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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경상북도

경주 추령재 황용골계곡 기림사 골굴사 경주민속공예촌 신라역사과학관

by 구석구석 2022.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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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동호를 지나 추령터널로 진입하기 직전 왼편 황용골을 주목해보라. 경주의 대표적 고찰인 기림사와 선무도의 본산격인 골굴사를 안고 있는 함월산 황용골계곡은 관광객들이 감포가면서 거의 스쳐가는 비경의 공간. 그 계곡에는 아직도 귀기(鬼氣)가 서려있다. 그래서 맘 공부하거나 치성드리는 사람들이 자주 기웃거린다. 꼭 강원도 심산유곡 같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길이 좁아지고 교행할 곳도 없기 때문에 초입에 차를 두고 콧노래 부르며 도보로 계곡 끝까지 걸어보면 기분이 충일해질 것 같다. 여름보다 겨울이 딱이다.

신라 신문왕이 다녔다는 모차골에서 용연폭포까지

신라 제31대 신문왕이 동해에서 만파식적을 취득한 내용과 관련이 있는 옛길

추령 고개를 넘기전 바로 옆에는 황룡 약수탕이 있다. 우선 이 길로 접어들어 동네인 모차골을 한참 들어가니 추원사란 절이 있고, 마을 안 깊숙이 잘 지어진 그림같은 펜션도 보이고, 마지막에는 석불암이라는 절이 있다.

여기서부터 이제 길이 포장된 길이 아닌 산길로 접어든다. 주변은 오는 길 내 단풍들이 온 산을 수 놓았다.

맑고 깨끗한 작은 물소리가 들리고 주변 공기가 맑아서 인지 몸과 마음은 한결 가벼운 느낌이다. 시간을 지금부터 초월하여 과거 신문왕이 수레를 타고 갔던 길을 상상하며 걷는다. 뭐 다 상상력이겠지만 과연 이 길이 그때 당시 마차가 정말 다녔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길은 그다지 좋지 않은 상태였다. 평지와 고개를 넘나들어 첫 번째 성황당고개라 불리는 곳에서 감포 기림사 방향을 보니 경관은 좋다. 약간 언덕 위에 길은 이제 조금씩 좋아졌다.

 

  세수방이라 하나 설명을 듣지 않고 지나지면 잘 모른다

고개를 넘어 낙엽을 밟아 가면서 오니 세수방 근처에 이르렀다. 세수방이란 손을 씻고 피곤을 달래던 곳이라 한다. 효명 세자의 제수비용을 마련코자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숯 가마터가 있었다고 하나 글쎄. 예전에는 민가도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주변을 보니 축대가 있어 정말 사람이 깊숙한 산중에 옛 이야기처럼 살았던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두 번째 고개는 이름이 없다고 한다. 민묘가 언덕 위에 잘 조성되어 있고, 이제 세 번째 고개를 넘어 향하니 불령이 나온다. 사실 이번 답사의 개인적인 목적이었다. 이곳에는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불령의 봉표가 있기 때문인데, 아직 보지 못해 이번 기회에 볼 수 있었다. 香炭山은 木炭 숯을 생산하기 위한 나무가 있는 산을 말한다고 한다.

 신라 31대 신문왕이 감은사 앞바다 동해 대왕암에서 용에게 옥대와 만파식적을  만들 대나무를 얻고 기림사 서쪽 시냇가에서 와서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들고 쉬는데  때마침 태자(후에 효소왕) 가 다가와서 "이 옥대의 한쪽 한쪽이 모두 진용(眞龍)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네가 어찌 아느냐"라고 하자  태자가 "옥대의 한쪽을 떼서 물에 넣어 보소서" 라고 하였다. 왼편 둘째 쪽을 떼어서 시냇물에 넣으니 곧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그땅은 못이 되어 용연(龍宴)이라고 하였다는 전설이 삼국유사에 전하는 바로 그 현장이라 한다.

수량이 많이 줄어 물은 그다지 장관을 이르지는 못하나 주변 경관은 역시 좋다.

오마이뉴스 2008 김환대

 

황룡골 골짜기는 깊다. 여름 빛이 물드는 산천도 산천이지만 고개 고개 넘어가는 그 길이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그 아스라함도 일품이다. 함월산 자락의 기림사. “달을 머금었다가 토한다”는 뜻을 지닌 기림사는 해방 전만 하더라도 불국사를 말사로 거느렸을 만큼 위세가 당당했었으나 불국사의 개발로 현재는 반전되었다. 

