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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전라북도

익산 함라마을 삼부잣집 김안균 조해영 이배원 원불교함라교당

by 구석구석 2016.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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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열리 함라마을 돌담길

 

‘함라’라는 명칭은 이 곳의 주산인 함라산에서 취한 것으로 전해지며 홍길동전의 작자로 유명한 허균이 1611년(광해군3)에 함열로 귀양와 유배되어 있는 동안 800년 동안의 시가를 96권으로 묶은 성수시화등 여러 작품을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을 뒤의 함라산을 주산으로 하여 그 옆으로 부를 가져온다는 길상의 의미로 알려진 소가 누워있는 형세에서 따온 와우산이 마을 전체를 싸고 있고 앞으로는 넓은 들이 펼쳐져 있어 일찍이 부농촌으로 자리잡았다. 마을의 건축물은 새마을운동 당시 상당 부분이 신축 또는 개축된 것으로 시도민속자료 제 23호 ‘김안균가옥’ 등의 지정문화재가 마을의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다.

 

이 마을의 담장은 토석담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이 외에도 토담, 돌담, 전돌을 사용한 담 등 다양한 형태의 담이 혼재되어 있다.

 

평쌓기 방식으로 축조되었으며 담의 지붕은 한식 기와가 아닌 시멘트 기와를 써서 처리되었다. 담장의 높이는 일반 농가의 담장이라는 점과 주택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점에 비하여 높은 점이 한 특징이다. 또한 차순덕 가옥의 담장은 거푸집을 담장의 양편에 대고 황토흙과 짚을 혼합하여 축조한 보기드문 전통적인 방식으로 축조되어 있어 눈에 띈다.

 

전통가옥들과 마을 한편에 자리한 문화재자료 제85호 ‘함열향교대성전’은 전통마을로서의 품위를 더해주고 있으며 마을의 역사와 함께 해 온 묵은 돌담길은 보존상태 또한 양호하다.

 

* 담장형태 - 토담길이 약 1,500m의 토석담, 돌담(전형적인 토석담, 일부 전돌담, 판축담)
* 마을형성 - 조선시대 이전 형성, 현 178세대 (534명) 거주
* 문화재 - 함열향교 대성전(문화재자료 85호) 등 4건 

 

함열리 579번지  함열향교 지방문화재자료 제85호 / 1984년 4월 1일 지정  

 

함라산을 등지고 동남향으로 위치하며, 위쪽으로는 대성전이 있고 동쪽에는 영소전이 세워져 있으며, 서쪽에는 난심제와 고팻집으로 된 교직사가 있다. 함열향교는 조선 세종19년(1437)에 처음 지었으며 임진왜란으로 완전히 불타 없어진 것을 영조(재위 1724∼1776) 때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성전의 규모는 앞면 3칸, 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안쪽에는 공자를 비롯한 그 제자와 우리나라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 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자료출처 : 한국관광공사]

 

함라꽃누리체험


구절초체험(비누, 향기주머니, 베게, 차)
들꽃체험(들꽃심기, 화분만들기, 꽃차 마시기, 꽃누름이)
꽃음식 체험 (꽃주먹밥, 허브주먹밥, 진달래김밥, 꽃비빔밥, 진달래초밥, 국화밥, 국화송편 등)

 

 

 함라 삼부잣집고택 (古宅)

 

고택은 말 그대로 오랜시간이 흐르며 인간의 보금자리 역할을 해온 옛날의 집을 말한다. 고즈넉한 한옥에 향긋한 나무냄새에 취해 한껏 자연을 느낄 수 있는 한옥. 한옥으로 지어진 고택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아 맑은 공기를 가슴에 품는다면 이보다 더좋은 행복감이 또 있을까?

 

익산의 함라면소재지 마을에는 3명의 만석꾼 부자가 생활하면서 가꾸어온 한옥 고택이 그 위용을 자랑하기 위해 아직까지 고스란히 남아있으며 역사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익산시 함라면 함라마을에 위치한 대표적인 고택은 김안균 가옥과 조해영 가옥, 이배원 가옥이 그것이다.

