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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전라남도

담양 추월산 보리암 물통골 추성주

by 구석구석 2023.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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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양읍에서 29번 국도를 따라 정읍방향으로 가다보면 용면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계속 직진하면 추월산과 담양댐으로 가는 갈림길과 추월산 터널이 나오는데, 터널을 통과하여 담양댐이 내려다보이는 굽이친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왼편에 추월산 입구가 보인다.

담양2경-추월산 관리사무소 061-380-3492

담양읍에서 북쪽으로 14km쯤 가면 전남 5대 명산중의 하나인 해발 731m의 추월산을 만나게 된다. 담양읍에서 보면 스님이 누워 있는 형상인데 각종 약초가 많이 자생하고 있어 옛부터 명산으로 불렸으며, 진귀종의 추월산난이 자생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추월산 하부는 비교적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고, 노송이 빽빽이 들어차 있어 여름이면 가족을 동반한 관광객들에게 더없는 휴식처가 되고 있으며, 그리 높지 않지만 그렇다고 쉽게 오를 수 없는 산능성으로 연중 등산객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이다.  

 경칩(2∼3월)을 전후해서 용면 분통마을 주변에서 나는 두릅은 상큼한 향기와 특유한 맛으로 봄의 미각을 한껏 돋우어 준다.산 중부의 울창한 숲을 지나 추월산 정상에 오르면 기암절벽이 장관을 이루고 산아래에 널직하게 펼쳐지는 담양호와 한데 어우러져 그야말로 절경을 이룬다. 추월산과 담양호와 만나는 지점에 관광단지가 조성되어 식당과 주차장 등 편익시설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추월산에 올라 정상에 가까이 다다르면 깎아지른듯한 암벽에 사찰 보리암 061-381-1730이 자리잡고 있다. 아래서 올려다 보면 바위에 걸려 있는 제비집처럼 보이지만 암자에 들어서면 아늑하고 발아래 푸른 송림이 수면처럼 펼쳐져 있으며, 담양호가 명경같이 산 그림자를 안고 있는 수려한 경관에 심취되어 무아지경에 이른다.

'왜 이렇게 오르기 힘든 높고 험한 곳에 암자를 지었을까?'하는 생각이지만 그도 그럴 일이다. 기도하고 참선하며 용맹정진하려면 속인들의 발걸음이 쉬이 닿지 않아야 하리라. 또 남자들도 오르 내리기 어려워야 수행에 도움이 될 터. 힘들게 가는 것 자체가 수행일 것이니.

한시간여 낑낑대며 오르자 아래서는 나무사이로 '빼꼼히' 보이던 보리암이 눈앞에 다가와 있다.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돌리고 뒤돌아보니 가히 장관이다. 푸른 호반과 연녹색으로 물들어가는 삼림을 보노라면 저절로 탄성이 나온다. 추월의 가을 단풍엔 비할 바가 아니지만 이제 막 물들어가는 파스텔톤 연초록 물결도 만만찮다. 가을은 가을이고 봄은 봄이다.

한 숨 고르고 암자 입구로 들어서니 길가 바위에 다소 어지러이 새긴 한문자 몇자와 비석이 먼저 인사를 건넨다. 수직 절벽으로 이뤄진 이곳은 사실 역사적으로 슬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임란때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했던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부인 흥양(興陽) 이(李)씨의 의절터인 것. 부인 이씨는 당시 왜군에 쫓겨 도망가다 이곳에 이르러 몸을 던져 순절했다. 부인 사후 1840년(헌종 6년) 담양부사 조철영(趙徹永)이 그 자리 바위에 부인을 기리는 글귀를 새겨 놓았다.

'金忠壯公 德齡夫人 興陽李氏 萬曆 丁酉罵 倭賊殉節處□ 潭陽 秋月山'이라는 명문이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나선 장군의 기개를 부인도 초연히 따랐다는 생각이 드니 숙연해지는 느낌이었다. 이런 일 말고도 추월은 임란때 의병들이 모여 왜군과 치열한 싸움을 벌였고 동학군이 항거했던 역사성을 인정받아 드물게 산 전체가 지방기념물 4호로 지정돼 있다.

순절터임을 알리는 비석을 지나면 바로 암자로 들어선다. 초입에서 목을 축이고 마당에 내려서자마자 앞에 펼쳐지는 시원한 호반경치는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일망무제 푸른 바다를 내다보는 즐거움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은 곳이 여수 향일암이라면, 내륙에서 물과 산등성이들을 함께 내다보는 기쁨이 이만저만 좋지 않은 곳이 바로 이곳 추월산 보리암이다. 

아찔한 수직의 벼랑에다 아슬아슬 매달듯 지은 전남 담양 추월산의 암자 보리암. 스스로 벼랑 끝으로 밀어붙이는 수도자의 비장한 정신이 느껴지는 곳이다.

