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꾼한테는 '산연(山緣)'이란 게 있다고 합니다. 지난해 5월 '산&산' 취재팀은 수도지맥의 주봉 수도산에 올랐습니다. 수도산 능선에 서서 저 멀리 있는 가야산을 바라보았습니다. 일명 불타는 돌이라는 '성화석'이 푸른 하늘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저길 올라가 봐야 하는데, 언제 거길 가보나 싶었습니다. 다행히 그런 산연을 이 계절의 끝자락에서 만났습니다. 3월이면 봄꽃 산행 채비를 해야 하는데 그래도 가는 겨울이 아쉬워 가야산에서 마지막 겨울 산행을 꿈꿨습니다. '전국구의 산'이라 봄, 가을엔 하루에만 3천~5천 명이 찾는다고 합니다. 다행히 겨울엔 인적이 드문 편이라 호젓한 산행을 즐길 수 있습니다.
기암괴석 즐비한 만물상에 산행길은 온통 상고대 천지
▲ 조물주가 만든 가야산에 자연이 그린 동양화가 산행 내내 펼쳐진다. 산꾼이 한 폭의 그림 속으로 '설설!' 하며 오른다. 온통 눈뿐인 파노라마 조망에 탄성만 연발한다.
'산&산'은 가야산을 지금까지 두 차례 소개했지만 겨울 산은 이번이 처음이다. 산행 소감은? 만물상 능선에서 바라본 산등성이는 백설기를 산에 올려놓은 것처럼 한 폭의 동양화였다. 칠불봉(1,433m)과 상왕봉(우두봉·1,430m)에서 만난 바람은 매섭고 명징한 것이었다. 산행이든 세상살이든 정신을 제대로 차리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내려왔다. 이 겨울이 가기 전 가야산에서 설산의 그윽함을 맛보면 어떨까?
가야산은 개인 산행을 하기에는 여러모로 무리가 많은 산이다. 경남 합천군 해인사를 출발해 정상을 거쳐 경북 성주군 수륜면 백운동 주차장으로 내려오는 코스는 들머리와 날머리가 달라 자가운전 등산객은 차량 회수에 골머리를 앓았다. 여기에다 봄~가을 기준으로 7~8시간씩 걸리는 산행시간(겨울엔 1~2시간 추가)도 가야산을 산행지로 택하는 데 장애가 된다.
지난 2010년 6월에 개방한 만물상 코스를 밟고 칠불·상왕봉 등 가야산 핵심 코스로 넣어 원점회귀로 꾸몄다. 가야산 남동릉을 밟는 길인데, 등산로 통제 탓에 서성재~칠불·상왕봉 코스는 등산 하산길에 겹친다. 코스는 백운동 주차장~만물상 능선~서성재~칠불·상왕봉~서성재~용기골~백운동 주차장으로 꾸몄다. 용기골에서 기점으로 내려오는 계곡 길은 봄, 여름에 찾아가도 호젓한 산길일 테다. 산행거리 9.8㎞, 산행시간은 쉬는 시간을 포함해 5시간이면 충분. 가야산은 4월 말까지는 1,000m 이상 지역은 눈이 내리고 길이 빙판으로 아이젠과 등산스틱은 필수다.
백운동 주차장에서 출발한다. 주차장 입구에 '까마귀 검다 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 겉이 검다고 속까지 검을쏘냐/ 겉 희고 속 검은 이는 너뿐인가 하노라'는 형재(亨齋) 이직(李稷)의 시비가 있다. 성주 출신인 형재는 조선 세종 때 영의정을 지냈다.
주차장에서 상가 쪽으로 올라가 곧장 시멘트 포장길을 따른다. 5분쯤 가면 가야산야생화식물원이 나온다. 나무와 꽃 등 총 1천300여 종의 식물이 자란다. 입장료 1천 원. 식물원을 지나면 탐방지원센터가 눈에 보인다. 센터에서 아이젠을 무료로 빌려준다. 휴대전화도 충전할 수 있다. 센터 건너편에 등산객 수를 집계하는 출입 센서가 있다. 본격적인 산행 들머리다.
초반부터 오르막이다. 다행히 눈이 녹아 길은 흙길이다. 하지만 비탈이 '장난'이 아니다. 조금 과장하면 '무릎이 턱에 닿을 정도'.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의 해발 높이는 이제 600m대. 앞으로 만물상 능선까지 900m 후반대까지 올라야 하니, 각오를 단단히 하자. 그래도 걱정은 말자. 만물상 능선에만 올라서면 고행을 보상받을 만한 눈 세상과 기암 천지가 기다리고 있으니.
