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약산(載藥山, 1108m)과 천황산(天皇山, 1189m)은 해발고도 1,000m 이상의 준봉들로 이뤄진 영남알프스 산군에 속하는 산이다. 재약산은 신라의 한 왕자가 이 산의 샘물을 마시고 병이 나아 '약이 실린 산'이라고 했다는 데서 유래했다.
산세가 수려해 삼남금강(三南金剛)이라 불리는 천황산은 영남알프스의 소맹주 격으로 외유내강의 산이다. 안으로는 목장이 들어설 만큼 부드러운 산세를 품고 있지만, 바깥쪽은 깎아지른 절벽이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위엄을 뽐낸다. 억새밭, 그윽한 계곡, 층층의 폭포, 기암괴석 같은 우리 고유의 산수미가 빼어나다.
흑룡폭포와 층층폭포를 거쳐 사자평~재약산~천황산으로 이어지는 코스는 폭포의 거대한 물줄기가 떨어지면서 일으키는 물보라의 압도감에 도취할 수 있어 여름 산행지로 그만이다. 고사리분교 터를 지나 재약산~천황산에 이르는 코스는 울창한 수림을 지나며 낙엽 깔린 고운 흙길을 밟는 운치가 발을 이끈다. 내원암과 진불암을 거쳐 산의 중앙 능선을 쪼개듯 치고 오르는 코스는 갈 길 바쁜 산꾼들이 주로 타는 단축 코스다. 한계암과 서상암을 거쳐 천황산과 재약산을 반시계 방향으로 둘러보는 등로는 호젓한 암자 산행 코스로 제격이다.
고사리분교 터를 지나 사자평억새밭~재약산~천황산을 거친 뒤 서상암과 한계암을 거쳐 표충사로 원점 회귀하는 방식으로 산행 코스를 잡았다. 11.3㎞ 정도 걸어야 되고 산행시간은 겨울이라 넉넉하게 6시간쯤 잡아야 한다. 된비알이나 가파른 경사가 많지 않고, 지그재그로 둘러 오르는 길이 많아 체력 부담은 크지 않은 편이다.
들머리는 표충사 일주문이다. 효봉대선사 천진보탑비를 지나자마자 보이는 오른쪽 길에서 마주치는 첫 번째 이정표에서 재약산 방면으로 북쪽 산허리를 따라가는 오른쪽 길로 들어선다. 응달이어서 길 곳곳이 얼어 있고, 물을 머금은 낙엽은 미끄럽다. 눈 덮인 오솔길을 지나면 맹추위에도 푸름을 잃지 않는 대나무 숲이 펼쳐진다. 발아래로는 대나무 숲을 병풍처럼 두른 표충사가 호수 같은 적요 속에 잠겨 있다. 산사에서 퍼지는 낭랑한 예불 소리에 대나무 잎이 서걱거린다.
40분쯤 걸어 오른편으로 매표소에서 사자평 가는 작전도로가 보이면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곳이 나오는데 수미봉 능선 갈림길이다. 가던 길 그대로 고사리분교터 방면으로 계속 진행한다. 햇볕이 들지 않는 재약산 북사면은 하얗게 얼어붙었다.
전망대와 구조표지목, 이정표를 차례로 거쳐 돌계단을 오르면 바람에 하늘거리는 빛바랜 억새 군락 속에 고사리분교 터가 나온다. 45분 소요.
120만 평에 이르는 사자평의 서남단에 해당하는 이곳은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스키장을 만들기 위해 숲을 베어내고 초지를 만들었다. 하지만 눈이 많이 내리지 않는 기후 탓에 스키장 개발은 백지화됐다. 이후 60년대 초반까지 화전민들이 밭을 만들고 지역 주민들이 산나물을 얻기 위해 지속적으로 불을 지른 끝에 너른 평원으로 변모했다. 한때는 화전민 80여 가구가 모여 살았고, 이들의 자녀들을 가르치기 위해 고사리분교가 지어졌다. 고사리분교는 1966년부터 30년 동안 36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뒤 1997년 폐교됐다. 지금은 억새 무덤에 묻힌 전봇대와 축대 흔적만이 이곳에 한때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쓸쓸히 증언하고 있다.
