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곡리 용담사
길안면 금곡리 황학산(黃鶴山) 기슭에 위치해 있다. 절 앞으로 황학산에서 발원하여 길안천으로 흘러 들어가는 개울물이 풍부하게 흐르는데, 이곳은 황학산과 금학산이 맞닿는 곳에 내를 따라 그리 넓지는 않지만 적당한 논과 밭이 펼쳐져 있다. 그 옆으로 길이 나 있는데, 바로 옆에 용담사가 위치해 있다.
안동에서 길안면 소재지인 천지리로 가면 이곳에 35번 국도와 914번 지방도가 교차하는 지역의 교통 중심지가 나온다. 914번 지방도는 서쪽으로 의성군과 동쪽으로 청송군을 연결해주는데, 조선시대에는 군수창고가 위치했던 창리(倉里)가 인접해 있기도 하다.
이곳을 지나 가다보면 용담사에서 7km 떨어진 곳에 숙종 13년(1687)에 세운 묵계서원이 있는데, 묵계서원과 만휴정을 둘러 본 후에 국도를 따라 가면 맑고 푸른 길안천과 더불어 천하절경을 자랑하는 천지갑산을 만날 수 있다.
천지갑산의 입구 미내에서 오른쪽으로 신기와 소일마을로 가다보면 용담사를 만날 수 있다. 용담사는 황학산과 금학산이 맞닿는 계곡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황학산, 화부산, 연점산, 금학산, 그리고 천지갑산이 모여 있는 안동지역에서도 오지에 속하는 골짜기 중에 골짜기다. 겹겹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산은 높고 골이 깊으며,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르는 청정지역이다.
산줄기가 맞닿은 곳은 협곡을 이루고 있어 경치가 아름답기 그지없다. 황학산 기슭에 가람의 터를 잡고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용담사는 깊은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으나, 절이 번창할 당시에는 많은 승려들이 수도를 하여 쌀 씻는 물이 멀리 7km 떨어진 묵계까지 이어질 정도였다고 한다. 그만큼 용담사에는 수도승과 불자들이 많았으며 부속암자도 3개나 갖추고 있을 정도로 사찰의 규모가 상당히 큰 편이었다고 한다.
부처님과 같이 청정하기 그지없는 곳에 불심의 원을 세웠으니, 부처님의 진리를 공부하는데 손색이 없음인데, 천년의 변화무상한 세월은 속세의 욕심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말없이 흘러 속인의 마음만 안타깝게 한다. 속인의 안타까운 마음을 그때 알았는지 용담사 창건 당시 지나던 지사(地師)가 지세를 살피고는 당부의 말을 했다고 하니 이 또한 더욱 안타깝지 않은가.
부처님의 깊은 뜻이 있거니 생각하고 더욱 불심을 깊이 하는데 수행정진 하여 그 세월을 꿋꿋이 버텨옴이 그나마 위안이 된다. 용담사 아래 깊은 골짜기로 계곡물이 흐르고 흘러 만들어 낸 용담폭포가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진한 푸른빛으로 담겨져 있다. 얼마나 맑고 푸르면 이곳에 용이 보금자리로 삼고 살다가 승천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까. 보니 가히 그럴만하여 감탄사가 절로 튀어 나온다. 용담사라는 절 이름도 이 용이 살다가 승천을 했다는 용담소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송암폭포와 만휴정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에 있는 만휴정(晩休亭)도 빼어난 풍경 속에 있다. 만휴정은 인근 묵계서원에 배향된 보백당 김계행(1431~1517)이 만년을 보내려고 지은 정자다. 조선조 선비들이 가장 바람직하게 여긴 삶이 계거(溪居), 즉 계곡에 정자를 짓고 사는 것이었다는데, 이 정자에서 누린 보백당의 만년은 바로 그런 조건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가.
