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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거 저런거/군대이야기

국군정보사 정보부사관 HID UDU OSI MID

by 구석구석 2022.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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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정보사령부  

***창설 -HID, UDU, OSI, MID등 4개 군별 첩보부대가 국군정보사령부에 흡수통합되어 재 창설

이들은 인간정보(휴민트) 주특기로 분류되어 있다. 인간정보주특기는 정찰대나 28비행전대같은 특수한 정보임무를 담당하는 자들에게 부여 

 -1990년도 이후에는 북파공작원이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우리가 알고 있는 전과자들이 아니고 신원조회가 상당히 철저하게 이루어 진다. -위장부대라 면회가 없으며 그대신에 외박이 잦으며, 주소도 회사명칭을 사용한다.

**HID(Headquarters of Intelligence Detachment)

-1950년 육군본부 정보국 내 신설된 공작과의 명칭으로 전쟁 중 첩보업무 활성화를 위해 1951년 3월 독립된 육군첩보부대로 발족

-HID는 과거 육군을 위한 정보수집을 하였으며 북파특수팀을 운영했었다.

-미육군 방첩부대 CIC 에서 지원. 70년대 당시 명칭이 AIU (Army Intelligence Unit)로 변경되었으나 현재도 HID 라고 불리운다.

-AIU는 공작원 포섭에서부터 훈련에 이르기까지 훨씬 체계적으로 진행, 켈로부대 출신들을 대거 기용했다.

-이들은 작전시 5명의 게릴라를 조직하는 습성이 있으며, 육군 전방부대의 철문을 통하여 월북 하여 복장은 북한 민간인 복장을 하고 주석궁 이나 북조선 인민위원회 공화당 건물에 잠입하여 공산당 간부및 위원들을 제거한뒤 흔적을 남기지 않고 폭파하는 임무를 지닌 부대이다.

-현재 침투요원들은 스스로를 HID라 부르기 때문에 아직도 HID가  실존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HID내에 특수조식인 청계산부대가 대북침투팀이 었으며 실제로 북파됨.

 

**UDU(Underwater Demolition Unit)-해군의 첩보부대

 

 -주로 잠수정이나 잠수함을 이용 침투하여 육상병의 탈출루트를 확보하고, 북조선 해군 원자력 병기 폭파와 원자 핵병기 연구원 사살, 청사진 입수라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북조선 해군의 원자력병기는 90년대 당시 페이즈1 에서 페이즈2 까지 모듈을 완성한 것으로 드러났다. 원자핵병기란 냉전당시 구소련의 마지막 유물이며, 핵미사일을 탑재, 발사할수 있는 능력을 갖춘 수륙양용 보행형 전차이다. 구소련이 멸망할 당시 북한의 연구원은 소련으로 넘어가 원자력 핵병기의 기술을 모티브 하여 80년대 말 북조선 해군 사령관의 지휘아래 연구개발 해온 원자 핵병기이다.

UDU 대원들은 잠수정으로 침투를 하나 작전 목표지역에 도달하면 수중으로 침투하여 해군기지의 배수구나 맨홀로 빠져나와 공작활동을 한다. 그들의 특수 장비나 무기는 미해군 특수전여단의 네이비씰에서 지급한다.-UDU 대원의 무기 : 리볼버 나강, K5 피스톨, MP5 smg, UZI, M37 샷건, M63 휴대용 경기관총, M9대검, 드라구 노부 반자동 저격소총, M40A1 볼트액션 저격소총, RPG-7 로켓발사기, C4 폭약, 가사약(CIA개발), RGD 수류탄

북에서 처형되는 북파첩보요원

  **20특무대 (특수수사대-OSI Office Of Special Investigation) 

-미국의 6008부대임무를 물려받아 20특무대가 오류동으로 들어가면서 2325부대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20특무대에 대북수사대(OSI)가 있었는데 이 수사대가 유명하다 보니 부대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영화 "실미도"에서 나오는 부대는 20특무대 소속은 아니었고 김신조사건이후로 박정희지시에 따라 중정의 주도하에 공군에서 운용한 대북침투부대로 20특무대 209파견대인 684부대이다. 김신조부대가 31명으로 남파되었기에 684부대도 31명으로 조직되었다.

-1998년 KBS2 주말 연속극‘야망의 전설’(극본 최완 규·연출 이녹영)의 주된 줄거리가 실미도 부대원이었다. 

-ROKF 대한민국 공군 소속의 최정예 공작요원으로, 총 대원수 28명을 자랑하는 소수정예 최강의 전투요원이다. 대원은 작전시 단독임무를 수행한다는 특성이있다. 대원들의 임무는 가상훈련으로 적색경보가 울리면 미공군의 마하 3 이상의 초음속 스텔스 전투기에 탑승하여 작전 목표지에 도달하면 탈출좌석 (ejection sheet) 에서 탈출하여 HALO 고공낙하를 펼친다.

그후 목표지에 착륙하여 첫번째 임무는 '항공기 유도 장치'를 펼쳐 '공군 제6전투비행단' 에 좌표를 송신한다. 두번째 임무는 보초병을 스나이퍼 라이플(저격총)로 제거한뒤 세번째 임무는 미사일 사일로나 핵미사일 연구소에 잠입하여 연구원들을 사살하고 핵개발 관련 연구 자료를 탈취한다. 또한 미사일 기지 설비의 청사진을 입수한다. 미사일 기지라면 미사일의 연료를 주입한뒤 C4 시한폭탄을 설치한뒤 작전지를 빠져나온다. 

침투요원들은 공군 항공구조전대 RESCUE 의 도움으로 비밀리에 탈출을 한다. 하지만 작전 성공률은 90%에 비해 탈출, 생존률은 10%에도 못미친다.

-북파대원의 무기 : M93R 자동권총, P90 smg, M9대검, C4 시첼, 항공기 유도장치, 가사약(CIA개발), HE 고폭 수류탄

 

 **MID

-김일성암살을 위해 68년11월에 창설 

-해병대에서 운영했던 첩보부대로 74년 UDU로 흡수통합됨

-MIU(마니산 까치부대)가 대북침투팀 

/ 자료 - '대한민국 특수부대 및 무기가격' / 네이버 지식iN / 다음 신지식의 답변 / 특수부대겔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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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부사관 선발방법 및 의무복무 

서류심사-> 지원서 및 자기소개서 등 구비서류 평가, 평가요소에 의한 기본자질 평가

인성검사-> 표준 인성검사 질문서 작성, 종합적인 인성/품성 평가

신체검사-> 신체 주요항목 현장 검진, 신장, 체중, 혈압, 시력, 청력, 색맹, 치과 등

체력검정-> 체력검정 7개종목평가, 무술능력(앞차기, 다리벌리기, 낙법 등 개인특기) 평가

면접-> 면접관에 의한 개인면접 진행

최종합격-> 평가항목 배점별 종합적인 합격여부 판단하며 4년 하사관근무

더솔저스에 출연한 정보사 해상특수요원 출신 고인호 김영철

 

군사분계선을 13번 넘은 사나이 

2020. 12월 국군 정보사령부 원사(元士)로 전역한 홍재곤(72세) 씨가 수기(手記) 노트를 들고 기자를 찾아왔다. 앞서 그는 전화로 HID(육군 첩보대) 북파(北派) 무장공작원 출신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홍재곤 씨가 서울현충원 제53묘역에 묻힌 전우들의 유골없는 가묘에 소주를 따르고 있다. 다른 전사자들의 묘비와 달리 이들의 묘비에는 전사한 장소가 빈칸으로 남아 있다. 적진에 무장공작 침투했다가 전사한 사실을 기록으로 남길 순 없기 때문이다. [김당]

홍 씨는 기자가 쓴 책 〈공작〉을 읽고 연락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알고 보니 그는 〈공작〉의 주인공인 흑금성 공작원 박채서씨와 정보사 예하의 902정보부대 캠프 그레이 에넥스(서울 대방동) 한미 합동대에서 함께 근무한 인연이 있었다.

