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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전남 섬

진도 남동리 진도8경 남도석성 서망해수욕장

by 구석구석 2022.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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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진도군 진도8경 남도석성주변

어제와는 달리 저녁부터 내린 비가 아침까지 내렸다. 답사 때 비가 내리면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예전에 전라남도 광양의 마로산성에 갔을 때도 비가 내렸는데, 그곳 여러 연지(蓮池)들의 제 모습을 보아 좋은 기회였으나, 지금 생각하면 약간 아쉽기도 하다. 답사는 날씨가 좋은 날 가야하는데, 이것도 결국 운이라면 운이런가.

그러나 비 오는 날의 답사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비 오는 날 답사를 가면 구름에 가려 시야가 좁혀져 지세를 파악하지 못해서 문제지만, 사찰 등을 가게 되면 그 운치에 흠뻑 취하게 된다. 귀찮음을 무릅쓰고 비 오는 날 답사를 가고, 정자에 걸터앉아 경치를 안주삼아 술이나 한잔 하면 그보다 더 한 것도 없다.

남도석성은 그러한 사찰보다는 약간 운치는 떨어질지라도, 주위 산에 구름이 모여 있기에 색다른 느낌을 준다. 더군다나 분지지형이라는 점 때문에 사방에 있는 구름을 보면 그 운치가 기가 막히다. 남도석성이 왜 남도석성인가? 남쪽에 있는 도원(桃園)이라 생각하여 그런 명칭이 붙은 게 아닐는지. 만약 복숭아꽃이 만개하고 살짝 비가 뿌리는 날, 우산하나 쓰고 이곳에 다시 찾아오면 그 기막힘이 어떨까?

남도석성은 평지성이다. 그 속에는 마을이 자리 잡고 있는데, 옹기종기 모여 있다. 남도석성에 가서 제일 먼저 든 느낌은 전남 순천의 낙안읍성과 비슷하다는 거였다. 그러나 낙안읍성은 그 속에 옛 모습 그대로인 초가가 여럿 있다는 점에서 남도석성과는 비교된다.

쌍운교 및 단운교 / 국방일보

평지성이라면 일반적으로 군사적 목적보다 행정적 목적이 강하다. 남도석성은 위치상 진도의 남쪽에 자리를 잡고 있는데, 용장산성과는 거의 반대방향이다. 즉 용장산성이 북동쪽에 있다면, 남도석성은 남서쪽에 있다. 이 두 성의 공통점은 바다로 나아가기가 수월하다는 점이다.

주차장에서 제일 먼저 본 것은 쌍운교였다. 일명 무지개다리인 쌍운교는 1930년 경에 주민들에 의해서 만들어 진 것이라고 한다. 편마암 계열의 자연석으로 만들어졌는데, 단운교를 토대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와 좀 떨어진 거리에 단운교가 있는데,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 215호라고 한다.

단운교는 쌍운교와 함께 남도석성의 남문 밖에 흐르는 개울인 세운천을 건너는 다리이다.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흔한 돌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였는데, 특이하게도 아치부분은 다듬지 않은 납작한 돌을 세로로 세워 불규칙하게 돌려 쌓았다. 단운교가 세워진 것은 1870년 이후라 보이나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투박하나 솔직한 그 모습에서 서민적인 정취를 느낄 수 있다.

기자는 남문을 통해 남도석성으로 들어갔다. 남문은 옹성 형태로 되어 있는데, 옹성이란 항아리를 수직으로 반 토막 낸 모습에서 유래한 말이다. 성문을 감싸 안은 형태로 보호하는 모습을 띠고 있으며, 적들은 사방에 포위된 채로 성문을 공격해야 한다는 페널티를 안게 된다.

남문에는 여장(성벽에 있는 군사를 보호하는 낮은 담)이 약간 남아있는데, 이전엔 더 많이 있었을 것이라 본다.

남문에 올라 오른쪽으로 가면 자그마한 동치(東雉)를 보게 된다. 치란 치성, 혹은 곡성이라고도 부르는 방어시설로서, 일반적으로 성벽에 치성이란 성벽을 돌출시켜서 적을 공격할 수 있게 하는 기능을 가졌다. 우리나라에선 삼국시대부터 이런 치성이 보이는데, 이를 통하여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얼마나 뛰어난지를 쉬이 알 수 있다.

남도석성은 전체적으로 네모난 방형(方形)을 띠고 있다. 그러나 성벽을 둘러보다보면 각의 부분이 네모나게 처리된 것이 아닌 둥그스름하게 처리되어 있다. 한국의 성을 보면 외국의 성과는 달리 각이 서있기 보다도 둥글게 처리한 게 특징이다.

어찌 보면 민족의식이라는 게 바로 이런 게 아닌가 싶다. 다른 나라와는 달리 그 나라의 전통과 그에 따라서 독특하게 이어지는 사람들의 특성. 그리고 그에 대한 반영이 바로 민족의식이고 그들만의 모습일 것이다.

남도석성 동문 밖을 보면 여러 비석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바로 만호비(萬戶碑)인데, 만호는 대부분 무예에 능한 전임직으로서 고려시대에 몽골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단어이다.

주로 무관들이 임명된 종 4품 벼슬인데, 명칭에서 나오듯이 1만 호(戶 : 한 가구를 말한다)의 인구를 다스리는 게 아니라, 예로부터 계속 전해지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해서 이런 것이다. 주로 수군(水軍)에서 많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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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과 서문사이의 치성 / 국방일보

이곳엔 6개의 만호비가 있는데, 갈비(碣碑 : 비석의 머리 장식이 없는 작은 비)로 보인다. 고로 크기는 별로 크지 않고 땅딸 맞다. 원래 이 만호비들은 남도석성 안의 마을 중간쯤에 있던 것을 마을 사람들의 합의 아래 현재 위치로 옮긴 것이라고 한다. 성곽을 답사하면 그 성곽의 입구나 가는 길목에 이렇게 비석들을 진열해 놓기도 하는데, 이 또한 그러한 것의 일환으로 보인다.

