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구 방학동 632 방학동 도깨비시장 02)954 1225
조선 왕실의 무덤은 묻힌 이의 신분에 따라 능·원·묘 세 형태로 구분된다. 추존왕을 포함한 왕과 왕후의 무덤인 능(陵), 왕세자와 왕세자빈, 왕세손, 왕의 사친(왕을 낳은 후궁이나 왕족)의 무덤인 원(園), 나머지 왕족과 폐왕의 무덤인 묘(墓)다. 27명의 조선 왕 중 반정으로 폐위돼 능이 아닌 묘에 잠든 두 사람이 있다.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연산군(燕山君)과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광해군(光海君)이다.
연산군(재위 1494~1506)은 성종의 맏아들로, 1476년(성종 7) 계비 윤씨에게서 태어났다. 연산군의 생모 윤씨(1455~1482)는 함안부원군 윤기견(尹起畎)의 딸로, 1473년(성종 4)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됐다. 이듬해 성종의 첫 번째 왕비 공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1476년 두 번째 왕비로 책봉됐다. 그러나 왕비가 된 후 후궁들을 투기한 죄로 1479년(성종 10) 폐출된 지 3년 후에 사사됐다.
생모가 폐위되자 원자였던 연산군은 성종의 세 번째 왕비 정현왕후 윤씨 손에서 자랐다. 그는 1483년(성종 14) 왕세자로 책봉되고, 1494년 성종이 세상을 떠나자 1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그는 부왕 성종의 묘지문을 읽다가 윤기견이라는 낯선 이름을 발견하고, 혹시 다른 사람 이름을 잘못 쓴 게 아니냐고 승정원에 물었다. 승지들에게서 윤기견이 폐비 윤씨의 아버지며, 자신의 생모 윤씨가 폐위돼 죽었음을 비로소 알게 됐다. 그날 그는 별다른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수라(水剌)를 걸렀다.
연산군은 재위 초기에는 선왕이 이룬 태평성대 분위기를 이어가며 선정을 펼쳤다. 그러나 그의 선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1498년(연산 4) 무오사화와 1504년(연산 10) 갑자사화를 거치며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거나 유배됐다.
무오사화는 성종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그 사초 중에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발견된 데서 비롯됐다. 조의제문은 항우에게 죽은 초나라 회왕(의제)을 애도하는 글로, 세조의 단종 왕위 찬탈을 빗댄 것이었다. 조의제문을 쓴 김종직은 부관참시되고, 이를 사초에 기록한 김일손은 능지처사됐다. 이 밖에 많은 사림 학자들이 파당을 만들어 세조를 무고했다는 죄로 참형 당했다. 성종조부터 조정에 진출한 사림파는 무오사화 때 유자광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에게 화를 당했다. 이를 통해 연산군은 즉위 후 사사건건 자신을 견제하던 삼사(三司)를 무력화해 버렸다.
갑자사화 때는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폐비와 사사에 관여한 다수의 훈구 및 사림파들이 화를 입었다. 성종은 연산군이 원자 때 일어난 폐비 윤씨 사건에 대해 함구령을 내렸다. 그러나 척신 임사홍이 사건 경위를 연산군에게 전했다. 그는 생모가 폐위되고 죽은 게 귀인 엄씨·정씨의 참소 때문이라 해 밤중에 대궐 뜰에서 이들을 때려죽였다. 이어 손에 검을 들고 계모 자순대비(정현왕후) 침전 밖에서 “어서 나오라”고 외쳤다. 뒤쫓아온 왕비 신씨가 극구 말린 덕분에 대비는 위기를 면했다. 다시 귀인 정씨의 두 아들 항과 봉의 머리채를 쥐고 할머니 인수대비 침전으로 간 그는 “어찌하여 우리 어머니를 죽였냐”며 난동을 부렸다.
연산군은 과거 폐비 및 사사 논의에 참여했던 신하들을 능지처사 또는 참형으로 다스렸다. 이미 죽은 한명회, 남효온 등은 부관참시했다. 권달수 등 폐비 추숭(追崇)에 반대한 신하들도 참형 등 중형(重刑)에 처했다. 이들의 가산을 몰수했고, 그 친족들도 연좌 처벌하고 살아 있는 사람은 형장을 때린 후 귀양 보냈다. 갑자사화는 죽은 생모를 위한 연산군의 복수극인 동시에 왕과 측근 세력이 권력 독점을 위해 벌인 정치적 사건이기도 했다.
