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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드라이브 뚜벅이

서울 고궁나들이

by 구석구석 2022.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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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궁궐

옛날 옛적 그 모습 그대로 정취가 물씬 묻어나는 곳가족이나 연인의 손을 잡고 고궁으로 가보자.
 

 조선시대의 궁궐은 조선왕조 500년 역사를 관통하는 정치와 행정의 중심이었다. 또한 궁궐은 규범과 격식을 갖춘 당대 최고의 건축물로 의미가 있다. 건물들은 풍수지리에 따라 지어졌고, 그 쓰임새가 각각 달랐다. 쓰임새별로는 정사를 위한 정무공간, 일상생활을 위한 생활공간, 휴식을 위한 정원공간으로 크게 나눠진다. 일반적으로 정무공간은 앞에 오고, 생활공간과 정원공간은 뒤에 배치하는 전조후침(前朝後寢)으로 구성됐다.

이러한 궁궐은 성격 및 용도에 따라 정궁(正宮), 이궁(離宮), 별궁(別宮)으로 구분된다. 법궁(法宮)이라고도 불리는 정궁은 대표적인 궁궐로, 경복궁(景福宮)이 이에 해당한다. 이궁은 정궁에 화재나 변고가 있을 때 또는 임금이 잠시 머무는 궁궐로서, 창덕궁(昌德宮)이 이에 해당한다. 별궁은 왕실에서 상왕 또는 대왕대비나 대비가 머무는 등 왕실의 필요에 의해 특별히 지은 궁궐로 창경궁(昌慶宮)이 여기에 속한다.


조선왕조의 정궁, 경복궁 

눈내린 경회루 / 오마이뉴스 이홍노기자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궁궐인 경복궁은 조선왕조의 정궁으로 건국의 의지와 풍수지리설에 따른 명당, 유교사상 등이 가장 잘 구현된 곳으로 평가된다. 특히 풍수지리에 있어 경복궁 터는 북악산~인왕산~남산~낙산으로 이어지는 내사산(內四山) 안에 있어 명당 중의 명당이며, 서울의 대표적인 혈(穴)이란 것이 다수의 주장이다. 그러나 서울의 내사산 중 청룡(낙산)이 백호(인왕산)와 주작(남산)에 비해 너무 취약하기 때문에 조선왕조 내내 맏아들보다 차남이 득세했고 외척의 발호가 심했다는 주장도 있다.

향원정 /오마이뉴스 이홍노기자

경복궁의 본격적인 복원은 1990년부터 시작돼 요즘의 모양새를 갖추게 됐다. 왕의 거처인 강녕전(康寧殿) 등 침전(寢殿)지역과 왕세자의 생활공간인 자선당(資善堂) 등 동궁지역이 복원됐으며, 1996년 철거된 조선총독부 청사 자리에 흥례문(興禮門)과 영제교(永濟橋) 등이 다시 세워졌다.

경복궁 /오마이뉴스 이홍노기자

관람료는 성인 3천원, 어린이 1천500원. 겨울철에는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관람할 수 있다. 매주 화요일은 휴무일이다. 문화재청 경복궁관리소 (02)732-1931~2

창덕궁은 역시 데이트 코스

창덕궁 정문 돈화문에서 도심 속 데이트를 시작해보자. 안국역을 지나 창덕궁에서 창경궁까지 이르는 플라타너스 궁궐 담길(율곡로)은 서울 최고의 한낮 데이트코스. 행인이 많지 않아 호젓하기까지 하다.

창경궁은 정문(홍화문)을 지나 오른쪽으로 빠지면 온실과 춘당지가 나온다. 연못 분수대 앞은 사진을 찍기가 안성맞춤이다. 연못에서 통명전 쪽으로 빠지는 숲길도 좋다. 한 바퀴 돌아 창경궁 동남쪽 담장에 있는 궁문으로 간다. 조정의 신하들이 출입했다는 쪽문, 선인문 앞에서 남자 친구를 신하인 양 호령해봐도 재미있다. 

 

창경원으로 격하됐던 창경궁

창경궁은 아름다운 자연을 간직하고 있는 궁궐이다. 세종이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창건됐는데, 처음 이름은 수강궁(壽康宮)이었다.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버렸다가 중건됐으며, 험난한 역사의 현장으로도 유명하다. 숙종 때 장희빈과 그 일족이 처형됐으며, 영조 때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채 숨을 거두기도 했다. 또 1911년에는 일제가 궁내에 박물관을 설치하면서 순조 3년(1909)에 만들어진 동물원과 식물원을 포함해 창경원(昌慶苑)으로 이름을 바꿔 격을 떨어뜨리기도 했다.

