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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안보/국방1

유해발굴감식단 MAKRI

by 구석구석 2022. 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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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잊혀지지 않는다"

 

육군중앙신원확인소(CILHI)의 영어이니셜을 따서 부르는 실하이가 합동전쟁포로/실종자 확인사령부(JPAC)로 통합된 후 국방부 직할 부대로 장교 4명, 부사관·사병 21명으로 구성된 육군 유해발굴팀을 확대편성하여 유해발굴감식단이 2007년 1월 공식적으로 창설되었다.

MAKRI: MND Agency for KIA Recovery & Identification

인류학자와 고고학자를 비롯한 전문가 425명과 18개 발굴팀을 거느린 미군 발굴부대엔 못 미치지만 세계에서 두번째로 창설되는 조직이다. 

'국방부 유해 발굴감식단'은 국방부 직할 부대다. 군(장교 13명, 부사관 15명, 병 48명)과 민간전문인력을 포함해 4개과 4개 발굴반 85명 규모로 운영하게 된다. 박신한 대령이 초대 단장을 맡고 2007년 상반기 7개 지역, 하반기 6개 지역에서 발굴작업을 벌이게 된다. 

미군과의 합동 미군 전사자 유해발굴 작업도 벌일 계획이며 부대원들을 미 JPAC에 실무 연수를 보내고 전문 감식요원도 채용할 계획이다. 또한 올해 11월 중으로 전사자 유해발굴 지원법을 제정해 추진할 계획도 갖고 있다. 참고로 JPAC은 전세계의 미군 유해를 발굴하기 위해 창설된 부대다.

유해감식발굴에서는 세계 최고로 불린다. 연간 예산은 1억 4000만 달러에 이르며 부대 내 민간전문가 숫자도 20 여 명에 달한다.이번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창설은 시작부터 미국의 JPAC과 같은 결과를 만들어내기는 힘들겠지만 지금도 전국 곳곳에 잠들어 있는 14만여 구의 전사자 유해를 본격적으로 발굴하는 시작이 될 전망이다. <신문보도문> 

(속초=연합뉴스) 이종건 기자 = 6ㆍ25전사자 유해발굴이 진행 중인 해발 1천400m 설악산 저항령 고지 정상에서 국방부유해발굴감식단원과 육군 3군단, 육군 12사단 유해발굴팀원들이 운구에 앞서 발굴된 유해 앞에서 거수경례로 예의를 표하고 있다. 2012.6.14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에 있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청사 입구에는 ‘그들을 조국의 품으로’라고 쓰인 휘호석이 서 있다. 이곳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으나 아직 수습되지 못한 채 산야에 흩어져 있는 13만여 전사자의 유해를 찾아 국립현충원에 모시는 사업을 한다.

전사자의 넋을 위로하고 유가족의 한을 풀어주는 것이다. 한국전쟁 5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2000년부터 시작된 이 사업은 올해로 10년째를 맞았다.

출처 국방부 블로그

유해발굴감식단은 2000년부터 2008년까지 유해 2855구와 유품 5만2453점을 발굴했다. 하지만 이름 모를 산과 들에 묻힌 13만여명의 전사자 가운데 가족 품으로 돌아간 비율은 아직 0.02%에 불과하다.

“데이터만 보면 실망스러운 수준”이라고 운을 떼자 박 대령은 “유해발굴 과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마치 감자 캐듯 유해가 나오는 줄 안다”며 “150곳을 뒤져서 1구 발견되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발굴단원들끼리 “시신을 찾는 게 아니라 그분들이 우리 정성을 보고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런 어려움 때문이라는 것이다.

유해발굴감식단은 ‘전국을 무대로 활동하는 유일한 부대’다. 실제로 장병들은 장마철인 8월을 제외하고 1년 내내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한다. 다행히 고고학·인류학 전공자 위주로 뽑힌 유해발굴병들은 전공을 살려 병영생활을 할 수 있어 만족도가 높은 편이라고 한다.

그래도 언제 유해를 발견할지 모르는 불확실한 작업에 신세대 장병들은 지치기 쉽다. 박 대령은 “요즘 장병들은 힘드냐고 물으면 ‘힘들다’고 솔직하게 답한다”면서 “그래도 젊은이들이 ‘여기 묻힌 사람들에 비하면 (우리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뿌듯하다”고 말했다.

/; 주간조선 2009.4 심선혜 기자

한미, 경북 문경서 6·25 전사자 유해 공동 발굴

국방부유해발굴감식단은 미 국방부 전쟁포로·실종자 확인국(DPAA)과 내달 28일까지 경북 문경 마성면 일대에서 6·25전쟁 전사자 유해 공동 발굴을 진행한다고 22일 밝혔다.

