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천 항일운동테마거리
1920년 9월 부산 출신의 박재혁 의사는 상하이에서 나가사키를 거쳐 부산으로 잠입했다.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를 암살하고 붙잡혀 순국한 후 그의 편지 한 통이 뒤늦게 의열단 단장 김원봉에게 전달된다. '어제 나가사키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형편이 뜻대로 되어가니 이 모든 것이 그대가 염려해 준 덕분인 듯합니다. (중략) 그대의 얼굴을 다시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영화 '암살'의 도입부다. 최동훈 감독은 "많은 사람이 운명처럼 그 시대에 맞서 싸웠고 버텼다. 어떤 이는 이름을 남겼지만 어떤 이는 이름조차 남기지 못했고 하물며 삶의 이야기도 남기지 않았다"며 "그 남겨지지 않은 이야기로부터 이 영화는 출발한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1920년 12월 27일은 밀양 출신의 최수봉 의사가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터뜨린 날이다. 차가운 겨울 공기를 뚫고 폭음을 울리며 터진 폭탄은 비록 일제의 목숨을 빼앗진 못했지만 순사부장에게 타박상을 입혔고 박재혁 의사의 의거 이후 위축된 암살 활동에 기름을 붓는 역할을 했다. 이를 기념해 국가보훈처는 올해 12월의 역사 인물로 최수봉 의사를 선정했다. 막 겨울로 접어들어 추위에 움츠러드는 때 최 의사의 거사 즈음에 맞춰 가까운 밀양을 찾아 잠시 역사 속으로 한발 디뎌보는 건 어떨까.
최 의사는 1894년 경남 밀양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약산 김원봉 단장과 밀양공립보통학교(밀양공보)를 함께 다녔다. 김원봉 단장은 회고록에서 "밀양공보 일본인 교사가 조선사를 가르치던 중 단군을 자기네 대화족의 시조로 추앙되는 스사노 오노미코토(소잔명존)의 아우라고 가르쳤지만 구두시험 때 최수봉은 '소잔명존이는 우리 단군의 중현손(9대손에 해당)이오'라고 서슴없이 답해 퇴학당할 정도로 곧은 인물이었다"고 말했다. 이후 최수봉 의사는 동화학교에 편입해 김대지 등 독립운동가의 가르침을 받으며 조국애와 항일의식을 키웠고 범어사에서 운영하던 부산 명정학교와 기독교 계통의 평양 숭실학교를 다니기도 했다. 1916년 평안도에서 광부와 우편배달부 생활을 한 후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인 봉천(오늘날 선양)과 안동(오늘날 단둥)을 왕래하며 동지를 규합했다.
월요일이던 의거일 아침 그는 경찰서장이 연말연시 특별경계를 당부하는 훈시를 하던 틈을 타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선생에 대한 재판은 상고심까지 진행됐으나 일제는 의거의 파문을 최소화하기 위해 확정판결 한 달 보름 만에 대구감옥에서 사형을 집행했다. 선생의 의거는 항일 민심과 독립운동 진영을 고무시켜 이후 김익상의 조선총독부 투탄으로 이어졌다. 정부는 선생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최수봉 선생의 사진은 감옥에서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1장밖에 남지 않아 더욱 안타까움을 전한다.
최 의사를 포함해 김 단장과 윤세주 열사 등 의열단 단원 11명을 배출한 밀양의 저력은 어디에 있을까. 밀양에 조성된 항일운동 테마거리, 밀양박물관과 이들 인물의 생가터와 묘 등을 통해 그 시대를 만나볼 수 있다. 밀양시가 생태하천인 해천을 따라 조성한 '항일운동 테마거리'에도 최수봉 의사가 등장한다. 밀양 독립운동가 명패가 매달려 있는 곳에서는 최 의사를 포함한 70명의 명패가 빼곡하게 매달려 있고 그와 함께 활동했던 김 단장과 박차정 여사, 윤세주 열사 등의 활동을 담은 3·13 만세운동 벽화, 태극기 변천사, 항일선전구호 벽화 등이 마련됐다. 테마거리 인근에는 김 단장, 윤세주 열사, 황상규 선생, 전홍표 선생, 이장수 선생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생가터가 자리 잡고 있어 왜 밀양인가 하는 물음에 답해주고 있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조선의용대 항일선전구호가 눈길을 끈다. '왜놈의 상관 놈들을 쏴 죽이고 총을 메고 조선의용군을 찾아오시요'. 테마거리에는 약산 김원봉의 생가터와 윤세주의 생가터가 고이 남겨져 있다. 현재 다른 집이 들어선 독립운동가 이장수 생가터는 윤세주 생가터 맞은편에 있다. 태극기가 그려진 벽면 곳곳에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에 대한 고마움이 새겨져 있다. '크레파스 일동'이란 이름으로 적은 글에는 '저희에게 미래를 주신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써놨다.
