 등의 드리개는 생명, 건강, 풍요, 다산, 액막이 등의 주술적 힘을 상징한다.

37. 감옥팔찌 / 신라, 고고관 신라실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된 팔찌다. 무덤의 주인공이 왼팔에 착용하고 있던 것이다. 신라의 팔찌는 대체로 한 줄로 된 원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 팔찌는 두 장의 넓고 길쭉한 금판을 바탕으로 하여 금 알갱이로 장식하고 청색과 남색의 옥을 끼워넣어 색색의 화려한 모양을 갖추고 있다. 이는 서역의 팔찌와 비슷한 모양으로, 당시 국제 교류를 통해 수입된 것으로 여겨진다.


38. 신발 / 
신라, 고고관 신라실

식리총에서 출토된 금동 신발의 바닥 부분이다. 윗부분은 떨어져나가고 바닥만 남았다. 금동 신발은 신라 시대 대형 무덤에서 거의 예외 없이 출토된다. 이 신발은 신분이 높은 사람을 위한 부장품임을 나타내듯이 거북등과 같은 육각형 안에 갖가지 꽃과 동물들을 매우 화려하게 표현해놓았다. 사람의 얼굴에 새의 몸을 하고 있는 가릉빈가, 사슴처럼 머리에 뿔이 난 기린, 날개 달린 물고기 등 상상 속의 상서로운 동물이 가득하다. 이러한 도안은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은 중국의 북위시대 문화가 고구려를 거쳐 신라로 들어와 수용된 것이다.

39. 금방울 / 신라, 고고관 신라실 전시예정

금령총에서 나온 금방울이다. 경주 시내에 흩어져 있는 신라의 무덤들은 묻힌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출토된 유물의 이름을 따서 정하곤 한다. 금령총은 다른 무덤에서 발견되지 않았던 아름다운 금방울이 출토된 데서 이름이 붙여졌다. 출토된 두 개의 방울은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데, 표면을 자잘한 금 알갱이로 장식하고 푸른색 유리를 박았다. 방울 안에는 조그만 구슬이 들어 있어서 흔들면 딸랑딸랑 소리가 난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방울이 어디에 쓰였는지는 알 수 없다.

40. 말 탄 사람 토기 / 신라, 고고관 신라실, 국보 제91호

무덤에서 출토된 말 탄 사람 토기다. 이렇게 사람이나 동물, 물건의 모양을 본떠서 만든 토기를 상형 토기라고 한다. 이 작은 상형 토기들 덕분에 신라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데, 말 탄 사람 토기도 신라인의 옷차림에서 말갖춤까지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장례용 주전자로 만들어진 말 탄 사람 토기는 두 구가 발견되었는데 출토될 때 간소한 옷차림에 방울을 든 하인이 주인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는 장례식에서 방울을 흔들며 상여를 옮기듯이 하인이 주인을 저승길로 인도하는 모습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41. 토우가 붙은 항아리 / 신라, 고고관 신라실, 국보 제195호

목이 길고 통이 넓은 항아리다. 목 둘레에 여러 가지 모양의 토우가 붙어 있다. 토우는 흙으로 빚어 만든 인형인데 신라 사람들의 독특한 조형감각을 나타낸다. 정교하지는 않지만 대상의 특징을 잘 포착하여 오히려 생생한 느낌이 전해진다. 항아리에는 뱀·개구리·남근을 잡고 있는 사람 등이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각각 생명력과 다산을 상징한다.

42. 짐승 얼굴 무늬 기와 / 통일신라, 고고관 통일신라실

짐승의 형상을 담은 기와다. 당시 사람들은 도깨비나 짐승 무늬 기와를 지붕에 얹어두면 집으로 들어오려는 악한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고 여겼다. 기와를 지붕에 고정시키기 위해서 이마 쪽에 구멍을 뚫어 못을 박았으며 때로는 뒷면에 달려 있는 고리에 줄을 매어 고정시키기도 했다. 기와의 무늬는 짐승 무늬 외에도 연꽃무늬, 덩굴무늬, 새 모양 등 다양했다.


43. ‘함화사년’이 새겨진 불상 / 
발해, 고고관 발해실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발해에서 발원한 불상이다.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하고 양옆에 가르침을 듣는 수행 승려가 있으며 그 옆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서 있는 모습이다. 불상에 ‘함화사년(咸和四年)’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고 그 밑에 불비상을 설명하는 글이 씌어 있다. 그 내용에 따르면, 834년에 발해 허왕부의 관리인 조문휴라는 사람의 어머니가 모든 불자들을 위해 이 불비상을 조성했다고 한다. 허왕부는 황제가 왕으로 봉한 부서의 이름으로, 발해가 독자적인 황제 체제를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44. 뼈 담는 그릇과 돌함 / 통일신라, 고고관 통일신라실, 국보 제 125호


죽은 사람의 뼈를 담아 보관하는 그릇이다.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통일신라시대에는 종교적 영향으로 장례에서 화장이 유행했다. 그래서 죽은 사람을 화장한 뒤 남은 뼈를 추려서 그릇에 담고 이것을 다시 돌로 만든 함에 넣어 땅속에 묻었다. 이때 쓰인 뼈 담는 그릇은 일상생활에서 쓰던 소박한 토기를 그대로 사용하기도 했으나 점차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무늬를 새긴 도장을 토기 겉면에 찍어서 장식하기도 하고, 유약을 입혀서 고운 색을 내기도 했다. 이 돌함은 화강암으로 만들었는데 뚜껑을 꽃잎 모양으로 각지게 표현해서 장식적인 효과를 주었다.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내 미술관

미술관은 둘로 나뉜다. 평면 회화와 칠공예품을 전시한 미술관1호은 2층에 있고, 자기와 불교 조각품이 있는 미술과2는 3층에 있다. 미술관1에서는 김홍도의 풍속도첩과 부리부리한 눈의 맹호도, 이암의 어미개와 강아지 등에 눈길이 간다. 또 공간이 없어 전시되지 못했던 9m 크기의 쾌불이 주는 압도적인 느낌을 잊지 못할 것이다. 미술관2에서는 청자와 백자, 분청사기를 감상한다. 세계적 걸작 반가사유상 앞에만 머물러 있다 와도 후회는 없다.

