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불패지지 금계에 자리 잡은 학봉종택(鶴峯宗宅) 경상북도 기념물 제112호 지정
서후는 풍산방면으로 34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지금은 새로운 다리가 놓인 속칭 솟밤다리를 건너 소뺨들과 송야천을 양편에 끼고 새로 반듯이 포장한 제5호 지방도를 타고 들어간다. 이곳은 교리라는 마을로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우고 안동의 유래와 산천, 인물, 고사 등을 정리해 안동역사를 바로 알 수 있게 한, 영가지를 편찬한 안동권문의 권기선생이 시묘살이를 한곳이기도 하다.
교리를 지나 다시 송야천을 건너는 만운교라는 조그만 다리를 건너면 천년불패의 땅이라는 금계로 선조에 의해 일본으로 통신사를 갔다가 온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선생의 종택이 있는 곳이다.
학봉종택이 있는 금계는 마을의 지세가 거문고와 같이 생겼다고 해서 금지(琴地)라 불렸으나 학봉선생이 이곳에 와 검재라 고치고 한자로 금계(金溪)라 적었다고 전한다.
퇴계 이황선생의 학통을 이어 받은 학봉은 임하 내앞(천전)마을의 청계선생의 넷째아들로 태어나 27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선조2년 병과에 합격해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학봉은 금계에 사는 권덕황의 사위가 되어 1582년 금계로 이주했는데 학봉의 금계에 살았던 기간은 일 년 남짓이라고 전한다.
종택은 원래 지금의 위치에 지었으나 지대가 낮아 침수가 자주 된다 하여 선생의 8세손인 광찬이 1762년에 현 위치에서 100m쯤 떨어진 현재의 소계서당 자리에 새로 종택을 건립하고 종택 자리에는 소계서당을 지었다. 그러나 갑진년에 종택을 다시 원래의 자리인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이때 종택의 사랑채는 그 자리에 그대로 두어 소계서당으로 사용케 하고 현 위치에 있던 소계서당을 사랑채로 사용하고 있다.
소계서당은 구한말 영남을 대표하던 학자 서산(西山)김흥락(金興洛)선생의 강학지소로 선생은 학봉선생의 11대 종손이다.
활짝 열려진 솟을 대문 사이로 보이는 종택건물은 오랜 세월의 흐름을 보내고서도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엄격한 선비의 품위처럼 단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방문 신청도 없이 들어선 대문 안 잔디 마당은 푹신한 잔디로 인해 내방객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아 더욱 숙연해 지는 느낌이었다.
사랑채를 돌아 학봉의 유물과 고문서들을 보관해 놓았다는 운장각을 찾아보니 그 역시 문이 잠겨 있어 반 천년 가장(家藏) 전적 문서는 들어가 볼 수가 없었다. 운장각의 내부를 보지 못하고 돌아서 풍뢰헌(風雷軒)을 본다.
임란의 질곡을 겪어온 선생의 풍도와 가장 닮은 풍뢰헌은 선생의 장손 단곡(端谷) 시추(是樞)공이 종가 안에 지은 건물의 이름인데 시추공은 부조(父祖)의 유업을 이어 병자호란에 창의하여, 가전의 충효를 이은 매운 의지를 보인 분이다.
학봉선생이 진주성에서 순국한지 300년 뒤, 한말과 일제하 국난기에 11대 주사손 서산(西山) 흥락(興洛)이 의병대장으로 창의하였고, 대를 이어 그 손자 여견(汝見) 용환(龍煥)이 가재를 털어 거액의 독립군 군자금을 제공한 일 등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류성룡과 조목, 그리고 김성일은 함께 퇴도(退陶)의 문하에서 배웠다. 성일은 강의독실(剛毅篤實)하고 풍채와 범절(凡節)이 높고 엄정(嚴整)하였다. 바른말이 조정에서 수용되지는 아니했으나 대절(大節)이 탁락(卓落)하여 남이 이의(異議)를 제기하지 못하였다. 계사년(癸巳年)에 나라 일로 최선을 다하다가 군진에서 졸 하였다. 퇴도 문하에서는 이 세 사람을 으뜸으로 삼는다.”이는 조선왕조실록 선조40년 정미5월 을해의 기사이다.
자료 : 안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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