달마대사 누워있는 형상

법당은 해가 솟는 동쪽을 향하고 있고 그 옆으로 요사채가 한 채 있다. 대웅전 앞 뜰은 꽤 넓어보이지만 사실은 절벽을 다듬어 방을 내고 그 위에 마당을 만들었다. 그러니 마당 끝으로 나서면 곧바로 수십 길 낭떠러지다. 마당 밑 요사채로 들어가려면 마당 한켠에 난 지하통로(?)로 내려서야 하는데 마치 무슨 요새로 들어서는 길 같다.

법당 아래 절벽으로 내려서면 작은 동굴법당도 있다. 이 동굴법당엔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32년전 한 노승이 수직절벽에 있던 작은 동굴을 넓혀 법당으로 만들려고 인부 세명을 동원해 돌을 쪼아내는 작업을 시작했다. 작업 시작후 스님과 인부들 꿈자리가 하도 사나워 정성을 다한 기도끝에 작업을 계속했다. 어느 정도 파들어갔을 무렵 작업 속도를 높일 생각에 남포(다이나마이트)로 폭파하기 위해 구멍을 뚫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천둥과 벼락이 내리쳐 놀란 인부들이 도망가 버렸다. 그리고는 그 스님과 인부들 셋이 차례로 1년안에 모두 숨졌다는 것이다. 

알고본 즉 추월산은 달마대사가 누워있는 형상이고 남포용 구멍을 뚫은 곳은 바로 달마대사 머리 속 뇌에 해당하는 부분이었다고 한다. 이후로는 절대 그 동굴에 손대지 않고 불공만 드리고 새로운 스님이 올 때마다 지켜야 할 첫번째 계율로 동굴 훼손하지 말것을 이야기한단다.

보리암은 산밑이나 옆에서 보면 마치 제비집이 처마끝에 매달려 있는 형상이다. 보리암이 이곳에 터를 잡은 것은 예사롭지 않은 이유가 있단다.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에 주석중이던 보조국사가 새 절을 짓고자 나무로 만든 매 세마리를 날려 보냈는데 그 매가 가 앉은 곳이 송광사와 백양사터, 그리고 이곳 추월산 보리암터였다는 것이다.

새를 날려 보내 앉은 곳에 터를 잡았다는 설화는 다른 절집에서도 간혹 보이지만 하여튼 이곳이 길지요 명지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임은 분명하다. 부처님이 깨달은 지혜, 불교 최고의 지혜를 이르는게 '보리'이니 그런 이름을 붙일 정도면 이곳 터가 범상치 않은 곳이라는 것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우리 나라에는 '3보리암(三菩提庵)'이 있습니다. 남해 금산 보리암, 강원도 고성 보리암, 그리고 이곳 추월산 보리암 등 세곳이 기도도량으로 유명한 데 공통점이 있습니다. 대웅전이 모두 낭떠러지 위 바위에 자리를 잡았으며 모두들 쉽게 접근하기 힘든 곳에 위치하고 있다는 겁니다. 금산 보리암만 해도 그렇잖아요. 그곳이 과거엔 배타고 건너 올라야 하니 가는데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그렇게 힘들게 찾아가 수행에 정진하려는 뜻으로 그런 곳에 터를 잡았을 겁니다."

보리암이 언제 창건됐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보조국사가 창건했다는 이야기는 전하나 그 연대는 알 수 없다. 지난 1983년 암자 법당을 중창하고 나서 보리암 올라가는 길 중턱에 세운 '추월산 보리암 중창공덕비'엔 절 창건을 '1198년'으로 적고 있으나 이는 아마도 보조국사가 살았던 시대와 활동내용을 추적, 계산한 것이 아닌가 싶다.

1694년(숙종 20년)에 쓰여진 보리암 중수기가 현재 법당에 보존돼 있는데 여기에도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다'고 기록돼 있다. 이 중수기는 용면 도림리 출신 신태순(申泰純)이 쓴 것인데 신씨 문중에서 보관해 온 덕분에 아직까지 유실되지 않고 남아있다. 중수기엔 '송광사에서 정혜결사를 일으킨 보조국사가 창건했고 조선시대 정유재란으로 소실된 후 1607년(선조 40년) 승 신찬(信贊)이 중수했다'고 적혀 있다.

근래에는 한국전쟁때 한번 불탔으며 보리암의 현재 법당은 지난 80년대 초반 복원됐다. 당시 복원때는 공수부대 군인들과 헬기까지 동원됐고 등산객들은 모래 주머니를 날라 민관군 합동으로 작업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보리암엔 오랜 역사에 비해 이렇다할 문화재나 기념물 등은 없다. 지난 1984년 전남도 문화재자료(19호)로 지정됐을 뿐이다. 하지만 어려운 등산로를 따라 힘겹게 올라와 탁트인 경치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반가이 찾아들 만한 곳이다. 