45. 미수 허목이 쓴 척주동해비 원고본 / 조선, 미술1관 서예실, 보물 제592호

척주, 즉 강원도 삼척에 세워진 동해비의 원고본이다. 비석에는 동해비가 세워진 일화가 전해진다. 허목이 삼척 부사로 부임하던 때에 그 지역에 극심한 해일 피해가 있었다. 허목이 ‘동해송’이라는 시를 지어 비석을 세우자 바다가 잠잠해졌다고 한다. 영험한 비석의 글을 쓴 허목은 고전체를 응용해서 떨림이 있는 구불구불한 글자체를 완성했는데, 이를 그의 호를 따 ‘미수체’라고 한다. 당시에는 워낙 기이한 글자체라 비판을 받았으나, 지금은 조선시대의 개성 있는 글씨체로 평가되고 있다.

 

46. 소상팔경 시첩 / 조선, 미술1관 서예실

중국 호남성에 위치한 동정호 주변의 소수와 상강이 맞닿은 지역은 빼어난 경치로 유명한데, 그곳 사계절의 풍광을 일컬어 소상팔경이라고 한다. 소상팔경은 많은 시인과 화가들이 시와 그림으로 다룰 만큼 인기가 있는 소재였다. 1442년에 만든 이 소상팔경 시첩은 그림과 짝을 이룬 감상 시를 모은 것이다. 성삼문·박팽년·김종서 등 당시 엘리트 문사 19인의 글씨를 확인할 수 있으며, 그 내용을 통해 지금은 전하지 않는 소상팔경 그림의 분위기를 가늠할 수 있다.

 

47. 한석봉 증류여장 서첩 / 조선, 미술1관 서예실, 보물 제1078호

석봉 한호가 남쪽으로 돌아가는 친구 류기에게 즉흥으로 써준 서첩이다. 유명한 일화대로, 한석봉은 어머니에게서 어둠 속에서도 고르게 떡을 썰듯이 아름다운 글씨를 써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아 당대의 명필이 되었다. 그의 글씨는 ‘왕희지체’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강하고 힘찬 개성을 담고 있다. 선조 임금은 한석봉의 글씨에 감화되어 그가 쓴 ‘천자문’을 전국의 서당에 보급할 정도였다. 서첩에는 중국 당나라 시인 왕발·한무제·이백 등이 지은 시 세 편이 담겨 있고, 송별 모임에 참여한 이들의 이름도 적혀 있어 조선 중기 시문 풍류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48. 추사필 묵소거사자찬 / 조선, 미술1관 서예실

김정희가 자신의 호를 설명한 글씨다. 김정희는 대표적인 호 ‘추사’ 외에도 묵소거사, 완당 등 약 200개의 호를 만들어 사용했다. 김정희가 말하는 묵소거사란, 침묵할 때 침묵하고 웃어야 할 때 웃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쉽고도 어려운 추사의 인생철학을 반영한 것이겠다. 추사의 글씨체는 가늘고 길면서 변화가 큰 필획인데 그 속에 날카로움이 깃들어 있다.

 

49. 강세황 초상 / 조선, 미술1관 회화실, 보물 제590호

정조 시대의 화원 화가 이명기가 그린 강세황의 초상화다. 초상화는 사진이 없던 시절에 그 인물을 가장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는 매체였다. 유교사회의 모범이 되었거나 큰 공을 세운 충신, 학자, 승려의 초상화는 영당이라는 곳에 모셔지기도 했다. 학자이자 서화가인 그림 속 강세황의 모습은 꼿꼿한 성품과 함께 얼굴의 검버섯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이는 전신사조라고 해서 인물에 깃든 세월의 흔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면서도 내면의 품성을 전하고자 했던 우리나라 초상화 제작의 전통 방식을 나타낸다.

 

50. 풍속도첩 / 조선, 미술1관 회화실, 보물 제527호

조선 후기 서민의 생활 모습을 담은 단원 김홍도의 풍속도첩 중 하나다. 김홍도는 농, 공, 상을 가리지 않고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그림의 소재로 삼아 특유의 익살과 구수한 맛으로 엮어냈다. 스냅사진을 보는 듯한 그의 풍속화는 특징적인 한순간의 장면을 포착하여 투박하고 생동감 넘치는 필력과 배경을 생략한 대담한 구성 등 탁월한 연출의 묘를 보여준다. 보리밥에 탁주 한 사발을 들이켜는 농부들의 새참시간을 비롯해서 서당, 씨름, 무동, 기와 이기 등 당시의 시정 풍속이 가득히 열거되어 있다.

 

51. 강산무진도 / 조선, 미술1관 회화실

조선 후기의 화가 이인문이 그린 강산무진도다. 사계절의 변화무쌍한 자연 풍광을 소재로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장려하고도 세밀하게 표현했다. 조선 후기의 산수화는 작은 기왓장까지 세밀하고도 꼼꼼하게 표현하는 북종화 기법과 몇 번의 붓질만으로 정신과 의미를 나타내는 남종화 기법이 큰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인문은 그러한 산수화의 두 흐름을 한 작품 속에서 조화롭게 구현하여 조선시대 산수화의 격조와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52. 풍악도첩 / 조선, 미술1관 회화실

조선 후기의 대화가 정선이 그린 금강산 풍경이다. 36세 되던 1711년에 백석공이라는 사람과 함께 금강산을 처음 여행하고 그 풍경을 담은 것이다. 이 풍악도첩에는 내금강·외금강·해금강 등 명승의 특징과 형세가 고스란히 담겨 있으며, 당시에 유행했던 지도처럼 산봉우리마다 이름이 적혀 있다. 그러나 실제 경치를 관찰하고 그렸지만 자신의 머릿속에서 창의적으로 재구성하여 중심이 되는 것을 부각해놓았다. 이는 우리나라 산천의 아름다움을 사실적으로 표현해내는 진경산수화라는 새로운 양식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53. 유압도 / 조선, 미술1관 회화실

조선 말기의 선비화가 홍세섭이 그린 유압도다. 마치 현대의 수채화를 보는 듯한 담박한 느낌의 그림이다. 맑고 옅은 색에 진하고 특이한 먹을 가미하여 명암과 질감이 느껴지도록 표현했다. 물 위에서 헤엄치는 오리 두 마리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파격적인 구도 또한 강한 인상을 준다. 이러한 색다른 구도와 표현법은 당시 유입되고 있던 서양 회화의 영향으로 여겨지며, 조선 말기에 등장한 일련의 새로운 그림들을 이색화풍이라고 한다.

