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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서울 한강

노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태릉 문정왕후 조선왕릉

by 구석구석 2015.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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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원구 화랑로 681  사적제201호 태릉 02.972.0370

 

조선왕릉전시관에 게시된 태릉사진

 

태릉은 11대 임금 중종의 제 2 계비인 문정왕후 윤씨의 능으로, 능침은 단릉 형식이다. 상설제도는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다. 봉분 아래에는 구름과 십이지신을 의미하는 방위신이 새겨진 병풍석을 둘렀으며, 그 주위를 난간석으로 다시 보호하였다. 병풍석 위의 만석(滿石) 중앙에는 십이간지를 문자로 새겨놓았다. 원래 십이간지가 문자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병풍석을 없애고 신상을 대체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등장한 것인데, 여기에서는 신상과 문자가 함께 새겨져 있어 주목된다.

문무석인은 목이 짧고 얼굴이 상대적으로 매우 큰 형태이다. 문석인은 높이가 260cm로, 관복에 과거 급제자가 홍패를 받을 때 착용하는 복두(幞頭)를 쓴 공복차림을 하고 있다. 두 손으로는 홀(笏)을 공손히 맞잡고 있는데, 왼편의 문석인의 경우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고 있는 반면 오른편의 문석인은 그 반대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좌우 문석인의 홀을 잡는 방법은 동일하나 이곳 태릉과 창릉(昌陵)의 경우만이 예외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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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석인은 문석인과 비슷한 크기이며, 갑옷을 입고 머리에는 투구를 쓴 위용 넘치는 무장(武將)의 모습이다. 문무석인을 통틀어 얼굴과 몸통의 비례가 1대 4 정도로 머리 부분이 거대하며, 안면 부분을 제외하고는 입체감이 결여되어 사각 기둥과 같은 형태이다.

 

한편 태릉에서는 비교적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한 금천교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태릉은 왕이 아닌 왕비의 단릉(單陵)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웅장한 느낌을 준다. 이는 조성 당시 문정왕후의 세력이 어떠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1565년(명종 20) 4월 7일 문정왕후가 창덕궁 소덕당에서 65세로 승하하자 4월 12일 시호와 존호를 올리고 능호를 신정릉이라고 했다가 6월 4일 태릉으로 고쳤다. 7월 15일 현재의 위치에 예장했다

문정왕후는 사후에 중종 곁에 묻히는 것이 소원이었으므로 자신의 능과 함께 쓸 요량으로 봉은사 주지 보우와 상의하여 지금의 서삼릉에서 장경왕후릉 옆에 있던 중종 왕릉을 선릉 부근으로 천장하였다. 그러나 새로 옮긴 중종의 능은 지대가 낮아 홍수 피해가 자주 일어났으므로, 문정왕후는 그 자리에 함께 묻히지 못하고 현재의 위치에 예장되었다. 결국 중종과 함께 묻히고자 했던 소원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능 주변에 향나무가 있는데 이는 향나무의 향이 신을 부른다는 믿음이 있다.

문정왕후는 수렴청정을 물린 이후에도 명종의 뒤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조선의 측천무후, 철의 여인 등 현세에 와서 수많은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정계와 학계에서는 위 사신의 기록과 같이 문정왕후가 여인으로서 이렇게 조정을 쥐락펴락하며 권력을 휘두른 것에 대해 매우 불편한 심사를 드러냈다. 그들의 불만의 일부는 숭유억불의 시대에 그녀가 펼친 불교중흥정책을 향하고 있기도 하다.

문정왕후는 독실한 불교신자로 도첩제를 실시하여 승려를 뽑고 전국 300여 개의 절을 공인하는 등 당시의 유교지향정책을 무시하고 불교 중흥을 도모하였다. 양주 회암사에 있던 승려 보우를 맞아들여 봉은사(奉恩寺) 주지로 임명하고 훗날 중종과 함께 묻힐 요량으로 봉은사 근처(정릉)에 중종의 능을 천장하기도 하였다. 폐지되었던 승과를 부활시켰으며, 이러한 노력으로 불교 교단은 활기를 띠고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유생들은 문정왕후의 불교 중흥 노력에 심한 반발을 시작했다. 각지에서 보우를 타도하라는 상소와 종단 및 승과 폐지의 상소가 빗발쳤다. 요승 보우를 죽여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다 못해 성균관 유생들이 성균관을 비우는 집단 시위를 하기도 했다. 이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문정왕후는 불교 중흥 정책을 그만두지 않았으며, 그녀의 지원을 받은 보우는 도대선사가 되었다.

1565년(명종 20) 문정왕후가 승하하자, 성난 유생들은 회암사로 몰려가 불상의 목을 자르고 절을 불질러 버렸다. 명종 역시 문정왕후의 불교를 중흥하라는 유언을 무시하고 깊은 산 절로 도망친 보우를 체포하였다. 전국에서 보우를 처형하라는 여론이 빗발치기 시작하였고, 율곡 이이 등이 이를 만류하였으나, 명종은 보우를 제주도로 유배 보냈다. 보우는 이곳에서 험악한 여론을 살피던 제주목사 변협에 의해 결국 살해당했다.

태릉의 정자각은 한국 전쟁 시 파손되어 석축과 초석만 남아 전하고 있던 것을 1994년에 복원한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전(正殿)과 그 앞의 배전(拜殿)으로 이루어져 있다.

 

조선 13대 왕인 명종의 재위 시, 스스로를 조선의 여주(女主)로 칭할 만큼 대단한 권력을 행사했던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에 의해 봉은사는 더욱 번창하기 시작하였다. 문정왕후는 조선왕실의 숭유억불 정책을 따르지 않고, 불교의 중흥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 과정에서 승려 보우(普愚)를 만나 봉은사의 주지로 임명하고, 봉은사를 조선 불교 중흥의 장으로 삼았다. 폐지되었던 승과시(僧科試 : 승려들에게 실시하는 과거시험)가 부활하여 이곳 봉은사에서 치러졌으며,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바로 이곳에서 등과하였다.

봉은사를 중심으로 한 문정왕후와 보우의 불교 중흥책에는 조정과 유생의 반발이 컸다. 문정왕후가 승하하자 유생들의 빗발치는 항의에 의해 봉은사 주지인 보우는 제주도로 유배당하여 그곳에서 목숨을 잃었고, 문정왕후의 불교를 중흥하라는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다. 봉은사는 병자호란 때 불탔으나 숙종 때에 중건하고 1825년(순조 25)에 다시 중수하여 여전히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 자료글 : 문화재청 태강릉이야기에서 가져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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