기림사는 신라에 불교가 전해진 직후인 643년(선덕여왕 12) 천축국의 승려 광유(光有)가 500여 명의 제자들을 교화한 뒤 창건한 후 임정사라 부르던 것을 원효가 중창하여 머물면서 기림사로 개창 하였다. 

기림사의 여름 하루는 이 곳을 찾은 사람의 손을 잡고는 놓아주지 않는다.
하늘빛과 녹음이 어우러져 기림사를 둘러싸고 있는 배경들이 아늑함마저 들게 하기 때문이다. 풍경소리가 들린다. 기림사의 풍경소리가 좋아 십수년째 이 절을 찾는 이도 있다 하니 이 또한 기림사의 숨겨진 매력일듯하다. 

기림사 입구에는 경주지역에서 보기 드문 석종형 부도가 있다. 눈 여겨 볼 문화재는 당연 성보박물관 내에 있는 보물 제415호인 건칠보살좌상(종이로 만들어 그위에 옻칠을 하고 다시 금을 입혀 조성협저상이라고도 한다)이다. 돌로 만든 치미(망새)도 눈 여겨 보아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황룡사지, 부산 만덕사지 등 몇 안 되는 석조치미이다.

건칠불

천년 가람을 느끼게 해주는 보물 제833호 대적광전도 유심히 보아야 할 문화재인데 특히나 창살 무늬의 규모가 압도적이다.

기림사 대적광전

기림사의 문화재는 대적광전 내에 모셔진 보물 958호 기림사 소조비로자나삼존불상, 보물 959호 기림사 비로자나불 복장전적,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205호 기림사 삼층석탑, 유형문화재 214호 기림사 응진전, 문화재자료 251호 기림사 진남루, 문화재자료 252호 기림사 약사전, 문화재자료 301호 경주 기림사 소장유물 등도 보아야 한다.

대적광전 동쪽에 위치한 목탑지

기림사에서 유명한 것은 ‘5종수’라 불리는 샘물이다. 물을 마시면 눈이 밝아진다는 명안수, 마실수록 마음이 편해진다는 화정수, 이 물로 차를 끓이면 최고의 차가 된다는 감로수, 물맛이 하도 좋아 까마귀가 쪼아 먹었다는 오탁수, 마시면 천하무적의 장군이 된다는 장군수가 있다. 하지만 지금은 감로수와 화정수만 남아 있다.

<삼국유사>에 신라 제31대 신문왕이 동해에서 용으로 화한 선왕으로부터 만파식적이라는 피리를 얻어 가지고 왕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기림사 서편 시냇가에서 잠시 쉬어갔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통일신라 초기인 신문왕 이전부터 있던 고찰로 생각된다.

영남일보

 

감포 가는 길에 있는 황용골 골굴사(骨窟寺.주지 설적운)는 아담한 석굴사원이다. 발을 들여 놓으면 한눈에 들어올 만큼 부담스럽지 않고 편안하다.
 
하지만 골굴사는 넓이보다 깊이로 보아야만 제대로 볼 수 있다. 골굴사의 진면목은 해질녘 마애여래좌 상을 찾아 오르는 길에서 볼 수 있다. 이리저리 연결된 난간은 심상찮은 풍경이다 . 그 왼쪽으로 아들을 낳게 해준다는 약 5m 높이의 남근(男根)바위와 여궁(女宮)인 산신당이 반긴다. 불교문화와 민속신앙이 한데 어우러진 현장이다.   

그 위쪽은 관음굴. 굴 입구에 기와를 얹고 문을 달아 바위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집으로 보인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석굴이다. 천장도 양쪽의 벽도 모두 돌이다. 좌우 양쪽 벽면은 틈이 없을 정도로 작은 굴들을 파고 부처를 모셨다. 

원래는 이 거대한 바위에 12개의 석굴이 있었으나 대부분 허물어지고 형체만 남아 있다. 지장굴, 약사굴, 라한굴, 신중단 등 층층이 석굴의 흔적들마다 부처와 보살이 모셔져 있다. 인도의 아잔타석굴과 중국의 돈황(敦煌)석굴을 연상시킨다. 하긴 골굴사는 1,500 여년전 인도에서 온 승려들이 자기 나라 사원양식을 본떠 세운 석굴사원이라 했다.

