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면 동리 433 만년교
영축산과 함박산 사이 골짜기에서 내려온 물줄기가 창녕 영산 읍내의 동쪽을 적시며 남쪽으로 흐른다. 영산의 실개천이라 영산천이라 부르는데, 더 오래전에는 남산 아래를 흐른다고 남천이라 했다 한다. 그 물길 위에 무지개다리가 놓여 있다. 영산 만년교(萬年橋)다.
개천의 자연 암반을 주춧돌로 삼아 그 위에 받침돌을 놓고 잘 다듬은 화강암 32개를 맞대어 홍예를 올렸다. 홍예의 머릿돌 위에는 비교적 큰 돌들을 조르르 배열하고, 양쪽 다리 벽은 자연 잡석을 쌓아 전체적으로 완만하게 휘어진 경사를 만들었다. 서로를 밀고 또 당기는 돌들의 긴장으로 완성된 홍예는 단순하여 아름답고 꾸밈없이 우아하다.
다리의 노면에는 얇게 흙을 깔았다. 부드러운 탄성을 느끼게 하는 흙 마감은 연결되는 땅과의 일체감을 선사한다. 다리는 땅의 연속이자 땅의 뿌리처럼 이 땅에서 저 땅으로 자라나 있다.
다리 옆에 세 동강 난 몸을 이어 붙인 비석이 서 있다. 거기에 이 다리가 처음 건설되었을 때의 상황이 새겨져 있다.
100여 년이 흘러 고종 29년인 1892년, 마을의 현감 신관조(申觀朝)가 석수 김내경(金乃敬)을 시켜서 다리를 중수했다. 그리고 '이 다리는 만년을 갈 것이다'라 기원하며 '만년교'라 이름 지었다.
다리 앞에 '萬年橋(만년교)'라 새겨진 비석이 서 있다. 당시 이 고을에 살던 열세 살 신동이 새겼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신관조는 멋을 알고 선정을 베푼 현감이라 전해지는데, 그로 인해 만년교는 '원다리'라 불리기도 한다.
만년교 조금 아래 현대에 세워진 다리 이름은 아예 원교다. 원교에서 만년교를 바라보면 홍예와 반영이 만들어내는 원(圓)이 확연하다.
남산호국공원
임진왜란부터 일제 강점기를 거쳐 6·25전쟁에 이르기까지, 이 땅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산화한 이들을 기리는 곳이다. 규모는 작지만 전국 최초의 호국공원으로 3대 국란호국의 성지로 꼽힌다고 한다.
남산을 오르면 위엄찬 화왕산 신성봉 자락과 그 아래 영산 읍내가 한눈에 펼쳐진다. 그 자리에 6· 25전쟁 영산지구 전적비가 서 있다. 1950년 여름 영산 일대에서 두 차례의 혈전이 있었고, 국군과 유엔군의 결사방어로 부산으로 향하는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할 수 있었다.
전적비 뒤편에는 3·1독립운동기념비가 자리한다. 1919년 3월13일 오후 2시, 23인의 청년들이 이곳에서 독립운동을 결의했다. 산을 내려온 그들은 만년교 일대에서 일경과 육탄전을 벌였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일경의 저지선을 뚫고 영산읍내로 진격해 시위를 펼쳤다. 경남 최초의 만세운동이었다고 한다. 기념비석 하단에 결사대원 23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영산 연지
연지는 불덩어리 형상을 한 영축산을 다스리기 위해 아주 옛날 축조했다고 한다. 신관조 현감이 영산에 왔을 때 못은 헐어 묻히고 마르고 막혀 있었다고 한다. 말라붙은 지 60년, 현감은 수천 민호를 동원해 하루의 역사로 우거지고 쌓인 것을 치우고 더 깊이 파내어 거울 같은 호수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연지를 보수한 것이 만년교 중건 3년 전의 일이다.
연못 가운데에는 하늘의 오성(五星)을 본떠 만들었다는 다섯 개의 인공 섬이 있다. 신관조 현감은 만년교를 중건하던 해에 못의 북녘 모퉁이에서 잠시 쉬다가 크게 돋보이는 한 섬에 한 칸의 초가 정자를 세우기로 한다. 그리고 작은 배로 7일을 넘나들며 여섯 기둥에 굽은 난간을 가진 정자를 완성했다. 그리고 중국 항주호수의 미정(眉亭)에 비겨 항미정(抗眉亭)이라 현판 했다.
[영남일보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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