 

홍씨는 호리호리한 체격에 선한 눈매를 가진 70대 노인이었다. 막연하게 머리속에 그렸던 '살인병기'라는 별칭의 북파공작원 이미지와는 딴판이었다. 북파공작원에 대한 기자의 선입견이 무색해졌다.

 

하지만 나중에 홍 씨의 젊을 적 사진을 보고 그 까닭을 알 수 있었다. 알고 보니 그는 북파공작원 시절에 노출된 고엽제 피해와 그로 인한 대장암 수술 후유증으로 호리호리한 몸매가 된 거였다.

 

홍씨가 가져온 두툼한 스프링 노트 수기(A4 용지 200쪽 분량)에는 어마무시(?)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물론 개인의 주관적 경험담이기에 취재와 객관적 검증이 필요한 내용들이었다. 그런 과정을 거쳐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확인했다.

 

1960년대 중반 '국립소년직업훈련소'에서 매년 정원(500명)의 5%에 해당하는 소년들(14~18세)을 북파공작원으로 물색, 1967년 응징보복 북파 무장공작에서 전사한 번개1호 팀원(팀장 포함 6명)에 대한 판문점 시신 인수 거부, 북파공작원들의 무공훈장 공적서를 '적진 침투'에서 '대간첩작전'으로 조작 등이었다.

 

정보사 물색관들이 서울역 등지에서 무연고자나 고아들을 감언이설로 꾀어 북파공작원으로 양성했다는 것은 알려진 서사구조(敍事構造)이다. 하지만 국가가 운영하는 아동복리시설에 수용된 14~18세 아동들을 조직적으로 물색한 것이 밝혀지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는 명백하게 실정법(아동복리법 등)을 위반한 국가 범죄였다. 당시의 국립소년직업훈련소 '운영규정'(보건사회부령 제155호)에 따르면, 훈련생의 입소 기준과 연령은 '(육아)시설에 수용된 14세부터 18세 이하의 남아아동'으로 제한되었다.

1962년 7월 19일 인천 구산동에 건립된 국립소년직업훈련소 준공식 테이프 커팅. 이주일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가운데)과 정희섭 보건사회부장관(맨오른쪽), 김병삼 내각사무처장(맨왼쪽) 등 군사정부 요인들과 착공 자금 2억 환을 기증한 김영귀(풍한산업), 채몽인(대륭산업), 이봉수(신일기업) 등 독지가들이 함께 했다. [국가기록원]

이런 국가 범죄는 국가안보와 군사기밀이라는 방패를 무기로 지난 50여년 동안 은폐돼 왔다. 국가, 즉 북파공작을 실행한 군(정보사)과 이에 대한 조정∙감독 책임이 있는 국가정보기관(중앙정보부)이 북파공작원을 국가안보를 위한 응징보복 작전의 '1회용 소모품'으로 간주하고, 이들의 물색∙양성∙침투∙사망의 전과정을 군사기밀로 분류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국립소년직업훈련소 준공식 때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이주일 부의장이 대독한 훈시에서 "직업훈련에 그치지 말고 인간개조에 하나의 발판이 되어야 한다"면서 "기술은 일생의 재산이다"라고 강조했다. 국가는 그 몇 해 뒤부터 소년 훈련생들을 사탕발림과 목돈의 유혹으로 속여 대패와 보습 대신에 대검과 총을 쥐어주고 '살인병기'로 인간 개조했던 것이다.

 

이런 국가 범죄를 추적할 수 있었던 것은 북파공작원(특수계약직 사병)과 북파공작원 훈련조교(하사관), 정보사 행정운영담당관(원사) 등으로 복무한 홍 씨의 독특한 정체성 덕분이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 당시 명예회복과 보상을 요구하며 서울 시내에서 '가스통 시위'를 주도한 북파 공작원들은 대부분 1950~1960년대 한시적으로 북파공작원으로 복무했던 이들이다. 당시 국민회의 김성호 의원이 공개한 1950년대 HID 제1교육대 '종결공작원 명부'에 따르면, 이들의 평균 활동 기간은 258일이었다.

 

이들의 복무기간은 달수로 치면 1년이 채 안되는 8~9개월이다. 적진 침투는 그야 말로 사지(死地)로 들어가는 위험한 작전이다. 그만큼 이들의 복무기간도 수명만큼이나 짧았던 것이다. 이후 1960년대 HID가 AIU로 바뀐 뒤에는 물색과 교육훈련, 침투의 전과정이 좀더 체계적으로 진행되었다.

 

홍 씨는 남북간에 비무장지대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1967~1969년 동안 적진에 13회나 침투해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고도 운 좋게 살아남아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다. 홍 씨와 함께 복무한 북파 무장공작대원들 40명 중 6명(사망률 15%)이 전사했다.

 

국방부 특수임무수행자보상심의위원회가 홍 씨의 민원에 답변한 회신문에 따르면, 국방부가 보상을 위해 산정한 홍 씨의 특수임무수행 기간은 52개월(66. 7. 15~70. 10. 12)이다. 앞서의 제1교육대 출신 북파공작원들과 비교하면 6배 정도 더 장기복무한 것이다.

 

홍 씨는 북파 기간이 길어질수록 남은 것은 '개죽음'뿐이란 사실을 목도했다. 그는 자대인 인천101첩보대에 끈질기게 계약해지를 요구해 마침내 3년만에 하사관으로 양성화되었다. 이후 1969년부터 정보사에서 북파 무장공작대 및 단독첩보수집 공작원 훈련조교와 행정운영담당관 등으로 1998년까지 복무했다.

 

홍 씨는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1998년에 6월 30일자로 정보사에서 전역했다. 32년 군복무를 마치고도 만49세였던 것은 그가 16살에 소년병으로 차출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북파공작원들처럼 '가스통 시위'에 선뜻 나서지 못한 것도 그 자신이 북파공작원이자 북파공작원을 키운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북파공작원과 북파공작원 훈육조교, 그리고 북파공작 행정운영담당관으로 복무한 북파공작의 '산증인'이기에 그의 증언과 기록은 의미가 있다.

1945년 9월 말 미군 사진병 돈 오브라이언(Don O' Brien, 왼쪽)이 38도선 인근에서 소련군을 만나 찍은 기념사진. [돈 오브라이언 flickr 캡처]

예를 들어 1968년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 직후에 우리 군의 응징보복 작전으로 전개한 '황소공작'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소련군사고문관 사살' 등이 사실로 확인되면 소련군사고문단이 1958년에 완전 철수했다는 학계의 기존 연구를 뒤집는 것이다.

