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직면 조탑리는 중앙고속도로 남안동 나들목 으로 가다가 우측으로 바로 내려다보이는 마을이다. 마을 앞 너른 밭 가운데 우뚝 선 5층전탑이 유독 눈에 뜨인다. 조탑동이라는 지명은 1300여년 전 통일신라시대 고창군의 남단 표지로 칠층의 전탑을 세웠다하여 연유된 지명이란다.
고려조의 영상대감 일직손씨 정평공 손홍량(孫洪亮)선생의 위패를 모신 타양서원(陁陽書院)
타양서원 편액
안동이 역사도시라고 하는데는 다 이유가 있다. 안동지역 곳곳에 역사적인 유물과 유적들이 산재한 것만으로 그러하거니와 민속에서 조차 그러한 역사적인 인물들이 등장을 한다. 안동지역의 민속놀이인 놋다리밟기는 고려조 공민왕의 안동몽진을 배경으로 하는 민속놀이이며 안동 각 지역에서 꾸준히 열리는 정월보름 당제 또한 그 배경을 가지고 있다.
먼저 마을 입구에 세워진 선생의 유허비를 만났다. 유허비는 단아한 비각에 모셔져 얕트막한 토담에 의해 외부와 격리가 되어 있었다. 높이 2.3m인 이비는 1804년(순조4년)에 세운 것으로 귀부의 좌대 위에 이수를 얹었다. 비문은 영조임금 때 영의정을 지낸 조현명이 짓고 제목글씨는 좌의정을 지낸 서명균이 썼다고 한다.
마을 중앙쯤에 위치한 골목길을 조금 들어서니 일반 한옥과 높이의 차이가 없이 평지에 서원을 앉혀 놓았다.
이 서원은 1741년(영조 17)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창건되어 정평공 손홍량 선생과 상촌 김자수선생, 파산 류중암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그들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페령에 의해 훼철되어 서원이 폐쇄되자 그 유적지인 송리 뒷산에 설단하여 향사를 지내왔다. 그 후 1948년 다시 지방 유림과 자손들이 발의하여 복설된 후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주변의 일반 주택들과 연결되어 있는 서원이라서인지 서원 앞에는 담장을 따라 주민들이 심어 놓은 채소가 한창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었고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한지 오래라서 마당에도 풀들이 무성했다.
서원의 대문인 경양문
서원 내의 건물로는 6칸의 상현사, 10칸의 성경당, 정면 2칸의 전사청, 3칸의 동재와 경앙문이라는 현판이 붙은 대문과 주소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상현사는 묘우로서 주향인 손홍량 선생과 배향인 김자수 선생 및 류중손 선생의 위패 가 봉안되어 있다. 그리고 전사청은 향사 때에 사용할 제물을 보관하는 곳이며 동재인 진수 재는 유생들이 기거하며 공부하는 곳이다.
성경당은 강당으로서 중앙의 마루와 양쪽의 협실로 이루어 져 있는데 동쪽에 있는 것은 사의재이고 서쪽에 있는 것은 숭모재이다. 이곳은 서원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강론 장소로 사용된다.
사진출처 : 안동서부초등총동창회카페
서원의 주향인 손홍량(1287~1379) 선생은 호를 竹石이라 하였고,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일직이다. 본래의 성은 순씨였으나 현종의 이름과 같아서 그것을 피해 5대조 응 때 손씨로 고쳤다. 충선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충숙, 충혜 양조에 벼슬하고 1348년(충목왕 4) 첨의평리로서 하정사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1349년(충정왕 1) 추성수의동덕찬화공신에 봉해지고, 도첨의찬성사를 거쳐 삼중대광판삼사, 즉 영상에 올랐다. 이듬해 직성군 복주부원군에 봉해졌다.
65세로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였으나 1361년(공민왕 10년)에 홍건적의 난을 만나 공민왕이 복주(안동)로 피란할 때 노구를 이끌고 난국 수습책을 공민왕에게 진언하였다. 1364년 난이 평정된 후 왕은 공의 충의에 감탄하여 친히 영정을 그려 주었고, 아울러 안석일좌와 구정산호용장을 하사하였다.
배향인 김자수선생은 고려의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이다. 자는 순중이고 호는 상촌 이다. 아버지는 통례문부사 지제고를 지낸 오이다. 1374년(공민왕23) 문과에 급제하여 덕녕부주부를 제수받았다. 우왕 초에 정언이 되었는데, 왜구 토벌의 공으로 포상받은 경상도도순문사 조민수의 사은편지에 대하여 회답하는 교서를 지으라는 왕명을 받았으나, 그가 전날 김해, 대구에서 있었던 왜구와의 전투에서 비겁하게 도망하여 많은 사졸을 죽게 한 사실을 들어 거절한 죄로 전라도 돌산에 유배되었다.
류중암(1538~1571) 선생은 풍산인이고 자는 희범이며 호는 파산으로 입암 류중영 선생의 종제이다. 퇴계 선생의 문인으로 종질인 겸암, 서애 선생과 동문수학하여 학문에 침잠하였으나 34세에 조몰하니 비지 남치리와 함께 세칭 '공문의 안자'라 칭하였다고 전해진다.
자료 : 안동뉴스 조승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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