고사리분교 터를 지나 재약산 방면 이정표를 따라 20분가량 능선을 오르면 '진불암 20분'이라고 쓰인 표지판과 함께 우측으로 목재 계단으로 오르는 샛길이 보인다. 임도를 버리고 바위를 타고 목재 계단을 밟고 올라간다. 경사가 만만치 않은데다 재약산 정상 턱밑까지 계단이 이어져 무릎깨나 시리다.
▲ 재약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황산 모습.
정상부 암릉지대의 바위를 헤치고 오르면 정상석이 있는 곳이 수미봉(재약산 정상)이다. 재약산 정상에서 펼쳐지는 360도 파노라마 전망은 여느 조망 산행지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지만 잠시 후 천황산 정상에서 펼쳐질 일망무제의 감동을 위해 아쉽지만 발길을 재촉한다.
수미봉에서 천황산 이정표를 따라 북쪽으로 5분가량 걸으면 울주군에서 지난해 조성한 하늘억새길 이정표가 나온다.
주암계곡삼거리 이정표를 지나 30분을 더 걸으면 해발 800m의 안부에 광활한 억새밭이 펼쳐지는데 이곳이 사자평(천황재)이다. 사자평 한쪽에는 산을 타고 넘는 구름이 내려놓은 습기로 만들어진 거대한 습지도 형성돼 있다. 험준한 산이 이처럼 내밀한 속살을 숨기고 있다니? 대관령 목장으로 순간 이동이라도 한 듯한 착각이 든다. 다시 암릉지대 바위를 딛고 30분을 오르면 먹잇감을 노려보는 사자의 형상을 한 천황산 정상(사자봉)에 이른다.
▲ 영남알프스의 소맹주로 군림하고 있는 천황산 정상인 사자봉의 허리 위에 올라타면, 천하를 호령하고픈 호연지기가 용솟음친다. 정상에서 바라본 남동쪽 조망. 억새밭 지나 능선으로 연결된 산이 재약산이다.
정상에 서면 천하가 사자 발아래로 납작 엎드린다. 티끌 한 점 없는 시리도록 푸른 하늘과 맞닿아 겹겹의 산이 소실점을 그리며 펼쳐진다. 북쪽으로는 대구 팔공산, 익산과 함께 보현산, 가지산, 운문산 등 영남알프스의 준봉들이 어깨를 겯고 서편으로는 창녕 화왕산, 청도 화악산과 멀리 지리산, 덕유산도 시야에 잡힌다. 남쪽으로는 남해 바다 수평선 위로 부산의 장산, 금정산과 봉래산이 성큼 다가선다. 해운대 마린시티의 초고층 아파트 마천루도 마루금 사이로 고개를 빼곡 내민다. 눈이 맑아지고 막혔던 가슴이 뻥 뚫린다.
▲ 웅크린 사자 형상을 한 천황산 정상부 돌출 암릉지대를 마주하면 천황산 정상을 사자봉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수긍이 간다.
하산길인 한계암 길은 20여 분 동안 숲길로 이어진다. 소나무 숲과 산죽림이 드리워진 길을 따라 내려가다보면 급경사 돌길이 30분쯤 이어지지만, 제각각의 크기와 모양으로 풍파를 이겨낸 바위들이 지천으로 널브러진 너덜겅에서 또다시 시원스러운 풍광이 펼쳐진다.
참나무 숲을 지나 나무다리를 내려오면 금강폭포가 보인다. 좁은 골 사이로 하얀 포말로 부서지며 세차게 떨어지던 폭포의 물줄기도 얼음 기둥으로 매달렸다. 폭포 위 벼랑가에는 한계암이 선계의 풍경처럼 살포시 내려앉아 있다.
계곡길을 따라 15분쯤 더 걸으면 한계암·내원암 갈림목이 나타나고, 임도를 따라 표충사로 내려오면 일주문 앞에 산행 종점인 홍제교가 보인다.
산행 문의:부산일보 라이프레저부 051-461-4164. 전준배 산행대장 010-8803-8848. 박태우 기자
표충사 계곡 인근에는 간단하게 허기를 달랠 수 있는 산채비빔밥부터 손두부, 도토리묵, 닭백숙까지 토속 음식을 파는 식당들이 즐비하다.
숯불에 구워 나오는 흑염소불고기도 노린내가 없어 여성들에게 인기다. 마가목을 함께 우린 동동주까지 한잔 걸치면 산행의 피로가 싹 가신다. 사자평명물식당(055-352-1603), 입소문맷돌순두부(055-353-7703), 약산가든(055-352-7786) 등이 이 지역에서 이름난 맛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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