밀양의 만세 운동 벽화로 시작하는 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는 태극기의 종류와 변천사를 거쳐 조선의용대 성립 기념사진으로 이어진다. 조선의용대는 김원봉과 윤세주가 주축이 되어 만든 독립운동 단체다. 요인 암살과 기관 파괴 중심이던 의열단 투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일본 제국주의 군대와 맞설 무장 부대를 조직한 것이다. 이후 조선의용대는 한국광복군에 합류했고, 조선의용대장 김원봉은 한국광복군 부사령관이 됐다.
의열기념관에서 500m쯤 떨어진 밀양 관아지는 1919년 3월 13일, 밀양 최초로 만세 운동이 일어난 곳이다. 고종의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경성(서울)으로 간 윤세주는 탑골공원에서 벌어진 3·1운동에 참여하고 돌아와, 19세에 밀양 만세 운동을 주도했다. 여기에는 김원봉과 윤세주의 스승이자 동화학교 교장을 지낸 전홍표의 도움이 컸다. 함께 경성에 간 윤치형 등과 거사를 준비한 윤세주는 밀양 장날인 3월 13일에 태극기 수백 장을 나눠주며 만세 운동을 일으켰다. 당시 이곳에는 밀양군청 건물이 있었고, 바로 앞이 밀양시장이라 많은 사람이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 현재의 관아 건물은 모두 최근에 복원한 것이다. 만세 운동을 주도한 윤세주와 윤치형은 일제의 검거를 피해 만주로 망명, 의열단원이 되어 평생 항일 독립운동에 매진한다.
밀양시립박물관으로 이동한다. 밀양박물관 1층 한쪽 독립운동기념관 입구에는 최 의사가 올해 12월의 역사 인물로 선정된 내용을 붙여놓았다. 기념관 내부에는 최 의사가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지던 당시 상황을 재현한 모형이 있는데 간담이 서늘해졌을 일제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밀양의 독립운동 역사를 자세히 보고 싶다면 밀양독립운동기념관으로 가자. 건물 마당에는 김원봉과 윤세주를 포함한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 36명의 흉상이 관람객을 맞는다. 안으로 들어가면 밀양 만세 운동의 풍경이 생생한 디오라마로 펼쳐진다. 밀양에서는 3·13 만세 운동을 필두로 8차례 만세 시위가 있었다. 여기에는 계급과 이념, 종교를 초월해 수많은 사람이 참여했다.
이어지는 전시실에는 의열단에서 시작한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의 활동이 자세히 소개된다. 김원봉이 세운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졸업생 중에는 시인 이육사의 이름도 보인다. 조선의용대와 한국광복군으로 이어지는 김원봉의 활동, 동맹휴업과 노동쟁의, 사회운동으로 일제에 저항한 밀양 사람들의 투쟁도 살펴볼 수 있다.
밀양독립운동기념관과 나란히 자리한 밀양시립박물관은 독립운동의 요람이 되기 전, 선비의 고장 밀양의 역사를 보여준다. 아이들과 함께라면 공룡과 익룡 등 다양한 고생물 화석이 있는 화석전시실도 빼놓을 수 없다. 밀양시립박물관 바로 옆은 산책로와 놀이 시설을 갖춘 밀양아리랑대공원이다. 공원 안쪽에 한국전쟁 전사자를 기리는 충혼탑이 보인다. 일제강점기 의열단에서 한국전쟁 전사자까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이 우리 역사에 면면히 흐른다.