국립공원이라 등산로의 표지목과 이정표가 잘 정비돼 있다. 헷갈릴 길도 없다. 출발 40분 만에 979봉 아래에 닿는다. 이 부근부터 가야산성 터의 흔적이 보인다. 가야산성은 용기골의 좌우 능선에 쌓은 7.2㎞의 포곡식 산성으로 축성 시기는 확실치 않다. 다만 임진왜란 때 백성의 피란처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979봉에 올라서면 만물상 능선의 하이라이트 구간이 나온다. 강아지 코뿔소 시루 투구 등 갖은 모양의 바위들이 '날 좀 봐주세요'라고 외치는 것 같다. 만물상, 이름값을 톡톡히 한다. 산색은 표고가 1,000m에 가까워지자 잿빛을 버리고 백색으로 갈아입었다.
안부로 내려섰다가 1,096봉에 오른다. 뒤를 돌아 만물상을 다시 본다. 아까 동물 모양의 바위들이 이번에는 수백 명의 승려가 능선에 선 모양으로 등장한다. 그 아래 수백 개의 손바닥이 하늘을 향해 합장한 모습도 장관이다. 1,096봉에서 15분 남짓 오르면 상아덤이다. 전설에 따르면 이곳에서 가야산 여신인 '정견모주'와 하늘신 '이비하'가 사랑하며 놀았다. 두 신은 아들 둘을 낳았는데, 첫째는 대가야의 이진아시왕이 됐고 둘째는 금관가야의 수로왕이 됐다고 한다.
상아덤에서 가야산 꼭대기를 쳐다본다. 택리지를 쓴 실학자 이중환은 가야산은 뾰족한 바윗돌이 불꽃같이 이어졌고 바위 모양새가 깎아지른 듯해서 사람이 올라갈 수 없다고 한탄했다. 그러면서 때때로 봉우리 위에서 풍악소리나 말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고 썼다.
잔뜩 낀 구름이 산정을 둘러싸 칠불봉의 기이한 형세가 관측되지 않는다. 대신 신비감만 안은 채 서성재로 향한다. 10분 소요. 서성재 지킴터 정자를 지나 나무 계단과 너덜을 지나면 다시 눈길이다. 길옆은 온통 상고대 천지다. 구름에 가린 칠불봉이 머리 위에 있다. 가파른 철 계단과 씨름하며 40분가량이면 칠불봉 아래 이정표에 닿는다. 오른쪽으로 꺾어 칠불봉을 밟는다. 칠불봉은 울퉁불퉁한 암봉들이 하늘을 향해 뾰족하게 서 있다.
한때 가야산 최고봉을 놓고 논란이 일었다. 이에 지난 2004년 2월 국토지리정보원이 실측해서 칠불봉이 상왕봉보다 약 3m 더 높은 것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각종 가야산 지도에는 여전히 상왕봉이 주봉 행세를 한다. 국립공원 산행지도에도 상왕봉 높이만 표기했고 칠불봉은 위치만 나타냈다. 주봉은 그 산의 얼굴이다. 논란은 종지부를 찍었지만, 후속 수정이 뒤따르지 않아 여전히 가야산을 찾는 사람들에게 혼란을 준다.
칠불봉에서 내려와 여기서 250m가량 서쪽으로 떨어진 상왕봉으로 올랐다. 봉우리가 소머리를 닮아 다른 말로 우두봉이다. 널찍한 봉우리 바닥에 '우비정(牛鼻井)'이 있다. 소 콧구멍 샘인데 눈이 녹으면 봄에 샘물과 비단개구리를 볼 수 있다.
가야산 조망은 한국의 12대 명산에 들 정도로 수려하지만, 이번 산행은 구름과 눈발에 막혀 그 멋을 느끼지 못했다. '3대를 이어 적선이라도 해야 볼 수 있는 걸까?' 이런 푸념을 하면서 다시 서성재로 내려온다. 눈길은 내리막이 더 위험한 법, 올라갈 때보다 약 10분이 더 걸렸다(50분 소요).
서성재에서 '백운동 주차장(용기골)' 방향으로 하산로를 연다. 중간 중간 데크 계단이 있어 걷기가 수월하다. '용이 일어난 골짜기'인 용기골은 이름만큼이나 골이 길고 깊다(약 2.6㎞). 졸졸대는 물소리가 발길을 재촉한다. 나무다리와 백운3교를 지나 탐방지원센터까지 30분 정도. 센터에서 아이젠을 정리하고 출발지점인 주차장으로 돌아온다. 7분 소요.
산행문의 : 부산일보 라이프레저부 051-461-4164. 전준배 산행대장 010-8803-8848. 전대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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