/ 광주일보 

>> 산행코스

○ 1코스  관광단지~보리암~정상~우측능선~월계리 (3시간 소요. 4km)

○ 2코스  관광단지~보리암~정상~호남정맥~밀재 (3시간30분 소요. 4km)

○ 3코스  밀재~호남정맥~정상~호남정맥 동북능~암벽코스~인삼밭재~구산마을 (5시간 소요. 8km)

○ 4코스  견양동~너덜경사길~호남정맥 능선~수리봉~암릉~정상~보리암~관광단지 (5시간 소요, 8km)

전남 담양 물통골 물맛도 좋아 

담양군 용면 쌍태리 추월산(秋月山) 남서쪽 자락에 다소곳이 숨은 물통골. 골짜기 입구가 물통의 목처럼 비좁은 데다 '신비하고 영험한 약수가 샘솟는다'고 해서 물통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담양군 금성면 비내동의 '대나무골 테마공원'과 달리 입장료를 내지 않고도 대나무 숲이 선사하는 곧은 기개를 가슴속 깊이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도 매력이다.

담양호 반대편에 숨은 이 골짜기는 외지인의 발길을 거부한 채 태고의 자연미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전북 순창군 복흥과 담양을 잇는 구절양장의 험준한 고개, 즉 '빛재' 아래가 물통골 입구지만 그 흔한 표지판조차 세워져 있지 않으니 나그네들은 멋모르고 지나칠 수밖에 없으리라.

하늘을 가린 대나무 숲은 시나브로 활엽수에 바통을 넘긴다. 콧노래 절로 나는 호젓한 오솔길을 10여분 헤치다가 경사 급한 비탈길을 5분 남짓 더듬으면 바위틈에서 약수가 샘솟는다. 대나무의 고장답게 바위 속에 대나무 관을 박고 물을 받아 한결 이색적인 정취를 자아낸다.

물통골 약수는 신기할 만큼 영험있는 명약이다. 위장병이나 피부병으로 고생하던 이들이 두서너달쯤 장기 복용하고 깨끗이 나은 사례가 부지기수. 좋은 약이 흔한 요즈음에는 예전만큼 환자들이 찾아오지 않지만 인근 주민들은 여전히 틈나는 대로 물을 길러 온다.

물통골 약수는 약찜물로도 활용되는데 그 과정이 다소 번거롭다. 우선, 계곡에 널린 탄소 성분의 돌을 참나무를 태워 빨갛게 달군 뒤 물통골 약수를 담은 탕에 담근다. 그리고 추월산에서 딴 다래 등의 덩굴나무와 약초.소금을 넣는다. 이렇게 만든 약찜통에 몸을 담그고 두어 시간 찜질하면 신경통.피부병.산후 통증 등이 씻은 듯이 낫는다는 것이다.

물통골 약수 아래 위로는 청정 계곡이 굽이친다. 크고 작은 폭포와 맑디맑은 계류가 청아하기 그지없는 심산유곡이지만 인적은 거의 없다. 흠이라면 가뭄에는 물이 별로 없다는 것. 하지만 추월산 계곡의 모든 물이 바닥나도 물통골 약수만은 마르는 법이 없어 신비함을 더한다. 

/ 중앙일보 신성순(여행작가)

 

추성리 662-5 추성주 061-383-3011

10여가지 한약재로 100일이상 지하에서 숙성시킨 전통민속주로 청정지역의 원료와 한방초재 자체로 발효 숙성이 되어 흡수력이 높아 뒤끝이 깨끗한 술이다. 순곡으로 만든 일반증류주이기 때문에 발효주와는 달리 오래 보관할수록 더욱 맛과 향이 더해가는 선인들의 술이다. 

추성주는 여러 가지 약초를 넣은 황금색으로 마시기가 부드럽고 전통주의 은은한 향취 가 좋으며 뒷끝이 깨끗한 일반증류주(위스키)로써 특히 추성주를 칵테일(파인애플 쥬 스, 피치브랜드, 오렌지 쥬스)하여 마시면 과히 평가할 만한 가치를 지닌 술이다.

추성주제조과정

1. 정선한 찹쌀 10kg 멥쌀 30kg을 깨끗한 물에 씻은후 10~12시간 침지하였다가 고두밥을 찐 다음 완전히 식힌다.

2. 미리 준비한 재래 누룩과 엿기름 물과 식혀진 고두밥을 잘 버무려 25~30°c되는 곳에서 3일정도 발효 시켰다가 다시 30~35°c에서 2일정도 2차 발효 시킨다.

3. 발효가 끝날 때쯤 밑술의 온도를 25°c정도로 낮춰준 다음 덧술을 만든다.

4. 덧술은 약간의 누룩과 분쇄한 한약초를 버무려밑술과 섞어 저어주되, 20~25°c되는 실내 에서 약 10~12일정도 발효숙성시키면 알콜 15%의 술이 되는데 이를 여과하면 15%의 추성 주가 된다. -추성대잎술

5. 15%의 추성주 약주를 증류하면 약코로 부터 분리된 특유한 향미를 지닌 알콜함량 40%의 증류식 소주가 된다.

6. 여기에 몸에 좋은 약재(구기자, 오미자, 갈근 등) 침출한 물을 증류식소주에 섞어 20°c 의 지하에서 숙성시켜 대나무로 여과하면 알콜 25%의 추성주 증류주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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