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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경상북도

영천 성곡리 오천정씨烏川鄭氏 강호정 하천재 오회공종택

by 구석구석 2020.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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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지 않는 이 전통 고가촌에는 강호정, 하천재와 추원당, 오회공종택, 오회당, 사의당, 삼휴정 등의 집과 정자들이 있다. 이들은 모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영천댐 수몰지에 있었던 오천정씨 가문의 조선 시대의 문화유산들이다.

 

세장지입구

비에는 가문의 역사가 새겨져 있는데 한글이라 기쁘다. 비문에 따르면 정차근이 이곳에 들어온 이후 주자의 서재인 자양서실(紫陽書室)의 이름을 따 학당을 자양이라 불렀고 그것이 현재 자양면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정몽주를 모신 임고서원을 창건하는데 주축이 된 이도 바로 그였다. 

호수 정세아가 임란이후 여생을 보낸 경북유형문화재 71호 강호정

비석 뒤편에 정세아의 정자인 강호정(江湖亭)이 있다. 정세아는 임진왜란 때 영천성 수복과 경주성 전투에 참여해 많은 공을 세운 의병장이다. 전쟁 후 나라에서 수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나가지 않다가 오리 이원익의 청을 이기지 못하고 황산도찰방을 잠시 지냈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강호정사를 짓고 가르치고 공부하다 여생을 마쳤다. 이후 그는 영조 때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정조 때는 강의라는 시호를 받았다. 정자에서 영천호가 내려다보인다. 

오천정씨 문중 묘재인 경북유형문화재 73호 하천재

 

강호정만이 영천호를 향해 남향으로 서 있다. 

나머지는 모두 계곡을 따라 동향으로 자리한다. 첫 번째는 하천재(夏泉齋) 부 비각이다. 하천재는 묘재이며 비각에는 정세아의 신도비가 모셔져 있다. 비각으로 오르는 계단 아래 향나무가 근사하다. 

하천재 뒤에 건립된 추원당. 왼쪽 계단을 오르면 정세아의 신도비가 있다.

두 번째는 오회공종택(五懷公宗宅)이다. 정세아의 넷째아들 정수번이 그의 셋째아들 삼휴 정호신의 분가주택으로 광해군 때 지은 것이다. 길게 뻗은 담장 위로 '삼휴고택'이라 적힌 현판이 보인다. 

오회공종택

종택과 이어지는 담장 안에는 오회당(五懷堂)이 자리한다. 정호신의 손자인 정석현이 만년에 이 집을 짓고 다섯 형제들과 모여 지내며 오회당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다섯을 품은 집'이 아주 소박하다.

경북유형문화재72호 정면 5칸 측면 1칸의 오회공종택

직선으로 오르던 길이 굽어지며 담장 없이 계곡으로 화계를 낸 건물들이 있는데 사의당(四宜堂)이다.

사의당

영조 때의 정중호, 중기, 중범, 중락 형제가 우의를 다지고 인재를 기르기 위해 지은 집이라 한다. 사랑채가 사의당, 안채는 수의헌(守宜軒), 그리고 고방채와 문간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길 끝에는 정호신의 정자인 삼휴정(三休亭)이 자리한다.   

그는 할아버지 정세아가 살았던 곳에 이 정자를 짓고 풍경을 바라보며 '삼휴'라는 시를 지었다고 한다.

'좋은 봄날 꽃을 즐기다가 꽃이 지면 쉬고

맑게 갠 밤 달을 마주 보다 달이 지면 쉬고

한가한 달에 술을 얻어 마시다가 술이 떨어지면 쉬노라.'  

 

길은 삼휴정에서 끝나지만 계곡은 더욱 멀리 나아간다. 그리고 그 계곡의 사면에도 꼿꼿하거나 휘었거나 기울어진 소나무들이 도열해 있다. 

 

보현산 줄기가 남쪽으로 뻗어오다가 기룡산을 솟구쳐 놓고 다시 남쪽으로 달려 고깔산을 세웠다가 단박에 누운 광활한 땅, 성곡리 하천(夏泉). 이곳은 설학대사라는 노승이 정차근의 아들인 효자 정윤량(鄭允良)에게 점지해 주었다는 명당으로 오천정씨 문중에서 대대로 묘소를 쓰는 세장지(世葬地)다. 정차근과 정세아의 묘 등 80여 기의 묘소가 모여 있는 이곳을 하천묘역(夏泉墓域)이라고 하며 후손들로 이루어진 하천종약회(夏泉宗約會)가 이 일대를 관리한다.

 

가장 위에 정세아의 묘가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정세아의 장자인 백암(栢巖) 정의번(鄭宜藩)의 묘가 있다. 의번은 임진왜란 경주성 전투에 아버지와 함께 참전했다. 적에게 포위된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의번은 세 번 적진으로 향했다. 종 억수(億壽)가 그와 함께였다. 마지막에 그는 억수에게 말했다. 너는 가거라. 그러자 억수는 울며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주인과 노비는 마찬가지'라 하였다. 의번과 억수는 경주성에서 전사했다. 시신은 찾지 못했다. 그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이들의 시와 그의 의관을 모아 장사를 지냈으니 그의 무덤에는 시총(詩塚)이라 새겨져 있다. 그 옆에는 시신 없는 억수의 무덤도 함께 있다. 

자료 : 영남일보 2020.6.5 유혜숙여행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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