 

익산시 함라면 수동길 20번지 김안균가옥 전북민속문화재제23호(1986.9.9)

 

삼부자집의 가옥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김안균가옥은 사생활보호를 위해 개방하지 않고 있으나 면사무소를 통하여 내부를 둘러 볼 수는 있다. 전북지역에서는 가장 크다고 소문나있으며 안채와 사랑채는 1922년에, 동·서 행랑채는 1930년대에 건립된 걸로 전해진다.

 

고가로 들어가는  흙담장길. 가죽나무가 매우크다

일제강점기 시절의 전통적인 상류가옥의 변모를 보여주고 조선 말기 양반가옥 형식을 기본으로 구조와 의장에 일본식 수법이 가미된 특징이 있다. 현대식처럼 거실과 침실을 구별했고 사랑채 가장 깊은 곳에 별도의 침실을 마련했다. 사랑채와 안채 앞뒤로 복도를 두르고 유리문을 달아 채광을 조절한 게 눈에 띈다.

 

유리문이 달린 사랑채와 청풍루

사랑채는 팔작지붕으로 대청은 누마루 형식으로 정교한 아자(亞字) 난간을 둘렀고 함석으로 빗물받이를 해 놓았다.

 

안채는 비교적 전통적 기법을 유지하고 있다. 1922년에 지어진 만큼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상류가옥이 이 무렵에 어떻게 변천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중요한 문화재이다.

 

안채

 

1918년 건축된 조해영가옥 전북문하재자료제121호(1986.9.8)

 

 

대문만 12개여서 열대문집으로 알려진 조해영 가옥은 여러 채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안채와 본채, 별채만 남아있다. 안채는 상량문에 ‘대정(大正)7년’이라 명기되어 있어 1918년에 건축된 것으로 보여지고 별채는 안채보다 조금 늦은 1922년이나 그보다 조금 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가옥은 정남향에 가까운 남남서향이며 안채와 별채는 모두 남북으로 길게 서로 평행하게 배치되어 있다. 안채는 남쪽으로, 별채는 서쪽으로 향해 자리 잡고 있다. 대문은 집의 구조상 남쪽에 있으나 풍수지리적으로 보면 지형에 맞지 않는다고 한다.

 

대문채 안쪽으로는 집안 여성을 위해 안채를 가리는 헛담은 아름다운 돌담길 꽃담으로 쌓았다.

 

꽃담 바깥 담장은 붉은 벽돌로 쌓고 그 중앙에 화려한 그림을 그려 넣었다. 네모나게 흰 회칠을 하고 돋아나게 그린 그림 속으로 학, 사슴, 구름, 연꽃과 산삼 등 십장생 벽돌꽃담이 있다. 경복궁 대조전 뒤뜰의 굴뚝꽃담을 모방해서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함라면 턴남1길 이배원가옥 민속문화재제37호(2012.11.2) 

 

삼부자집 가운데 가장 먼저인 1917년에 지어진 이배원가옥은 김안균가옥과 조해영가옥의 모델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평면의 구성에서도 서로 연관성을 찾아 볼 수 있다.

 

건립 당시에는 안채, 사랑채, 행랑채, 문간채, 곳간채 등을 비롯해 이 집안의 부를 이뤘던 여러 채가 있었으나 현재는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주위의 토석 담장만이 남아 있다.

 

사랑채는 내부가 개조되어 1959년부터 원불교 함라교당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안채는 입식부엌으로 개조하여 활용하는 안방 뒤쪽 공간을 제외하고 비교적 그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이배원가옥은 3구역이 담장으로 나뉘어 있는데 이배원의 손자인 이서영씨가 사는 별채, 처음부터 이곳에 살고 있는 동생이 사는 안채(슬라브로개조됨), 1959년부터 원불교 함라교당으로 사용되고 있는 사랑채.

 

원불교 함라교당. 정원에서 각종행사가 개최되고 있다.

 

이배원가옥은 오래된 전통 가옥으로 인근 조해영가옥, 김안균가옥과 토석 담장, 한옥 기와지붕 등이 어우러져 전통적 경관을 유지하고 있다. 위 세 가옥은 특이하게도 한 마을에 같이 함께한 만석꾼들이다. 이들은 또한 자신들의 이익에 치중하지 않고 어려운 주민들을 돕고 마을의 번영에 앞장,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것으로 유명하다.

 

[자료 : 전라일보/익산 김종순기자 20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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