54. 맹호도 / 조선, 미술1관 회화실

조선 말기에 그려진 맹호도다. 예로부터 한반도에 호랑이가 많이 살았던 까닭인지 호랑이는 한국화의 소재로 큰 인기를 끌었다. 심사정이나 김홍도 같은 대가들이 그린 맹호도에서부터 아마추어 화가들이 그린 익살스런 모습의 호랑이 민화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그려졌다. 이 맹호도는 바늘보다 가는 선으로 촘촘히 털을 그려넣는 등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사실적으로 표현된 수작이다.

 

55. 미원 계회도 / 조선, 미술1관 회화실, 보물 제868호

미원은 사간원을 부르는 별칭으로, 사간원의 문인들이 친목을 다지기 위해 가진 모임의 한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모임을 소재로 한 계회도이지만 사람을 중심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자연의 풍광을 표현하는 데 더 중점을 두고 있다. 이는 자연을 중요하게 여겼던 당시의 풍조가 반영된 것이다. 그림 위에는 성세창이 그림을 본 느낌을 써놓은 글이 있고, 아래에는 유인숙·이황 등 계회에 참석한 관리의 이름·관직·본관 등을 써놓았다.

 

56. 문자도 / 조선, 미술1관 회화실

그림인지 글자인지 경계가 모호한 문자도다. 조선시대에는 좋은 뜻을 담은 한자를 그림처럼 그려서 늘 마음에 새기도록 했는데, 화려한 기교로 다듬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소망과 감정을 단순하고 소박하게 표현했다. 이 문자도는 유교적 윤리관에 따라 군자가 행해야 할 실천덕목을 표현한 것이다. 오른쪽부터 부모에 대한 효성, 형제간의 우애, 나라에 대한 충성, 친구 간의 믿음, 예절, 의리, 검소, 겸손의 뜻을 담은 효, 제, 충, 신, 예, 의, 염, 치를 쓰고 각 글자의 뜻과 관련된 상징물을 곁들여놓았다.

 

57. 곽분양의 즐거운 잔치 / 조선, 미술1관 회화실

중국 당나라 현종 때 곽자의라는 장군이 마련한 성대한 잔치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곽자의는 안록산의 난을 토벌한 공으로 높은 벼슬에 올라 많은 자손을 거느리며 평생토록 액운 한 번 없이 만복을 누렸던 인물이다. 이로 인해 팔자가 좋은 사람을 가리켜 ‘곽분양 팔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곽분양의 즐거운 잔치’는 곽자의와 같이 부귀영화와 오복을 기원하는 뜻으로 궁중에서 유행한 그림이다.

 

58. 어미개와 강아지 / 조선, 미술1관 회화실

조선 후기의 화가 이암이 그린 동물화다. 조선시대에는 생활 주변의 살아 있는 생물을 통해 자연의 흥취를 느끼게 하는 그림이 많이 그려졌다. 새와 꽃을 다룬 화조화, 동물을 다룬 영모화 등이 그것인데 이러한 그림에는 인간의 삶을 보호하고 도와주는 벽사와 길상의 의미가 담겨지기도 해서 더욱 큰 사랑을 받았다.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을 특히 잘 그렸던 이암은 젖을 먹기 위해 어미의 가슴으로 파고드는 강아지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사실적이면서도 서정적으로 포착하고 있다.

 

59. 무신년진찬도 / 조선, 미술1관 회화실

조선시대 궁중에서 잔치를 벌이는 장면을 담은 그림이다. 이런 그림을 진찬도라고 하는데 대왕·왕대비·대왕대비의 생신이나, 왕위에 오른 해를 기념하여 제작되었다. ‘무신년진찬도’는 1848년에 순원 왕후가 예순 살이 된 것을 기념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궁궐 안에는 신하들이 다 같이 모여 있지만 정작 주인공인 왕비의 의자는 비어 있다. 이는 신성하고 위엄을 지닌 왕비의 존재를 감히 그리지 못하고 의자로 표시만 해둔 것이다.

 

60. 신윤복 여속도첩 / 조선, 미술1관 회화실

혜원 신윤복이 그린 풍속화다. 서민의 생활 모습을 생생하게 다루었던 김홍도와는 달리 신윤복은 주로 기녀와 벼슬 없이 지내는 한량의 사랑을 소재로 하여 당시의 풍류와 사회상을 표현했다. 그는 한껏 멋을 부린 남녀의 모습을 강조하기 위해 가늘고 부드러운 필선과 선명한 채색을 가하였고, 구성의 묘가 배인 배경에서 회화적 역량을 펼치고 있다. 남녀유별의 유교사회에서 노골적인 사랑을 다룬 신윤복의 풍속화는 조선시대의 또 다른 사회상을 전해준다.