일시 팀원 공작 성격∙내용 전과
번개2호 1967. 7 6명 군관막사 폭파 등 적 군관막사 폭파
오성산 1968. 6 5명 1∙21사태 응징보복 적 남침로 유동병력 기습공격
호랑이 1968. 8 5명 1∙21사태 응징보복 잠복조 5명 등 7명 사살, AK소총 노획
태풍 1968. 9 5명 1∙21사태 응징보복 적 12사단 지역 기습공격
무지개 1968. 10 5명 1∙21사태 응징보복 3사단 관할 민통선 야전천막에서 숙식하며 적 12사단 지역 8회 침투(3명 사살)
황소1호 1968. 11 5명 1∙21 및 울진∙삼척 사태 응징보복 소련군사고문관 등 20여명 사살(귀순한 북한군 707GP장 신문첩보로 확인)

그런 점에서 홍 씨가 '직접' 참여한 북파 무장공작을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굳이 '직접'을 강조한 것은 무장공작은 임무에 따라 적진 침투 폭파공격팀과 전∙후방 지원팀으로 나뉘는데 후방 지원조로 참여해도 무공훈장을 받기 때문이다.

 

홍 씨는 훈련조교로 양성화되기 전까지 3년 동안 번개2호 △오성산 △호랑이 △태풍 △무지개 △황소1호 등 6개 북파 무장공작에 참여했다. 이 가운데 더러는 추가로 교차검증이 필요한 내용들도 있지만, 그동안 알려진 북파 공작사를 다시 써야할 내용들도 있다.

 

홍 씨가 참여한 번개2호 팀과 함께 동시다발 작전에 참여한 번개1호 팀은 최○형 팀장과 경계조 김○재, 폭파조 김○덕∙장○혜, 후방경계조 전○성 등 5명이 전사했다. 척후조 신○환은 적진에서 교전 중 탈출한 유일한 생존자이다. 그는 전우들이 사살된 장면을 목격하고 혼자만 살아 돌아왔다는 자괴감에 시달리다가 1991년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우울증으로 자살했다.

 

북한군 특수부대가 청와대를 기습공격한 1∙21사태에 대한 응징보복 작전으로 기획한 오성산 공작은 북한군 주요 남침로의 유동 병력을 기습공격해 적을 사살∙납치하는 것이 골자였다. 오성산은 나중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전방시찰한 곳으로 알려졌다.

 

호랑이공작과 태풍공작은 모두 1∙21사태에 대한 응징보복 무장공작이었다. 둘 다 아군 3∙6사단과 접경한 북한군 12사단 관할 부대에 대한 기습공격 작전이었다. 특히 호랑이공작의 경우 북방한계선 앞 북한군 잠복호를 기습공격해 잠복조 5명 등 북한군 7명을 사살하고 AK소총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무지개공작 역시 전선공작이지만 단발성 공작이 아니라 아군 3사단 관할 남방한계선 민통선 지역에서 야전천막을 치고 숙식하면서 적 12사단 지역에 침투해 수시로 기습공격과 군관납치를 시도한 다발성(8회 침투) 무장공작이었다.

 

홍 씨의 수기를 보면, 당시 적지역 강원도 평강군 하진리 일대를 거의 매주에 한번씩(9월 13일 새벽 1시, 9월 22일 밤 10시, 9월 27일 새벽 1시, 10월 15일 밤 9시, 10월 21일 밤 10시 등) 침투한 것으로 돼 있다. 이때 재수(?)없게 조우한 북한군 3명이 사살되었다.

 

황소1호 공작은 본디 1∙21사태에 대한 응징보복 작전으로 기획되었다가 호랑이공작 목표와 침투경로가 겹쳐 연기되었다. 그러다가 1968년 10월말에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터지자 작전을 강행해 1개 소대 병력 중 소련군사고문관을 포함해 20여명을 사살하는 망외(望外)의 전과를 거두었다. 이 같은 전과는 그 뒤에 귀순한 북한군 707GP장 유대윤 소위의 신문첩보로 교차 검증되었다.

 

홍 씨가 국군 제9965부대 부대장(정보사령관)으로부터 확인받은 '복무사실 확인서'에 보면, "상기자는 1968. 6. 15~1968. 11. 16 강원도 평강시 평강군 하진리(CT 535417) 지역에서 복무한 사실이 있음"으로 돼 있다. '하진리(CT 535417)'의 좌표는 그가 적진에서 복무했음을 뜻한다.

 

홍 씨는 무지개공작 기간에 6개월 동안 적 지역에 침투해 잠복한 것을 특수임무수행 기간에 어떻게 산정했는지를 질의했다. 그러자 정보사측은 홍 씨에 대해 침투공작 횟수를 총 13회로 산정해 보상금을 지급했다고 답변했다. 무지개공작 기간의 침투 횟수를 8회로 산정한 셈이다.

홍재곤씨의 전역증. 1949년생인 홍씨의 임관일이 18세인 67년 9월로 돼 있다. [홍재곤 제공]

전과(戰果)와 무공훈장 뒤에는 적지 않은 희생과 상흔이 뒤따랐다. 앞서 말한 번개1호팀은 팀장과 대원 등 5명이 적진에서 전사했고, 유일한 생존자인 척후조 신○환은 혼자만 살아 돌아왔다는 자책감에 시달리다가 1991년 외상후스트레스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에 따른 우울증으로 비관 자살했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로 자살한 북파공작원들

 

외상후스트레스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는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극심한 스트레스(정신적 외상)를 경험하고 나서 발생하는 심리적 반응을 지칭한다. 베트남전, 이라크전 참전용사 영화에서 흔히 보는 소재다.

 

북파공작원들도 예외가 아니다. 훈련과 실전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한 동료들과 적진에 침투했다가 혼자서만 살아 돌아왔다는 죄책감과 악몽에 시달리다가 끝내 자살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홍재곤 씨의 북파 무장공작 전우만도 4명이 자살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극한 체험에 따른 PTSD 환자는 그뿐이 아니다. 번개2호 후방경계조 채○덕도 PTSD에 시달리다가 자살했다. 침투공격조와 후방 지원조를 포함해 작전에 참여한 대원 전원이 무공훈장을 받은 황소공작의 김○동 팀장은 2008년 집앞 근린공원에서 목을 맸고, 척후조 임창호도 자살했다.

 

홍 씨 자신도 황소공작에서 왼쪽 장단지에 총탄 부상을 당했다. 또한 다른 북파공작원들과 마찬가지로 고엽제 노출에 의한 피해를 겪고 장해 판정을 받았다.

 

적진에서의 작전 중 생존율은 이른바 기도비닉(企圖秘匿)에 달려 있다. 북파공작원들의 실전훈련도 군견에 들키지 않고 공격목표에 접근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그런데 북파공작원들이 실전에서 잠복 중에 가장 견디기 어려운 건 모기떼였다.

 

홍 씨가 작전에 투입된 1968년 7~8월에는 전방 사계청소(射界淸掃) 차원에서 고엽제를 대량 살포했다. 이로 인해 북파공작원들뿐만 아니라 전방 수색대원들도 고엽제에 노출되는 피해를 겪었다.

 

특히 북파공작원들은 잠복 중 모기를 쫓기 위해 제초제를 물에 이겨 얼굴과 피부에 바르고 침투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홍 씨 역시 고엽제 피해로 인한 장해 등급을 판정받고 나중에는 대장암 수술을 받기도 했다.

 

홍 씨는 북파공작 13회 침투 횟수와 고엽제 피해를 인정받아 다른 특수임무수행자들보다는 상대적으로 많은 액수의 보상을 받았다. 하지만 잃은 것은 돈으로 대신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는 국립소년직업훈련소에 들어가 제주도 말목장에서 일하는 청운의 꿈을 잃었다. 그와 함께 입소한 직업훈련소 출신의 공작원 50명 중에서 6명이 전사했다. 4명은 임무를 마치고 PTSD에 시달리다가 자살했다.

