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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경상북도

영천 팔공산 은해사 칠암자길

by 구석구석 2022. 5.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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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천 팔공산 자락의 은해사는 대표적으로 여행자들에게 과소평가된 절집입니다. 아주 알려지지 않은 건 아니라지만, 큼직큼직 들어선 당당한 위세와 절집이 두르고 있는 화려한 단풍을 생각한다면 그깟 정도의 명성이란 게 너무 보잘것없다 싶을 정도입니다. 게다가 은해사는 제각기 절 하나라고 해도 믿길 정도로 번듯한 격식을 갖춘 여덟 개의 산중 암자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그중 일곱 개 암자를 한 걸음으로 돌아보는 ‘칠암자 순례길’을 걸었습니다.‘지리산 칠암자 순례길’과 마찬가지로 일곱 개의 암자를 이어서 걷는 숲길입니다. 누군가 코스로 다듬어 놓았거나 이정표가 있는 길은 아니고, 다녀온 이들이 저마다 정보를 공유하고 제 나름의 지도를 그려가며 걷는 길입니다. 가을볕이 환하게 쏟아지는 날에 단풍 찬란한 그 숲길을 걸었습니다.

등산이나 다름없는 가파른 구간도 있었고 흐려진 자취로 자주 길을 잃을 뻔한 구간도 있었습니다. 힘들거나 내키지 않는다면 번듯한 길이 나 있는 암자에서 산을 내려가면 그뿐이지만,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오히려 등을 떠밀었습니다. 스스로를 가둔 고행과 정진의 공간을 그동안 너무 편하게 찾았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적당한 오르내림으로 이어지는 숲길을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밟으며 걷는 길. 단풍색 환한 숲길을 걷다가 ‘이 길을 걷는다는 게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 팔공산, 단풍의 바다를 이루다



‘은해(銀海)’. 절의 이름이 ‘은(銀)의 바다’다. 팔공산에 안개가 끼고 구름이 짙어지면 절집 주위 풍경이 마치 은빛 바다가 물결치는 듯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다. 지금 팔공산 은해사 일대는 안개 대신 ‘단풍’의 바다다. 팔공산 단풍이 이름난 단풍 명소처럼 핏빛은 아니지만, 그래도 화려하게 불붙어 가슴이 두근거리게 할 정도는 된다. 단풍도 단풍이지만, 무성했던 이파리를 낙엽으로 내려놓고 빈 가지로 돌아가는 이맘때의 숲은 절집의 맑은 정신과도 썩 잘 어울린다. 단계적 일상회복이라고는 해도 아직 인파로 가득한 행락지로의 단풍여행은 마음 불편할 수 있다는 것까지 생각한다면, 팔공산의 절집 은해사의 호젓한 암자로 떠나는 고즈넉한 여행이야말로 참으로 적절하지 않은가.

 

은해사는 경북 영천의 팔공산 자락에 있다. 뜻밖에도 팔공산을 외지인들은 잘 모른다. 팔공산을 서울 남산 크기 정도로 알고 있거나, 팔공산이나 갓바위가 대구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팔공산은 큰 산이다. 국립공원 승격을 추진하고 있는 팔공산도립공원(125㎢)의 크기는 한라산국립공원(153㎢)의 80%가 넘는다. 팔공산이라면 ‘대구의 산’이라 생각하기 쉬운데, 실은 팔공산에서 대구가 차지하는 땅은 4분의 1에 불과하다. 이웃한 영천과 칠곡이 대구와 비슷한 팔공산 지분을 갖고 있고, 나머지는 군위와 경산이 나눠 갖고 있다. 팔공산 정상인 비로봉(1193m)의 행정구역도 대구가 아니라 군위이고, 팔공산 ‘갓바위’도 대구가 아니라 경산 땅에 있다.

 

팔공산은 신라 이래 불국토였다. 수많은 절과 탑이 들어섰다가 스러지기를 거듭했다. 지금도 팔공산에는 줄잡아 300개가 넘는 절집과 암자가 있다. 팔공산의 불국토는 영천 은해사와 대구 동화사가 동서로 양분하고 있다. 동화사는 대구를 끼고 있어 산문으로 드는 길이 반질반질 윤이 났지만, 영천의 은해사 쪽은 발길이 덜해서 적요하다.

 

은해사 성보박물관에 전시된 추사 김정희의 대웅전 현판은 서울 봉은사에 걸린 ‘판전(板殿)’이란 추사의 마지막 작품과 함께 사찰편액 글씨의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경상감사 재직 중 은해사를 찾은 김정희는 대웅전과 보화루, 불광 등 희대의 명필편액을 남겼다. 대웅전에 내걸린 네 폭의 주련도 추사의 글씨다. 은해사 지장전 편액은 1955년 손가락을 태워 서원하는 이른바 ‘연지연향(燃指燃香)’으로 불법의 정진을 발원했다는 동곡 일타스님이 남긴 것이다.