 

61. 청룡도 / 조선, 미술1관 회화실 전시예정

정월 초에 궁궐이나 관청의 대문에 붙였던 것으로 여겨지는 궁중 장식화다. 십장생·모란·용 등은 평안과 번영, 장수를 상징하는 궁중 장식화의 주요한 소재였다. 특히 용은 귀신과 재앙을 막는 신통력을 가진 존재로 여겨졌을 뿐 아니라 천자를 상징하기도 해 임금이 앉는 자리, 수레, 옷의 장식 문양으로 많이 쓰였다. 조선시대의 용 그림은 구름이나 물속을 배경으로 그려지거나 호랑이와 힘을 겨루는 장면 등으로 다양하게 묘사되었다. 그림 속의 청룡은 먹구름 사이로 몸을 틀며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는 모습인데 활달하고 섬세한 필선과 아름다운 채색이 어우러져 힘찬 웅혼과 생명력이 전해지는 듯하다.

 

62. 감지금니 화엄경 그림 / 고려, 미술1관 불교회화실

부처의 말씀을 기록한 책을 경전이라고 한다. 경전을 정성스럽게 베낀 것을 사경이라고 하는데 사경을 만드는 일은 불교에서는 좋은 업을 쌓는 것으로 여겨진다. 사경은 부처의 말씀을 수록하는 것이라 가장 좋은 재료인 금가루, 은가루를 써서 화려하게 꾸며졌다. 검푸른 종이 위의 금빛 글자와 그림은 일일이 손으로 작업한 것으로 종교적 엄숙함과 만든 이의 깊은 신앙심이 전해진다. 이렇게 화려한 사경은 고려시대에 많이 만들어졌다.

 

63. 감로를 베풀어 아귀를 구해냄(감로도 甘露圖) / 조선, 미술1관 불교회화실

아귀도에 빠진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음식을 공양하는 장면을 그린 불화다. 부처의 수제자 목련존자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아귀도에 빠져 먹지 못하는 고통을 당하자 참회의 날에 부처님과 스님께 온갖 음식을 바쳐 어머니를 구제한다. 그 어머니는 부처가 주신 감로(甘露), 즉 달콤한 이슬을 마신 뒤 깨달음을 얻고 영원한 삶을 이어갔다. 불교 경전 속의 이 이야기는 조상을 숭배하는 효자상으로 여겨져 우리나라와 중국에서 특히 많이 그려졌다.

 

64. 야외의식용 괘불 / 조선, 미술1관 불교회화실

야외에서 열린 불교 법회 의식에 걸렸던 거대한 불화다. 조선시대의 사찰에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과 같은 전쟁을 겪으면서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고, 살아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위무하기 위한 의식을 자주 열었다. 불상을 대신해서 예불의 대상으로 봉안된 이 괘불에는 인도의 영취산에서 부처가 처음으로 묘법연화경을 설법하는 영산회 장면이 그려져 있다. 영산회란 현실 세계를 벗어난 깨달음의 세계, 즉 부처님이 사시는 깨끗한 세상에 다시 태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의 염원이 담겨 있다.

 

65. 사자도 / 조선, 미술1관 불교회화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먼저 저승의 왕들에게 불려간다고 믿는다. 저승사자는 왕들의 심부름꾼으로 죽은 사람이 살아 있을 때 한 일들을 적은 책을 저승의 왕들에게 전달하는 일을 한다. 말에서 막 내린 저승사자는 무표정하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당당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사자 뒤의 말 또한 금방이라도 달려나갈 듯이 생동감이 넘쳐 보인다. 이와 같이 불화는 불교 경전의 어려운 내용을 좀더 쉽게 설명할 수 있어서 사람들에게 부처의 말씀을 전하는 좋은 교재가 되었다.

 

66. 시왕도 / 조선, 미술1관 불교회화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저승세계에 있는 열 명의 왕을 차례로 만나 심판을 받는다고 한다. 이 일은 극락이나 지옥에 가기 전인 명부라는 곳에서 이루어지는데 이곳에 있는 열 명의 대왕을 그린 그림을 시왕도라고 한다. 시왕도의 윗부분에는 왕이 심판하는 모습이 그려지고, 아랫부분에는 끔찍한 지옥이 묘사된다. 그림 속의 대왕은 맨 처음 만나는 진광대왕으로 불효와 같은 큰 죄를 지은 사람을 칼산에 가두는 벌을 내린다. 시왕도는 경각심을 통해 중생이 현생에서 착하게 살라는 가르침을 주는 그림이다.

 

67. 반가사유상 / 삼국, 미술1관 불교조각실, 국보 제78호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의 반가사유상이다. 금동으로 만든 반가사유상 가운데 가장 큰 이 상은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표현으로 우리나라 불교 조각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살짝 미소를 머금고 있는 살진 얼굴, 꿈틀거릴 것만 같은 오른손, 얇은 옷으로 인해 드러난 인체의 아름다움 등은 삼국시대 조각가의 빼어난 솜씨로 탄생되었다. 특히 일본 국보 제1호인 교토 고류지의 반가사유상은 반가사유상(국보 제83호)과 매우 닮아 있는데, 녹나무를 짜맞추는 방식의 일본 조각상과 달리 붉은 소나무에 직접 조각한 방식으로 보아 한반도의 전래품으로 여겨진다.

 

68. ‘연가칠년’이 새겨진 부처(연가칠년명 금동 불 입상 延嘉七年銘 金銅 佛 立像) / 고구려 539년, 미술1관 불교조각실, 국보 제119호

만들어진 때를 알 수 있는 우리나라 불상 중에서 가장 오래된 불상이다. 불꽃 무늬가 새겨진 커다란 광배의 뒷면에 47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어 불상 발원의 배경이 밝혀져 있다. 즉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에 동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539년에 1000개의 불상을 만들었고 이 불상은 스물아홉 번째라고 한다. 그런데 불상이 발견된 곳은 신라의 땅이었다. 이는 불교를 널리 알리겠다는 고구려 사람들의 불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69. 경주 구황동 삼층 석탑 출토 부처와 아미타불좌상 / 통일신라, 미술1관 불교조각실, 국보 제80호, 국보 제79호

황복사 터 삼층석탑에서 출토된 순금제 불입상과 아미타불좌상이다. 1942년에 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사리함 뚜껑에 눌러 쓴 기록에 의하면, 692년에 효소왕이 아버지인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석탑을 만들고 그 안에 금동사리함을 넣었다고 하며, 706년에 아들인 성덕왕이 다시 탑을 열어 사리함에 무구정광다라니경을 넣었다고 한다. 왕실 후원으로 순금으로 만들어진 이 불상들은 두께가 1mm도 채 되지 않는 고도의 주조기술로 완성되었다.

