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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거 저런거/군대이야기

11공수특전여단 / 63특전대대 버팔로

by 구석구석 2021.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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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공수여단 황금박쥐

■ 11공수특전여단 63특전대대 / 버팔로대대

1977년 7월에 창설되어 화천 오음리에 주둔(황금박쥐)하였으나 702특공여단의 창설로 임무를 넘기고 담양으로 이전한 11공수여단의 4개특전대대 중 하나이며 7지역대(버팔로) 8지역대(상어) 9지역대가 있다.

아시아나항공 733편 추락사고, 세월호 침몰사고등 각종 재난현장에 투입되었으며 2000년에 동티모르에 파병되었고 5.18광주 민주화운동에 계엄군으로 투입되어 11공수여단이 민간인학살이 많았다.

 

63특전대대 버팔로

◁63특전대대 버팔로

ㅇ5.18때 외곽으로 빠지던 11공수여단의 병력을 시위대로 오인하여 매복중이던 전교사의 공격을 받아 63대대원 9명사망하고 33명이 부상당한 사건

5월21일 옛 전남도청 앞 집단 발포 이후 주남마을로 철수해 광주외곽봉쇄 임무를 수행하던 11공수여단에게 5월 24일 새벽 1시 30분 ‘광주 송정리 비행장으로 이동해 전투병과교육사령부(전교사) 예비대로서 의명(依命) 기동타격대 임무를 수행하라’는 지시가 하달됐다. 이날 오후 1시30분 임무교대를 위해 20사단 61연대가 도착하자 11공수여단은 육로를 통해 비행장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30여분 두 부대는 광주~나주간 도로에 들어서며 효덕초등학교 삼거리 부근에 도달했다. 11공수여단은 무장시위대를 발견하고 총격전을 벌여 전재수(당시 10세)군, 방광범(13세)군 등이 총상을 입고 사망했다.

11공수여단은 시위대가 있던 광주 시내를 피해 외곽길로 비행장에 갔다. 선두에 섰던 63대대가 효천역 앞에 도착했을 때 전교사 보병학교 교도대 병력이 63대대 병력을 무장시위대로 오인, 선두 장갑차와 후속 트럭에 90㎜ 무반동총 4발을 명중시키는 등 집중사격을 가했다. 전교사 교도대는 전날 20사단 61연대와 임무를 교대해 막 투입된 참이었다. 이에 63대대도 대응 사격을 했다. 하지만 높은 지리와 은신처를 먼저 점하고 있던 교도대가 우위였다.

사건 현장에 있었던 63대대 지대장(당시 소위)은 “그 때 오인사격이란 사실이 확인돼 사격중지! 사격중지! 라고 수차례 외쳤는데, 부대원들이 넋을 잃고 사격을 멈추지 않았다”면서 “들고 있던 소총 개머리판으로 일일이 대가리를 쳐대니까 서서히 총성이 멈췄다”고 광주일보에 증언했다.

오인사격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지만 악에 바친 11공수여단은 민간인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인근 마을 청년 권근립(33), 김승후(18), 임병철(25)씨와 박연옥(여·50)씨 등이 총격을 받아 사망했고 노득규(33), 김영묵(45), 최철진(37) 등이 총상을 입었다.

/ 2018.7.18 광주일보 (kwangju.co.kr)

 

ㅇ11공수여단 63대대 9지역대의 이경남일병이 5월 19일 광주에 투입되었는데 공수부대원으로는 당시의 학살을 최초로 고백했다. 1999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19주년을 맞아 진압군 측으로서는 처음 수기를 발표했다. ‘5월의 회고-어느 특전병사의 기록’이라는 글이었다.

다음 해 전태일문학상(생활글 기록문 우수상)을 받았다. 두려움과 내부 비난을 무릅쓰고 소속 부대가 저지른 학살극을 뒤늦게 고백한 것이었다. 용기의 밑바탕에는 목회자로서의 양심이 깔려 있었다.

그는 수기 말미에 “아직도 살아서 지난날의 망상을 버리지 못하고 준동하는 전두환씨를 비롯한 5공 신군부 권력자들에게 ‘이 나라에서 당신들이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며 자숙하라’는 충고를 하고 싶었다”라고 썼다.

/시사인 5.18 어느 진압군의 고백

ㅇ당시 광주에서 처음 발포가 이뤄진 시점은 5월 19일. 과거사위에 따르면 광주고와 계림파출소 사이에서 시위진압에 나선 11공수여단 63대대 작전장교 차모 대위는 시위대의 공격을 받자 M16소총을 발사했고, 당시 조선대부속고등학교 3학년이던 김영찬 군이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11여단이 서암산에서 미국 17특전단과 함께 국지도발 대비훈련
특전에비군훈련 / 담양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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