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에서 ‘맑은 기운’을 흠뻑 느낄 수 있는 명소 두 곳이 있다. 두 곳 모두 동창천 물길 곁에서 맑은 기운을 품고 있는 곳이다. 한 곳이 선암서원이고, 다른 하나는 정자 삼족대다.
운문구곡은 우리나라 구곡 중 매우 빠른 시기에 설정된 구곡에 속한다. 청도군 운문면과 금전면에 걸처 흐르는 운문천과 동창천에 소요당(逍遙堂) 박하담 (1479~1560) 이 운문구곡을 설정하고 소요하며 구곡원림을 경영했다. 소요당(逍遙堂) 박하담은 1536년에 주자가 무이산의 무이구곡을 읊은 ‘무이구곡가' 를 차운하여 운문구곡가도 지었다.
박하담의 문집인 '소요당일고(逍遙堂逸稿)’에 ‘중종 31년(1536) 선생의 나이 58세에 운문구곡가를 지으시다. 무이구곡가에 차운하니 소요하는 취미를 읊으신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운문구곡은 칭도군 금친면 신지리에 있는 선암서원 앞의 선암(仙巖)을 1곡으로 하여, 상류로 오르면서 9곡까지 이어진다. 2곡은 석고봉(石效率), 3곡은 횡파(橫坡), 4곡은 천문동(天門洞), 5곡은 내원암(內院庵), 6곡은 석만(石灣), 7곡은 백탄(白灘), 8곡은 도인봉(道人孝), 9곡은 '평천(平川)이다. 운문댐을 거처 운문사와 사리암 입구를 지나 멀리 가지산이 보이는 곳까지 걸쳐 있는 구곡이다
동창천 변의 선암서원 / 청도군 금천면 선암로 455-27 / 054-372-3071
청도의 선비 박하담이 일대의 빼어난 경관 아홉 곳을 ‘운문구곡(雲門九谷)’이라 이름했던 자리에 세워진 서원이다.
박하담은 동창천 변에 집을 지어 ‘소요당(消謠堂)’이란 현판을 걸었는데, 그걸 자신의 호로도 삼았다. 소요(消謠)란 ‘자유롭게 이리저리 슬슬 거닐며 돌아다닌다’는 뜻. 방점은 ‘돌아다닌다’가 아니라 ‘자유롭게’에 찍힌다. 그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서 평생을 은거하면서 자유롭게 살았다. 박하담이 세상을 떠난 뒤 그가 ‘구곡’이라 이름 붙이고 거닐며 소요하던 자리에 세워진 게 바로 선암서원이다.
청도에서 박하담과 함께 기억해야 할 인물이 삼족당 김대유다. 동갑내기인 박하담과 김대유는 평생 벗으로 지냈다. 지금의 표현으로 하면 이른바 ‘절친’이었던 셈이다. 박하담이 철저히 은거한 선비였다면, 두루 벼슬을 하고 현감 자리까지 올랐다가 기묘사화로 관직을 박탈당하고 고향 청도로 돌아온 김대유는 낙향한 선비였다. 둘은 고향 땅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것뿐만 아니라 의기투합해 가난한 이를 위해 가뭄과 기근을 대비하는 곡식 창고를 짓기도 했다.
이들이 구휼을 위해 지은 창고는 관아 동쪽에 있다고 해서 ‘동창(東倉)’이라 불렸는데, 선암서원을 끼고 흐르는 물길에 붙여진 ‘동창천’이란 이름도 거기서 비롯된 것이다. 박하담과 김대유가 살다간 지 500년 뒤에도 그 이름이 지워지지 않고 선명한 건, 이들이 음풍농월의 풍류와 뒷짐 진 소요를 넘어 학문으로, 혹은 곡식으로 이웃에 베풀며 다른 사람의 삶까지 살폈기 때문이지 않을까.
선암서원은 박하담 문중 소유지만, 서원은 박하담과 김대유를 함께 기린다. 사실 봄나들이에 나선 여행자의 눈높이에서는 선암서원이 누구를 배향하고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을지 모르겠다. 봄볕으로 환한 동창천 변의 선암서원 담장을 끼고 오솔길로 들어서는 순간, 수묵채색으로 그려낸 듯한 주변 경관이 먼저 눈에 들어올 것이고, 그 풍경만으로도 단숨에 반할 것이니 말이다.
선암서원은 기왕의 서원과는 건물의 배치나 느낌이 전혀 다르다. 강학 공간 뒤에 사당이 있는 전형적인 ‘전학후묘’ 방식이 아니라, 격식을 잘 갖춘 고택에 가깝다. 행랑채와 사랑채, 그리고 안채가 있다. 격조 있는 서당 건물은 뒷마당에 들어와 앉아 있는데, 거기 서원의 현판을 내걸었다. 우아한 서당채 건물은 선암서원을 한결 근사하고 운치 넘치는 별서(別墅)로 느끼게 만든다.