 

70. 감산사 미륵보살입상, 아미타불입상 / 통일신라, 미술1관 불교조각실, 국보 제81호, 제82호

경주 감산사 터에 있던 미륵보살상과 아미타불상이다. 명문에 의하면 당시 최고의 행정기구인 집사성의 시랑 김지성이 719년에 돌아가신 부모님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전 재산을 내놓아 감산사를 짓고 두 불상을 만들게 했다고 한다. 어머니를 위해 발원한 미륵보살상은 이전의 보살상에 비해 장식이 훨씬 화려하고 관능적인 모습인데, 이는 당대에 유행했던 인도의 굽타양식을 수용한 결과다. 이러한 사실적인 표현과 능숙한 석조기술은 50년 뒤 석굴암의 조성으로 이어진다.

 

71. 춘궁동 출토 철불좌상 / 고려, 미술1관 불교조각실, 보물 제332호

철로 만든 우리나라 불상 중에서 가장 큰 상이다. 원래는 경기도 광주시 춘궁리 절터에 있던 불상인데 겉옷의 표현이나 손 모양 등 석굴암의 본존불과 같은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부처의 손 모습은 각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편하게 손을 내려놓은 것 같지만 이 손 모양은 부처가 보리수 밑에 앉아 명상을 할 때 악마가 나타나 방해를 하자 땅에 있는 신을 불러내 자신의 깨달음을 증명했던 순간을 나타낸다. 이 손 모양을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불상의 손은 불교의 사상을 형상으로 보여주는 구실을 한다.

 

72. 감은사 동탑 집 모양 사리기 / 통일신라, 미술1관 불교조각실, 보물 제1359호

감은사는 신라를 통일한 문무왕이 마지막 유언으로 동해를 지키는 용이 되겠다는 호국정신을 기려 만든 절이다. 현재는 서탑과 동탑만이 남아 있는데 동탑에서 이 사리갖춤이 발견되었다. 사리란 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뒤 화장했을 때 몸에서 나온 구슬로, 불교에서 가장 성스러운 예배 대상이다. 그래서 소중한 사리를 보관하는 사리기들은 정성을 다해 아름답게 만들고 보호를 위해 여러 겹으로 제작되었다. 감은사 동탑 사리기는 사리를 넣은 수정병을 호리병에 넣고, 다시 사천왕이 지키는 사리 외함에 넣어 보관했는데 우리나라 사리기의 최대 걸작으로 꼽힌다.

 

73. 청동 은입사 물가풍경 무늬 정병 / 고려, 미술2관 금속공예실, 국보 제92호

절에서 부처님께 예배를 드릴 때 쓰이는 의식구로, 맑은 물을 담는 병이다. 날씨가 더운 인도 승려들이 물병을 휴대하는 관습에서 유래되었다. 정병은 승려가 지니는 18가지의 필수품 중 하나가 되었고 불화에서 관세음보살이 지니는 용기로 그려진다. 겉에는 고려인의 자연관에 따라 흐드러진 버드나무와 물결 따라 노를 젓는 어부, 한가롭게 노니는 물오리들이 아주 평화롭게 펼쳐져 있다. 이러한 무늬는 표면에 홈을 파고 은실을 박아넣은 상감기법으로 만들어졌다.

 

 

74. 천흥사 범종 / 조선, 미술2관 금속공예실, 국보 제280호

현종 1년인 1010년에 천흥사에서 만든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범종이다. 범종은 절에서 시간을 알리거나 사람들을 모을 때, 또 의식을 진행할 때 쓰인다. 불교에서는 범종을 울리면 장엄하고 청명한 소리가 먼 지옥까지 닿아 참회의 마음을 갖게 한다고 여겼다. 천흥사 범종은 으뜸으로 꼽히는 신라의 범종 양식을 충실히 계승하면서도 여의주를 문 용뉴, 비천상 등 새로운 고려의 감각을 발휘한 뛰어난 작품이다.

 

75. 문갑 / 조선, 미술1관 목칠공예실

문방구나 문서를 정리하기 위한 가구다. 문구갑이라는 원래의 이름을 줄여서 문갑이라고 한다. 문갑은 주로 바닥에 앉아서 생활하는 우리 전통 한옥양식에 맞게 창틀 정도의 높이로 제작되었다. 사랑방과 안방에서 모두 사용했는데 주로 뒷마당으로 난 창 아래쪽에 놓았다. 나뭇결이 그대로 살아 있어 자연미가 돋보이는 조선시대의 문갑은 문방구이나 문서를 보관하는 용도 외에도 그 위에 난, 수석 등을 늘어놓아 품격 높은 진열대 구실도 했다.

 

76. 사방탁자 / 조선, 미술1관 목칠공예실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사방탁자는 전통 가구 중에서 높이가 높은 가구에 속한다. 책을 올려놓거나 장식품을 진열하기 위한 용도로 쓰였다. 보통 3단이나 4단으로 만들어 키는 크지만 사방이 네모나게 트여 있어서 시원한 느낌이 든다. 맨 아래층에는 문이나 서랍을 달아 중요한 물건을 보관했다. 기둥과 널판만으로 이루어진 모던한 조형미는 간결하고 소박한 멋을 추구했던 조선시대 선비의 감각과 잘 어울린다.