동남향의 정자 앞은 적지 않은 규모의 계곡이다. 정자로 이어진 10여 미터 길이의 좁은 다리 밑으로 흐르는 것은 이른바 곡간수(谷澗水)다. 정자 위쪽의 넓고 평평한 너럭바위를 지나쳐 다리 아래 여울에서 숨결을 가다듬은 물은 이내 20여 미터 높이의 벼랑에서 수직으로 뛰어내리니 이 물줄기가 송암폭포다
폭포를 지나 오른쪽으로 휘어진 길을 오르면 좁고 긴 다리 너머에 만휴정이 차분하게 나그네들을 반긴다. 등 뒤로 낮은 솔숲을 두르고 정자는 마치 조신한 여염집 처녀 같은 단아한 자태로 서 있는 것이다. 왼편 추녀 두어 뼘 아래에 문을 열고 있는 일각문(대문간이 따로 없이 양쪽에 기둥을 하나씩 세워서 문짝을 단 대문)의 모습도 정겹기는 마찬가지다.
만휴정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홑처마 팔작집이다. 앞은 고스란히 개방하여 툇마루로 구성했고 뒤에는 양쪽에 온돌방을 들였다. 누마루에 앉으면 담장 너머로 계곡과 시냇물, 바위와 소나무가 하나로 어우러진 풍경이 무심히 다가온다. 16세기 초에 지어진 이 정자는 여러 차례 수리로 변형되었고 조선 후기의 양식을 보이는 부분도 있다고 한다.
보백당 김계행은 퇴계 이황, 서애 유성룡보다 한 세대 앞선 인물이다. 마흔아홉, 뒤늦게 대과에 급제, 쉰이 넘어서 본격적인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성균관 대사성, 대사간, 이조참의 등을 역임했으나 부조리한 정치현실을 비판하는 상소를 끊임없이 올려 출사와 퇴사를 거듭해야 했다.
보백당을 배향한 묵계서원
계리에 있는 조선시대 서원으로 1980년 6월 17일 경상북도민속자료 제19호로 지정되었다. 묵계서원은 보백당 김계행을 봉향하는 서원으로 1687년에 창건되었으며 김계행은 조선초기 성종 때 대사성을 역임하고 이조판서 양관대제학을 역임 하였다. 서원 옆에는 김계행의 신도비와 비각이 있으며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기와로 된 팔각지붕 건물로 되어 있다.
묵계서원은 마을 가운데 위치하고 있지만 고즈넉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으며 묵계서원 들어가는 입구에서 오래된 소나무의 향기가 솔솔 뿜어져 나와 발걸음도 가볍게 하는 곳이다.
출입문이라 할 수 있는 진덕문에 들어서면 고풍스러운 서원 분위기에 압도되는 느낌이 든다. 진덕문을 지나면 2층 누각 목조건물인 읍청루가 웅장하면서 중후한 멋을 풍기며 버티고 있다. 날렵한 모습으로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으며 나무 기둥 하나하나에 모진 풍파를 이겨낸 흔적이 역력하여 숙연해 진다. 나무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서면 서원 앞을 흐르는 길안천이 시원스럽게 시야에 들어와 마음까지 후련해 진다. 강당인 입교당은 돌을 사각으로 잘 다듬어 쌓아 올린 후 그 위에 한옥의 곡선이 살아 숨쉬는 건축물이 있고 묵계서원 이라는 현판이 걸린 건물에는 조용하면서 편안한 모습으로 방문자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또 서원 밖의 고직사에서는 제향에 필요한 제수준비는 물론 서원의 관리는 맡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데 안으로 들어서면 제기를 비롯한 물품이 보관되어 있다.
서원을 둘러싸고 있는 노송들은 묵계서원을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로 기와지붕을 얹은 돌담길을 따라 산책하듯 서원 주위를 걸으면 머리까지 상쾌해지는 솔향기를 마음껏 마실 수 있어 고택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 출처 2020 시니어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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