국유단에 따르면 해당 지역은 국군 제6사단이 1950년 7월 17∼22일 ‘영강 부근 전투’를 치른 곳이다. 앞서 전사자 유해 약 150구가 발굴된 바 있어 추가 발굴 가능성이 크다.

사진 국방부

또 1950년 12월 15일 문경시 신현리 일대에서 미 육군이 발굴했던 미군 유해 1구의 신원을 특정하기 위한 근거를 찾으려는 목적도 있다. 한국과 미국은 2000년부터 전사자 공동 발굴을 진행하고 있다.

 

|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의 발굴 절차 |

1. 준비

·지역주민·참전 용사의 증언 확보 및 전투기록 분석
·현장 답사 후 발굴 지역 결정
·전투 현장 확인, 현지 토양 등 주변 정황 분석
·행정 관서·토지 소유주의 협조 아래 발굴 예정 지역 경시

2. 발굴·수습
·문화재 발굴 기법을 적용해 정밀 발굴 및 기록

·시신 식별(유품, 기록, 증언, 정황분석)
·전통방식에 따라 입관, 태극기 포장

3. 신원 확인
·성별, 나이, 사망원인 등을 통해 유해 감식

·유전자(DNA) 검사로 친족관계 확인

4. 국립 현충원 안장·봉안
·신원 확인된 유해는 화장 후 대전현충원 안장

·신원 미확인 유해는 일정기간 유해보관소 보존
·우방국(UN군) 유해는 해당국 인계
·적군 유해는 인수의사 타진 후 미인수 때 적군묘지에 매장 

마산 진동지구 56년만에 올리는 진혼의 경례. 유해발굴감식단(단장 박신한 대령)의 첫 발굴 현장으로 전사(戰史)에 따르면 당시 북한군에게 파죽지세로 밀리던 국군을 지원하기 위해 지역 청년들이 자위대, 민보단, 방위대 등 이름으로 참전했다가 산화했다.

△(서울=뉴스1) 허고운 기자 = 작년 비무장지대(DMZ) 내 백마고지에서 소총을 겨누고 있는 듯한 자세로 발견된 한국전쟁 전사자 유해의 신원이 고(故) 조응성 하사로 확인됐다고 2022.3.17일 국방부가 밝혔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국유단)에 따르면 조 하사는 1928년 경북 의성 출신으로 1952년 제주도 제1훈련소에 입대했다. 고인은 이후 국군 제9사단 30연대에 배속돼 1952년 백마고지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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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사단은 6·25전쟁 당시 강원도 철원 일대 백마고지를 확보하기 위해 중공군과 12차례나 공방전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7차례나 고지의 주인이 바뀌었다. 고인의 유해는 작년 10월28일 개인호 바닥에 엎드린 자세로 국유단과 육군 5사단에 발굴됐다. 현장에선 탄약류를 비롯해 개인 소장품으로 추정되는 만년필, 반지, 숟가락 등의 유품도 함께 나왔다.

특히 발굴된 철모와 머리뼈에선 한눈에 봐도 고인의 전사 원인으로 추정할 수 있는 관통 흔적이 확인돼 발굴에 참여한 장병들에게 안타까움을 더했다고 한다. 국유단은 발굴된 유해와 백마고지 전투 전사자 병적기록 등 자료조사를 거쳐 조 하사의 딸 영자씨를 찾아냈고 유전자 분석으로 친자관계를 확인했다.

경남 하동 화개면 탑리 일대서 2007년 4월 24일부터 26일까지 6.25전사자 유해발굴 시작 이래 최초, 학도병 유해발굴 실시. 참전자, 지역주민 제보, 전사연구 통해 20-30명(지휘 현역군인 포함) 집단 가매장되었을 것으로 추정.

 

2007년 현충일 기념방송 '반세기만의 귀향'을 보면서.....

2007년부터는 전사자가 많이 묻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강원도 화천 양구 서화 원봉 대관령 경기도 포천등에서 발굴작업예정이다. 게스트로 나온 김을동씨는 "아직 못찾은 유해가 137,899명이라고 하는데 이들을 찾는 것이 국민의 사명이자 의무이다"라고 말했다.

유가족의 DNA를 미리 채취해서 유해가 발굴이 되면 상호 대조를 전사자 신원을 확인하게 된다. 

이선영아나 : 한국전쟁당시 최초로 조직된 학도병은 수원에서 조직되어 서울전투에 공식적으로 참여했으며 정식학도병은 전국적으로 5만명이나 되었다. 여수 순천지역 학도병들이 15연대에 입대를 하였으며 화개전투에서 숨진 학도병유해를 최초로 발굴하였다. 탄알 버클 십자가를 포함하여 유해11구를 발굴하여 DNA대조 결과 한명만 신원이 확인됨.