 

# 팔공산, 그리고 지리산의 ‘칠암자길’



은해사는 팔공산에 여덟 개의 산내 암자를 거느리고 있다. 은해사 암자는 팔공산 골짜기에 깊숙이 숨어있지만, 그 앞까지 찻길이 나 있다. 좁고 가파르긴 해도 포장도로가 놓여있으니 차를 타고 암자까지 갈 수 있다는 얘기다. 은해사 뒤쪽으로 여러 암자로 이어지는 찻길이 마치 부챗살처럼 펼쳐져 있다. 이렇게 길이 놓이니 절집과 암자 사이는 쉽게 오갈 수 있게 됐지만, 암자와 암자 사이의 거리는 오히려 멀어졌다. 암자와 암자 사이를 순례하듯 걷는 길인 ‘칠암자길’이 만들어진 이유다. 팔공산 칠암자길은 기왕에 있던 길은 아니고, 근래 팔공산을 오르내리던 이들이 ‘지리산 칠암자길’을 본떠서 만든 길이다.

 

이른바 ‘칠암자 순례길’의 원조는 지리산이다. 지리산에는 ‘칠암자길’이 세 개나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게 삼정산 능선 칠암자길이다. 도솔암에서 영원사로, 그리고 상무주암과 문수암, 삼불사, 약수암을 들러 실상사에 닿는다. 예로부터 이름난 고승들이 칩거해 수도하던, 깊은 산중에 숨듯이 파묻혀 있는 전설 같은 암자를 두루 찾아가는 길이다. 길이 멀고 거칠지만 세상과 등 돌려 앉은 암자에서 수도자의 맑은 정신을 느껴보려는 이들이 그 길을 걷는다.

 

이것과는 또 다른, 지리산 남쪽의 천은사에서 시작하는 ‘천은사 칠암자길’도 있다. 천은사에서 시작해 천은사의 산내 암자를 둘러보고 노고단 근처로 되돌아오는 길이다. 삼정산 능선의 칠암자길이 웬만큼 산행 경험이 있다 해도 쉽지 않은 코스라면, 천은사 칠암자 코스는 거리도 비교적 짧고, 걷기도 수월한 길이다.

 

지리산 칠암자 코스 중 가장 난도가 높은 것이 이른바 ‘헛절 칠암자길’이다. 지리산 동북부의 산허리를 따라 터만 남은 암자의 자취를 찾아다니는 코스다. 조선의 문인 김종직이 함양태수를 지내던 시절, 닷새 동안 지리산을 둘러보고 산행기행문 ‘유두류록’을 썼는데, 거기에 지금은 없는 암자가 여럿 등장한다. 헛절 칠암자길은 그렇게 이름만으로 남아있는 절집 터를 찾아가는 코스다. 이른바 ‘시공을 초월한 다른 차원의 길’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길은, 지리산을 손금보듯 하는 마니아들만 이따금 드나든다.

 

#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는 길



팔공산 은해사가 거느린 암자를 이어 걷는 팔공산 칠암자길은 아직 코스가 공인된 바 없다. 들머리부터 종점까지 코스가 걷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다. 들러가는 암자가 아예 다르거나 걷는 방향이 다른 경우까지 있다. 그러니 칠암자길은 완성된 길이라기보다는, ‘완성돼 가고 있는 길’이라는 쪽이 맞는 말이겠다. 지금까지의 발자국 뒤로 더 많은 이들의 발자국이 보태지고 난 뒤에나 뚜렷해질 것이란 얘기다.

 

칠암자길을 찾는 이들이 가장 많이 걷는 코스가 경산의 원효암에서 출발해 시계 방향으로 암자를 돌아서 제자리로 돌아오는 원점회귀 코스다. 순서대로 보면 원효암→묘봉암→중암암→운부암→백흥암→기기암→천성암→원효암(회귀)의 순이다. 같은 코스를 정반대 방향으로 돌기도 한다. 천성암에서 원효암 사이에 은해사를 끼워 넣고 더 길게 걷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걷는다면 전체 코스는 14㎞가 넘는다. 하나하나 암자를 둘러보는 시간까지 계산한다면 여유 있게 8시간 정도는 잡아야 한다. 걷는 시간이 좀 길긴 하지만 단풍으로 물든 숲 속을 걸으며 가을을 감상하고, 암자마다 들러 두 손을 모으다 보면 지루할 틈이 없다.

