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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서울 한강

강남구 삼성동 선정릉 봉은사

by 구석구석 2022.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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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릉 산책로와 봉은사 순례길 / 7.4km / 3시간 

 

만일 한 마리 새가 되어 서울 강남 일대를 내려다본다면, 직각의 마천루(摩天樓)들로 이루어진 정글이 보일 것이다. 이 삭막한 빌딩의 숲 속에, 마치 바다 한가운데 있는 고도(孤島) 같은 녹지(綠地)가 있다. 선정릉(宣靖陵)이다. 선정릉의 아름다운 소나무숲 산책로는 울타리 바깥의 빌딩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그려낸다. 선정릉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천년고찰 봉은사는 숨 가쁘게 돌아가는 도시생활에 지친 영혼이 쉬어 가는 마음의 쉼터다. 섬과 쉼터가 빌딩 숲에서 만났으니 이보다 더 럭셔리한 길이 또 있을까?

 

선정릉에는 모두 세 개의 능이 있다. 조선 성종(成宗)의 능인 선릉(宣陵)과 그의 계비(繼妃) 정현(貞顯)왕후의 능, 그리고 중종(中宗)을 모신 정릉(靖陵)이 그것이다.

 

빌딩이 숲을 이룬 삭막한 강남 한복판에 자리 잡은 선정릉에는 고맙게도 숲길까지 얼키설키 이어졌다. 2009년 6월 조선왕릉 40기(基)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덕에 이 공간은 앞으로도 온전히 지켜질 수 있게 됐다. 우리의 문화유산이 세계인의 문화유산으로 기억되게 된 것도 기쁜 일이지만, 걷기꾼의 한 사람으로서 왕릉이 품은 아름다운 자연의 길이 대대손손 지켜지게 되었다는 것은 더욱 기쁜 일이다.

 

선정릉과 가까운 지하철역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선릉역이다. 8번 출입구에서 불과 5분이면 선정릉 매표소에 다다른다.

 

선정릉 매표소 앞에 있는 안내도를 보면 다양한 루트로 산책로가 나 있음을 알 수 있다. 단순히 선정릉 외곽을 돌며 왕릉만 보고 나오면 짧게 끝나버리고 말지만, 여러 갈래의 산책로를 지그재그로 걸으면서 요령 있게 길을 잡아 나가면 꽤 긴 거리의 솔숲길을 거닐 수 있다.

 

선정릉매표소에서 입장권(성인 1000원)을 끊고 입구로 들어선 후에는 오른쪽 정릉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선정릉기념관 공사현장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왼쪽으로 단청(丹靑)이 없는 한옥(韓屋) 한 채가 보일 것이다. 이 집은 선정릉에 딸린 재실(齋室)로 제관(祭官)들이 제사 준비를 하거나 제사를 모시러 온 왕이 휴식을 취하는 장소로 이용되던 곳이다. 지금도 선정릉에 제사를 모실 때는 이곳을 이용한다.

 

정릉의 홍살문.

재실을 나와 붉은 빛이 영롱한 토종소나무 길을 10분 정도 거닐면 왼쪽으로 중종임금의 능인 정릉이 보인다. 홍살문까지 간 후 제향(祭享)을 올리는 정자각으로 간다. 이때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박석(薄石) 깔린 길에서 왼편의 높은 길은 가급적 밟지 않는 것이 좋다. 두 개로 나누어진 이 길 중에서 왼쪽의 약간 높은 길은 신도(神道)라고 하여 죽은 영혼이 다니는 길이고, 오른쪽의 길은 임금이 밟던 어도(御道)이다.

 

정릉을 보았으면 그 뒤로 이어지는 솔숲 산책로를 밟아 간다. 피톤치드가 많이 나오는 토종소나무길이기 때문에 비온 뒤에 찾으면 제대로 된 피톤치드 샤워를 할 수 있다. 10분 정도 길을 따라 걸으면 선정릉 울타리가 있는 곳까지 오게 되므로 왼쪽으로 간다.

 

붉은 빛이 감도는 토종소나무를 만날 수 있다 (선정릉 산책로).

갈림길이 나올 때 외곽을 따라 걷는다는 느낌으로 가면 곧 성종임금의 계비인 정현왕후릉에 다다른다. 정현왕후는 우의정 윤호의 딸로 입궁(入宮)했다가 연산군(燕山君)의 생모(生母)인 왕비 윤씨가 폐위된 이듬해 왕비로 책봉됐다. 후에 중종이 된 진성대군을 낳았다.