최 의사의 추모 기적비와 생가터를 찾아 그의 고향인 상남면으로 간다. 상남면에는 최수봉 의사 추모비가 들어서 있다. 최수봉 의사 기념사업회가 2002년 건립했다. 추모비에는 최 의사의 업적을 설명하고 이 마을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옷깃을 여미고 예의를 차리도록 권하고 있다. 기적비 위에는 용 두 마리가 여의주를 물고 있다. 10여 년이 지났지만 관리는 잘 되고 있다. 하지만 주택과 창고가 들어선 최 의사의 생가터는 아무런 표식이 없어 찾기가 어렵다.
밀양시내에서 멀지 않은 부북면에는 의열단 단원이었던 박차정 여사의 묘도 있다. 박 여사는 의열단 김원봉 단장의 부인이다. 동래 일신여학교 출신인 그는 1930년 근우회 사건을 배후에서 지도하다 옥고를 치르기도 했고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장 등으로 활동했다. 1939년 2월 장시성 쿤륜산 전투 중에 부상을 입고 1944년 5월 27일 충칭에서 병사한 이후 남편의 고향인 밀양에 모셔졌다. 우령산 기슭에 있는 묘에 대해 이정표도 마련돼 있지만 정작 여러 묘 가운데 어느 것인지에 대한 안내판이 없어 찾기가 힘들다. 묘 앞에 세워져 있는 국기가 유일한 힌트다. 묘는 흙으로 된 봉분으로 비가 조금만 와도 흙이 씻겨 내려갈 판이다. 육안으로 보이는 여러 개의 구멍도 생겼다. 역사를 지키기 위한 지자체의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 김종직 선생의 묘 바로 옆 호랑이 묘, 무슨 사연 있길래…
박차정 여사 묘와 가까운 종남산 북쪽 자락에는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태어나고 죽은 생가인 추원재(경남문화재 제159호)가 있다. 김종직 선생의 부친인 강호산인 김숙자가 처음 거처를 정한 곳이다. 김종직 선생은 1453년(단종 1년)에 진사시험, 1459년 문과에 급제해 함양군수, 선산부사를 지내면서 많은 후학을 양성했다. 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은퇴 후 고향으로 내려와 후학을 지도했으며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시호는 문충공이다. 저서로는 점필재집, 청구풍아, 당후일기 등이 있으며 편저로 일선지, 이준록, 동국여지승람 등이 전해지고 있으나 많은 저술이 무오사화 때 소실됐다. 이후 1810년에 사림파 후손들이 건물을 개조하고 중건해 현재까지 전해진다. 재사를 추원재, 당호를 전심당으로 정한 것도 이때다. 재실은 6칸의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으로 이 지방의 일반적인 주택 살림채의 규모를 갖추고 있다.
이와 함께 추원재 뒷산에는 김종직 선생의 묘가 들어서 있다. 동산을 하나 옮겨놓은 듯 화려하다. 인근에 김종직 선생의 묘를 지킨 호랑이의 무덤도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전설이 전해진다. 김종직 선생이 세상을 떠나 무오사화 때 지금의 장소로 이장했는데 인근에 사는 큰 호랑이가 날마다 무덤 옆에서 슬피 울다가 어느 날 선생의 묘 옆에 죽어있는 것을 사람들이 발견해 양지바른 곳에 장사를 지내줬다고 한다. 호랑이 무덤을 만들어준 후에는 마을에 도둑이 없어졌다고 한다.
[자료 국제신문 유정환기자]
밀양대공원의 구절초 / 밀양시 교동 476
밀양대공원은 밀양의 관문 역할을 하는 밀양대로변에 위치하고 있어 접근성이 좋다. 밀양대공원에는 밀양시립박물관, 독립기념관, 현충탑 등 밀양지역 주요 상징물이 들어서 있으며, 공원 내 산책로가 정비되어 밀양시의 대표적인 공원으로 손꼽힌다.
밀양대공원은 2017년 밀양아리랑대공원으로 명칭을 변경했으며 출향의 숲, 탄생의 숲, 시민의 숲 등이 있다.
[2020.10 시니어매일 박미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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