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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경상남도

통영 용초도 죽도 한려해상국립공원

by 구석구석 2022.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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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여객선터미널 섬사랑 055 645 3717 매물로페리호

운항시간 - 07:00, 11:00, 14:00 통영 항 여객선터미널에서 50분가량 소요, 11:00는 비진도 해수욕장이 있는 비진외항을 경유함. 여름 성수기에는 차량 수송 가능함.

국도를 따라 통영에 들어서는 순간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대형 전자제품 매장과 고층 아파트, 시내를 가득 메운 패션 브랜드 매장과 영어 학원, 패스트푸드점이었다. 바다와 접해 있다는 것을 빼면 편의 시설도 웬만한 도시 수준이었다. 그런데 번화가를 지나서 길목 하나만 돌면 당황스러우리만큼 갑자기 바다가 나타난다. 그제야 ‘여기가 해안 도시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해안가에 도착해 바로 앞으로는 짙은 녹색의 남해바다가 넘실거리고 멀리는 크고 작은 섬들이 자그마하게 보이는 것을 보고야 제대로 남해를 찾아왔음을 확인했다. 해안선에서 바라보는 통영은 막혔던 가슴이 탁 트일 정도로 시원스러웠다. 푸른 해안 옆으로 잘 뻗은 도로와 가파른 언덕에는 멋진 건축물들이 풍광을 더하고, 멀리 보이는 푸른색의 아치형 다리는 이국적이기까지 했다. 

용초도로 가는 배는 하루 두 번, 오전 7시와 오후 2시 30분에 있는데 우리는 아침 배를 선택했다. 중간 규모의 여객선인데 승객들은 대부분 섬 주민들로 육지에서 장을 보거나 필요한 물건을 사가지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30분 정도 지나니 용초도가 보이기 시작했는데 멀리서 바라보는 용초도는 작고 아담한 섬으로, 섬은 푸른 나무 숲으로 덮여 있고 그 밑으로는 개간한 밭이 보였다. 그리고 해안을 따라 슬레이트 지붕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한 폭의 수채화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선착장에 내린 후 우리는 영화 촬영 장소인 ‘용호분교’로 향했다. 가는 도중 만나는 섬 주민들은 모두 우리에게 “어딜 가느냐? 여기는 왜 왔느냐?”고 물었다. 의심스러워서가 아니라 낯선 이방인에 대한 못 이기는 궁금증 때문이었다. 우리의 대답이 떨어지면 그들은 경계를 풀었다. 그리고 남도 특유의 걸쭉한 사투리로 위치를 알려주고 아울러 마을잔치에 와서 점심 먹고 가라는 말까지 잊지 않았다. 도시의 각박함이 아직 땅끝 섬마을까지 미치지는 않았음을 확인했다. 

용초도 호두마을/경남일보

 선착장에서부터 해안선을 끼고 아스팔트 길이 뻗어 있는데, 이 길이 예술이다. 길 한쪽으로는 남도의 희귀한 나무와 꽃, 산열매들이 가득하고 다른 한쪽으로는 쪽빛 남해바다가 양탄자처럼 깔려 있다. 멀리 보이는 아른한 수평선과 창공을 맘껏 날고 있는 바닷새들도 운치를 더한다. 이 길을 걷고 있노라니 이제 막 시작하는 연인이라면 없던 사랑의 감정도 용솟음치고, 죽도록 싸우고 난 부부라면 눈 녹듯 마음이 풀어질 것 같다. 길에 대한 감동은 흥분으로 이어졌다. 

바다와 맞닿아 있는 용초분교/경남일보

 길을 따라 15분 정도를 걸어 섬으로 들어서자 한산초등학교의 분교인 용호초등학교가 나왔다. 듣던 그대로, 영화에서 봤던 그대로의 풍광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청록의 바다와 하얗고 깨끗한 모래밭, 바로 그 뒤에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는 작고 아담한 초등학교까지. 「국화꽃 향기」 후반부의 비주얼을 장식했던 바로 그곳이었다. 

단층으로 된 노란색 학교 건물과 운동장의 놀이 기구, 본관 건물 앞 바람에 펄럭이고 있는 태극기까지. 무엇보다도 운동장에서 교문 쪽을 바라보면 바로 청정한 한려수도의 남해바다가 그대로 눈 안에 들어오는 게 아닌가? 아파트촌에 둘러싸인 초등학교를 다닌 나에게 이곳은 오래도록 기억될 만큼 참신한 곳이었다. 

물에 빠진 장진영을 구해내고 살짝 키스했던 곳, 청기백기 게임을 했던 곳, 아픈 아내를 안고 흔들의자를 타던 곳 등 영화 속 장면들이 영사기를 돌리듯 머릿속을 스치기 시작했다. 내 눈앞에 펼쳐지는 황홀한 풍광과 함께 영화 내내 흘렀던 가곡 ‘산타루치아’가 귓가에 맴돌면서 무언지 모를 감동에 휩싸였다. 달려온 먼길은 결코 헛된 발걸음이 아니었다. 

용초도는 인구 1백50명 정도의 작은 섬으로, 본섬인 한산도는 배를 타고 20분이면 도착할 수 있다. 오전을 용초도에서 충분히 즐겼다면 오후에는 한산도를 즐기는 것이 좋다. 용초도와는 달리 규모가 상당히 큰 섬이다. 버스와 자가용도 다니고 식당이며 민박 시설도 비교적 잘 되어 있는 섬으로, 관광지로 손색이 없다.  

