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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드라이브 뚜벅이

해남 달마고도 남파랑길 90코스

by 구석구석 2022.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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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파랑길의 출발지점은, 해파랑길과 마찬가지로 부산 오륙도를 마주 보고 있는 오륙도 해맞이 공원이다. 해파랑길은 여기서 북쪽으로 향하지만, 남파랑길은 충남 쪽 바다를 끼고 구불구불 한려수도와 다도해의 섬을 지나서 해남 땅끝마을의 땅끝탑까지 간다. 남파랑길의 전체 구간은 자그마치 1470㎞. 부산에서 고성까지 동해안을 따라가는 해파랑길이 750㎞니, 남파랑길의 거리가 두 배에 가깝다.

 

지도로 보면 해파랑길이 더 길어 보이지만, 남파랑길은 남해안의 복잡한 해안선을 따라가며 때로는 바다를 버리고 내륙의 안쪽으로 파고 들어가기도 하니 실제로는 훨씬 더 길다.

 

남파랑길 90코스의 출발지점인 해남의 미황사.

남파랑길을 단번에 다 걸을 수는 없는 일. 그래서 하루에 한두 코스를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코스를 잘라놓았다. 코스별 평균 거리는 16.3㎞ 남짓. 가장 짧은 코스가 9.9㎞고, 가장 긴 건 27.4㎞다. 짧게는 3시간, 길게는 7시간 30분이 걸리는 거리다. 이런 길 90개 코스가 모여서 남파랑길을 이루고 있다. 하루 한 코스라면 90일, 그러니까 석 달을 꼬박 걸어야 완주할 수 있다.

앞서 놓인 해파랑길의 주인공이 ‘푸른 바다’였다면, 남파랑길이 보여주는 건 바다와 어우러지는 다채로운 삶의 모습이다. 부산이나 창원 같은 대도시의 휘황한 도로부터 고요한 갯벌을 앞에 둔 소박한 어촌마을의 구멍가게와 누추한 골목까지 두루 지나간다. 은모래 반짝이는 해수욕장과 미술관, 유적지뿐만 아니라 비린내 나는 어판장의 뒷골목과 허름한 공용버스정류장을 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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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파랑길은 ‘새로 놓은 길’이 아니다. 기존에 있던 길을 바느질하듯 이어붙여 만든 길이다. 지역마다 이름난 곳을 지나기도 하지만, 일상의 걸음으로 지나던 골목과 논둑길도 있다. 남파랑길이 특별한 건 그래서다. 차를 타고는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남해안의 쪽빛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오솔길이야 말할 나위 없지만, 너무도 평범한 타인의 일상 공간을 가로지르는 길을 걷는 감회도 제법 깊다.

 

해남 땅끝마을에서 땅끝탑까지 이어지는 난대림의 숲길.

한 사람이 지나고, 그 뒤를 다른 사람이 지나면서 또렷해진 자취. 그게 바로 ‘길’이다. 길은 사람이 흘러가는 자취이기도 하고, 땅이 사람과 함께 흘러가는 모양이기도 하다. 길은 순환이기도 하다. 이쪽과 저쪽을 잇는 길은, 실은 정해진 방향이 없다. 이쪽에서 저쪽으로도, 저쪽에서 이쪽으로도 걸을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남파랑길에는 정해진 방향이 있다. 물론 거꾸로 걷는 걸 막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걷는 게 더 좋은 구간도 있지만 말이다. 출발지점이 부산이고, 종착지점은 해남의 땅끝이다. 모든 방향은 ‘좌에서 우’가 보통인데, 이건 ‘우에서 좌’다. 강원 고성에서 부산까지 이어진 해파랑길의 출발지점도 부산이다. 통상 ‘위에서 아래’가 보통인데, 이것도 ‘아래에서 위’다. 이로써 남파랑길과 해파랑길의 출발지점은 둘 다 부산이 됐다.

달마고도

남파랑길과 해파랑길, 그리고 앞으로 놓일 서해랑길과 DMZ 평화의 길이 ‘코리아 둘레길’이란 이름으로 묶이게 되면 하나의 길의 끝나는 지점이 곧 다른 길의 출발지점이 돼야 하는데, 부산이 4개 길 중 2개의 출발지점이 됐으니 도리 없이 한 곳은 두 길의 종착지가 돼야 하는 상황이 됐다. 왜 그랬을까. 부산이 대도시여서 그랬을까. 돌아온 답이 허망하다. 의도는 아니고 ‘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는 것. 그렇다 하더라도 남파랑길의 종점이 해남의 ‘땅끝’인 건 참으로 적절하다.

 

남파랑길의 종착지인 전남 해남에 가서 마지막 코스 ‘90코스’를 걸었다. 전남 해남의 미황사에서 달마산 옆구리를 끼고 염포산 임도를 거쳐 땅끝마을의 땅끝탑까지 걷는 13.9㎞의 길이다. 남파랑길 90코스 대부분 구간은 해남을 대표하는 걷기 길인 ‘달마고도’ 4코스와 겹친다. 달마산 산허리에다 놓은 오솔길을 따라 달마고도와 줄곧 동행하던 남파랑길은 달마산을 버리고 땅끝마을로 내려서 바다를 마주 보는 땅끝으로 이어진다.

