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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충청북도

영동 금강둘레길

by 구석구석 2022. 5.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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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영동에는 가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둘레길이 있습니다. 둘레길이라면 대개 산의 둘레를 도는 길인데, 영동의 둘레길은 ‘물의 둘레’를 돕니다. ‘양산팔경 금강둘레길’은 금강의 물길을 돌고, ‘월류봉 둘레길’은 수묵의 풍경 같은 월류봉에서 반야사까지 줄곧 초강천 물길을 끼고 갑니다. 반야사에서 다시 경북 상주의 옥동서원을 잇는 ‘백화산 둘레길’도 석천의 물길을 따라가는 길입니다. 이 세 곳의 둘레길은 어느 곳이 더 낫다고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저마다 근사한 풍경과 정취를 품고 있습니다. 호젓하게 가을을 마중하거나 떠나보내기에 맞춤한 길. 되도록 천천히 걸었던 그 길의 이야기입니다.

 

양산팔경 금강둘레길 

옛사람들은 충북 영동군 양산면을 끼고 흐르는 금강 일대 명승 여덟 곳을 묶어 ‘양산팔경’이라 불렀다. 여덟 개 명승 중에서 여섯 개가 모여있는 금강 변에 그 경관을 따라 걷는 ‘양산팔경 금강둘레길’이 있다.

양산면 송호리를 끼고 흐르는 금강을 따라가다 강을 건너 출발한 자리로 거슬러 되돌아오는 6㎞ 남짓한 길이다. 양산팔경의 여덟 경치 중에서 1경 영국사와 7경 자풍서당을 빼고 나머지 경관이 그 길 위에 다 있다. 2경 강선대, 3경 비봉산, 4경 봉황대, 5경 함벽정, 6경 여의정, 8경 용암. 이렇게 여섯이다.

우선 영국사는 여기서 멀다. 금강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천태산 아래 절집 영국사와 그 절이 거느린 은행나무 노거수 얘기는 뒤에서 다시. 7경 자풍서당은 경치보다는 ‘글 읽는 소리’로 양산팔경에 꼽혔던 곳이니 빠뜨린대도 뭐 그리 아쉽진 않다.

양산팔경 금강둘레길의 가장 큰 매력은 편안하다는 것. 강기슭을 오르내리는 구간도 있긴 하지만 길이 가파르지도, 굽이치지도 않아 몸도 마음도 다 가볍다. 둘레길의 출발은 소나무가 빽빽하게 숲을 이르고 있는 송호국민관광지로 정하는 게 좋겠다. 주차장과 캠핑장을 비롯한 편의시설이 그쪽에 있어서다.

꼿꼿한 선비처럼 도열한 솔숲 너머로 금강이 유유하게 흘러가는 이곳의 풍경은 ‘국민관광지’란 건조하고 계몽적인 이름으로 부르기에는 너무나 낭만적이다. 특히 붉고 노란 단풍으로 강변이 물드는 가을에는 더 그렇다. 송림 한가운데 근사한 캠핑장이 있고, 이제 막 물들기 시작한 은행나무와 단풍나무를 끼고 이어지는 낭만적인 산책로가 있다. 여기는 단풍도 화려하지만, 단풍이 지고 난 뒤 양탄자처럼 깔리는 낙엽의 초겨울 정취도 못지않다.

 

# 결정적 장면…강선대의 가을 달

송림 너머 강변의 바위 위에 운치 넘치는 정자가 있다. 양산팔경 중 가장 먼저 만나는 제6경 여의정(如意亭)이다. 여의정은 송호국민관광지의 빽빽한 솔숲 너머 강변에 있다. 이곳의 솔숲은 400년 전쯤 지금의 군수나 도지사쯤 되는 황해도 연안부사 벼슬을 지낸 만취당 박응종이 관직을 내려놓고 돌아와서 소나무를 심어 기른 자리다. 지금의 소나무는, 그러나 그때 심어진 게 아니다. 400년 된 노송은 일제강점기에 철도 침목으로 쓰기 위해 모두 베어지고 말았다.

지금의 소나무는 그 이후에 심어 가꾼 것이지만, 그래도 수령 100년 남짓한 아름드리로 자라나서 솔향 짙은 근사한 솔숲이 됐다. 여의정은 낙향해 소나무를 심고 그 그늘 아래서 후학을 길러냈던 박응종을 기리기 위해 1935년 후손들이 지은 정자다. 정면 두 칸, 측면 한 칸의 소박한 정자지만, 발돋움하듯 바위를 딛고 지어져 존재감이 뚜렷하다. 비록 콘크리트 자재로 지어진 정자지만, 바위 위의 미륵불 입상 및 깨진 석탑과 어우러져 제 나이보다 훨씬 더 오래된 듯 고색창연한 멋을 풍긴다.

양산팔경은 하나하나 장소마다 잘 어울리는 시간이 따로 있다. 계절에 따라 팔경에 대한 감상이 다른 이유다. 가을이 물들기 시작하는 지금과 딱 맞는 곳이 송호국민관광지에서 강물을 따라 내려가다 봉곡교로 금강을 건너면 만나게 되는 2경 ‘강선대’다. 강선(降仙). 선녀가 내려왔다는 자리다. 노송이 뒤틀고 자라는 10m쯤 되는 바위 절벽 강선대에 금강이 내려다보이는 육각 정자가 있다.

양산팔경 금강둘레길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강선대.

강선대는 양산팔경이기도 하고, 함벽정을 중심에 두고 정한 ‘함벽정팔경’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함벽정팔경은 여덟 곳의 명소를 정하고 그곳의 가장 ‘결정적 순간’을 읊는 방식으로 정했는데, 강선대의 결정적 순간은 ‘가을 달이 떴을 때’다. 그걸 일러 ‘선대추월(仙臺秋月)’이라 한다.

아름다운 금강의 정취만 해도 좋은데, 팔경의 명소가 곳곳에 있고, 강물소리 들리는 청량한 숲길과 평화로운 가을 들판과 마을이 있으며, 옛사람들의 시간까지 잠겨있으니 이 길 위에서 더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양산팔경 금강둘레길에는 무인판매대가 두 곳 있다.

하나는 솔숲에 설치된 부추를 파는 무인판매대. 다른 하나는 논 가운데 개방된 공간에서 농산물이나 음료수 등을 파는 무인 가게다. 솔숲의 무인판매대는 텅 비었다. ‘제발 그냥 가져가지 말아달라’는 호소를 적어놓은 걸 보면 양심 불량 손님 때문인 듯했다. 무인판매대에는 바구니에 담은 농산물이 풍성했다. 냉장고에 음료수도 가득했다. 같은 사람이 걷는 길인데 아무도 보지 않는 숲 속 판매대는 장사를 접었고, 개방된 공간의 판매대는 성업 중이다.

/ 문화일보 2021.11 영동 = 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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