성벽길을 따라 천천히 걸으면서 생각에 잠긴다. 이 성의 과거 모습은 어땠고, 이 성에 살고 있는 현재의 사람들처럼, 옛 사람들도 열심히 살아갔으리라는 생각, 그리고 아이들이 노닐었을 시골길 풍경이 떠오른다.

복원된 관아 / 국방일보

서문(西門)으로 가서 그 옆으로 계속 이동해보려고 하였으나 그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민가로 이어졌다. 괜히 남의 집에 들어가는 것은 별로라는 생각에 다시 발을 돌렸다. 다시 남문 쪽으로 가면서 천천히 성내를 둘러보았는데, 마을의 모습이 내가 어릴 적 살던 동네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길도 시멘트길이 아닌 흙으로 된 시골길인지라 그 정취가 물씬 풍겨서 정겨웠다.

동문과 서문사잇길 / 국방일보

그러나 사실 이러한 정겨운 모습 뒤에는 이곳 주민들만의 아픔이 있을지도 모른다. 주민들이 이 유적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고 살지, 아니면 귀찮음을 가지고 살지는 잘 모르겠지만,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문화재 내에 있는 가옥들이므로 개축이나 보수 등에도 제재가 가해질 것이다. 그래서인지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양옥한 채 없는 것은 그러한 법의 제재 때문이리란 생각이 든다. 문화재는 보호해야하고, 그래도 사람들은 스스로 살 권리가 있다. 문화재보호법과 생존권의 충돌은 예전부터 지속되어 일어난 것으로서 어느 한쪽의 손을 쉽사리 들어주기가 그렇게 쉬운 것도 아니다.

과거의 경우 문화재보호법이 강하게 작용되지 않아 느슨하게 작용됨으로서 우리의 귀중하고 수많은 문화재가 파괴되었다. 가장 큰 일례는 서울 풍납동 토성으로서 기존에 그곳을 백제의 사성(蛇城)으로 지목하였던 선학들의 불찰도 문제였으나, 상식적으로 토성 내에 대규모 주거지를, 그것도 아파트를 짓는 다는 것은 너무나도 큰 아이러니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쪽에서는 풍납동 주민들과 발굴하고 있는 사람들과의 몸싸움과 큰 목소리가 오가겠지만….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씁쓸하다.

그렇다고 문화재보호법이 무조건적으로 옳다고 보기에도 어려울 때가 없진 않다. 경주를 답사하다보면 거대한 고분들과 그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에 탄사를 자아내지만, 고분군을 지나 골목길로 들어가면 다 쓰러져가는 집들이 여럿 보이며, 제대로 개축, 보수도 힘들어하는 주민들의 목소리도 들린다. 언제나 모든 것에는 양면이 있지만, 이럴 때마다 과연 무엇이 중요할까란 고민을 하게 된다.

그래도 이곳 남도석성의 골목길은 정겹다. 처음 왔어도 낯설지 않고 도시보다도 훨씬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듯하다. 비가 와서인지, 시골이어서인지는 몰라도 아이들의 모습이나 젊은이들의 모습은 별로 보이지 않는 게 약간 씁쓸하다면 씁쓸할까…….

골목길 아래를 살펴보다보면 여기저기에 백자 조각들이 널려있다. 개중에서 몇 개를 주워서 살펴보면 예전 모습을 그대로 알만한 것도 제법 보인다. 이는 당시 이곳에서 여러 사람들이 살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증거로서, 이런 과거의 장소에서 과거의 물건을 현대인이 만지고 살펴본다고 할 때, 비로소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것만 같다.


마을 북쪽에는 관아가 있다. 사실 이건 예전부터 있었던 것이 아닌 최근에 들어서 새로 만든 것이다. 예전에 이곳에 대해서 잠시 조사하다가 발굴보고서를 뒤져본 적이 있는데, 그때 발굴보고서에서 이러한 관아의 유구를 발굴하고 그 모습을 추정한 바 있다. 현재의 관아는 바로 그런 과거의 발굴을 통해서 다시 만든 것으로서, 문화재는 이렇게 발굴을 통하여 되살아나는 경우가 많고, 우리는 이를 어렵잖게 볼 수 있다.

관아를 한 바퀴 돈 다음 천천히 남도석성에서 나왔다. 이로서 진주답사를 끝내고 다시 집으로 간다. 머리가 아플 때, 잠시 바람을 쐬러, 그리고 옛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리고 싶다면 이런 과거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장소로 가는 것도 뜻 깊은 일이다. 굳이 어려운 글로 되어 있는 것을 공부하는 것 보다, 그 있는 그대로를 즐기고 느낀다면, 그보다 더 값지게 얻는 것은 없다.

남도석성 만호비 / 국바일보

임회면 서망리 서망해수욕장

규모가 그리 크지 않고 알여지지는 않았지만, 청정해역에다 어족자원이 풍부하여 주변 어느 곳에서나 바다 낚시가 가능하다. 경사가 완만한데다 고운 모래밭, 특히 다른 해수욕장에 비해 피서객들이 붐비지 않기 때문에 가족단위 피서객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

화장실 1동/ 샤워장 1동/ 음수대 1동 

민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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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 진도군청 문화관광과 : 061)540-3224~7 / 임회면사무소 : 061)540-3605

가는 길 벌교역앞에서 좌측 2번국도로 400m지점에서 좌회전 - 15번과 27번 공용국도 -고흥 - 15번국도 - 연륙교 - 내나로도 - 15번 국도 - 소영선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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