해거름에 산 아래서 올려다보는 마애여래좌상(보물 581호)은 신비롭다. 수십미터 석회암 꼭대기에 자리잡은 불상은 산 아래의 사바세계와는 철 난간과 밧줄로만 연결되어 있는 상태. 피안의 세계로 올라가는 108계단은 높지는 않지만 꽤 가파르다. 속세를 벗고 일상에서 탈출하기가 쉽지만은 않아 보인다. 

관음굴에서 마애불로 오르기 위해서는 자연동굴을 지난다. 두손, 두발을 다 사용 해야 겨우 바위위로 올라설 정도. 절벽 아래쪽을 내려다보면 괜히 아찔해진다. 눈 을 들면 높이 4m, 폭 2.2m로 돋을 새김을 한 마애불이 은은한 미소로 맞이한다. 석회암의 약한 성질 때문에 떨어져 나간 부분이 많다. 점점 하나의 바위로 변해 가고 있는 중이다. 훼손을 막으려고 지금은 머리위로 투명한 둥근 보호막을 설치 했다.

어둠일까, 아니면 안개일까. 마애여래좌상 앞쪽 산들을 어스름 빛이 감싸안을 때 쯤 이 일대는 '불국토의 환상'에 젖는다. 땀 흘리며 사바에서 피안의 세계로 올라온 걸 그렇게 보상받는다. 


 안내문에는 마애아미타불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높다란 상투 모양의 머리와 뚜렷한 얼굴, 가는 눈, 작은 입, 좁고 긴 코의 독특한 이목구비와 얼굴 전체에 웃음을 띤 형태 등은 형식화가 진행된 9세기 신라불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건장하지만 평면화된 신체, 얇게 빚은 듯 계단식으로 평행되게 한 옷 주름, 무릎에서 형식적으로 나타낸 물결모양의 옷 주름과 겨드랑이 사이에 팔과 몸의 굴곡을 표시한 V자형 무늬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기림사적기’에는 골굴암에 열두 굴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불상은 그 주불인 듯하며 만든 시기는 9세기 경으로 보인다.”

 

선무도 여름수련회

방학이면 골굴사도 바빠진다. 선무도 여름수련회가 이곳에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일상의 복잡함을 벗어 던지고 절로 향하는 마음은 홀가분할 수밖에 없다. '짧은 출가'로 '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기회. 녹음이 짙어가는 선무도 도량에서 나 의 참모습을 찾아보는 것도 분명 색다른 여름 보내기다.  

선무도 수련은 이제 템플스테이의 한 형태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골굴사 주지 적 운스님은 "참선, 선요가, 선무술, 다도 등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어선지 외국인 의 참여가 많이 늘어나고 있습니다"고 소개했다. 수련회에 참여하면 새벽 4시 기 상, 밤 9시 취침 등 스님과 똑같은 수행과정을 거친다. 초등학생 이상 개인이나 단체가 대상. 주5일 근무로 2박3일 주말 코스가 많다. 학생 1일 2만원, 일반 1일 3만원. ☎054)745-0246.

매일신문

 

경주시 하동 201 경주민속공예촌

상당수 관광객들은 이 마을을 잘 모르고 지나간다. 경주의 얼이 서려있는 이 공예촌은 86년 토함산 자락 2만여 평에 조성된다. 다양한 공예 분야 장인을 한 자리에 끌어들인 국내 최대 공예마을로, 첫 단추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끼웠다.

보문단지 조성을 지시한 건 박정희 전대통령, 이 공예촌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지시로 급조된다. 그 때가 83년. 연두순시차 경주에 온 전 전 대통령이 시정 브리핑을 받는 자리에서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는 장인들을 한 곳에 모아라"고 지시한 것. 정부가 10억원을 내놓았다. 민속촌 같은 공예촌이 탄생한다.

이곳에 입주한 업체들은 금관, 문화재모조토기, 청자, 백자, 목가구, 목각공예, 한복, 수정, 옥 등 다양한 전통공예품을 생산해 종합전시장에서 전시·판매하거나 납품 및 수출하고 있다.