선암서원이 보여주는 그윽한 아름다움의 절반 이상은 눈부신 자연과의 협업으로 이뤄진 것이다. 봄볕 따스한 고택의 마루와 아름드리 소나무가 드리운 그늘, 만개한 봄꽃들, 여기다가 유연하게 휘돌아 나가는 동창천의 물길이 어우러진다. 자연과 조화된 풍경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특별하다. 지금 청도는 복사꽃과 신록으로 가장 아름다운 때이니, 선암서원도 절정의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청도군 매전면 청려로 3836-15 (금곡리) / 삼족대
선암서원을 끼고 흐르는 동창천을 따라 더 내려가면 물가에 정자 삼족대가 있다. 선암서원이 박하담의 것이라면, 삼족대는 김대유의 것이다. 김대유는 천변에 딱 붙은 벼랑에다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 정자를 세웠다. 물을 앞에 두고 벼랑에 올라앉은 자세가 기품이 넘치지만, 방 두 칸과 ㄱ자 마루 하나가 전부인 소박한 정자다. 정자 마루에 앉으면 동창천의 푸른 물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삼족(三足)’이란 정자의 이름은 ‘세 가지가 족하다’는 뜻이다. 본래 삼족은 유교 경전 ‘예기(禮記)’에 나온다. 물고기를 잡을 수 있고(漁), 땔감이 충분하고(樵), 양식을 구할 밭이 충분하니(耕) 이 세 가지로 족하다는 뜻으로 쓰였는데, 김대유는 이걸 본떠 육십을 넘긴 나이가 족하고(壽), 과거에 합격하고 벼슬을 지냈으니 영예가 족하고(譽), 아침저녁으로 고기반찬이 끊이질 않으니 먹을 것(食) 또한 족하다고 했다. 이런 뜻으로 정자의 이름을 삼족대로 삼았고, 자신의 호도 삼족당이라 했다.
이쯤에서 드는 의문 한 가지. 개혁을 꿈꾸다가 사화에 휘말려서 낙향한 선비가 고작 일신의 안위만 생각했을까 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절친 박하담의 문집에 나온다. 다음은 박하담의 질문에 김대유가 내놓은 진짜 삼족에 대한 설명이다.
“시대에 어리석어서 영광과 치욕이 내 몸에 미치지 않아 몸을 보전함에 만족하고, 일에 어리석어서 헐뜯고 칭찬하는 것으로 내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니 마음을 기르는 데 만족한다. 또 욕심에 어리석어서 힘쓰는 것이 분수를 넘지 않으니 분수에 만족한다.”
찬찬히 새겨 읽어보면 그가 말하는 만족이란, 영욕과 성취, 욕심을 내려놓음으로써 비로소 얻어진 것들이다. 그걸 내려놓게 된 연유를 자기가 ‘어리석기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한껏 낮췄다. 그렇다면 그가 나이와 벼슬, 음식을 들어 삼족이라 일컬었던 건 스스로 어리석음을 가장하고자 한 것이었으리라.
# 동창천 물길 따라 걷는 느긋한 산책
선암서원이 있는 금천면 신지리에는 박하담의 후손들이 여태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다.
마을에는 운치 있는 고택이 여럿 있는데, 그중 빼어난 집이 6·25전쟁 때 이승만 전 대통령이 묵어갔다는 여든여덟 칸 운강고택과 고택에 딸린 정자 만화정(萬和亭)이다. 선암서원에서 천천히 걸어서 10분이면 넉넉한 자리에 운강고택이 있다.
동창천을 끼고 너른 누마루를 두르고 있는 만화정에 올라 신록으로 물든 천변의 버드나무 정취를 즐기기 딱 좋을 시기인데, 아쉽게도 정자 지붕을 보수하는 중이어서 드나들 수 없다.
금천면 임당리에 있는 운림고택도 들러볼 만하다.
조선시대 궁중의 내시로 정3품 통정대부 관직까지 오른 이가 말년에 낙향해 직접 지은 집이다.
임당리는 400년 동안 16대에 이르기까지 내시의 가계가 이어져 온 독특한 내력의 마을.
내시 가문은 부인을 들인 뒤 입양한 양자를 다시 궁중으로 들여보내 내시 생활을 하도록 하면서 대를 이었다. 도둑이 많았던 시절에도 운림고택에서는 맷돌 하나 훔쳐가는 이가 없었다는데, ‘내시의 물건을 훔치면 그 자손이 내시가 될 수 있다’는 속설 때문이었단다.
고택의 주인은 이런 편견에 얼마나 시달렸을까. 운림고택의 담장이 유독 높은 것도 편견과 호기심의 시선을 차단하기 위한 것일 텐데, 청도군의 관광해설사는 ‘내시 부인이 외간 남자와 접촉하는 걸 막기 위해서’라는 식으로 해설한다. 그 해설을 다 믿는다면 고택의 주인은 담장을 높이 쌓고 집안 곳곳에다 구멍을 뚫어 거기 눈을 대고서 아내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신경증 환자나 다름없다.
/ 문화일보 2021 박경일전임기자
청도 20번국도-신지리 운강고택 박곡마을 대비사 귀천봉 (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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