 

칠암자길은 공인된 걷는 길이 아니어서 길이 제대로 닦여있지 않고, 이정표도 없어서 자칫 길을 잃기 십상이다. 산중에 ‘팔공산 둘레길’ 코스가 지나가면서 안내판이 뒤섞이는 바람에 더 헷갈린다. 서둘지 말고 천천히 이동하되 수시로 이동방향을 체크하면서 걸어야 한다. 칠암자길을 먼저 걸은 이들이 산행 리본을 촘촘하게 매어놓았으니 그걸 따라가는 것이 요령. 먼저 다녀온 이가 블로그에 올려놓은 이동 궤적의 좌표를 내려받아서 스마트폰 트레킹 앱으로 구동하면 더 손쉽게 길을 찾을 수 있다.

 

사진 위는 깎아지른 벼랑에 들어선 암자 중암암. 빼어난 경관 덕에 은해사 암자 중에서 가장 방문객이 많다. 사진 아래는 붉고 노란 단풍으로 물든 팔공산 칠암자길. 칠암자길을 걷는 이가 기기암 아래 숲길에서 다리쉼을 하고 있다

# 단풍 불붙은 벼랑 끝의 암자



칠암자길이 지나는 일곱 암자 가운데 하이라이트는 ‘바위구멍절’이라 불리는 중암암이다. ‘중앙암(中央庵)’이라 잘못 알거나 발음하기 십상이지만, ‘가운데 중(中)’에 ‘바위 암(巖)’ 자를 써서 ‘중암암(中巖庵)’이다. 직벽 바위 벼랑의 손바닥만 한 자리에 다 들인 법당과 법당에 붙여 지은 산신각, 그리고 멀찌감치 떨어진 자리에다 지은 요사채 하나가 전부인 암자다. 속세와 등진 이상향을 상상으로 그려낸다면 이런 모습일까. 법당이 아슬아슬 들어선 자리와 정취만으로도 감탄을 자아내는데, 암자 주변에 단풍마저 불붙어 있으니 더할 나위 없다.

 

중암암 법당의 네 기둥에는 금강경의 마지막 구절이 주련으로 걸려있다.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 금강경은 부처님이 제자 수보리(須菩提)에게 한 설법으로 주석서만 600여 종에 이른다는 경전. 법당에 걸어둔 글씨는 부처가 수보리에게 ‘억만금을 보시했다고 해도 이걸 읽고 외우며 실천하는 것만 못하다’며 일러준 내용이다.

 

주련의 글씨를 풀어본다. “일체의 모든 현상계는 꿈이고 허깨비이고 물거품과 그림자에 불과하고 이슬방울이나 번개와도 같으니, 마땅히 (세상을) 이와 같이 보아야 할 것이다.” 보이는 형상에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벼랑 끝 법당에다 그 글을 걸어둔 까닭은 무엇일까. 영원히 가질 것처럼, 혹은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는 어리석은 삶을 벼랑 끝에서 돌아보라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중암암 뒤쪽의 벼랑 위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활개 치듯 자라는 소나무 ‘만년송’.

# 팔공산 최고의 명당자리 암자

 

은해사 암자는 중암암을 빼고도 인상적인 곳이 하나둘이 아니다. 같은 사찰이 품은 암자는 풍경이 비슷비슷한 법인데, 은해사 암자는 하나하나 풍경이 다르고, 분위기가 다르다. 어느 곳 하나 허투루 지나칠 곳이 없다. 칠암자길이 조금도 지루하지 않은 이유다.

 

중암암의 매력과 견줄 수 있는 곳이 운부암이다. 중암암과 운부암은 여러모로 비교된다. 중암암이 위태로운 절벽에 매달린 절집이라면, 운부암은 분지형 지형에 들어선 편안한 느낌의 암자다. 운부암이 앉은 자리가 팔공산에서 최고의 명당자리란다. 중암암은 겨우 법당 두 개뿐인 손바닥만 한 암자지만, 운부암은 웬만한 절집보다 규모가 크다. 경내에 큰 연못만 세 개가 있고, 누각부터 법당까지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작은 불이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험악한 인상의 돌사자 뒤로 누각 보화루가 있다. 단청이 지워져 갓 세수한 듯 말갛다. 보화루 아래를 지나면 암자의 중심인 원통전이다. 원통전 석탑 아래 뼈만 남아 웅크린 노승 모습의 청동 조각품이 있다. 그 앞에 씌어있는 글. “우째 왔노. 이 몸은 늙어지면 니 또한 이래 된다….” 주지 불산 스님이 적어놓은 위협 섞인 글이다.