민속공예촌은 보문단지와 불국사의 중간쯤 위치해 있다. 보문단지에서 경주세계문화엑스포공원을 지나 감포삼거리에서 우회전하면 불국사로 향하는 보물로가 나온다. 보물로를 조금만 지나면 좌측편에 커다란 공예촌 간판이 보인다. 입구에 주차장이 있으니 차를 대고 천천히 걸어서 둘러보는 것이 좋겠다.

이곳은 보통 버스를 대절하고 오는 단체관광객이 많지만 외국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다. 우리나라 고유의 미를 찾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기 때문이다.

처음 공예촌이 만들어질 때 시내 곳곳에 흩어져 있던 공예품 생산업체가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단지를 형성했다. 전통을 사랑하고 또 그것을 이어가려는 노력이 집결된 장소인 셈이다.

단지 내의 공방은 모두 한국적 촌락 형태이기 때문에 집집마다 비교하면서 살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철쭉이 분홍빛으로 물든 집도 있고, 정원을 잘 가꿔 놓은 집도 있다. 이따금 길가에서 만나는 솟대나 장승도 반갑기 그지없다.

누군가 이곳을 두고 역사가 이어지는 공간이라 했다. 아마도 우리 조상의 얼과 멋과 솜씨가 깃든 전통공예품을 옛 모습대로 재현시켜 민속공예를 계승·발전시킨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리라.

공예촌 안에 들어서서 천천히 돌아보면 공방마다 색다른 볼거리를 만날 수 있다.

전시판매장 옆 계단에 올라 오른쪽 길로 들어서면 불상조각을 전시하는 신라불상과 금관을 제작·전시하는 삼선방이 나온다. 특히 삼선방은 유물 복원전문가 김진배씨가 아내와 함께 운영하는 곳으로, 그가 복원한 금관과 귀고리 등이 화려한 자태를 뽐낸다.

공예촌 안에 가장 많은 공방은 신라요, 서라벌공예 등 토기를 만드는 공방들. 대부분 작업실이 공개돼 있어 장인들이 작업하고 있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공방 작업실 입구마다 들어와서 구경해도 좋다는 문구가 붙어있어 관광객을 안심(?)시키기도 한다. 또한 어떤 토기를 만들고 있는지, 전시된 물건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하는 내용을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사람도 있다.

물레가 돌아가는 작업실 옆에는 토기를 굽는 가마가 있고, 전시장에는 재현토기부터 실용적인 토제품까지 다양하게 판매되고 있다. 관람객들이 토기를 직접 만들어 볼 수 있도록 체험장을 운영하는 곳도 있다.

이밖에도 자수정 공예, 분청사기, 전통복식, 목기공예를 재현하는 공방이 있다. 또 공방에서 운영하는 전시장과 종합판매장에는 관광객들을 유혹하는 아기자기한 물품들이 판매되고 있다. 사지 않고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곳의 매력을 느낄 수 있으니 부담은 갖지 말 것.

 윤경렬의 제자인 석우일 관장이 평생을 걸고 만든 신라역사과학관도 경주민속공예촌 안에 있다.

이곳은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민족 과학의 뿌리를 알리고 심어주기 위해 1988년 문을 연 사설 박물관으로, 수학여행 코스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석우일 관장이 처음 이곳을 만들 때 염두에 둔 점은 유리창 안에 갇혀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석굴암을 역사의 현장으로 끌어내는 것이었다고. 또 모형으로라도 그 구조와 미의 원류를 분석, 실험해 과학적 보존방법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전시실은 1,2층과 지하, 야외(옥상) 전시실로 나뉜다. 1층 전시실에는 첨성대 모형을 비롯해 천구의, 해시계, 물시계, 천상열차분야지도 목판본 등이 전시돼 있다. 2층에는 오대산 상원사 동종의 실물 모형과 주조과정, 한국의 고대 인쇄 기술사를 살필 수 있는 해인사장경판과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신라와 백재의 금관 등을 만날 수 있다.

지하에는 석굴암 전체 및 부분모형이 다양하게 전시돼 있는데, 이중에는 석굴암 수리 과정에서의 문제점을 재조명하는 모형도 있다. 건물 옥상에는 첨성대 실물모형과 일출탑, 문무대왕릉 및 이견대의 30분의 1 축소모형이 있고 옥상을 오르는 계단 옆에는 토함산에 자생하는 우리 꽃과 나무가 푯말과 함께 정겹게 자라고 있다. 관람료는 1천200원~3천원.

경북일보 이선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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