 

 

77. 나전대모 칠 국화 당초무늬 불자 / 고려, 미술1관 목칠공예실

승려들이 수행할 때 들고 다니던 불자(拂子)다. 불자(拂子)는 원래 벌레를 쫓는 데 쓰던 생활도구였는데 불교에서는 수행하는 사람의 마음속 번뇌와 티끌을 떨어낸다는 상징적인 의미의 법구로 쓰였다. 보통 한쪽 끝에 드리개 장식을 달고 다른 쪽 끝에 갈고리 모양의 금속을 연결하여 소나 말의 꼬리털을 단다. 이 불자는 장식이 모두 떨어져나가고 대만 남은 상태이나 원래는 독특한 나전칠기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삼국시대부터 시작된 나전칠기 기법은 바다거북의 등껍데기를 얇게 갈아 투명하게 만든 뒤 뒷면에 색을 칠해 은은하게 배어나도록 만든 작은 조각을 붙이는 방법이다.

 

78. 청자 참외 모양 병 / 고려, 미술2관 도자공예실, 국보 제94호

고려 17대 임금인 인종의 무덤에서 출토된 청자 참외 모양 병이다. 고려청자의 기술과 아름다움이 절정에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이 청자는 무늬는 없지만 팽팽한 참외 모양의 몸체와 유려한 선이 돋보이는 목 부분, 참외 꽃을 연상시키는 입술 등에서 완벽한 비례와 단아한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은은하게 발산하는 옥빛은 고려청자의 비색으로 여겨지던 것으로 동시대의 중국 제품을 능가하는 맑고 깊은 담녹색을 띠고 있다.

 

79. 청자 칠보무늬 향로 / 고려, 미술2관 도자공예실, 국보 제95호

국내외적으로 널리 알려진 청자의 명품이다. 고려청자에서는 드물게 음각, 양각, 투각, 퇴화, 상감, 첩화 등 다양한 청자기법이 절묘하게 집약되어 있다. 섬세한 장식이 많은 듯하면서도 전체적으로 조화와 균형이 잘 잡혀 안정감이 뛰어나다. 연꽃 모양으로 된 부분이 향을 태우는 부분이고, 뚜껑에 있는 칠보무늬 구멍을 통해 향이 빠져나가도록 해놓았다. 받침대에 장식된 앙증맞은 세 마리의 토끼는 고려 도공의 조형적인 감각과 숙련된 기교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80. 청자 대나무 학무늬 매병 / 고려, 미술2관 도자공예실, 보물 제903호

주둥이가 작고 몸체가 팽팽한 형상의 청자 매병이다. 병의 몸체에는 한 폭의 그림과 같은 멋진 무늬가 장식되어 있는데, 그림 자체만으로도 손색없는 훌륭한 작품이다. 대나무와 매화나무는 바람에 흔들리는 듯하고,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멀리 하늘을 나는 학은 작게 표현되어 좁은 공간 속에서도 거리감이 잘 살아 있다. 오랜 관찰의 결과인 듯 모든 소재가 사실적인 표현으로 완성되어 있다.

 

81. 분청사기 상감인화 용무늬 항아리 / 조선, 미술2관 도자공예실, 국보 제259호

조선 전기에 새롭게 등장한 분청사기는 소박하고 아름다워서 조선시대 사람들의 검소한 취향에 잘 맞았다. 특히 거친 듯하면서도 재치가 가득한 무늬가 많아서 서민들에게도 큰 인기를 끌었다. 이 항아리는 표면에 무늬를 파서 그 안에 백토(흰 흙)나 주토(붉은 흙)를 넣어 구워내는 상감기법으로 용무늬를 냈다. 윗부분에는 물결무늬와 원무늬가 새겨진 도장으로 촘촘하게 찍는 인화(印花) 기법으로 장식하여 활기찬 미감을 나타냈다.

 

82. 분청사기 박지철채 모란무늬 자라모양 병 / 조선, 미술2관 도자공예실, 국보 제260호

한쪽 끝의 주둥이와 납작한 몸체가 자라를 닮았다고 하여 자라병이라고 불리는 분청사기다. 주둥이에 끈을 매어 허리춤이나 말안장에 묶으면 휴대하기 편리해서 여행용 물병이나 술병으로 사용한 듯하다. 하얀색 모란꽃 무늬는 바탕에 백토를 바른 뒤 무늬 부분만 남기고 나머지를 긁어낸 다음 검은색 철화 안료를 바탕에 덧칠해서 완성한 것이다. 백토 분장을 하는 분청사기의 특성을 이용한 독특한 기법이라 하겠다.

 

83. ‘밀양 장흥고’가 새겨진 분청사기 접시 / 조선, 미술2관 도자공예실

작은 국화꽃 무늬로 장식한 분청사기 접시다. 국화꽃 하나하나의 모양이 똑같은 것은 국화 무늬가 새겨진 도장으로 찍어냈기 때문이다. 이것을 인화기법이라고 하는데 자국이 난 자리에 백토로 메워 그 모양을 드러낸 것이다. 그릇 바닥에는 장흥고라는 글자가 상감되어 있다. 장흥고는 궁중에서 사용하는 물품을 대어주거나 관리하던 관청 이름인데 이 그릇의 사용처를 나타낸 것이다.

 

84. 백자 달항아리 / 조선, 미술2관 도자공예실

한가위 보름달처럼 둥근 모양이라고 해서 달항아리라는 정겨운 이름으로 부르는 백자 항아리다. 은은한 색과 함께 덜하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는 넉넉한 곡선이 감상 포인트다. 가운데를 자세히 보면 가느다란 선이 보이는데, 이는 그릇의 몸체가 너무 커서 윗부분과 아랫부분을 이어 붙여 만들었기 때문이다. 완벽한 원형이 아니라 약간 기울어진 모양이지만 오히려 푸근하고 자연스러운 멋이 풍긴다.

 

85. 백자 매화 대나무 새무늬 항아리 / 조선, 미술2관 도자공예실, 국보 제170호

하얀 백자에 푸른색 물감으로 그림을 그린 백자 항아리다. 둥그런 도자기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조선 전기의 청화백자 문양은 한 폭의 회화 작품을 보는 듯 자연스럽고 빼어난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이는 푸른색을 내는 코발트 안료가 멀리 아라비아에서 수입해온 귀한 것이라 능숙한 솜씨의 화원화가들이 그림을 그렸던 까닭이다. 대나무, 매화, 새의 모습이 사실적이면서도 입체적으로 보인다.