/자료 - 프라이데이 전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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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초도는 용이 모래밭에 내려앉았다는 전설과 나무보다는 풀이 많다고 해서 용초도라 불린다. 통영의 여러 섬들 중 내만권에 속한 용초도는 가을 감성돔의 출몰지로 유명해 초가을부터 강태공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 중 하나다. 특히, 미역 양식장 근처에 머물고 있던 감성돔들이 양지바른 갯바위 구석구석에 휴식을 취하는 곳이기도 하다. 초가을부터 벵에돔과 함께 찾아온 감성돔은 수온이 내려갈수록 갯바위 쪽으로 이동하여 영등철까지 이곳에서 월동하는 놈들이 많아서 낚시꾼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몽돌과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호두마을 뒷등 해변

 용초마을은 6·25 한국전쟁 당시 포로수용소가 설치된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1952년 5월부터 1954년 말까지 약 3년간 미군 1개 대대와 국군 1개 대대가 용초마을에 주둔하면서 약 2000명의 북한 공산군 포로를 수용했던 포로수용소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당시 미군들은 마을 주민들을 인근 한산도, 비진도, 죽도 등으로 강제로 이주시킨 후 주민들이 살던 가옥 100여 채를 불사르고 불도저와 트럭 등으로 논밭을 짓뭉개 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길을 내고 시멘트와 돌 등으로 거대한 포로수용소를 세웠다.

용초마을에 남아 있는 6·25전쟁 포로수용소 흔적

 포로수용소는 용초마을 세 구역으로 나눠져 큰몰(큰마을)과 제싯골(작은마을), 그리고 재너머 논골에 철조망을 둘러쳐 포로들을 가두었다. 제싯골 왼쪽 언덕배기에는 수용소의 우두머리를 비롯한 장교들 막사와 중요 군장비, 시설물 관리 건물 등이 세워졌다. 한 구역에 7~8개의 수용소가 들어 있었으며, 한 개의 수용소에는 100명의 포로들이 수용되었다.

 

아담한 섬마을 뒷동산엔 벚꽃이 물들고 쪽빛바다는 삼치와 볼락이 춤추는 황금어장

통영IC로 빠져나와서 통영 해안로를 타고 서호동의 통영여객선터미널을 찾는다. 터미널에서 죽도행 섬누리호를 타면 오전 7시 배는 1시간 만에, 오후 2시 배는 1시간40여분 만에 죽도에 닿는다.

바다가 삶의 터전인 섬사람들은 예부터 용왕에게 풍어와 안녕을 비는 제를 올렸다. 자연 풍광을 즐기고 소문난 굿도 구경할 겸 300년 전통이 이어져 내려오는 죽도 남해안별신굿이 열리는 날에 맞춰 통영 한산면 매죽리 죽도를 찾았다.

어느새 파랑·주황색 지붕들이 들어앉아 있는 작은 마을에 닿는다. 선착장에 내리니 섬 특유의 고요함은 한발짝 뒤로 물러나 있다. 곳곳에 색동천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마을은 이미 별신굿 준비로 분주하다. 

통영 죽도에서 열리는 남해안별신굿은 남해안 지역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며 지냈던 마을굿으로 일종의 마을잔치다.

엄청난 규모와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오는 지역 축제와도 같았던 옛날의 기억은 희미해졌다. 원래 2년마다 열리던 것을 규모를 축소해 1년에 한 번씩 열기로 변경했다. 집집마다 정성을 쏟은 음식을 겨루기하듯 내놓아 풍성했던 제사상은 일괄적으로 만들어진 조촐한 제사상을 나열하는 데 그쳤다.

다른 섬의 별신굿은 사라져가는 마당에 그나마 통영시의 지원이 있고 죽도 주민들의 의지가 남아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죽도의 면적은 66만5000㎡로 마을이 크지 않아 1시간 정도면 돌아볼 수 있다. ‘대섬’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화살과 죽창을 만들기 위해 이곳에 대나무밭을 조성했기 때문이란다.

제승당이 있는 한산도를 상죽도, 죽도마을을 하죽도로 불렀던 때는 마을 뒷산 아래가 온통 대밭이었다. 세월이 가면서 수요가 줄고 관리하는 손길이 사라지면서 대밭은 점점 줄어 지금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한때 100가구 이상 500여 명이 살기도 했던 죽도는 ‘돈섬’, ‘부자섬’이라는 별칭이 붙었을 만큼 풍성함을 자랑했다고 한다. 그물을 드리우기만 하면 삼치와 볼락을 원하는 만큼 걷어올릴 수 있었다. 죽도 앞바다가 그야말로 황금어장이었던 것이다. 깨끗한 바다에서 건져 올린 미역이나 다시마 등도 죽도마을 사람들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불리는 데 한몫했다. 섬마을답지 않게 물이 풍부해 농업도 성행했단다. 마을 뒤편부터 당산 입구까지 보이는 둑들이 모두 논이다. 벼와 마늘, 고추, 콩, 고구마를 특히 많이 생산했다고 한다.

마을은 아담하고 깨끗하다. 골목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 집집마다 담벼락에 다시마을 널어두고 있다. 다시마은 채취해서 바로 먹고, 말려서 음식에 넣기도 하고 그대로 보관한단다.

마을회관 옆에는 생김새부터 범상치 않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포구나무’라고 불리는 이 고목(古木)은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다. 마을 주민들은 오랜 세월 희로애락을 함께해 온 이 나무 앞에서 당산제를 지내고, 마을의 안녕을 빌며 신성하게 대접한다.

폐교된 옛 죽도초등학교는 지금은 개인이 사들여 죽도연수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벚나무를 비롯해 각종 나무로 꾸며진 정원과 돌탑이 멋스럽게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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