 

그의 마지막 소원은 북파공작 기간에 연락이 두절돼 헤어진 하나뿐인 동기간인 누이동생과 재회하는 것이다. 또한 국립서울현충원 제53묘역에 시신 없이 가묘로 안장된 6인의 전우들의 형제나 유족이 정당한 보상을 받는 것이다.

 

정보사 행정운영담당관으로 복무한 홍 씨는 "전우들은 나와 같은 국립소년직업훈련소 출신의 고아들이라서 부모는 없지만 형제자매 중에 동기간이 한 사람은 있을 것"이라며 "이들의 신상과 공작 사례가 정보사 특수처에 마이크로필름 형태로 보관 중이니 어떻게든 연락을 취해 보상을 해줘야 한다"고 당부했다.

UPI뉴스 / 김당 대기자 dangk@upinews.kr

 

 

북파공작원/특수임무수행자회-HID UDU

북파공작원 공식규모 확인 '실미도 사건' 등으로 어렴풋이 존재만 알려졌을 뿐, 정확한 실체가 그동안 베일에 감추져온 북파공작원의 실상이 정부에 의해 처음으로 공개됐다. 1만3천명 양성, 7천

blog.daum.net

 

북파공작원 

북파공작원들은 북한 주요 관공서나 군부대에 잠입해 비밀문서를 빼오거나 요인을 납치해오는 등의 고급공작임무, 휴전선 부근의 북한군을 교란하고 북한군의 장비를 획득해오는 일반공작임무를 수행했다. 이런 임무는 군이 지휘했지만 특히 위험하거나 중요한 임무를 수행할 때는 당시 중앙정보부가 직접 작전지휘를 맡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북파공작원들은 주로 HID라는 특수부대에 소속돼 작전에 투입됐다. 48년께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지며, 전쟁 당시 활동했던 북파공작원들은 HID의 고유명칭을 육군첩보부대로, 통상명칭을 육군4863부대로 기억하고 있다. HID는 전쟁 당시 약 30개의 부대를 운영했고 이 중 잘 알려진 부대는 52년 10월께 서울 정릉 청수장에 설립된 제1교육대다.

이들은 휴전선 부근과 북한에 공중으로 침투, 폭파와 정보수집 등을 맡았다. 이 부대는 60년대 말부터는 AIU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AIU는 속초와 고성 사이에 현재에도 존재하고 있으며 이 사실은 지난해 신창원 검거에 결정적 공헌을 한 김모(31)씨를 통해 알려지게 됐다.

그러나 정보사쪽은 "부대는 유지하고 있지만 72년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면서 공동성명 정신에 따라 서로간에 무장공작원을 파견하지 않기로 약속한 뒤 북파는 중단했다"고 밝히고 있다.단일 임무 하나만을 위해 만들어지긴 했지만 실미도부대 역시 대북 침투부대였다. 이 부대는 김신조 사건에 대한 보복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부대로 알려져 있다.

이상의 부대들은 미군과 별도로 조직된데 반해 켈로와 잭은 미군의 통제 아래에 있는 부대였다. 미8군 산하 396부대로 알려진 켈로부대는 KLO(Korea Liason Office)를 한국식으로 발음한데서 나온 부대명이다. 45년 일본이 항복하자 미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하지 중장이 이끄는 24군단을 한국에 주둔시켰다.

 

그러나 48년 12월 미국 정부는 대규모 감군작업을 하면서 소수의 군사고문단만 남기고 주한미군을 철수시켰다. 이 군사고문단은 극동군사령부의 '주한연락처'로 활동했으며 북한내 정보수집이 주임무였다.

주한연락처는 이를 위해 당시 고트, 이글, 윔프스, 불독, 리바이벌 부대 등 10여개의 한국인 첩보부대를 운영했는데 이 부대들을 통칭해서 켈로부대라고 불렀다.

잭(JACK)이란 1952년 CIA 한국지부가 창설한 한-미합동고문단 첩보부대를 말한다. 미군이 훈련시켜 북한에 투입, 무장 북파공작 활동을 벌인 공작원은 50년부터 56년까지 모두 300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대부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고 56년 이후의 부대 운영도 드러난 바가 없다.

유투브 화면캡쳐

 

前 국군정보사령관이 말하는 북파공작부대의 어제와 오늘

[신동아] 2009.9 황일도기자

1968년 11월의 어느 아침. 자줏빛 단풍으로 물든 산야가 아리도록 곱다. 아직 열여덟의 어린 나이, “동무, 살려달라”고 소리치던 북한군 병사를 향해 무참히 방아쇠를 당기던 손끝의 감촉이 수풀 속에 엎드린 그의 뇌리에서 접착제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북한군 막사 비포장 군사도로 언덕 위로 정치보위부 소대 병력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 순간이었다. 검은색 승용차에 탑승한 소련 군사고문관의 호위병력. 그는 크레모어 격발기의 안전핀을 풀고, 팀장의 신호에 맞춰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강원도 평강시 평강군 하진리 계곡에서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이 하늘을 찢었다.

아비규환 속에서 북한군 군관을 잡아채는 순간, 요란한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손등을 스치고 지나가는 방망이 수류탄의 파편. 피투성이가 된 손을 바라보며 숨을 몰아쉬는 동안 혀는 바싹 말라 입천장에 달라붙는다. 

10시간 뒤, 그는 죽음의 고비를 넘고 넘어 우리군 GOP 통문에 다다랐다. 미리 당도해 있던 동료 팀원이 살아온 그를 보고 눈물을 쏟는다. ‘다시는 이런 목숨 거는 일을 하고 싶지 않다.’ 가슴속으로 되뇌임이 이어지지만, 쉽게 현실이 될 수 없음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부산이 고향인 홍남형(가명·60)씨가 인천에서 ‘물색관’에게 입대를 권유받은 것은 1966년 3월, 그의 나이 16세 때였다. 1968년 11월의 침투임무는 그가 수행한 마지막 작전이었다. 그러나 수백만 원의 돈을 주겠다는 애초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후 30여 년 세월 동안, 그는 자신이 비무장지대 북방한계선을 넘나든 인물임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함께 작전하다 죽은 동료의 누이를 알고 있었지만,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명령에 끝내 전사 소식을 전하지 못했다. 

해외 밀리터리포토싸이트에서

1953년 정전협정 체결 이후 한국군의 모든 부대는 전시를 ‘대비’하는 부대다. 현재 전쟁을 치르고 있지 않은 국가의 모든 부대가 마찬가지다. 유사시를 대비해 계획하고, 준비하며, 훈련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다. 그러나 예외가 있다. 공식적으로는 전쟁이 멈춘 이 나라에도 끊임없이 휴전선을 넘나들어야 하는 임무가 있었고, 이 임무를 수행하는 부대가 있었다. 다만 비공식적이었으므로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 북파공작원 문제를 수면으로 끌어올린 김성호 전 민주당 의원이 관련 책의 제목을 ‘우리가 지운 얼굴’이라고 붙인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2009년 현재, 북파공작부대에 관한 이야기는 이제 비밀의 영역을 완전히 벗어났다. 1999년부터 쏟아져 나온 전직 부대원 및 그 유가족의 증언은 이들의 존재와 역사적인 실체에 관해 다양한 정보를 세상 밖으로 꺼내놓았다. 2004년 영화 ‘실미도’로 대중의 관심은 폭발했고, 정부 역시 같은 해 관련법령을 제정하고 이들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총 1만3000명을 양성했고 그 가운데 무려 7726명이 임무수행이나 훈련과정에서 사망했다는 공식 보고였다. ‘군사기밀’이라는 네 글자에 가려 있던, 베트남전보다 많은 사망자의 사연이 비로소 빛을 보게 된 순간이었다.

