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갑면 23번국도 주변
■ 상사화길
불갑산은 해발 516m로 천연기념물인 참식나무가 자생하고 있으며, 백제 침류왕 원년 마라난타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불갑사가 자리잡고 있다. 영광 불갑산은 이름에서 풍기는 것처럼 불교적 색채가 짙은 산이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백제에 불교가 처음 들어올 때 불교의 도래지란 의미의 불(佛)자와 육갑(六甲)의 천간(天干)인 갑(甲)자를 따서 불갑사라 했고, 이 절의 영험한 효험이 불갑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중국에서 마라난타가 바다를 건너 맨 처음 당도한 곳이 법성포이고, 그곳에서 가장 가깝고 신령스런 산인 모악산(현 불갑산)에 절터를 잡았다고 전해진다. 이런 불교적인 유래 때문인지 몰라도 크지 않은 산의 규모임에도 숨어있는 암자가 7∼8개나 될 정도다. 원래는 이 산을 모악산이라 불렀던 것은 산세의 수려함과 신령스러움이 마치 산들의 어머니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라 한다.
불갑사는 가장 편하게 꽃무릇을 볼 수 있는 절이다. 함평의 용천사는 꽃무릇축제 때에는 일반 승용차를 아예 먼 길의 초입부터 막아 버린다. 불갑사 입구에 들어서면 초입 주변 산기슭부터 붉은 꽃술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다리를 건너면 분홍색으로 곱게 핀 맥문동과 함께 화려하 꽃세계가 열린다. / 살아생전 꼭 가봐야 할 우리땅 저자 이두영
불갑산은 수림이 울창하다. 겨울에 눈이 많기는 하지만 따뜻한 기후 때문이다. 비록 6·25때 공비 토벌 과정에서 산림이 많이 훼손되기는 했다. 그러나 지금은 등산로가 아니면 몸을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잡목과 덩굴이 우거져 있다.
불갑산에는 상사화라는 꽃이 대표적인 명물이다. 보기에도 매우 탐스러운 상사화는 특이하게도 꽃잎이 지고 나면 잎이 돋아 눈 속에서 봄까지 그 자태를 지닌다. 이처럼 한번도 꽃과 잎이 함께 필 수 없다하여 화엽 불상견 상사화(花葉 不相見 相思草)라고 부른다. 늦여름 온 산을 뒤덮는 상사화 군락은 불갑산만의 독특한 향기이다. 산세는 바위와 돌이 많아 꽤 거친 편이다. 특히 연꽃 열매를 닮았다는 불갑산의 정상 연실봉(蓮實峰)은 커다란 암괴로 이루어졌다. 이곳은 넓은 바위지대라 조망이 뛰어나다. 맑은 날 동쪽으로 무등산을 볼 수 있고 해질녘 서해 칠산 앞 바다의 낙조 또한 일품이다. 봄철 붉은 하늘과 돌과 사람이 어우러진 모습은 한 폭의 선경을 보는 것 같다.
6·25때 이 산은 빨치산의 본거지로 많은 양민이 토벌작전에 희생된 아픈 역사를 지닌 무대이다. 인민군 전남 유격사령부는 한때 광주, 노령, 유치, 보성, 불갑 지구 등 5개의 지구대로 편성하여 활동했는데 이곳 불갑산은 주로 노령지구와 연계하여 작전을 펼치곤 했다. 이때 이 주변마을의 선량한 양민 5,6 백명이 학살당하여 규명을 해야할 역사적인 소명을 간직한 산이다.
불갑산(516m)기슭에 자리잡은 불갑사는 백제 침류왕 원년(384년)에 인도승 마라난타가 백제에 불교를 전래하면서 제일 처음 지은 불법도량이라는 점을 반영하여 절이름을 불갑사라 하였다고 한다.
불갑사는 내산서원에서 부르면 들릴 듯한 거리에 있으며 수은 강항이 비록 유생이었지만 가까운 이곳 불갑사에서 오랜 기간 지낼 정도로 이 부근에서는 '열린' 공간이었던 듯하다.
빼어난 산책로였던 절 입구의 흙길은 푹신푹신한 블록이 깔린 차도, 사람도 두루 다니는 새길로 바뀌었고, 짙푸른 숲이 터널처럼 하늘을 가렸던 천왕문 오르는 자연스러운 돌계단 길은 네모 반듯한 돌이 깔려 예스러운 맛을 잃었다.