 

글은 위협적인데 대접은 융숭하다. 보화루 누각 안에 누구든 앉아서 차를 마시고 갈 수 있도록 탁자와 다구(茶具)를 놓아두었다. 단감이 한가득 담긴 바구니 곁에 칼과 접시도 두었다. 경내에서 딴 감을 누구든 깎아 먹으라고 내놓은 것이었다. 암자를 찾은 이들이 가을볕 아래서 차를 마시고 단감을 깎아 먹으며 좀처럼 일어설 줄 모른다.

 

지금은 대중과 소통하는 절집이지만, 운부암은 한때 수행처로 이름을 날리던 암자였다. 그 무렵 운부암은 선산 도리사와 함께 남한의 2대 중심선원으로 꼽혔다. 북한의 2대 선원으로는 마하연과 상원암을 쳐주었는데, 남북에서 하나씩만 꼽으라면 운부암이 마하연과 함께 꼽혔다고 전해진다. 운부암을 거쳐 간 조사 스님은 경허, 혜월, 운봉, 만공 대선사를 비롯해 경봉, 청담, 한암, 팔봉 스님 등으로 당대의 선지식을 망라한다.

 

# 몸은 저자에, 마음은 극락에

 

중암암에 닿기 전에 들르는 암자 묘봉암은 팔공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암자다. 신라 때 창건한 뒤로 중창을 거쳐 꾸준히 법맥을 이어 내려오다 6·25 전쟁으로 폐사됐던 것을 근래 중수했다. 암자는 특별하달 게 없지만, 암자가 끼고 있는 뒷산 묘봉에서 내려다보는 경관이 그야말로 ‘백만 불짜리’다. 묘봉암 뒤로 난 오솔길을 따라가면 묘봉으로 이어지는 길이 나오는데, 그 길을 15분쯤 오르면 사방으로 시야가 탁 터진 조망 바위가 있다. 거기서 맞은편 벼랑에 매달리듯 앉아있는 중암암이 새의 시선으로 건너다보인다. 여기서 보면 중암암이 얼마나 근사한 자리에 있는지 대번에 알 수 있다. 팔공산의 주 능선인 묘봉에서는 저 멀리 경산 쪽 팔공산의 갓바위 불상의 옆모습이 또렷하게 보인다. 얼마나 걸어야 하는지 알 수 없지만, 묘봉암에서 갓바위까지 이어지는 등산로도 있다.

 

사진 왼쪽은 칠암자 중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묘봉암의 원통전. 바위를 건물 안으로 넣어 지었다. 오른쪽은 묘봉암 원통전 내부. 벽을 뚫고 들어온 바위가 불단을 장식하는 닫집처럼 보인다

묘봉암은 또 거대한 바위를 안으로 들여서 지은 법당이 명물이다. 애초에 지을 때부터 그렇게 지은 것인데, 마치 바위가 법당 벽을 뚫고 들어온 것처럼 보인다. 요사채 앞마당에 세워서 산 아래 풍경을 배경 삼아 서 있는 자그마한 석탑도 독특하다.

 

일곱 암자 중에서 정원의 조경이 빼어나기로는 기기암이 단연 최고다. 나무와 꽃으로 가꿔낸 정원의 단정한 아름다움은, 정성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해 보였다. 기기암(寄寄庵). 암자 이름에 ‘맡길 기(寄)’ 자가 하나도 아니고 두 개씩이나 들어갔다. ‘신기사바(身寄娑婆) 심기극락(心寄極樂)’에서 온 말이란다. 몸은 사바세계에 머물고 마음은 극락세계에 있다는 뜻이다. 중암암 법당 주련에서 본 금강경의 글귀와 마찬가지로 ‘있고 없는 것에 연연하지 말라’는 뜻이리라.

 

팔공산 칠암자길 구간의 중간에 들르게 되는 백흥암. 팔공산 산자락의 단풍 물든 숲이 쏟아져 내려오는 듯한, 그야말로 절묘한 자리에 앉아있다.

은해사의 산내 암자 중에서 가장 아늑한 자리에 있는 암자가 백흥암이다. 백흥암은 1년에 딱 두 번. 사월초파일과 백중 때만 산문을 여는 암자다. 보통 때는 누각 앞에까지만 발걸음을 허락하는데, 지워진 단청 대신 나무결을 섬세하게 살린 누각 건물에서 ‘기품있게 늙은’ 절집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암자 안으로 발을 들일 수는 없지만, 백흥암을 가운데 두고 흘러내리는 능선의 단풍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거기까지 간 보람은 충분하다. 이미 산정을 물들인 푸른 빛과 노랗고 붉은 단풍, 푸릇푸릇한 잣나무의 초록이 일시에 산 아래로 진격하는 듯한 형상이다.

 

/ 문화일보 2021.11 영천=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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