 그러나 퇴역 부대원들의 기억에 의존한 북파공작부대 이야기는 지나치게 파편적이거나 부정확한 정보를 담고 있기 일쑤였다. 반세기 동안 대한민국 정부가 운용해온 대북 첩보부대의 정확한 얼개와 흐름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 누구나 북파공작을 알지만 그 정확한 내역은 여전히 안개에 싸여 있는 형국이다.

 2003년부터 2006년까지 국군정보사령관을 지낸 오항균 예비역 육군소장(육사 29기)은 이를 체계 있게 들여다본 거의 유일한 인물이다. 북파공작원 문제가 양지로 쏟아져 나오던 시점에서 정보사령관으로 재직했던 그는, 퇴역자나 유가족들과 만나 실태를 듣고, 정보사가 보관하고 있는 관련 기록을 뒤져가며 작전내용과 종사자, 전사자를 확인하는 한편, 보상 법률에 대한 시행령을 입안하는 작업까지 진행했다. 한마디로 북파공작 임무의 어제와 오늘을 꿰뚫고 있는 셈이다.

 오 전 사령관의 회고와 경험담을 바탕으로 각 시기 전역자들의 증언과 자료를 취합해 북파공작부대의 극적인 역사와 그 맥을 잇는 정보사 특수임무 부대의 현재를 하나씩 정리했다.  

현재는 공개적으로 모집은 안하고 있다.

 

 “손에 쥔 건 자폭용 수류탄 뿐” 

북파공작의 시작은 광복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법적으로는 1948년 건국 직후 창설된 육군본부 정보국을 연원으로 보지만, 이전부터 38선을 넘나들던 민간유격대나 미 극동군사령부 소속 첩보부대 KLO(Korea Liaison Office)까지 그 역사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만만찮다.

 이후 창설된 육해공군 첩보부대는 6·25전쟁의 참화 속에서 눈부신 활약을 했다. 그 가운데는 군인으로서 명령에 따라 임무를 수행한 이들도 있었지만, 민간인 신분으로 북한 지역에 뛰어든 평범한 젊은이들도 있었다. 열여덟 여학생의 몸으로 첩보작전에 참여했던 김부전(74)씨의 회고다.

 “여성계 지도자들의 독려에 따라 어린 여학생들이 첩보임무에 자원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갈래머리를 잘라 파마를 하고 는 배를 타고 북한 후방지역으로 투입됐다. 원래는 백마산의 유격단체를 접촉하는 임무를 받았지만 이미 사실상 해체된 상태였고, 대신 인근 지역 지하에 은폐돼있던 대형 비행장 시설을 확인해 보고하는 등 다양한 작전에 참여했다. 무장이라고는 붙잡힐 경우 자폭할 수 있도록 쥐여준 수류탄 하나가 전부였다.” 

동해와 서해, 육상과 공중으로 나뉜 이들은 중국군의 참전 사실 확인, 북한군 고위간부 납치, 주요 군사시설 파괴 같은 임무를 수행했다. 전쟁을 전후해 이들 첩보부대는 육군의 HID(Headquarters of Intelligence Detachment), 해군의 UDU(Underwater Demolition Unit), 공군의 AISU(Airforce Intelligence Service Unit)로 체제를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사진출처 blog.naver.com/nicole9262/222509789233

목장, 물색관, 왕사장

 전쟁이 끝난 뒤 북파공작은 ‘무장공비’로 불렸던 북측의 침투에 대응하는 보복 공격 형태로 이뤄졌다. 쉽게 말해 북파부대는 한국 측의 무장공작원이었던 셈. 차이가 있다면 북한군의 무장공작이 후방침투 성격을 띠고 있었던 데 비해, 이들의 활동은 주로 휴전선 인근에 있는 북한군 연대·사단본부 등을 파괴하는 5~10명 단위의 임무가 많았다는 점이다.

 이 시기부터 각 군 첩보부대는 안전가옥 형태의 훈련소를 여러 지역에 설치해 운영했다. 육군 HID의 경우 흔히 ‘목장’으로 불린 청계산 훈련소를 비롯해, 집 한 채와 텃밭이 전부인 안가가 인천, 논산, 춘천, 전곡, 인제 등 수십 개에 달했다. 해당 지역의 이름을 따서 ‘춘천대’ 등으로 불렸다. 대원이 생포되는 경우 전체 부대의 규모를 발설할 수 없도록 훈련소끼리도 거의 교류 없이 지냈다.

 문제는 이들 중 상당수가 정식 군인이 아닌 민간인 신분(이른바 ‘민수’)이었다는 점이다. 군인을 투입했다가 생포될 경우 정전협정 위반으로 국제법적인 문제가 발생하게 되므로, 민간인들을 데려다 쓴 것. 내부적으로 군인 신분을 부여한 경우에도 군번이나 계급을 알려주지 않는 일이 많았다.

 흔히 ‘물색관’으로 불린 첩보부대 관계자들은 기차역 같은 번화가에서 ‘몸이 좋은 젊은이’를 골라 “공무원 자리를 보장해준다”거나 “집을 몇 채 살 수 있는 큰 돈을 주겠다”며 섭외하는 게 당시의 일반적인 패턴이었다.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강도 높은 훈련과 보안 철저준수를 강조한 폐쇄성의 폐해도 컸다. 훈련 중에 사망하거나 북한지역에서 임무를 수행하다가 죽은 경우에도 유가족에게 제대로 통보되지 않는 일이 잦았다. 심지어 훈련 중에 중대범죄가 발생하면 자체적으로 즉결처분해 살해하는 끔찍한 사건도 많았다. 북파공작부대가 인권유린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한 배경이었다.

 이 무렵의 한 전역자는 “육신이 워낙 고단했기 때문에 일단 실컷 먹고 푹 자는 게 소원이었다”고 회고했다. 언제 전역하는지도 몰랐다가 ‘왕사장’으로 불리던 HID 대장 앞에 가서 ‘전역 후 보안엄수 서약서’를 쓰는 순간에야 비로소 알게 됐다는 것. 집 몇 채를 살수 있는 거금을 준다는 약속은 깨끗이 사라졌지만, 부대를 떠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는 이야기다. 

1980년대 설악개발단

앞서 말했듯 북한군 전방 군사시설 공격이 주를 이뤘던 북파공작은, 그러나 1968년 1·21사태로 급변한다. 북한 무장공작원 31명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휴전선을 넘어 서울까지 진출한 이 사건은 정권 핵심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각 군에 기존의 첩보부대와는 별도로 ‘후방에 침투해 김일성 주석 등 수뇌부 암살을 시도할’ 새로운 형태의 북파공작 기획을 지시한다. 이와 함께 육군 HID가 AIU (Army Intelligence Unit)로 개편되어 ‘설악개발단’이라는 위장명칭을 사용하는 등 편제가 정규화됐고, 해병대도 별도의 첩보부대를 창설했다(이 부대는 1975년 해군 첩보부대로 통합된다). 