천왕문 안에는 신라 진흥왕때 연기조사가 목각하고 고종 1년에 설두선사가 불갑사를 중수하면서 폐사된 전북 흥덕연기사에서 옮겨 왔다고 전해지는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다.
보물 제830호로 지정된 대웅전은 정면 3칸.측면3칸의 팔작지붕건물로 정면과 측면 모두가운데 칸의 세짝 문을 연화문과 국화문으로 장식했고 좌우칸에는 소슬 빗살무늬로 처리하여 분위기가 매우 화사하다.
불갑사안에는 만세루, 명부전, 일광당 그리고 요사채가 있고, 절 뒤에는 천연기념물 제112호로 지정된 참식나무 군락이 있다. 녹나무과에 속하는 상록 활엽수로 10 월이나 11월에 암꽃과 수꽃이 각각 딴 그루에서 피며 다음해 10월쯤에 열매가 붉게 익어 꽃과 열매를 함께 볼 수 있어 눈길을 끈다.
불갑사 종무소 061-352-8097
쌍운리 내산서원(지방 기념물 제 28호)
영광은 삼남 지방에서 지방관이 가장 부임하고 싶어 하는 풍요로운 고장이었다고 하며 칠산 바다에 조기가 사라지고, 농업마저 사양길에 접어들면서 쇠락했지만, 과거의 영화를 보여주는 인물과 명승이 제법 많이 남아 있는데, 그중 한곳이 내산서원이다.
불갑사를 조금 벗어나면 수은 강항선생(1567~1618)을 배향한 사우인 내산서원이 있고 강감회요 원판인 장판각이 보관되어 있다. 잘 다듬어진 정원에서 넓게 펼쳐진 하늘을 감상하는 것도 내산서원이 주는 또 하나의 여유이다.
내산서원은 대형버스 십여 대는 너끈히 댈 만한 넓은 주차장부터, 우람한 동상과 홍살문, 정원처럼 꾸며 놓은 형형색색의 꽃밭과, 연못 위 정자가 하나 같이 크고 화려하다. 워낙 넓고 새뜻하다보니 스승을 추모하고 후학을 양성했다는 서원이라기보다는 잘 가꿔진 공원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곳은 임진왜란때 일본으로 잡혀가서도 조선 선비의 기질을 굽히지 않고 그곳에 주자학의 새 물결을 일으킨 수은 강항 선생을 추모하는 서원이다. 강항(1567~1618)은 강희맹의 5대손으로 영광군 불갑면 금계리, 유봉마을에서 태어났다. 공조와 형조의 좌랑을 지냈으며,휴가로 고향에 돌아왔다가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군량수송과 의병모집 책임을 맡았다.
수은 강항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고향인 영광에서 의병들을 모집하고 친히 전라좌수영 이순신의 휘하에 귀속하고자 시도하다가 그의 형과 함께 왜군에 포로로 잡혔다. 일본으로 끌려간 그는 2년 여의 포로생활 동안 유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일본승려 후지와라 세이가를 만나 조선의 주자학 이론과 과거제도 등을 가르쳐 일본 주자학의 개조가 되었다.
후지와라 세이가는 불교를 버리고 일본에 새로운 성리학을 일으켜 일본 성리학의 비조가 되었습니다. 현재 일본에서 퇴계의 학문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은 정작 퇴계보다는 수은 강항의 공이라고 할 수 있다. 오즈시에서는 ‘홍유 강항 현창비(鴻儒姜沆顯彰碑)’를 세워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내산서원의 문지기 소나무, 홍살문을 지나 300여 미터를 산책하듯 걸어 오르면 서원에 닿으며 입구에는 1868년 대원군이 이곳을 폐철하는 모습에서 최근 되살린 모습까지 두루 지켜봤음직한 아름드리 소나무가 버티고 있다.
고구려의 담징과 백제의 왕인 등이 일본에 문화를 전파한 인물로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리는 등 '대단한' 평가를 받는 것에 비하여 수은 강항은 역사 전공자들에게조차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더구나 조선 세조 때의 명문장가 강희맹의 5대손으로, <간양록> <근사록> 등 수많은 명저들이 일본 내각 문고에 소장될 만큼 뛰어난 인물임에도 크게 부각되지 못해 아쉽다.
수은 강항의 글은 1658년 그의 문인인 윤순거(尹舜擧)가 금구현령으로 있을 때 <수은집>이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었다. 이 초간본 수은집은 4권의 원집과 간양록(看羊錄), 부록, 별집의 4책으로 이루어졌다.
