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화려하고 복잡하고 시끄러운 곳이다. 특히 '서울의 심장'이라 불려도 좋을 만큼 많은 관공서, 언론사, 오피스빌딩이 빼곡히 자리 잡고 있는 광화문 일대는 훨씬 더 그렇다. 하지만 이처럼 정신없이 시끄럽고 복잡한 이곳을 지하철 한 정거장 정도만 벗어나면 서울답지 않게 조용한 동네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서울 도심에 가장 가깝지만 서울의 화려함보다는 소박함을 느낄 수 있는 이곳은 바로 서촌이다.
◆시간이 멈춘 듯한 건물들
서울의 '서촌'은 경복궁 서쪽의 동네를 이른다. 지금의 서울 종로구 통인동, 통의동, 옥인동, 효자동 등 13개 동 일대를 이르는 말로 경복궁 영추문에서 사직공원까지의 동네를 모두 묶어 서촌이라 부른다. 서촌은 최첨단을 달리는 도시 한가운데에 사라져가는 것들을 추억할 수 있는 공간이 남아있다는 이유로 요즘 주목받고 있는 동네이기도 하다.
출발은 서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4번 출구다. 영추문 방향으로 올라가다 보면 나오는 '보안여관'에서 서촌 기행을 시작했다. 한때 화가 이중섭이 문지방 닳도록 드나들었을 정도로 가난한 예술가들의 안식처였던 이곳은 한때 문화예술공간으로 사용되다 지금은 문을 닫았다. 문틈 사이로 보이는 옛날 여관의 구조가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보안여관을 지나 왼쪽의 골목으로 들어서면 갤러리와 카페가 보이기 시작한다. 네거리를 지나 조금 더 좁은 길로 들어서면 서울 중심가라기보다는 변두리 동네 같다는 느낌이 든다. 참여연대 건물을 지나 화장품가게가 있는 골목으로 들어서면 작은 한옥 한 채에 '대오서점'이라는 낡은 간판이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중고서점으로 꼽히는 대오서점은 지금은 카페로 운영되고 있다. 헌 책들과 책방 이곳저곳을 구경하던 중 이곳의 주인인 권오남(84) 할머니가 들어왔다. "주말에 손님들 보러 잠깐 들른다"는 권 할머니는 방문객들에게 스스럼없이 대오서점의 추억들을 한 자락씩 꺼내 들려주었다.
"이 동네 근처에 경복고교, 배화여대처럼 학교가 많았다고. 그때 '책방'으로만 알고 있던 학생들이 여기를 다시 찾아와서는 참 많이 반가워해요. 18년 전 남편이 저 세상 가고 나서는 책방 운영도 힘들어서 지금은 딸과 외손자 둘이 차도 팔고 하면서 지키고 있어요. 예전만 해도 주변이 다 양기와 올린 주택이었는데 참 많이 변했지요. 그래도 사람들이 알고 찾아와주니 반갑고 고마워요."
◆골목길 끝에서 본 서울의 풍경
대오서점에서 만난 권오남 할머니의 배웅을 뒤로하고 통인시장을 지나 좁은 골목길로 들어섰다. 골목길 초입에 바로 적산가옥을 개조한 액세서리 가게와 피아노학원이 눈길을 끌었다. 계속 골목을 타고 오르다 보니 연립주택과 빌라들 사이에 작은 카페와 아기자기한 상점들이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곳을 구경하는 것도 서촌을 여행하는 특별한 재미다.