두 차례의 사화로 조정을 완전히 장악한 연산군의 폭정은 날로 심해졌다. 그는 유흥과 황음(荒淫)을 일삼았다. 이로 인해 재정은 파탄났고 양반 관료들의 반발도 커졌다. 민생을 외면하니 백성들의 원성도 높아졌다. 결국 1506년(연산 12) 9월 2일 성희안, 박원종 등의 주도로 반정이 일어났다.
반정 세력은 연산군을 끌어내리고 정현왕후의 아들이자 연산군의 이복동생 진성대군을 새 왕(중종)으로 세웠다. 폐위된 왕은 연산군으로 강봉되면서 강화 교동에 유배됐다. 왕비 신씨도 폐하여 사저로 쫓아냈으며 폐세자, 창녕대군, 양평군, 이돈수 등 왕자들은 각지에 분산해 유배한 후 모두 사사했다. 연산군은 두 달 후인 11월 6일 유배지에서 31세의 나이로 역질에 걸려 죽었다. 중종은 연산군을 왕자군(王子君)의 예에 따라 장사 지내도록 했다.
반정 세력은 명 황제에게 왕의 퇴위와 승계에 대해 허락을 청하는 연산군 명의의 문서를 보냈다. 이때 연산군의 폐위 사실을 숨기고 ‘연산군이 병으로 왕위를 사퇴하고, 동생 진성군에게 왕위를 잇게 했으니 윤허해 달라’고 했다. 명 황제의 예상 질의에 대한 사신의 거짓 답변자료까지 준비했다.
그로부터 31년이 지난 1537년(중종 32), 조정은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면서 연산군이 이미 죽은 사실을 이제라도 명나라에 알려야 하는지를 두고 의논했다. 1539년에도 명나라 사신이 폐왕의 거처를 물으면 어디에 있다고 답해야 할지 중종이 고민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 1545년 사신 당고(唐皐) 이후로는 명의 사신들이 더는 전왕의 안부를 묻지 않자 명종은 1562년 연산군 관련 답변자료를 삭제했다. 무려 56년간 연산군의 죽음을 감추고 거짓이 들통날까 걱정해야 했다.
연산군은 세자 때인 1487년(성종 18) 당시 병조판서였던 신승선의 딸이자 신수근의 누이동생과 혼인했다. 신씨(1476~1537)는 이듬해 왕세자빈에 책봉되고, 1494년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됐다. 그러나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함께 폐출돼 거창군부인(居昌郡夫人)으로 강봉됐다. 그녀는 연산군이 유배 갈 때 울부짖으며 따라가려 했다. 연산군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신씨가 보고 싶다”는 한 마디를 남겼다. 신씨는 1537년(중종 32) 4월 8일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남편 곁에 묻혔다.
본래 연산군묘는 유배지인 강화 교동에 있었다. 폐비 신씨가 중종에게 양주 해촌(海村, 현 도봉구 방학동)으로 묘를 이장하게 해달라고 청해 1513년(중종 8) 현재의 자리로 개장했다. 신씨가 남편의 묘를 이장한 곳은 그녀의 외가, 외조부 임영대군( 세종의 넷째 아들) 땅이었다. 신씨도 훗날 연산군묘 쪽 쌍분에 묻힌다.
연산군묘 아래쪽엔 태종의 후궁 의정궁주(義貞宮主) 조씨의 묘가 있다. 조씨는 태상왕(태종)의 빈으로 간택됐으나 가례를 올리지 못하고 태종이 죽어 빈 대신 궁주로 봉해졌다. 조씨가 후사 없이 죽자, 그녀의 제사를 모시도록 명을 받은 임영대군은 자기 땅인 이곳에 조씨의 묘를 썼다. 훗날 연산군과 신씨 사이에 난 딸 휘순공주(徽順公主), 그녀와 이혼했다가 재결합한 남편 능양위(綾陽尉) 구문경도 여기에 묻혔다.
출처 : 한국아파트신문(http://www.hap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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