 

정현왕후릉에서 조금 밑으로 내려가면 선릉으로 들어가는 샛길을 통해 능 입구까지 가 볼 수 있다. 다른 왕릉과 달리 오전 10시30분과 오후 2시30분에 능침 부근까지 들어갈 수 있으니 시간을 잘 맞춰 가길 바란다. 선릉까지 보았으면 밑으로 내려오다 정자각 부근에서 왼쪽으로 간다. 음료수 등을 파는 매점이 나오면 이 매점을 끼고 정릉이 있는 방향으로 넘어간다. 작은 언덕을 넘은 후 오른쪽으로 가다 화장실이 있는 곳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언덕을 넘어오면 선정릉 산책로를 겹치는 곳 없이 거의 다 돌아보게 된다.

 

이제부터는 봉은사로 가는 길이다. 매표소를 나와 왼쪽으로 간 후 선정릉 울타리를 왼쪽에 두고 초록 우레탄 길을 밟으면서 나아간다. 15분 정도 걸어가다 선정릉 울타리 길을 빠져나와 큰길로 나간다. 오른쪽으로 5분 정도 걷다 사거리에서 건널목을 두 번 건너 잠실 방향으로 가자. 삭막한 도심을 걷다 갑자기 신기루(蜃氣樓)처럼 봉은사 입구(3)와 만날 것이다. 아주 쉬운 길이지만 혹시라도 봉은사 가는 길이 헷갈리면 길 가는 이들에게 물어보면 된다.

 

빌딩보다 낮게 지어졌으나 그 이상의 진중한 무게감을 주는 봉은사의 전각들.

신라시대의 연회국사(緣會國師)가 원성왕 10년에 견성사(見性寺)란 이름으로 창건한 봉은사는 12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조선시대에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에 의해 전국의 사찰들이 폐쇄될 때에도 능침(陵寢)사찰이었던 봉은사는 번창했다. 봉은사의 이런 위상을 잘 보여주는 여러 전각(殿閣)들이 보존되어 내려왔으나 1939년 큰불이 나는 바람에 대부분 불타 버렸다고 한다.

 

봉은사를 찾으면 절대불변의 진리를 찾으러 들어간다는 진여문(眞如門)이 힘들고 지친 영혼들을 맞아 준다. 진여문 편액에는 수도산 봉은사(修道山 奉恩寺)라고 적혀 있다. 느릿한 걸음으로 이 문을 지나 법왕루(法王樓)를 거치면 곧바로 대웅전 앞마당에 다다른다. 부처님 오신 날이 가까워지면 각각의 이름표를 매단 연등(燃燈)이 대웅전 앞마당 하늘을 가린다. 여기서는 신자들이 합장을 하고 음전한 모습으로 탑돌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대웅전 오른쪽 길로 올라서면 봉은사에서 가장 전망이 좋다는 영산전(靈山殿)이 나타난다. 여기서 뒤를 돌아본다. 대웅전와 법왕루의 둥그런 처마 끝 예각이 기세등등한 강남 빌딩 숲의 직각과 묘한 대조를 이루며 세속(世俗)과 불가(佛家)의 경계를 이룬다. 계속해서 왼쪽으로 가다 미륵대불 바로 앞에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미륵대불 뒤의 산길을 돌아온다. 여기서 세상을 구하기 위해 왔다는 미륵의 시선으로 바라본 화려한 강남 땅은 왠지 극락과는 점점 거리를 멀리하는 것 같아 보인다.

앞에 선 모든 사람을 숙연케 만드는 미륵대불.

미륵대불을 돌아 나와 정식으로 미륵께 곱게 인사를 드린 후에 만나게 되는 건물은 판전(版殿)이다. 이 판전의 편액(扁額)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의 마지막 글씨라고 한다. 판전을 지나 법왕루 옆에 있는 해우소 옆에 자리한 쉼터로 간다.

 

봉은사 미륵대불이 바라보는 사바세계는 어떠할는지.

이 쉼터에서 옆을 보면 최근에 폭을 넓힌 흙길이 보일 것이다. 이 길이 바로 봉은사 산책로 입구다. 그 길을 따라 150m 정도 가면 오른쪽으로 더 작은 소로(小路)가 보인다. 아는 사람만 아는 봉은사의 비밀산책로다. 그리로 들어가 아늑한 숲길을 잠시 걸으면 아까 걸었던 미륵대불 뒷길과 만난다.