 

마산 진동지구 발굴

진동리 어귀에서 유해발굴감식단 발굴과 이용석 과장(중령)을 만나 발굴 현장인 야반산 정상(341고지)을 향해 올라갔다. 30도가 넘는 경사면을 40여분 쉬지 않고 오르니 능선이 나타난다. 능선 양 옆에는 움푹한 참호(塹壕)가 즐비하다.

이용석 과장은 “왼쪽은 아군의 호고, 오른쪽은 북한군의 호”라고 설명한다.

1950년 여름, 참호는 빗발치는 공산군의 총탄을 막아내기 위해 가슴 높이까지 깊게 팠을 것이다. 하지만 57년이라는 세월의 풍화작용 속에 참호는 간장종지처럼 얕아져 있다.

진동리 야반산에만 1000여개의 옛 참호가 있다. 발굴과 대원들은 참호 한 개를 팔 때마다 호에 고유 번호를 붙인다.

전쟁 당시 참호로 사용됐던 것으로 보이는 곳은 일단 옛 낙엽을 걷어낸 뒤 야전삽으로 흙을 파낸다. 유해가 묻혔을 법한 장소의 표토(表土)를 걷어냈는데 나무 뿌리가 가로막고 있다면 톱으로 조심스럽게 나무 뿌리를 잘라낸다. 57년이라는 망각의 지층을 거슬러 잠들지 못하고 있는 유해를 만나려면 최소한 수십m는 파내려 가야 한다.

야반산 341고지 일대의 유해발굴은 성과가 좋은 편이다. 다른 고지 전투 현장에서는 평균 100개 호를 파면 그 중 2~3곳에서만 유해가 나오는 게 보통인데, 야반산에서는 평균 100곳을 파면 20곳에서 유해가 나온다. 1950년 여름 당시, 이곳에서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유해 수습에는 한 호당 5명이 한 팀을 이룬다. 호 안에는 경험 많은 대원이 들어가 호미로 조심스럽게 흙을 긁어내면서 깊숙이 파묻힌 나머지 유해를 찾는다. 다른 대원은 호 옆에 흰색 창호지를 길게 깔아놓고 그 위에 수습된 유해를 신체 부위 모양으로 맞추어 나간다. 모든 뼛조각과 유품들은 기록담당이 스케치를 하고 기록지에 기록한다.

뼛조각이 잘게 쪼개져 흙덩이와 뒤섞여 구분되지 않을 경우 체 위에 흙덩이를 놓고 좌우로 흔들어 유골을 걸러낸다. 다른 대원은 이 모든 과정을 동영상과 디지털 카메라로 찍는다. 

 ▲ 수습을 마친 유해를 봉송하고 있는 가운데 다른 대원들이 경례를 하고 있다. / 이용석 과장이 39호의 유해 상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감식반은 수습된 유해의 신체적 특성을 정밀 분석한 뒤 DNA 시료를 채취한다. 채취한 DNA 시료를 민간 전문기관에 보내 전사자를 찾고자 하는 유가족 혈액과 비교를 한다. 신원이 확인된 유해는 화장 후 대전 국립현충원 묘역에 안장되고, 신원이 확인되지 못한 유해는 화장 후 국립현충원 납골당에 임시 봉안된다.

진동리전투란 1950년 8월, 마산시 진동리 일대의 야반산, 여항산, 서북산, 배틀산에서 벌어진 전투를 말한다.

500여명의 해병대 ‘김성은 부대’는 여수에서 M1 소총을 지급 받았다. 철모와 대검이 없는 병사가 태반이었다. ‘김성은 부대’는 자동차, 무전기, 지도도 없이 전투에 나섰다. 8월 1~3일 진주에서 발산재를 넘어오는 북한군 6사단의 정찰부대를 마산시 진전면 고사리에서 궤멸시켰다. 이를 1차 진동리 전투 승리라고 한다.

이어 ‘김성은 부대’는 8월7~13일 2차 진동리 전투에서 진동과 태봉의 북한군을 섬멸하여 진주로 진출하는 미해병 5연대와 미 육군 5연대 전투단의 길목을 터졌다. ‘김성은 부대’는 이후 통영에서도 혁혁한 공훈을 세웠고, 이로 인해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주간조선 1948호 조성관 주간조선 차장대우]

▲6.25전쟁 후 북한지역에 묻혀 있거나 비무장지대에 묻혀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유해가 무려 5만 2천여 구에 달한다고 한다. 물론 남한 땅 곳곳에도 아직 발굴하지 못한 유해가 많이 있을 것이다.

