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발 98m의 자미산을 중심으로 덕산리를 비롯해 신촌리, 대안리 일원에는 사적으로 지정된 35개의 고분이 산재해 있다.
이렇게 큼직한 왕릉급 봉분을 볼 수 있는 곳은 경주와 백제의 마지막 수도인 부여 정도일 것이다. 나주 영산강 유역에는 역사상 도읍지가 들어선 적이 없지만 고대 사회의 중심지였다. 그 증거로서 이곳에는 ‘남도의 경주’라고 부를 만큼 대략 500∼600기 정도의 고분들이 즐비하다.
이는 사서(史書)에 기록을 남기지 않았지만 나주를 중심으로 남도의 젖줄 영산강 일대를 강력히 다스렸던 나라가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옹관고분 세력은 영산강을 끼고 있는 지리적 이점을 살려 비옥한 농경지와 철생산을 토대로 한 경제력에서 강력한 원동력을 갖췄을 것이다. 그렇지만 기록의 역사를 가지지 못한 마한은 수천년이 지난 현재 고분으로서만 존재감을 나타내고 있다.
덕산리 5호분과 6호분 둘레를 거닐어 본다. 봉분 주변은 잔디가 잘 관리돼 있고, 철 지난 국화가 여전히 노란 꽃잎을 피우고 있다. 봉분마다 ○호분이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봉분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고분 주위를 서성거리다 보면 피장자 뿐만 아니라 마한의 역사 역시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음을 절감하게 된다.
반남 일대 고분 발굴에 나선 이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었다.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회는 1917∼1918년 덕산리 1·4호분, 신촌리 9호분, 대안리 8·9호분을 발굴한다. 이 가운데 신촌리 9호분에서는 금동관(金銅冠·국보 295호)과 금동신발, 용봉문 환두대도, 옥으로 만든 각종 장신구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피장자가 강력한 세력가임을 말해주는 유물들이었다.
특히 대형 항아리 두 개를 맞붙여서 관으로 쓰는 옹관묘(甕棺墓)는 이곳만의 독특한 묘제이다. 고대인들은 죽은 자를 알 모양의 옹관에 안치시켜 다시 부활하기를 기원했을 것이다. 옹관 무덤의 발전과 소멸은 영산강 유역 마한의 흥망성쇠를 한 눈에 보여준다.
◇독특하게 꽃피운 옹관고분=나주시 다시면 복암리 3호분은 마한의 새로운 역사를 쓰게 했다.
복암리 3호분은 1996∼1998년 발굴결과 3세기 말에서 7세기 초까지 400여년에 걸쳐 옹관묘와 횡혈식 석실묘 등 다양한 무덤양식을 형성한 ‘아파트형 고분’으로 밝혀졌다. 이 가운데 96 옹관 석실은 커다란 돌을 다듬어 축조한 석실 내에 4기의 옹관이 놓여있어 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들녘에 흩어진 고분을 찾아 주위를 거닐며 허허한 느낌이 들었다면 지난 22일 개관한 국립 나주박물관(naju.museum.go.kr)을 찾아가 보자. 일제강점기 이후 영산강 유역 곳곳에서 발굴됐던 각종 유물들이 한 자리에 모여있다.
일제 강점기때 발굴됐던 금동관이 95년 만에 제자리를 찾았고, 고분속에서 수천년간 잠들어 있던 옹관 등 1200여점의 유물이 탐방객들을 맞고 있다. 주먹도끼로 시작하는 전시실에 발을 들인 후 찬찬히 전시유물들을 살펴보며 역사의 여명기 부터 마한시대로의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 제대로 된 기록은 없지만 고분속 유물들은 그 시대의 맨얼굴을 보여준다.
시간이 여유롭다면 ‘마한 고대문화길’을 걸어보자. 덕산리 고분군에서 반남면 사무소∼대안리 고분군∼상구마을(천연기념물 호랑가시나무)∼신포리 지석묘군 까지 이어지는 길이 10.3㎞길이의 도보길이다. 역사에서 사라졌지만 마한은 영산강물처럼 끊임없이 남도문화에 자양분이 되고 있다. 광주일보 송기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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