오 전 사령관에 따르면, 조천성 HID대장(당시 준장)이 훈련을 책임졌던 ‘새로운 형태의 부대’는 형식상 군별로 하나씩 만들어졌다. 1968년 4월 창설돼 ‘684부대’로 불렸던 실미도 부대는 공군 소속이었고, 선갑도 부대는 육군 소속, 장봉도 부대는 해군 소속이었다. 침투 용이성을 위해 북한 지역과 매우 가까운 서해 섬에 하나씩 자리한 형국이었다. 

HID훈련중

각 부대는 김신조 부대와 똑같이 31명으로 구성되어 총 93명에 달했다. 실미도 부대 대원들은 영화 줄거리와는 달리 전과자 출신이 아니었고, 북파공작부대를 통틀어 선갑도 부대만이 교도소에서 사면을 약속받고 차출된 이들로 구성됐다. 이렇듯 각 군이 비슷한 성격의 부대를 중복 편성한 데는 ‘충성경쟁’이 한몫했다는 게 같은 시기 AIU에 참여했던 특수임무수행자회 김희수 회장의 평가다.

 그러나 1971년 8월 실미도 부대원들이 섬을 빠져나와 청와대로 향하던 중 서울 대방동에서 자폭하자, 놀란 중앙정보부와 각 군 수뇌부는 나머지 두 부대도 바로 해체했다. 그 과정에서 부대원들 일부가 ‘보안유지’를 위해 살해당하는 끔찍한 일도 벌어졌다. 여기에 이듬해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됨에 따라 한국군의 북파공작 수행은 공식 중단을 맞게 된다. 그러나 퇴역자들 사이에서는 1990년대 초반까지 첩보수집이나 북한군 전방부대 공격을 위해 휴전선을 넘었다는 경험담이 적지 않다. 오 전 사령관은 “수도꼭지를 잠가도 단번에 물이 완전히 끊기는 것은 아니지 않으냐”고 에둘러 표현했다.

 그렇다 해도 1972년을 기점으로 북파임무의 횟수가 크게 줄어든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고, 군 내부에서도 ‘훈련에만 집중하고 있는’ 이들 부대를 계속 유지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라는 비판이 거셌다. 이에 따라 1990년 국방부는 정보당국과의 협의를 거쳐 이들 부대를 배대웅 당시 중장이 사령관을 맡고 있던 국군정보사령부 산하로 통합한다. 물색관 제도가 사라지고 대신 알음알이로 지원병을 받는 형식으로 모집형태가 바뀐 것이나, 곳곳에 흩어져 있던 안가가 하나 둘씩 폐쇄되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의 일이다.

 특수임무를 수행할 첩보부대의 규모는 날이 갈수록 줄어들었지만, 한국사회의 민주화가 진행됨에 따라 거꾸로 이들의 존재 자체는 숨길 수 없게 돼버렸다. 1999년 말 전직 북파공작원들과 그 유족들이 명예회복과 인권유린에 대한 진상규명, 보상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인 것. 여기에 김성호 의원 등 정치권의 실체공개가 이어지면서 2002년 정부는 관련 법률을 개정해 임시방편으로 위로보상금을 지급하기에 이르지만, 정부의 공식적인 인정과 적절한 예우를 요구하는 관련자들의 시위는 계속됐다. 오 전 사령관의 설명이다.  

 “한밤중에 국방부 장관 공관 앞에서 시위가 벌어졌다는 소식에 뛰어나간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국가정보원이나 정보사는 물론 내 집 앞에서도 시위가 벌어졌다. 군 입장에서는 보안문제 때문에라도 이들을 공식 인정하기란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나로서는 내가 지휘하고 있는 부대의 선배에 해당하는 이들을 피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들이 정보사령관실에 들어와 뜻을 전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결국 가려져 있던 이들의 실체를 양지로 끌어내는 마지막 결정은 노무현 대통령에 의해 이뤄졌다. 2003년 국방부는 국회에서 북파공작원 양성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했고, 2004년에는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에 관한 법률’이 제정,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당초 군에서 우려했던 보안 누설이나 국가신인도 문제는 생각만큼 파장이 크지 않았다.

 2007년에는 특수임무수행자들의 단체 설립을 규정하는 법률 작업도 마무리됐다. 퇴역한 북파공작원들이 지역별, 부대별로 단체를 만들어 혼선을 빚던 상황은 이 법에 따라 지난해 1월 창립된 특수임무수행자회가 국가보훈처의 인정을 받으면서 마무리됐다. 그 밖의 단체로는 각 군 첩보부대 장교 출신으로 이뤄진 정보동우회와 특수임무수행자유족동지회가 있다.

 김희수 특수임무수행자회 회장은 “실체가 가려져 있던 시절에는 전과자 출신으로 오해도 받았고, 명예회복 과정에서는 ‘가스통 시위’ 같은 과격행동으로 어두운 인상도 주었지만, 이제 공법단체가 된 만큼 그에 걸맞은 활동을 펴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지난 1월 법 개정으로 길이 열린 수익사업도 국민의 원성을 살 만한 일은 절대 하지 않겠다는 이야기였다. 

 

“자긍심이 감금보다 낫다”

앞서 설명한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에 관한 법률은 그 대상자를 ‘1948년 8월15일(건국) 이후 2002년 12월31일까지 군 첩보부대에 소속되어 특수임무를 하였거나 이와 관련한 교육훈련을 받은 자’로 특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2003년 이후에는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부대가 더 이상 없다는 말일까. 이들은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일까. 

국방부 관계자들 중에서도 정보사 산하 특수임무부대는 폐지된 것으로 생각하는 이가 적지 않지만, 이들은 분명 여전히 실재한다. 인원이 이전에 비해 크게 줄긴 했어도, 2003년을 기점으로 부대의 존재는 공식화되었고 일정부분 공개됐다. 뒤집어 말해 그러한 부대와 인원이 있다는 사실 자체는 더 이상 군사보안의 영역이 아니다. 다만 전에는 인권유린과 보상 미비 문제가 있었지만, 2003년부터는 특수임무에 종사할 인원을 공개 모집하고 위험한 훈련에 상응하는 수당도 관련 법령이 정한 대로 지급하고 있기 때문에 보상 대상자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2003년 이후 정보사는 매년 자체 홈페이지와 각 지역 병무청에 게시하고 있는 ‘특수정보부사관’ 모집공고를 통해 부대원을 모집하고 있다. 군 관계자들이 젊은이들을 ‘물색’하고 다니던 과거의 방식을 벗어나 일종의 ‘홍보’ 개념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 인터넷을 검색하면 누구나 각 지역 정보사 특수부사관 모병 담당관의 연락처를 확인할 수 있다.

 당시 공개모집을 결정했던 오 전 사령관은 “예전처럼 휴가도 못 가게 막는다고 해서 보안이 유지되는 건 아니라고 판단했다. 어차피 이들도 언젠가는 제대할 것 아닌가. 오히려 공개적으로 모집하고 충분한 대우를 해줌으로써 임무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하는 게 훨씬 낫다고 봤다”고 말했다.

 

별도편제, 별도예산

현재의 정보사 특수임무부대는 19세에서 24세 사이의 미혼 남성만이 입대할 수 있다. 학력은 고졸 이상이지만 실제로는 2년제 대학 졸업자가 많다. 날카로운 민첩성이 생명인 임무 특성상 키가 너무 큰 사람(185cm 이상)은 아예 지원자격을 주지 않고, 병무청 신체검사 1등급 판정자만 입대가 가능하다. 정보사의 모집공고는 태권도 등 무술특기자와 폭약취급, 스쿠버다이빙, 사진 등의 기술보유자를 우대한다고 적시하고 있다. 

