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지간한 악천후에도 부담 없이 오를 수 있는 육산을 골랐다. 적당한 높이에다 푸슬푸슬 밟히는 등산로가 매력적인 경북 영천의 운주산(雲住山·807m)이 목적지다.
운주산은 경북 영천시와 포항시의 경계를 이루는 낙동정맥의 줄기다. '구름이 머물러 산다' 하여 이름 지었다. 품세가 제법 넉넉하긴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 정도로 깊은 산은 아니다. 되레 산세는 수줍고 소박하다. 우뚝 솟은 바위 하나 없이 부드러운 곡선이 능선을 이룬다. 활엽수가 대부분인 산은 지난 가을 낙엽이 떨어진 후 아직까지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제법 이름난 산이면 하나씩 품고 있을 큰 절이나 문화재도 없다. 찾은 사람마저 적으니 호젓한 산행에는 제격이다.
소박한 산세… 호젓한 산행 제격
산행로는 포항 쪽 봉계리, 인비리가 많이 이용된다. 영천 쪽에서는 번다함을 피해 나선 산행이니만큼 영천시 임고면 수성2리 영전마을 입구를 들머리로 잡았다. 코스는 들머리~운암사~돌탑 삼거리~정상~구만저수지~구만마을~수성교로 잡았다. 산행 거리 11.8㎞, 총 산행시간은 4시간 20분이다.
수성리(守城里)는 임진왜란 때는 김백암 장군이 이곳에 성을 쌓고 진터를 설치해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이름 덕분인지 이 동네와 운주산 곳곳은 전란의 흔적을 품고 있다. 구한말에는 의병조직인 산남의진(山南義陣)이 이곳을 근거지로 일제에 저항했다.
운주산 중턱 어디쯤에 박쥐굴이 있는데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때 주민들의 피난처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산행은 마을을 왼편에, 야트막한 무덤을 오른편에 두고 가운데로 뚫린 임도를 따라 시작한다. 다행히 산행 시작과 함께 비가 멎었다. 시멘트 포장길을 10분여 올라가면 개천 건너 왼편에 운암사를 만난다. 언뜻 보기에 여염집 같다.
절집에서 흔히 보이는 탑과 불상은 물론 단청도 없다. 기둥이며 서까래가 무너질 듯 낡았다. 지붕 위 기와만 이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색깔이 선명하다. 마치 때에 절은 작업복을 입고 머리에 기름을 바른 촌부처럼 어색했다. 그러나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여래(如來·진리)는 '모양'에 얽매이지 않으니 말이다.
운암사를 지나면 완만한 오르막이다.
포장길은 여기서 끝이다. 오직 흙과 돌, 마른 풀들이 어울려 길을 낸다. 경운기 바퀴에 파인 구덩이에는 얼음 녹은 물이 고여 질척거린다. 물이 빠져 나간 흙은 푸슬거려 자연스럽다. 이 길을 따라 15분가량 오르면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은 오르막, 오른쪽은 내리막길이다. 오른편 내리막길로 방향을 잡아 20분가량 직진한다.
개울을 건너 왼쪽 오르막길을 따라 다시 10분을 더 걸으면 4푼 능선 즈음에서 또 다른 갈림길과 마주한다. 이른 봄볕이 생각보다 더웠다. 겹겹이 포개 입은 등산복을 하나씩 허물 벗듯 벗어 배낭 속에 쟁여 넣었다. '허탄한 곳에 둔 덧없는 욕심도 여벌 옷처럼 쉽게 벗어 던질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갈림길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가파른 너덜길이 갑자기 코앞으로 밀려왔다. 지난 태풍에 패고 할퀴어서 험하기 이를 데 없다. 돌 위에 발을 놓으면 미끄러지고, 돌을 피해 흙을 밟으면 푹푹 파묻힌다. 15분가량 기다시피 오르니 드디어 능선이다. 오른쪽으로 625봉, 왼쪽으로 618봉을 거느렸다. 산 아래로는 포항시 봉계리와 인비리의 넓은 들이 펼쳐진다. 그 사이를 익산~포항 간 고속도로가 시원하게 가로지른다.
잠시 휴식 후 왼편으로 길을 잡아 정상을 향했다. 능선길을 따라 걷다가 포항 인비리 방면에서 막 올라오는 한 무리의 산꾼을 만났다. "배치기를 했어요, 배치기!" "정말 코가 땅바닥에 붙더라니까요." 산꾼들은 얼마나 가파르고 험한 길을 타고 왔는지 무용담을 늘어놓기에 바쁘다.외길 능선을 따라 작은 돌탑이 나올 때까지 40분가량을 더 걷는다. 산짐승이 다닐 듯 좁은 오솔길이 매력적이다. 몇 번의 가을을 거치면서 쌓인 낙엽은 스펀지처럼 폭신하다. 돌탑에 다다르자 양 옆으로 울창하던 숲이 잠시 덤성거린다. 그 사이로 보이는 포항 방면의 전망이 시원하다.