일본에서 돌아온후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적국에 잡혀 갔던 죄인이라 하며 나서지 않고 은거하며 학문에 힘썼다.이 서원은 대원군의 철폐령으로 철거됐다가 1974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다시 세워졌는데, 1992년 부터 문화재 정비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며, 지방문화재 기념물 28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당인 용계사부터 강학당, 장서각에다 유물 전시관에 이르기까지 모든 게 잘 갖춰진 번듯한 서원이지만, 이곳저곳 매달린 거미줄에다 문에 달린 고리가 모두 녹슬었고 뜰엔 잡풀만 무성하여 박제화된 유적으로 남고 말았습니다. 굳게 닫힌 유물 전시관을 뒤로 한 채 생각해 보건대 역설적이게도 이곳에서 수은 강항의 자취는 느낄 수 없었습니다.
/오마이뉴스 서부원기자
현재 내산서원 장서각에는 <강감회요> 목판과 <수은집> <운제록> <문 선>, <간양록>의 필사본 등이 보관되어 있다. 서원 주변의 산기슭에는 강씨 문중의 무덤이 여럿 있는데, 서원 뒤쪽으로 돌아 산을 올라가면 강항과 두 아내의 무덤과 비석이 있다.
간양록은 저자의 충절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저술로 당시에도 널리 알려졌던 것으로 보인다. 본래 저자는 포로가 된 죄인의 글이라는 의미에서 ‘건차록’이라고 제명하였으나 문인인 윤순거가 한 나라 소무의 충절에 비의된다는 뜻으로 권필의 시구에서 따와 ‘간양록’이라고 개명하였다.
전체적인 구성은 〈적중봉소〉〈적중문견록〉〈고부인격〉〈예승정원계사〉〈섭란사적〉의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적중봉소〉는 다시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부분은 포로가 된 상황부터 절의를 버리지 않고 왜정을 정탐해 올리는 자신의 심정을 적은 서론과 같은 글로 1599년에 쓴 것이다.
이후 왜국팔도부터 풍신수길의 죽음을 적은 22판 전까지는 이예주에서 1598년에 기록하여 김석복에게 조정에 올리도록 부탁한 글이다. 마지막으로 22판~27판까지는 왜국의 정세와 우리나라의 정책을 비교 분석하면서 저자가 생각한 전략을 제시한 것이다. 이 봉소는 1599년 모두 두 벌을 등사하여 중국 차관 왕건공과 조선인 신정남에게 각각 올리도록 하였는데 왕건공의 주본이 선조에게 전달되었다고 한다.
적중문견록은 왜국백관도, 왜국팔도육십육주도 및 임진정유년에 침입했던 왜장의 수효 등 상세한 정황을 적어 1600년 귀국하던 해에 올린 것이다. 〈예승정원계사〉도 1600년 8월 소명을 받고 서울로 올라와 올린 글이며, 〈섭란사적〉은 1597년 포로가 되던 때부터 1600년 부산으로 돌아오기까지 저자가 겪은 고초와 참담한 심정을 일기체로 시와 함께 서술한 글이다. 권말에는 〈왜국지도〉와 윤순거, 유계가 지은 발이 있다.(민족문화추진회 김성애) 오마이뉴스
모악리 불갑사관광지구내 약오리탕 가오리산장 / 061)353-6327, 010-2262-4220
김치류와 파나물류, 젓갈과 마른반찬, 묶은 깻잎 등 30여 가지의 온갖 형형색색 식단으로 꾸려진 진수성찬 보리밥이 풍성하고 한견에서는 온갖 약재를 넣은 약오리탕이 나온다.
약오리탕은 오리를 토막 내어 한번 헹군 다음 각종 약재를 넣고 한번 끓인 것을 냄비에 다시 끓여 상에 올리는데 뼈가 쉽게 발라질 뿐만 아니라 육질이 미끈하여 씹히는 맛이 한결 부드럽다.
녹산리126-1 불갑저수지
전남 최대규모의 수변공원으로 조성된 이곳은 인공폭포와 풍력 오색경관 등의 야경은 다정한 연인, 가족 등과 함께 드라이브 코스 및 휴식처로 각광을 받고 있다. 제방에는 200m에 걸쳐 지압시설이 갖추어져 있고, 저수지에는 빙어가 서식할 정도로 맑고 깨끗하며, 낚시터 및 수상스키장으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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