가장 까다로운 것은 역시 체력검정과 신원조회. 윗몸일으키기를 30초에 35회 이상, 40kg짜리 모래주머니를 메고 50m를 12초 이내에 통과해야 만점을 받는다. 시력이 0.8이 안 돼 안경을 쓴 사람은 아예 시험도 볼 수 없다. 고교 생활기록부까지 제출받는 깐깐한 인성평가와 신원조회를 통과하고 나면 합격통보 후 이틀 뒤에 곧바로 입대한다. 

총 복무기간은 51개월. 이 가운데 3개월은 기초교육기간이다. 강원도 모처에서 진행되는 기초교육기간 중에는 포기하고 귀향을 요구해도 막지 않을뿐더러 탈영도 아니라는 것이 오 전 사령관의 설명. 이를 통과하고 나면 비로소 정보사령부 소속 하사로 임관하고, 다시 2년을 복무하면 중사로 승진한다. 영내생활이 의무화되어 있지만 전과는 달리 1년에 7일의 공식휴가가 주어지고 경조사 등 필요한 경우에는 청원휴가도 허락된다. 다른 부대처럼 정기 외출·외박도 있다. 

부대 안에서만 생활하므로 4년간 주어지는 월급과 각종 수당을 꾸준히 모으면 전역 무렵 1억4000만원을 수령할 수 있다고 정보사 측은 설명한다. 전역 후에는 경찰특공대 등 관련분야에 진출할 수 있도록 사령부 차원의 지원도 이뤄지고 있다. 해당 채용시험에서 사용하는 권총을 구해 전역이 임박한 대원들의 사격연습에 활용하기도 한다고. 

이들의 소속은 육상과 해상으로 나뉘는 임무에 따라 육군과 해군으로 구분된다. 모집부터 분리해서 뽑는 식이지만, 각 군 정원에는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보사는 이들의 침투수송 임무만을 전담하는 수단을 각 군 편제와는 별도로 확보해 운용하고 있다. 예산도 국방예산과는 별도의 경로를 통해 책정, 집행된다. 이전에 비해 인원을 크게 줄였기 때문에 전국의 안가에서 소규모로 훈련하던 이전의 관행을 폐지하고 동해와 서해의 주요 훈련장에서 함께 생활한다.

 

제압술 아닌 ‘살인술’

이들의 신분은 대한민국 국군의 정식 부사관이다. 문화도 이전과는 사뭇 달라졌다. 그렇지만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 상상하기 쉽지 않은 수준의 보안의식과 강도 높은 훈련이다. 

이들의 복장에는 계급장이 없다. 한국군 전투복은 지급되지 않는다. 오히려 훈련과정에서 북한군 위장복장을 착용하는 경우는 있다. 자신의 직속상관이 누구인지만 알 뿐, 부대의 전체 구성형태나 지휘체계에 관한 상세정보는 알려주지 않는다. 호칭 역시 군 계급 대신 별명을 지어 부르는 식. 오 전 사령관은 “나 역시 이들을 방문할 때는 군복을 입지 않았고, 사령관이라는 사실조차 알리지 않았다. ‘서울에서 온 손님’이었을 뿐”이라고 전했다.

 이들이 사용하는 개인화기 역시 북한군이 주로 사용하는 체코제 수입품이다. 심지어는 담배나 소형 가전제품 등 개인물품도 표식이 없는 것으로 특수 제작하거나 상표를 제거한다. 부식 등 보급품도 외부에서 직접 ‘사제품’을 구매해 조달한다. 이들의 훈련소에 군 시설임을 알 수 있는 표식이 없음은 불문가지다.

 오 전 사령관은 기초훈련을 마치고 나면 이들 부대원들이 “재빠른 행동으로 상대의 급소를 노리는 자그마한 살쾡이 같은 인상”을 갖게 되더라고 표현했다. 다른 특수부대가 상대를 쓰러뜨리는 제압술을 훈련한다면, 이들은 ‘살인술’을 익힌다는 것. 도검류도 통상 사용하는 단검 대신 특수한 형태를 사용한다. 모집공고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이들에 대한 훈련은 산악구보를 기본으로 고공강하, 스킨스쿠버, 스키, 잠수 등 침투능력 극대화가 주종을 차지한다. 여기에 독도(讀圖)나 지형지물 익히기, 폭파, 사격, 고립지역에서 야생 동식물로 식량을 조달하는 생식 등이 포함된다.

 오 전 사령관은 “그쪽에서 들으면 기분 나쁘겠지만, 특전사보다 훨씬 강도 높은 훈련이 진행된다”고 평했다. 산악구보만 해도 부대원들이 일렬로 줄지어 이동하는 통상의 행군이 아니라, 한쪽 산봉우리에서 다른 산봉우리까지 정해진 코스 없이 무조건 짧은 시간 내에 도착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것. 훈련과정이 워낙 강도 높다보니 실족 등으로 사상자가 생기는 부작용 역시 피하기 어렵다. 다음은 오 전 사령관이 전하는 에피소드다.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의원들을 공식 초청해 이들의 훈련을 참관케 한 적이 있다. 벽돌 깨기 같은 보여주기용 시범은 하지 않는다. 진짜 흉기를 손에 쥐고 정말 죽고 죽이는 것처럼 처참한 비명이 오가는 실전훈련만 할 뿐이다. 영화에서는 간단하고 멋있게 그려지지만, 실제 상황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다. 처참한 광경이 이어지자 의원 대부분이 고개를 돌렸고, 한 의원은 쇼크로 정신이 혼미해져 약까지 먹어야 했다. 잠시 훈련을 참관하는 것만으로도 그 정도다.”

 

최후를 위한 마지막 카드

2003년 공개모집을 전후해 정부 안에서는 이 부대를 존속시킬 필요가 있는지 격론이 벌어진 바 있다. 근래 들어 이들에게 북한지역 침투라는 본연의 임무가 실제로 주어진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부대를 별도로 구성하고 엄중한 보안에 부친 것은 상시적으로 북파공작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는데, 임무가 거의 없는데다 부대의 존재마저 공개된 상황이고 보니 다른 특수 부대와 통합해야 한다는 견해가 만만치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종결정은 ‘계속 유지’였다는 후문. 당장 북파공작을 벌일 일이 없다 해도 전시든 평시든 극단적인 상황이 왔을 때 활용할 ‘일당백의 정예요원’이 필요하다는 결론이었다고 한다. 특히 부대 창설 당시부터 구성과 운영에 상당부분 관련이 있는 정보당국의 견해가 완강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공개할 수는 없지만 현재 이들에게는 전시에 수행할 임무가 명확히 설정돼 있고, 이를 준비하기 위한 훈련도 정교하게 실시되고 있다. 오 전 사령관의 말이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이나 현재의 남북관계를 감안할 때, 북한이 무장공비를 내려 보내듯 우리도 북측 후방에 침투해 휘젓고 다닐 수는 없다. 이 부대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언젠가는 사라질지 모른다. 그러나 세계 어느 나라든 최후의 순간에 투입할 비장의 카드 한 장은 남겨두는 법이다. 특수임무 가운데서도 특수한 임무라고 할까. 극단적인 상황에 미리 대비하는 일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라면, 한때의 어두운 과거만으로 이 부대의 존재 이유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ㅇ5, 6공 시절에 정보사의 지시로 야당과 재야 지도자의 집에 침입해 각종 문서를 훔치는 등 정치 공작에 가담했던 북파공작원(HID) 출신 이종일씨(52)

이들 정치 테러 사건 중 김영삼 전 대통령 사저 침입과 양순직 국회부의장 린치 사건은 1993년 잠시 세간에 회자된 적이 있다.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자마자 북파공작원 출신 김 아무개씨가 이 대목만 폭로해 뒤늦게 검찰 수사가 이루어졌다. 조사 결과 이진삼 전 정보사령관과 전 감찰과장 이상범 중령이 이 사건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밝혀져 형사 처벌을 받았다.