 

이제 봉은사의 길은 모두 걸어 본 셈이니 다시 진여문을 통해 봉은사 밖으로 나온다. 봉은사를 나온 후로는 큰 찻길을 건너 삼성동길 지나 삼성역(4)까지 간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인도가 넓고 가로수길이 잘 조성되어 있어 걷는 동안 그리 삭막하지는 않을 것이다.

/ 월간조선 윤문기 걷기 칼럼니스트ㆍ도보여행전문가

 

선릉(宣陵)과 정릉(靖陵)

 

조선 시대에는 한성부 밖 경기도 광주(廣州) 땅이었던 서울 강남구 한복판. 흔히 ‘선정릉’으로 불리는 두 기의 왕릉이 자리하고 있다. 성종과 정현왕후의 선릉(宣陵) 그리고 중종의 정릉(靖陵)이다. 죽은 후 외침(外侵)으로 수모를 당한 부부와 아들의 사연이 묻혀 있는 곳이다. 

선을(선종) 능침 / 국가문화유산포털

성종(1457~1494, 재위 1469~1494)은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훗날 덕종으로 추존)와 세자빈 한씨(훗날 소혜왕후 또는 인수대비)의 둘째 아들이다.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아버지 의경세자가 요절하자 할아버지 세조는 그를 잠시 궁중에서 키우다 사저로 내보냈다. 다섯 살이 되던 1461년(세조 7) 세조는 그를 잘산군(乽山君· 또는 者乙山君)에 봉했다. 

그 후 1469년 숙부 예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그의 운명이 바뀐다. 당시 예종에게는 친아들 제안대군이 있었고, 잘산군에게는 친형 월산군이 있었다. 그러나 왕실의 최고 어른인 할머니 정희왕후는 남편 세조 때부터 막강한 권신이었던 한명회, 신숙주 등과 상의해 잘산군을 왕위 계승자로 정한다. 제안대군은 어리고 월산군은 병약하다는 이유였지만 잘산군의 장인 한명회 덕이었다. 잘산군은 예종의 양자로 입적돼 왕위를 잇는다.

1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성종을 대신해 대왕대비(정희왕후)가 7년 동안 수렴청정을 했다. 조선 최초의 수렴청정이었다. 1476년(성종 7) 친정을 시작한 성종은 세조 때 편찬을 시작한 ‘경국대전’을 반포해 조선의 법제를 완성했다. 관수관급제를 실시하는 등 조세제도도 정비했다. 신진사림을 등용해 세조의 측근 공신을 중심으로 한 훈구세력을 견제함으로써 왕권을 안정시키고 사림정치의 기반을 조성했다.

선릉

성종은 1493년(성종 24) 6월 병이 나 이듬해 12월 갑자기 위독해졌다. 대신들을 불러들여 뒷일을 부탁하고 이튿날 승하했다. 향년 38세, 재위 26년 만이었다. 실록에 따르면 죽기 직전 본인이 호소한 병증은 배꼽 밑에 생긴 적취(積聚) 즉, 종기였다.

죽은 후 그에게는 인문헌무흠성공효대왕(仁文憲武欽聖恭孝大王)이라는 시호와 성종(成宗)이라는 묘호(廟號)가 올려졌다. 그의 묘호를 두고 대신들 간에는 인종과 성종으로 의견이 나뉘었다. 제왕의 칭호로 인(仁)자만 한 것이 없으니 인종으로 하자는 주장에 처음엔 연산군도 동의했다. 그러나 인종은 과거 송(宋) 황제의 묘호라서 이를 범해서는 안 되며, 시호에 인(仁)자가 포함돼 있으니 ‘백성을 편하게 하고 정사를 바로 세웠다’는 뜻의 성(成)을 묘호로 해도 충분하다는 반론을 받아들였다.

성종의 능호는 선릉(宣陵)으로 정해졌다. 1495년(연산군 원년) 4월 6일(음) 경기도 광주(廣州) 서쪽 학당리 언덕에 장사지냈다. 원래 이곳은 세종의 열여덟 왕자 중 다섯째인 광평대군(廣平大君)의 묘가 있던 자리였으나 선릉이 조성되면서 광평대군묘는 현 강남구 수서동으로 이장됐다.

