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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광주광역시

광주 서구-치평동 5.18자유공원 5.18민주항쟁

by 구석구석 2015.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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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정권찬탈을 기도하던 일부 정치 강경진압에 맞서 우리나라 민주주의르르 지키기 위해 싸우신 분들이 구금 되어 군사재판을 받았던 곳이다. 원래 위치에서 1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원형으로 복원 재현하였다. 투쟁의 자취요, 인권 평화 화합의 상징으로 기억될 역사의 현장이다.

 

 

그분들의 자유 민주 정의의 정신을 기리고 소중한 역사교육의현장으로 보존하기 위해 1988년 3월부터 시작한 5.18자유공원 조성공사는 온 국민의 민주화 염원과 정성을 담아 199년 4월에 완공되었다.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부산과마산의 시민, 학생들은 박정희정권에 대항한 반독재투쟁을 벌였다. 김영삼총재의 의원직 제명안이 국회에서 변칙 통과된 것에 자극을 받은 부산대생이 교내시위에 이어 거리로 나와 부산시청앞에서 시민들과 합세하여 유신철폐 독재타도 야당탄압중지 등을 외치며 격력한 시위를 벌였다.

 

경찰력이 무너지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투입, 무력진압했으나 시위는 마산으로 번져갔다. 마산대생와 경남대생을 선두로 시위에 나선 시민들은 경찰과 맞서 격력하게 충돌하였다. 19일 저녁에는 수출자유지역의 노동자까지 합세, 시위가 기층민으로 확대될 조짐을 보이자 정부는 20일을 기해 위수령을 선포하고 무력진압한 결과 이틀간의 마산시위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부마항쟁의 불씨는 10.26사태를 촉발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5.18당시 형무소

 

 

5·18 자유공원은 5·18 광주항쟁에 관한 자료를 보관하고 홍보하는 곳이다. 이곳은 다양한 자료를 보관하는 자유관과 영창 및 각종 기념비로 구성되어져 있다. 5.18 당시 군사재판 현장이던 상무대 법정과 영창을 원래의 위치에서 100m정도 떨어진 5.18 자유공원으로 옮겨와 원형을 복원, 재현하였다.

 

 

5·18 광주항쟁 당시의 자료와 사진들을 보관한 전시실과 80년 당시 5·18군사재판을 위해 만들었던 법정 및 한눈에 감시할 수 있도록 부채꼴 모양을 한 영창을 원형대로 복원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영창체험은 5·18 기간에만 가능하다.

 

 

상무대헌병대영창

 

신군부에 저항하여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끌려와 구금되었던 곳으로 6개의 방이부채꼴로 되어ㅓ 있어 투옥된 사람들의 행동을 한 눈에 감시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투옥된 사람들은 하루 16시간동안 바른자세로 앉아 있어야 했고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노소를 불문하고 몽둥이로 두들려 맞았다.

 

 

전투교육사령부 계엄보통군법회의. 이법정은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을 재판하기 위해 1980.8월에 급히 만들어졌다.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421명에 대한 약시 재판이 진행된 곳으로 판사와 검사 모두 군인이었기에 공정한 재판이 이뤄질 것이라고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 군사재판부는 검사의 기소문 낭독과 짜여진 각본에 따라 판사는 구속자들에게 사형, 무기징역 등 실형을 선고했다. 구속자들은 부당한 군사재판에 대한 항의 표시로 애국가를 소리 높여 부르면서 저항했다.

 

한방에 많게는 150명이나 수감되어 있어서 잠도 누워잘 수도 없었고, 찜통더위 속에 피부병이 창궐해 살이 헤지는 등 갖은 고생을 하였다. 식사 또한 1인용 식기에 두사람이 먹게 했으며 밥도 3숟가락 밖에 주지 않아 굶주림의고통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잡혀온 시민들은 헌병들의 무참한 폭력에 굴종을 강요받았지만 진실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믿음으로 굳게 뭉쳐 꿋꿋이 극복해 나갔다.

 

 

감시 헌병들은 끌려온 시민들이 조금이라도 움직이거나 지시에 불응하면 쇠창살에 매달아 놓고 곤봉과 몽둥이로 매질을 하였다. 매질에는 노소를 가리지 않았으며 거꾸로 매달아놓기도 하는 등 인가나으로서는 할 수 없는 무참한 폭력을 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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