쉬어가는 김에 지도도 다시 보고 전망도 실컷 즐긴다. 돌탑을 기점으로 길은 세 방향으로 뻗어 복잡하다. 돌탑 삼거리에서 왼편으로 길을 잡아 정상을 향한다. 오르락내리락 능선길을 따라 5분가량을 걷다보면 헬기장이 나오고 곧 이어 정상을 알리는 표지판이 나온다. 최근에 설치된 정상부의 안내 간판에는 '운주산(雲柱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산이 구름을 받치고 있는 기둥 같다 해서 기둥 주(柱) 자를 썼나 보다. 하지만 국립지리원 발행지도에는 머물 주(住) 자를 써 '운주산(雲住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운주산에 대해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안내 간판뿐만 아니다.
정상에는 표석이 3개나 있는데, 정상 높이를 791m, 806.4m, 807m 등 제각각으로 새겨 놓았다. 하루 빨리 정리가 필요하다.
정상에 서니 사위 조망이 갑갑하다. 사람 키를 훌쩍 넘겨 자란 참나무 숲이 시야를 가린다. 이웃한 산봉우리들도 너무 가깝다. 그러나, 멀리 보면 북으로는 주왕산을 지나온 산줄기가 가사령을 넘어 침곡산으로 이어지고, 운주산을 넘어선 후 도덕산과 한티재로 달려 나가는 모습이 경쾌하다.
하산길은 상신방마을 방면으로 잡았다. 하산로는 외길이라 길 찾기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좁고 가파르다. 바닥이 물러 발이 저절로 미끄러진다. 등산로를 따라 로프를 잡고 내려갈 수 있도록 돼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내리막을 따라 10분 정도 가파르게 내려오면 등산로 오른쪽에 너럭바위가 나온다. 10㎡ 정도 넓이의 볼품없는 바위지만 걸음이 저절로 멈춰진다. 전망 때문이다. 산행 내내 숲에 둘러싸여 갑갑하던 조망이 탁 트인다. 영천댐이 물길을 가둬 만든 호수가 멀리 펼쳐지고, 주변 산봉우리들도 비로소 눈 아래로 펼쳐진다.
잠시 숨을 돌린 후 15분가량 다시 내려오면 분묘 2기가 등산로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김해 김씨 가문의 묘인데, 멧돼지들이 파헤쳐 놓았다. 무덤 주변으로 말뚝을 박고 줄을 연결 한 뒤 빈 페트병들을 매달았지만 산짐승들을 쫓는데 효과가 없었던 모양이다.
다소 완만해진 내리막길을 따라 10여 분을 다시 내려오면 이정표가 나오는데 조심해야 한다. 길을 헷갈리기 십상이다. 일단 상신방 쪽으로 길을 잡아 1분 정도 내려오면 자동차 2대가 교행 할 수 있을 폭의 임도를 만나게 된다. 여기서 왼쪽으로 길을 잡아야 목표한 구만저수지에 다다를 수 있다.
3분 정도 더 걸어 도착한 구만저수지는 물이 반이나 말랐다. 여기서부터 구만마을까지는 평지로 지친 다리를 쉬고 체력을 회복할 수 있다. 구만마을 경로당을 거쳐 왼편에 있는 수성교를 지나 20분가량 걸으면 원점으로 회귀할 수 있다.
사방 10리 안에서 음식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오지다. 원점에서 포항시 북구 기계면 쪽으로 지방도를 타고 20분가량 달려야 겨우 식당 하나를 만날 수 있다. 오리요리와 삼겹살, 매생이전골을 전문으로 하는 '푸른정식당'(010-3817-6948)이다. 전남 완도서 직접 가져온 매생이와 굴을 넣고 끓인 매생이 칼국수(5천원)가 일품이다. 바다 내음이 물씬한 국물이 언 몸을 녹여준다. 허기가 많이 진다면 매생이 오리찜(3만원)을 먹어도 된다.
임고면 효리 운주산 승마장
운주산 승마장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휴양림 안에 조성돼 승마를 즐기는 데 안성맞춤이라는 평가를 듣고 있다. 국제 규격의 실내외 승마장을 비롯해 산속에 승마코스 3.5km가 조성돼 있다. 어린이를 위한 마차도 운행한다.현재 말 9마리가 있으며, 조만간 16마리가 새로 들어올 예정이다. 누구나 승마 체험을 할 수 있다. 김영석 시장은 “승마는 휴양림과 어울리는 최고의 레포츠”라며 “이 일대를 승마종합휴양타운으로 조성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 동아일보 2009.3 이권효 기자
'방방곡곡 > 경상북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천 보현리 작은보현산 갈미봉 거동사 (0) | 2014.04.04 |
---|---|
군위 화본리 화본역 화본마을 (0) | 2014.04.01 |
포항 죽장-일광리 보현사 수석봉 (0) | 2014.03.31 |
성주 수륜-백운리 가야산남동릉코스(만물상능선~가야산~용기골) (0) | 2014.03.30 |
청도 매전-20번지방도-두곡리 선의산~용각산 (0) | 2014.03.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