 

선릉 왼쪽 언덕에 세번째 왕비 정현왕후 잠들어

성종에게는 세 명의 왕비가 있었다. 첫 번째 왕비는 공혜왕후로 한명회의 딸이었다. 잘산군 시절에 가례를 올리고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됐으나 1474년(성종 5) 18세의 어린 나이로 소생 없이 죽었다. 두 번째 왕비는 윤기견의 딸로 연산군의 생모다. 그녀는 성종이 후궁 처소를 자주 드나드는 데 투기해 폐출된 후 사사됐다.

정현왕후 능침과 무인석 / 국가문화유산포털

세 번째 왕비 정현왕후(1462~1530)는 영원부원군 윤호의 딸이다. 1473년(성종 4) 후궁으로 간택돼 숙의에 봉해졌고, 1479년(성종 10) 연산군의 생모 윤씨가 폐위되자 이듬해 10월 왕비로 책봉됐다. 그녀는 연산군을 친아들처럼 키웠고 연산군 역시 그녀를 친어머니로 알고 자랐다. 연산군이 즉위하자 자순왕대비가 됐다. 

연산군은 즉위 후 부왕 성종의 묘지문을 통해 비로소 폐비 윤씨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됐다. 그는 친어머니의 죽음에 연루된 귀인 정씨와 엄씨를 때려죽인 뒤 장검을 들고 자순왕대비 침전 밖에서 ‘뜰 아래로 나오라’며 외쳐대긴 했지만 그녀를 해치지는 않았다.

그녀는 아들 진성대군을 낳았는데 1506년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이다. 1530년(중종 25) 8월, 69세로 세상을 떠난 그녀에게는 정현왕후라는 시호가 올려졌다. 정현왕후는 유명(遺命)에 따라 성종이 잠든 선릉(宣陵) 왼쪽 언덕에 동원이강릉을 조성, 그해 10월 29일(음)에 장사지냈다.

정릉 능침 / 국가문화유산포털

중조(中祖)가 될 뻔한 중종(中宗)

중종(1488~1544, 재위 1506~1544)은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 연산군의 이복동생이다. 1494년(성종 25) 진성대군(晉城大君)에 봉해졌는데, 19세 때인 1506년(중종 1) 9월 박원종, 성희안 등이 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폐위하고 그를 추대해 왕위에 올랐다.

중종은 조광조(趙光祖)를 중심으로 한 신진사류를 중용해 그들이 표방하는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반정 공신들에 대한 ‘위훈삭제(僞勳削除)’를 밀어붙이는 등 이들 사림파의 급진적이고 배타적인 개혁정치에 곧 경계감을 갖게 됐다. 이런 가운데 훈구파는 ‘주초위왕(走肖爲王)’ 나뭇잎 사건으로 조광조를 모함하고, 기묘사화(己卯士禍)를 통해 사림파들을 조정에서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기묘사화 이후로는 훈구파의 전횡, 그리고 김안로, 윤원형, 윤원로 등 외척들의 득세와 이들 간 세력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중종은 재위 39년 되던 1544년(중종 39) 10월에 병이 났다. 스스로 밝힌 그의 병증은 한기가 배로 들어가 통증을 일으키는 산증이었다. 11월 14일(음) 병세가 위독해지자 그는 좌의정과 우의정을 침전으로 불러 ‘병이 심하니 세자에게 전위(傳位)하고자 한다’는 뜻을 남기고 이튿날 승하했다. 향년 57세였다.

대신들은 죽은 왕의 시호를 휘문소무흠인성효(徽文昭武欽仁誠孝)로, 묘호를 중종(中宗)으로 올렸다. 그러나 인종은 부왕이 반정으로 즉위하고, 종사를 편안하게 해 나라를 중흥시킨 공이 크므로 중종(宗) 대신 중조(祖)로 고치고자 했다. 그러자 우의정 윤인경 등이 중종은 성종의 왕위를 물려받아 즉위했으므로 조(祖)로 칭하는 건 부당하다고 아뢰었고, 인종도 받아들였다.

중종에게도 세 명의 왕비가 있었는데, 원비였던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 첫 번째 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 그리고 두 번째 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다. 이처럼 세 왕비가 있었음에도 중종은 이곳 정릉에 홀로 잠들어 있다. 세 왕비의 능(온릉, 희릉, 태릉)도 각각 다른 곳에 있다. 

