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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안보/해외 파병

이탈리아-바티칸 근위대

by 구석구석 2014.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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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황청 근위대(Pontificia Cohors Helvetica)

일명 스위스 근위대(Guardia Svizzera Pontificia)라고도 한다.

 

 

산악지형이라는 험준한 환경에서 자라온 스위스 청년들은 별다른 훈련 없이도 강한 체력과 정신력을 갖춘 훌륭한 전사들이었고, 중세 스위스의 역사 자체가 합스부르크 왕가로부터의 끊임없는 침략의 역사와 다름없었기에 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전투에 너무도 익숙할 수밖에 없었다.

 

스위스 각 지방의 영주들은 필요에 따라 뭉치기도, 흩어지기도 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인접 영주에게 돈을 받고 군대를 빌려주는 거래도 자주 이루어졌는데, 영주가 돈을 받고 빌려주는 군대, 즉 용병들이 워낙에 용맹하다보니 인접한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의 왕조나 지방의 힘 있는 영주들은 스위스 용병 단골고객이 되어 버렸다.



스위스인들은 용병이 되는 것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계약 기간이 끝날 때까지는 클라이언트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과 의리를 보여주었다. 용맹함과 충성심, 그리고 의리는 스위스 용병을 국제 용병시장에서 명품(?)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가 디자인한 것으로 잘못 알려진 사색 근위대복장은 1914년 근위대장 율레스 레폰트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소매가 봉긋한 것은 그 당시의 르네상스 시대에 가장 보편적인 의상이다.

 

 스위스 용병들이 교황을 지키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5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216대 교황인 율리오 2세(Papa Giulio II)는 스위스 연방에 바티칸을 지킬 병력 파견을 요청했고, 이에 스위스 연방이 150여 명의 병력을 파견하면서 스위스 근위대가 탄생했다.

 

 


이들의 진가는 1527년 5월,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가 로마를 침략할 때 발휘되었다. 당시 복잡한 국제 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했던 클레멘스 7세(Papa Clemente VII) 교황은 카를 5세의 대병력 앞에 무너졌고, 로마는 신성로마제국군에 의해 불타올랐다.



카를 5세가 클레멘스 7세를 잡기 위해 병력을 보내자 189명에 불과한 근위대는 수천 명의 병력에 맞서 교황을 탈출시켰다. 교황 근접 경호를 맡았던 40명을 제외한 나머지 149명 가운데 147명이 전사했으며, 나머지 2명은 중상을 입고 포로가 됐다. 신성로마제국군의 항복 권유와 대병력도 이들의 의지를 꺾지 못했고, 이러한 충성심과 의리는 5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스위스 근위대가 교황을 지키는 교회의 수호자 역할을 하게 만들었던 밑바탕이 되었다.

 

근위대 신병들은 매년 5월 6일에 신성로마제국이 교황령의 수도 로마를 침략한 1527년 전사한 147명의 스위스 근위대를 추모하며  산 다마소(San Damaso) 안마당에서 충성서약을 한다. '성삼위일체'를 뜻하는 세손가락을 하늘 위로 치켜들고 서약을 한다.

 

http://blog.naver.com/ilyang225

 

근위대 입단선서

나는 교황 성하와 장차 그분을 합법적으로 계승할 후임자들을 정직하고 명예롭게 섬길 것이며, 이를 위해서 온몸을 바쳐 나 자신을 바칠 것이며, 필요하다면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가되어 있다는 것을 엄숙하게 맹세한다. 나는 이와 같은 맹세를 사도좌 공석 기간 중에는 거룩한 추기경단의 추기경들에게 엄숙하게 맹세한다.

 

더 나아가, 나는 지휘관을 비롯한 선임들에게 존경과 충성과 순종을 맹세한다. 아울러 자신의 직분에 걸맞은 품위 유지에 수반되는 모든 요구사항을 준수할 것을 맹세한다. 나 (이름)는 방금 낭독된 모든 사항을 성실하고 충실하게 지킬 것을 맹세한다! 하느님께서 나를 보우하실 것이며, 그분의 성인들께서 나를 도우실 것이다!

 

현재 교황청 근위대 병력은 135명이다. 근위대원들은 모두 스위스군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으며, 174cm 이상의 건장한 체격과 강건한 체력, 그리고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는 자격 요건을 충족한 인원들로 19~30세까지이다. 스위스는 1859년 외국군입대를 법률로 금지했지만 교황청 근위대는 예외로 인정하고 있다. 이들은 평상시 근무때는 미늘창을 들고 중세시대 군복, 그리고 흉갑을 걸치고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그 복장 안에 방탄조끼를 입고 있다.

 

▲2014. 8 한국방문한 프란치스코교황과 경호원

 

병영과 무기고에는 최신 장비들이 가득하며, 이들 장비와 현대적인 전술에 맞게 요인 경호와 근접 전투에 초점을 맞춘 엄격한 훈련이 매일 반복된다.



근위대는 1정당 1,000만원이 넘는 '군용 소총의 롤렉스'라고 불리는 스위스제 SIG550 소총과 P226 권총 등을 기본 무장으로 사용하며, 스위스 SIG와 독일의 H&K 등에서 생산되는 개인화기와 기관총 등을 갖추고 있다. 외곽 경비는 이탈리아군이 맡고 있지만, 영내 방어를 위해 대전차 미사일과 보병 휴대용 지대공 미사일도 보유하고 있다.

 

1981년 5월 13일에 베드로광장에서 교황요한 바오로2세의 암살시도가 있은 후로 근위병들은 가라데를 공식으로 배웠으며 매일 무술연습을 하며 근위대는 교황청의 각종 행사마다 질서를 유지하고 바티칸 시티로 통하는 도로를 지키는 것이 주된 임무로 교황이 해외 나들이를 할 때는 소수의 사복 근위장교들이 항상 그를 수행하고 있으며 2014년 한국방문에도 2명의 사복장교가 수행한다.

 

 

오늘날 스위스의 손꼽히는 휴양 도시인 루체른에는 ‘빈사의 사자’상이라는 유명한 조각상이 있다. 온몸에 화살이 박힌 채 꺾여진 프랑스 브르봉 왕가의 방패를 껴안고, 고통스럽게 마지막 숨을 내쉬는 사자의 모습이죠. 이 사자상은 프랑스 시민혁명 당시 루이 16세의 근위대였던 스위스 용병들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당시 루이 16세는 시민군에게 포위된 상태였고, 다른 근위대들은 모두 도망 가버린 상태에서 스위스 용병들만이 남아 루이 16세를 지키고 있었으며 이미 상황이 절망적이라고 판단한 루이 16세는 이 스위스 용병들에게 “그대들과는 상관없는 싸움이다. 고국으로 돌아가라”고 권했지만, 스위스 용병들은 “신의는 목숨으로 지킨다”는 답과 함께 끝까지 항전하다가 786명의 대원 모두 전멸하고 말았다.

 

 

/ 서울신문 이일우 군사 통신원(자주국방네트워크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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