 

86. 백자 포도 원숭이 무늬 항아리 / 조선, 미술2관 도자공예실, 국보 제93호

흑갈색 무늬가 돋보이는 철화백자 항아리다. 철화백자는 산화철 안료로 무늬를 그린 것인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 청화 안료를 구하기 어려웠던 17세기에 가장 유행했다. 항아리에는 포도 덩굴 사이를 잽싸게 뛰어넘는 원숭이가 그려져 재미를 더해준다. 원래 원숭이는 지혜를, 포도는 풍요로움을 의미하는데 조선시대 백자의 문양으로 자주 등장하곤 한다. 생동감 넘치는 붓자국, 세련된 공간감이 돋보이는 조선시대 철화 백자의 걸작이다.

 

87. 청백자 두 귀 달린 병 / 중국, 아시아관 신안해저문화재실

중국에서 만들어진 청자 어룡식 화병이다. 전체적으로 문양이 없어서 깔끔해 보이고 정돈된 모양을 갖추고 있다. 두껍게 유약을 발라 구워서 아름다운 비취색을 띠는데 이는 모두 중국 도자기의 특징이다. 화병에 달린 귀는 물고기 모양이기는 하지만 얼굴이 용을 닮았다고 하여 어룡이라 부른다. 비늘과 지느러미 등을 세밀하게 표현했는데 우리나라 고려청자에도 어룡형 주전자가 있어서 그 미감의 차이를 비교해 볼 수 있다.

88. 백자 쌍엽문접시
중국, 아시아관 신안해저문화재실

타원형의 접시 위에 나뭇잎과 글자가 씌어져 있는 중국 백자다. 이는 당나라 선비 우우와 궁녀의 순애보를 다룬 것이다. 어느 가을날 산책길에 오른 우우는 계곡물에 떠내려오는 잎사귀 하나를 발견한다. 거기에는 사람냄새 나는 바깥세상을 그리는 궁녀의 시가 적혀 있었는데 쓸쓸했던 우우의 마음을 사로잡아버렸다. 세월이 흘러 궁녀가 늙어 출궁한 이후 두 사람은 서로를 확인하고 백년가약을 맺었다. 이 일화는 백자 위의 쌍엽문과 궁녀의 시로 남아 있다.

89. 곡식 담는 청동그릇-궤 / 중국, 아시아관, 중국실

청동으로 만든 중국 고대 식기, 궤이다. 중국식 발음으로는 ‘꾸이’라고 한다. 청동궤는 조나 수수 등 곡식을 담는 용기로 쓰였다. 제사용 그릇으로도 이용되어 세 발 달린 솥과 함께 무덤에 매장하는 부장품으로 사용되었다. 중국의 옛 문헌인 ‘예기’에 의하면 신분이나 계급에 따라 궤의 매장량이 달랐는데 천자는 아홉 개, 제후는 일곱 개를 매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천자와 함께 묻히는 부장용 궤는 더욱 정성을 기울여 양쪽 귀와 굽에 유행하는 무늬를 섬세하게 새겨넣었다.

 

90. 삼채말(三彩馬) / 중국, 아시아관 , 중국실

중국 당나라에서 만든 당 삼채마다. 삼채는 세 가지 색만을 썼다기보다 녹색, 황색, 백색, 적색, 갈색 등 다양한 물감을 칠해 산화시켜 구운 도자기를 말한다. 삼채는 한대 이후 납이 들어간 유약을 기본으로 점점 발전하게 되는데 생활용기뿐 아니라 왕실 무덤의 부장품으로도 쓰였다. 자기는 고온에서 굽고 유약을 발라 다시 굽는 과정을 거치는데 미세한 온도 변화에도 색이 달라지기 때문에 고도의 기술이 요구된다. 당 삼채마는 군청색이 특히 맑고 아름답게 표현된 수작으로 꼽힌다.

91. 불법을 수호하는 신-천부흉상(天部胸像) / 중앙아시아, 아시아관 , 중앙아시아실

중앙아시아에서 제작된 천부흉상이다. 마치 중앙아시아의 여인을 실제로 보는 듯하다. 둥글고 긴 눈썹이 콧날까지 연결된 얼굴은 새침하지만, 미소에서는 여유가 느껴지고 불상의 미소처럼 보인다. 천부흉상 곳곳에는 색칠한 흔적이 있다. 얼굴과 몸통에는 하얀 칠이 남아 있고, 가슴에 새긴 문양 안에는 녹색이, 머릿결 안쪽에는 검은색의 칠이 남아 있다.

 

92. 복희여와도 / 중앙아시아, 아시아관, 중앙아시아실

중앙아시아 투르판 아스타나 묘실 천장에 부착되었던 복희와 여와의 그림이다. 신화에 의하면 하늘을 열고 세상을 만든 천지창조의 신 복희와 여와는 땅을 다스리는 신 고비의 아들과 딸이다. 하반신은 뱀으로 표현되는데 오른쪽의 수염이 난 신이 복희이고, 왼쪽의 발그스레한 볼과 입술을 가진 여인이 여와다. 복희가 든 자와 여와가 든 컴퍼스는 그들의 창조 업적을 상징한다. 천에 그려져 묘실의 천장에 붙여놓았던 것이라 못 자국인 듯 구멍이 남아 있다.