매주 화요일 정기휴일이며, 겨울철에는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30분까지 관람할 수 있다. 관람료는 어른 1천원, 청소년 500원. 문화재청 창경궁관리소 (02)762-4868

 

역사의 숨결 그대로‘운현궁’
 운현궁은 ‘경복궁’과 같은 궁궐이 아니라, 흥선대원군의 사저이자 조선 26대 임금인 고종의 잠저(임금이 되기 전까지 출생, 성장한 곳)였던 곳이다. 

운현궁은 노락당과 노안당, 이로당으로 구성됐다. 운현궁에 들어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도 바로 이 노락당. 노락당은 운현궁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로 가족들의 회합이나 잔치 등 큰 행사 때 주로 이용했다. 덕분에 규모가 궁궐에 비해 손색없을 정도로 화려하고 웅장했다. 노안당은 대원군이 사랑채로 사용하던 건물. 그가 임오군란 당시 청에 납치됐다가 환국한 후 세도정치 아래서 운둔생활을 했던 건물이기도 하다. 노안당은 전형적인 한식 기와집으로 추녀 끝이 한복의 소매깃처럼 섬세하고 곱다. 카메라 하나 둘러메고 꼼꼼히 둘러보는 건축학도를 심심찮게 만날 수 있는 이유다. 


운현궁의 위상을 상징하는 것으로 4대문을 빼놓을 수 없다. 한창 전성기였을때는 정문, 후문 경근문(敬覲門), 공근문(恭覲門)의 4대문이 있었지만 현재는 후문 하나만 남아 있다. 규모와 구조가 웅장하고 화려했던 대원군이 권좌에 있을 때를 짐작케 한다.


 

일제에 처참히 짓밟힌 왕의 무대 ‘경희궁’

웅장한 자태로 경희궁을 찾는 발길을 환영하고 있는 흥화문은 원래 현재의 구세군 빌딩 자리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제가 1932년 흥화문을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사당인 박문사의 정문으로 사용하기 위해 떼어갔던 것을 이전해 현 위치에 복원 한 것. 모진 세월의 풍파를 겪은 문(?)이란 걸 알고 보면 더욱 반갑다.

경희궁은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살았던 곳으로 서쪽의 궁궐이라 해서 서궐(※창덕궁과 청경궁을 동궁이라 함)이라 불리기도 했다. 광해군이 축출된 후 영조 36년(1760) 궁의 이름을 경희궁이라 개칭했다.
경희궁에는 정전인 숭정전을 비롯해 편전인 자정전, 침전인 융복전, 회상전 등 10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었다. 하지만 1910년 일본인 학교인 경성 중학교가 들어서면서 대부분의 궁궐 건물이 헐려 나갔고, 면적도 절반 정도로 축소됐다. 1988년 경희궁복원 사업을 통해 현재의 모습으로 공개된 것은 2002년부터다.

 

연인들의 고백의 장소

흥화문을 통해 들어서 정면에 보이는 건물인 승정전은 임금과 신하들의 조회가 이뤄지거나 궁중연회, 사신 접대 등 공식 행사가 행해지는 곳이다. 특히 경종·정조·헌종 등 세 임금의 즉위식이 거행된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제가 경희궁을 훼손하면서 1926년 숭정전 건물을 일본인 사찰인 조계사에 팔았는데 현재는 동국대학교 정각원으로 남아있다. 현 위치의 숭정전은 복원 된 것. 일제에 의해 흔적도 없이 파괴됐던 태령전도 2000년 복원돼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문화와 예술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정동길과 정동극장, 정동교회는 경희궁과 함께 최고의 데이트코스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데이트 코스이기도 한 경희궁은 길을 따라 걷기만 해도 한적해 마음속 얘기가 절로 나온다. 게다가 경희궁 옛터에는 서울시립미술관이 있고 정동극장도 보이는 곳이 자리하고 있다. 낭만적인 정동길, 문화향기 그득한 정동극장과 함께 하는 데이트 코스에 경희궁을 묶어보자. 코끝 시린 초겨울 바람, 고즈넉한 산책에 이만한 곳이 있겠나 싶을 만족감이 차오른다.

/ 자료 - 영남일보 김상진기자

 

덕수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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