2011년 2월 철원 광덕산에서 6.25때 전사한 유해 62구를 발굴했다는 기사가 났다. 절박한 상황에서 처절한 사투를 벌이다 전사한 유해가 그동안 광덕산 자락에 묻혀 있다가 이제야 돌아온 것이다. 이 나라 방방곡곡에 방치되어있는 유해가 얼마나 되는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미군 유해 발굴 지휘부대 JPAC, “지구 끝까지라도 찾아간다”

2005년 5월 13일 오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6·25 당시 희생된 미군 유해 15구를 남측에 인도하는 의식이 열렸다. 15구의 미군 유해를 넣은 관들이 하늘색 유엔기에 싸여 일렬로 놓인 가운데 지상에서 가장 경건한 유해 반환식이 거행됐다.

2004년 4월, 주한미군은 판문점을 통해 미군 유해 발굴작업에 사용될 미군 장비와 물자를 북한 측에 전달했다. 미국 측 유해 발굴 장비가 판문점을 통해 육로로 북한에 보내진 것은 1996년 북한 지역에서 미군 유해 발굴작업이 시작된 후 처음이었다.물론 미군 유해가 판문점을 통해 인도된 것은 2005년 이전에도 여러 차례 있었다.

그 때마다 이와 같은 미군 유해 인도 의식이 벌어지곤 했다. 미국은 북한과 외교관계를 맺지 않은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측은 미군 유해 발굴을 위해 평양에 연락관 2명을 상주시키고 있다. 연락관들은 평양에 머물며 미군 유해 발굴과 관련된 정보를 본국에 보고한다.

북한에 들어가 미군 유해 발굴을 지휘하는 부대는 미국 국방부 소속 ‘합동전쟁포로/실종자 담당사령부(JPAC)’다. 미국 정부는 1973년 유해 발굴 · 감식기구를 설치해 운영해왔다. JPAC는 ‘Joint Pow/Mia Accounting Commander’의 약칭이다. 부대장은 육군 준장이고 편성 인력은 450여명. JPAC는 미군 태평양사령부 예산의 3분의 1을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2005년 판문점에서 미군유해 인도

JPAC는 한국전쟁을 비롯해 걸프전, 베트남전, 2차 대전, 냉전(Cold War) 당시 실종된 군인들의 유해를 찾기 위해 전 세계를 대상으로 전문 발굴팀을 편성 ·운용하고 있다.

JPAC는 베트남 6개 팀, 라오스 4개 팀, 캄보디아 2개 팀, 북한 지역 2개 팀, 기타 냉전지역 4개 팀으로 총 18개 발굴팀으로 운용되고 있다. 팀별 인원은 10~14명이다.

JPAC 측이 북한에서 발굴작업을 집중하고 있는 곳은 6 · 25 당시 최대 격전지로 유명한 함경남도 장진호(長津湖) 인근과 평양에서 북쪽으로 100㎞ 떨어진 평북 운산 등 2곳이다. 장진호 일대는 미 7보병사단이 1950년 10월 말부터 중공군의 포위를 뚫기 위해 50여일간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이 과정에서 미군 1100여명이 실종되었다.

평안북도 운산은 1950년 11월, 미 1기갑부대와 25보병사단이 공산군과 격전을 벌인 곳이다. 특히 장진호 전투는 미국 작가 마틴 러스에 의해 ‘브레이크 아웃-1950 겨울 장진호 전투’라는 제목으로 미국에서 출간되었을 만큼 유명한 전투다.

JPAC가 1996년 북한에 들어가 유해 발굴을 시작한 이후 190구 이상의 미군 유해가 수습되었다. JPAC 측은 북한 지역에 아직도 8100구 이상의 미군 유해가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JPAC가 현재까지 전 세계 전투 현장에서 유해 발굴을 통해 신원을 확인한 유해는 1300여명이다. JPAC 측에 따르면 아직 수습되지 못한 미군 유해는 2차 대전 7만8000명, 한국전 8100명, 베트남전 1800명, 냉전 120명, 걸프전 1명 등이다.

미국 하와이 진주만 히켐 공군기지 내 JPAC 사령부 부대 정문에는 ‘조국은 당신을 잊지 않는다(You Are Not Forgotten)’라는 문구가 붙어 있다. JPAC 부대 휘장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다. ‘그들이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Until They Are Home)’이다.

[주간조선 1948호 조성관 주간조선 차장대우]

"뼛조각 하나도 놓칠 수 없다"

△강원도 양구군 수리봉 일대에서 6ㆍ25전사자 유해발굴작업을 벌이는 국방부유해발굴감식단 발굴단원들이 전사자의 뼛조각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위해 흙을 체로 거르는 작업을 하고 있다. 2012.5.29

△29일 오후 강원도 양구군 수리봉일대 6ㆍ25전사자 유해발굴 현장을 찾은 6ㆍ25참전ㆍ지원국 국내 유학생들이 국방부유해발굴감식단 관계자의 설명을 듣고 있다. 2012.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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