 

남파랑길의 종착 지점인 땅끝탑

갈기처럼 솟은 달마산의 힘찬 암봉 아래 단청이 지워진 채 말갛게 들어선 전남 해남의 절집 미황사. 괘불제를 준비하며 당간지주를 높게 세워둔 법당 앞마당에서 신발 끈을 다시 매고 호젓한 암자 부도암을 지나 땅끝을 향해 걸었다. 창검 같은 바위가 늘어선 달마산의 암릉은 험준하지만, 그 아래로 이어지는 남파랑길 90코스이자 달마산 둘레길 ‘달마고도’는 순하디순하다.

 

달마고도 길 위에는 눈이 번쩍 뜨일 만한 경관은 없다. 그렇다고 지루한 길도 아니다. 비유하자면 그 길은 ‘경관’과 ‘생각’이 반반쯤이다. 이 길이 걷기 좋은 건 그래서다. 풍경에만 눈이 팔리는 길이 아니고, 오르내림이 있지만 급하지 않아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찬찬히 걸어갈 수 있는 길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달마산을 남파랑길로만 걷고 지나치는 건 못내 아쉬운 일이다. 그렇다면 딱 한 곳 도솔암만큼은 들렀다 가기를 권한다. 미황사에서 출발해 1시간 30분쯤 걸으면 편백나무 숲이 나오는데, 거기서 도솔암으로 올라서는 길이 있다. 이정표에는 ‘도솔암 200m’라고 거리표시가 돼 있지만, 그걸 믿어서는 안 된다. 거리는 200m가 맞지만 험한 산길이 거의 수직으로 일어서 있어서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그런데도 도솔암을 꼭 보라고 권하는 건 아슬아슬 들어선 암자와 그 주변의 기암들이 빚어내는 경관 때문이다.

 

달마산의 기암 사이에 아슬아슬 자리 잡은 삼성각. 암자 도솔암에 딸린 작은 법당이다. 남파랑길 90코스에서 산길을 따라 200m만 오르면 만날 수 있다

도솔암의 경관이야 좀 알려진 것이지만, 맞은편 아래쪽의 삼성각이 들어선 자리는 그야말로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도솔암에서 능선을 따라 15분만 가면 도솔봉주차장이 있고, 거기서 포장도로를 따라 내려가면 남파랑길 90코스와 만나서 땅끝으로 길이 이어진다.

 

남파랑길 90코스는 해남 땅끝마을에서 상록림 숲길을 걸어서 닿는 토말탑 앞에서 끝난다. 바다를 마주 보고 뾰족한 삼각뿔로 서 있는 토말탑의 분위기는 다른 여행지와는 사뭇 다르다. 경관보다는 그곳을 찾아오는 사람들 때문이다. 길을 다 걷고 당도한 오후의 토말탑 앞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겨울날 이른 새벽, 토말탑 앞에는 늘 누군가 있었다. 다들 ‘끝’을 찾아 온 사람들이었다.

 

정면 땅끝마을과 흑일도, 우측 사자봉의 땅끝전망대를 바라보고...

여기까지 온 사연이 없을 리 없다. 추운 겨울밤을 어디서 보냈을까. 토말탑 앞에서 허겁지겁 컵라면을 먹던, 직장에서 퇴직했다는 30대 가장도 있었고, 거듭된 입사시험 낙방으로 절망에 빠진 취업준비생도 있었으며, 아내를 병으로 잃은 상실감으로 떠나온 중년의 사내도 있었다. 그들에게 땅끝마을이란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

 

사자봉 정상 땅끝전망대를 비롯해 땅끝을 기념하는 자리에 해남군이 세운 안내판이며 기념비 글귀에는 땅끝의 의미를 ‘끝’이 아닌 ‘시작’에 두려는 의지가 역력하게 드러난다. 그렇다. 사실 모든 끝은 시작이다. 코리아 둘레길도 마찬가지다. 부산의 오륙도를 바라보며 출발한 남파랑길은 여기까지 와서 끝이 났지만, 땅끝에서 다시 서해안을 따라 인천 강화도까지 올라가는 ‘서해랑길’이 시작할 것이니 말이다. 긴 길의 끝이자, 다시 긴 길의 시작. 이 길 위에서 우리는 지친 삶을 위로받거나 새로운 출발을 다짐할 수 있으리라. 생각을 비우고 그저 걷는다 해도 뭐 어떨까. 모름지기 길은 삶을 은유하는 법. 이제 막 열린 이 길을 걸을 모든 이에게 건투를….

 



■ ‘남파랑길’의 의미


대국민 명칭공모로 선정된 ‘남파랑길’이란 이름은 ‘남쪽(南)의 쪽빛(藍) 바다와 함께 걷는 길’이란 뜻이 담겨 있다. 남파랑길은 남해안 일대의 인문적 경관과 문학적 자산 등을 모두 아우른다. 코로나 시대에 거리 두기와 비대면 여행의 방식으로 ‘걷기’가 떠오르는 상항에서 남파랑길 개통은 의도치 않았지만 시의적절하다.

 

/ 문화일보 2020.11 박경일 전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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