93. 허리띠 버클-금제교구(金製金交具) / 낙랑유적출토품, 아시아관, 국보 제89호

낙랑시대의 유물인 금제교구다. 낙랑군은 한 무제가 고조선을 멸망시킨 뒤 설치한 군현의 하나로, 약 500년간 한반도 서북지역을 점거하며 낙랑토성과 주변의 고분들을 중심으로 금제교구와 같이 화려한 부장품을 많이 남겼다. 교구는 벨트를 묶고 조이는 버클과 같은 것이다. 순금으로 된 대형 버클에는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것 같은 용들이 새겨져 있는데 좁쌀보다 더 작은 금 알갱이와 금실을 일일이 녹여 붙이는 누금 기법을 사용해서 더욱 화려하고 생동감이 넘친다. 비슷한 유물이 중국에서도 나오는 것으로 보아 한나라가 주변 국가에 내린 하사품인 듯하다.

94. 이마리 도자기 / 일본, 아시아관, 일본실

일본의 에도시대에 만들어진 이마리 도자기다. 에도시대는 우리나라의 조선 후기에 해당되는 시기로, 일본은 임진왜란 당시 우리나라에서 도공들을 데려가 도자기술을 크게 발전시킨다. 이마리 도자기는 일본의 규슈 지역의 이마리 항구에서 수출되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코발트로 그림을 그려 장식하거나 유약 밑에 그림을 그리는 등 다양한 방식을 응용하여 화려한 도자기를 만들었다. 소메스케, 이로에 도자기가 대표적인 예이며 해외 수출 이후 유럽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95. 혼수 칠기 세트 / 일본, 아시아관, 일본실


칠공예는 한국, 중국, 일본은 물론 동남아시아 국가들에서도 성행했다. 일본은 6세기경부터 중국 당 문화의 영향을 받아 가구, 식기 등 다양한 영역에서 칠기로 된 생활용품을 제작했다. 오늘날 일본을 뜻하는 영어 재팬은 15~16세기에 포르투갈, 네덜란드와의 무역을 통해 일본 칠기가 유럽에 널리 소개되었을 때 칠기를 뜻하는 일본말 ‘자판(japan)’에서 유래된 것이다. 칠기 중에서도 마키에는 옻칠과 금은 가루를 섞어 그릇을 장식하는 일본 특유의 기법으로 일본적인 세련된 장식미가 돋보인다.

96. 가네샤 석조신상 / 인도네시아, 아시아관, 인도네시아실

인도 힌두교의 신, 가네샤 신상이다. 사람 몸에 코끼리 얼굴, 네 개나 되는 손 등 특이한 외모를 지녔다. 가네샤는 힌두교의 삼신 중 하나인 시바와 그의 부인 파르바티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전설에 의하면 어머니의 뜻을 지키려다 아버지의 뜻을 어기게 되어 목을 베이는 참수를 당했다. 아들의 강직함을 안타깝게 여긴 시바는 그의 죽은 몸에 생명을 불어넣었는데 없어진 아들의 머리 대신 지나가던 코끼리 머리를 떼어 붙였다고 한다. 가네샤는 지혜와 배움, 행복을 관장하는 신으로 알려져 있어 오늘날에도 사업의 시작과 번창을 기원할 때 찾는 신상이다.

97. 부처건칠 석가여래상 / 두부 가네코 가즈시게 기증, 기증관, 가네코 가즈시게실

16세기 미얀마의 건칠 불두다. 불교국가인 미얀마에는 불상조형이 성행해서 불상이 다양한 조형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이 불두는 건칠 기법으로 제작된 것으로 통통하고 둥근 얼굴은 미얀마 북부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 건칠 기법은 나무나 흙으로 골격을 만들고 그 위에 종이나 천을 씌운 뒤 반복적으로 칠을 입혀 불상을 만드는 방법이다. 건칠 불상은 석상이나 금속류의 상에 비해 가벼워서 불상의 순행 시 많이 만들어졌다.

 

98. 장식용 머리꽂이 / 기증관, 하치우마 다다스실

조선시대 여성들이 머리를 꾸밀 때 사용한 장식용 머리꽂이다. 단순한 꽃 모양이 아닌 입체적으로 보이도록 제작된 이 머리꽂이는 화려한 금세공술도 돋보이지만 떨잠처럼 머리가 움직일 때마다 조금씩 흔들리는 장식 효과를 의도한 것이 독특하다. 지금은 꽂이 부분이 사라지고 꾸미개만 남아 있지만 칠보 무늬, 박쥐 무늬, 꽃, 잎사귀 무늬를 금 알갱이와 얇은 금실로 붙여 만드는 정교한 세공 방법으로 만들어져 나무랄 데 없는 분위기를 연출한다.

99. 도깨비얼굴무늬 기와 / 기증관, 이우치 이사오실

건물 지붕에 매달았던 도깨비 얼굴무늬 기와다. 옛사람들은 도깨비 얼굴이 그려진 기와가 잡귀를 쫓는다고 생각해서 지붕 위 잘 보이는 곳에 세워두었다. 부릅뜬 눈과 들창코, 옆으로 찢어진 입, 날카로운 뿔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재미있게 표현되어 있다. 이 유물은 일본인 이우치 이사오가 한국 기와의 매력에 빠져 평생토록 수집한 결과로 만나게 되었다. 기와를 찾아 한국을 70차례도 넘게 방문할 정도였다고 한다.

100. 보살무늬 수막새 / 통일신라, 기증관, 유창종실

지붕에 얹는 기와는 부위마다 다른 모양을 띠고 있다. 이 둥근 모양의 수막새도 그중 하나인데 섬세한 표현과 안정감에서 하나의 완성된 작품처럼 통일감이 나타나 있다. 중앙의 보살은 다소 두드러진 모습이지만 꽃무늬, 둥그런 테두리와 적절히 조화를 이룬다. 우리나라 기와에는 연꽃무늬, 새무늬, 덩굴무늬 등 여러 가지 무늬가 나타나지만 보살무늬로 장식된 예는 드물다. 이는 석굴암이 조성된 불교문화의 전성기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 자료 - 주간동아 511호 별책부록 기획·취재 김민경 / 자료 정리 최정주 인하대 강사, 국립 모바일사업 어린이 팀장(유물 부문) 박미정 경희대 문화예술 경영학과 석사(박물관 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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