이종일씨는 김영삼씨 사저 침입 사건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1985년 5월 정보사 이상범 중령이 같이 일해보자고 제의해 와서 북파공작원 선후배 사이인 주○○·김○○·정○○과 내가 한 조가 되어 정치 테러팀을 꾸렸다. 서초동 터미널 호텔에서 보름간 숙식을 함께 하며 정보사가 준 김영삼씨 집 약도와 주변 위치를 암기하고 10일간 현장을 정찰한 후에 쥐도 새도 모르게 침입했다. 정치자금을 댄 재계 인사 명단, 일본 방문 기자회견문, 녹음 테이프 2개를 훔쳐서 정보사 이상범 중령에게 전달했다.”

정보사는 이들이 정치 공작을 한 후 잠시 피해 있도록 도피 자금을 대거나 은신처를 제공했다고 한다. 이들이 몸을 피한 곳은 주로 정보사가 운영하는 안전가옥이었다.

김영삼씨 집을 턴 뒤 이씨는 정보사 이상범 중령으로부터 “양순직 국회부의장이 반정부 발언을 많이 하니 테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이번에는 북파공작원 동료인 김○○씨와 한 조가 되어 움직였다. “우리 두 사람이 사흘간 양순직 국회부의장을 미행한 뒤에 내가 승용차를 가로막아 문을 열고, 양부총재를 형두가 끌어내 두드려 패서 이빨 두 개를 부러뜨렸다. 다른 두 사람은 망을 보았다.”

이 사건 뒤 야당의 문제 제기로 소란해지자 정보사는 행동대원 김○○씨에게 위장 양심선언을 하도록 교사했다고 한다. 신민당을 찾아가 ‘모르는 사람이 사주하기에 술김에 화가 나서 양부의장을 폭행했다’는 식으로 진술하라고 이른 것이다. 결국 위장 양심선언을 한 후 노량진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은 김씨와 이씨를 정보사 고위 간부들이 경찰서에 직접 찾아가 벌금 50만원을 대납해주고 빼냈다.

문익환 목사 집에서 서류를 절취했다는 사실은 테러 가담자들이 이번에 처음으로 공개했다. 이씨는 “김영삼씨 집을 턴 뒤 정보사에서는 2차 공작으로 우이동 문익환 목사 집을 털어오라고 했다. 들어가 보니 너무도 청렴하게 사는 집이어서 그런 짓을 한 것이 지금도 고인에게 죄송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이씨는 지금까지 드러난 5, 6공 당시의 정보사 정치 테러는 빙산의 일각이라고 말했다.

“1980년대에 야당 정치인 집이나 재야단체 사무실, 재계 인사 집이 털렸다 하면 대부분 정보사의 ‘내수 공작’이라고 보면 된다. 우리가 작업을 한 곳 가운데는 대방동에 있던 두산식품의 한 고위 임원 집도 있다. 그 기업인이 당시 야당에 몰래 도움을 준다고 해서 정보사에서 털라고 지시했다. 몰래 들어가 서류를 절취해 나왔는데 우리가 훔친 서류를 토대로 그 기업에 대해 세무사찰을 했다고 들었다.”

이씨의 증언을 토대로 기자가 정치 테러에 가담한 북파공작원들을 수소문한 결과 그들 역시 당시 정치 테러는 매우 광범위하게 일어났다고 증언했다. 5공 당시 정보사 정치 테러를 주도한 팀장급 한 간부는 “지금 세상에 알려진 것은 YS 사저 절취 사건과 중앙경제신문 오홍근 부장 테러(1988년 8월) 사건뿐이지만, 우리가 재야와 야당 정치인을 상대로 벌인 정치 공작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매 사건에 대해 정보사로부터 돈을 받고 차용증을 써준 서류를 갖고 있지만 아직은 공개할 때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정치 공작 팀원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1980년대 중반부터 정보사는 산하에 북파공작원 중 현역과 예비역으로 각각 따로 구성한 정치 공작 팀을 여러 개 두고 있었다. 이들은 경쟁적으로 특수 임무를 수행했다. 당시 군사 정권은 북파 훈련 과정에서 문서를 절취하거나 요인 납치·암살 등 특수 기술을 익힌 이들을 뽑아 각종 정치 공작에 투입했던 것이다.

그 가운데 ‘남산대’가 예비역 북파공작원으로 구성된 대표적인 정치 공작 조직이었다는 점이 이번에 처음 드러났다. 6개월에 걸친 <시사저널>의 추적 결과 남산 기슭의 흰색 4층 건물에 사무실을 둔 남산대는 정보사 정치 공작의 산실이었다. 당시 정보사에서는 이상범 중령이 북파공작원 출신을 모아 정치 공작 팀의 실무를 총괄했다. 그는 4명 1조로 구성된 팀을 여럿 꾸려서 각종 정치 공작을 지시했다. 이들은 북파 공작과 구별해 대남 정치 공작을 ‘내수 공작’이라고 불렀다.

남산대에 소속되었던 한 정치 공작 조직원은 “남산대에서는 이효명 대령을 사장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우리가 정보사의 오더를 받아 담을 넘어 서류를 절취한 집이 김영삼 총재·문익환 목사·이 철 의원·양순직 국회부의장 등이었고, 김동주 의원과 양순직 부의장에 대해서는 테러까지 했다”라고 말했다.

이종일씨는 “이상범 중령 산하 남산대에는 우리 팀 외에 몇 팀이 더 있었는데 그 중에서 북파 훈련 동기들인 김○○와 나○○이 소속된 팀에서 ‘우리마당 사건’을 일으켰다. 이 철 의원 사무실도 우리 팀이 털려고 답사까지 했지만 옆 팀에서 털어버렸다”라고 말했다.

우리마당 사건은 1988년 8월17일 새벽에 발생한 재야 문화운동단체 사무실 습격 및 여학생 강간 사건이다. 서대문구 창천동에 있는 우리마당 사무실에 당시 괴한 4명이 습격해 잠자고 있던 최 아무개양을 강간하고 서류를 훔쳐 달아났다. 사건 직후 야당에는 이 사건을 정보사 우이동지대 박○○ 소령 휘하 2개 정치 공작팀 가운데 박○○ 대위 팀 소속 현역 요원들인 김○○ 중사·손○○ 중사·김○○ 중사·나○○ 하사가 저질렀다는 제보가 날아들었다.

야당이 이를 공개하며 수사를 요구하자 당시 군 당국은 그런 이름을 가진 현역 정보사 요원들은 없다면서 근거 없는 억지 주장이라고 일축했다. 경찰 수사도 유야무야 끝나 이 사건은 미궁으로 빠졌다. 그런데 당시 우리마당 사건에 가담한 행동대원들은 현역 정보사 요원이 아니라 예비역 북파공작원들로 정보사 ‘남산대’ 이상범 중령 휘하 팀원들이었다는 증언이 이제야 나온 것이다. 

/ 출처 : 시사저널(http://www.sisa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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