이 중 특히 사람들이 많이 붐비는 곳은 '옥인상점'이었다. 옥인상점은 책 '서촌방향'의 저자로 서촌의 변화를 연구하고 알리는 서촌 토박이 설재우 씨가 오락실이었던 곳을 인수해 액세서리나 장식용 소품을 판매하는 곳이다.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전시된 곳을 보면 이곳이 오락실이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지만 벽 한 귀퉁이에 있는 '사용자 준수사항' 문구를 보고 나서야 이곳이 옛날에 뭘 하던 곳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옥인상점을 지나면 나오는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은 꼭 들러보길 권한다. 이곳은 해방 후 한국화 1세대로 잘 알려진 박노수 화백의 생가였다. 지난해 별세한 박노수 화백이 자신의 집을 서울 종로구청에 기증하면서 종로구청이 이곳을 미술관으로 꾸몄다. 1937년에 지어진 이 집은 일제강점기 시절 한옥과 양옥이 절충된 양식을 보여주고 있어 근대 건축 연구자료로도 가치가 높다. 내부는 현재 박노수 화백의 작품이 전시돼 있는 데 삐걱거리는 나무바닥을 밟으면서 작품을 감상하는 느낌은 매우 새롭다.
골목길 끝자락이 가까워져 오면 길은 조금 가팔라진다. 골목길 끝에 우뚝 버티고 서 있는 산은 바로 인왕산이다. 인왕산은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암반과 급경사지대가 많아 무턱대고 오르기에는 위험한 산이다. 인왕산을 오를 준비가 안 됐다면 골목길 끝자락인 수성동 계곡과 옥인시범아파트터에서 서울을 감상해도 좋다. 겸재 정선의 그림에도 등장하는 수성동 계곡은 2010년 옥인시범아파트가 철거되면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수성동 계곡의 경치도 빼어나지만 옥인시범아파트터에서 바라보는 서울의 풍경도 색다르다. 정말 이곳이 서울 도심이 맞나 싶을 정도로 경관이 빼어나다.
◆출출하다면 통인시장으로
가파른 골목길을 올랐더니 출출해졌다. 다시 골목을 타고 내려와 통인시장으로 향했다. 통인시장은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전통시장이지만 먹거리에 관해서는 아주 쏠쏠한 재미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먼저 통인시장을 유명하게 만든 '기름떡볶이'가 있다. 최근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이 이곳을 방문해 기름떡볶이를 맛보는 모습이 언론을 통해 전해지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특히 주말이면 30분 이상 기다릴 각오를 해야 한다. 기름떡볶이의 조리방법은 특별한 게 없다. 미리 간장 또는 고추장 양념이 된 떡을 기름을 넉넉히 두른 무쇠 솥뚜껑에 볶아 내면 그만이다. 기름이 좀 많이 들어가 느끼한 맛도 있지만 특이하게 만들어진 이 떡볶이는 통인시장의 별미로 손색이 없다.
통인시장을 돌아다니다 보면 구역이 나뉜 검은색 플라스틱 통을 들고 반찬가게를 배회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은 반찬가게를 돌아다니며 반찬을 받은 뒤 시장 중앙의 고객센터로 향한다. 통인시장이 2012년부터 운영하는 '도시락 뷔페'다. 이용방법은 간단하다. 고객센터 2층에서 1개당 500원인 엽전 모양의 쿠폰을 산 뒤 검은색 플라스틱 도시락통을 받는다. 이 통을 들고 시장 곳곳에 '통 도시락카페 가맹점'이라는 팻말이 붙은 가게에 가서 원하는 음식을 담아오면 된다. 반찬값은 구입한 쿠폰으로 해결한다. 대부분 엽전 5천원어치를 구입한 뒤 반찬을 사고 엽전 한두 개를 남겨 고객센터에서 밥과 국을 사서 먹는다.
'서울에 화려하고 좋은 곳도 많은데 왜 굳이 옛 건물 많은 동네로 사람들이 몰릴까' 생각해봤다. 현대인들이 자극적인 음식에 지쳐 담백한 음식을 그리워하듯 서촌을 찾는 이유도 그래서이지 않을까. 화려하고 자극적인 서울의 한구석에 담백한 삶을 살아가는 이웃을 볼 수 있는 곳이라는 점이 서촌에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일 것이다.
자료 : 매일신문 2014. 2 이화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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