중종의 능호는 처음에는 정릉이 아니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1545년(인종 1) 2월 3일(음), 인종은 경기도 고양, 부왕의 첫 번째 계비이자 자신의 모후인 장경왕후의 희릉(禧陵) 서쪽 언덕(현 서삼릉 내 철종의 예릉 자리)에 아버지를 모셨다. 중종과 장경왕후의 능을 동원이강릉 형식으로 조성하고 두 능을 합쳐서 희릉이라 했다. 앞서 죽은 왕후의 능호를 왕의 능호로 쓰는 데 대해 대간의 반대가 있었으나, 그 같은 선례가 없지 않다며 그대로 쓰기로 했다.

두 번째 계비였던 문정왕후는 풍수상 이유를 들어 1562년(명종 17) 중종의 능만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능호도 정릉(靖陵)으로 고치게 했다. 남편이 장경왕후 곁에 있는 게 못마땅했던 그녀는 훗날 자신이 남편 곁에 묻히려고 능을 옮긴 것이다. 하지만 그녀 생전에 옮긴 정릉은 큰비가 내리면 배를 띄워야 할 정도로 침수 피해가 잦았다. 결국 문정왕후 본인은 1565년(명종 20)에 죽어서 중종 곁이 아닌 경기도 양주 대방동(현 노원구 공릉동)의 태릉에 따로 묻혔다. 한편 정릉이 선릉 옆으로 옮겨오면서 고양 장경왕후의 능은 원래대로 희릉으로 남게 됐다.

 

임진왜란 때 왜적이 파헤쳐 훼손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3년(선조 26) 경기 감사 성영은 당시 경기도 지역이던 선릉과 정릉이 왜적에 의해 파헤쳐졌다는 보고를 올린다. 그의 보고에는 앞서 겨울에 왜적이 태릉(泰陵)과 강릉(康陵)도 범했다는 언급이 있어 왜군이 점령지역의 여러 능을 훼손했음을 알 수 있다.

‘선릉은 광중(壙中, 무덤의 구덩이)이 이미 비어 있고, 정릉은 염습(斂龒)한 옷은 없어지고 옥체(玉體)가 광중에 가로놓여 있었다’는 성영의 보고를 받은 조정은 확인에 나선다. 도체찰사 유성룡 등이 목격자들의 말을 인용, ‘정릉에서 발견된 시신이 양주(楊州) 송산(松山)에 있는 인가로 옮겨졌다’는 장계를 올린다. 중신들을 보내 거듭 조사한 결과, 왜적이 세 봉분을 파헤쳐 광중의 부장품을 가져가고 관은 모두 구덩이 밖에서 불태웠음이 확인된다. 다만 정릉에서 발견된 시신 한 구는 중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송산으로 옮긴 것임이 밝혀진다. 

이후 영의정을 비롯한 신하들과 중종의 용모를 알만한 종친, 궁인들이 현장에 총동원된다. 이들은 불에 탄 세 능의 잿더미 속에서 뼛조각들을 확인한다. 그러나 송산의 시신에 대해 하나같이 형체와 상태로 볼 때 중종인지 확인하기가 애매하다고 말한다. 결국 타버린 재와 버려진 일부 부장품을 모아 능을 개장하게 된다. 이때 일부 대신들은 침수가 잦은 정릉을 이 기회에 옛 능으로 다시 천장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유해도 없는 상황에서 천장은 어렵다고 판단해 원래의 자리 그대로 개장하기로 한다.

선릉은 1593년(선조 26) 7월 27일(음), 정릉은 한 달 후인 8월 15일(음) 각각 원래의 자리에 개장됐다. 의주로 피란했다 남하해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를 오가며 환도를 미루고 있던 선조는 피란지에서 백관들을 거느리고 개장에 따른 예를 올렸다. 선조는 도성으로 돌아온 후 10월에야 선릉과 정릉에 나아가 위안제를 지냈다.

선릉과 정릉은 임진왜란 치욕의 역사를 무덤 속에 품고 있다. 지금은 1970~1980년대 개발로 상전벽해가 된 강남 중심부에서 도심 속 공원 역할을 하고 있다. 조선왕릉의 세계문화유산 등재(2009년) 전 실사를 위해 선·정릉을 둘러본 유네스코 관계자들이 강남의 노른자위 땅에 왕릉이 남아있는 데 대해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했다고 한다. 개발에 눈먼 누군가가 이곳에 눈독을 들이는 일이야 설마 일어나지 않아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며 능을 포위한 빌딩 숲을 바라보니 정말 뜨거운 여름이다.

출처 : 한국아파트신문 유병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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