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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겨울여행

한국관광공사-2월에 가볼만한 곳/인천 군산 포항 정동 논산

by 구석구석 2010.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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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관광공사는 ‘근대 문화유적을 찾아서’라는 테마 하에 2010년 2월의 가볼만한 곳으로 ‘인천 개항 120년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여행(인천광역시 중구)’, ‘서울 한복판에서 대한제국의 흔적을 만나다(서울특별시 정동)’, ‘근대문화유산, 군산의 ‘그’ 날을 이야기하다(전라북도 군산)‘, ’황금어장 구룡포의 100년 전 골목여행(경상북도 포항)‘, ’금강변에서 넉넉하게 즐기는 빈티지풍 시간여행(충청남도 논산)’ 등 5곳을 각각 선정, 발표했다.

 

서울 덕수궁과 정동의 근대문화유산

 

가족이나 연인끼리 대한제국의 흔적을 따라 걸어봄직하다. 근대와 현대를 잇는 덕수궁과 정동길 산책은 덕수궁~시립미술관~정동교회~정동극장~이화학당~경교장~홍난파 가옥~중림동 약현성당 순으로 하루코스로 걸어 다니면 좋다.


정동길을 따라 경향신문사까지 이르는 정동길은 서울에서 산책하기 좋은 거리로 손꼽히는 곳이다. 주변으로 덕수궁을 비롯해 구 러시아공사관, 중명전, 정동교회 등 개화기에서 근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역사를 관통하는 유서 깊은 건물이 많이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한 세기가 지난 지금은 역사의 흔적을 뒤로하고 정동극장,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 서울시립미술관 등이 있는 문화의 거리로 거듭나고 있다.

 

 

덕수궁 돌담길은 약 1.5㎞에 불과하지만 서울의 가장 낭만적인 길로 꼽힌다. 덕수궁 돌담길과 정동길엔 언제나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이 있다. 덕수궁 돌담길에서 정동극장~이화여고~경교장으로 이어지는 길은 서울에서도 특별하다. 돌담길 왼편으로 옛 대법원 건물을 운치 있게 꾸민 시립미술관. 좀 더 걸어가면 정동극장·정동 이벤트홀 등 공연장이 밀집해 있어 데이트 코스로 제격이다. 밤이면 돌담길을 비추는 조명과 벤치가 어우러져 더욱 운치 있다.

 

근대와 현대를 잇는 정동길 여행은 시청역 2번 출구로 나와 덕수궁 대한문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대한문에서 매일 세 차례(오전 11시30분, 오후 2시·3시30분) 열리는 왕궁수문장 교대식은 특별한 볼거리다. 국립현대미술관 분관인 덕수궁미술관은 고종황제가 집무실과 접견실로 썼던 최초의 유럽풍 궁중 건축물인 석조전에 있다.

 

석조전은 크게 정면에 보이는 동관과 측면에서 동관과 직각을 이루는 서관으로 나누어진다. 석조전은 덕수궁 안에 세워진 서양식 건물에서 이뤄졌던 새로운 문명과의 만남을 상징한다. 석조전은 우리나라 근대 건축 양식을 대표하는 건물로 궁궐 안에 자리한 서양식 건축이라는 의미도 갖는다. 근대 미술의 다양한 걸작을 감상할 수 있다.

 

덕수궁은 특히 구한말 비운의 황제 고종이 일제의 압박으로 양위를 강요당하고, 한 많은 여생을 보내다가 1919년 1월 22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일제에 의해 독살당하여 돌아가신 것으로 알려져 3·1 독립운동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던 곳이다.

 

정동제일교회는 개신교가 이 땅에 보급된 후 가장 먼저 세워진 교회다. 1885년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Appenzeller)는 우리 나라에 입국하여 배재학당을 세워 한국의 근대교육을 시작하였다. 그는 학교에서 종교 활동을 하였으나 예배만을 위한 건물을 구입하여 벧엘(Bethel)예배당이라 하고 1887년 첫 예배를 시작하였다.

 

이화학당 교문 맞은편으로 올라가면 정동공원이 있다. 공원 위쪽의 구 러시아공사관은 조선 말 한러수호조약이 비준된 1885년 직후 착공되어 1890년 준공되었다. 르네상스식의 우아한 2층 벽돌집으로 러시아인 사바틴(Sabatine)이 설계하였다고 한다. 공사관이 건립된 일대는 연산군이 도성 밖으로 놀러 가기 편리하도록 설치한 3개의 마장 중 하나였다. 고종이 일본을 견제하기 위하여 미국과 영국의 영사관과 함께 러시아공사관을 덕수궁이 인접한 곳에 두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러시아공사관은 아관(俄館)이라 불리는데, 고종의 아관파천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다.

 

경향신문사 맞은편 강북서울삼성병원 본관에 위치한 경교장은 백범의 마지막 숨결이 깃든 장소다. 일제강점기에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로 지어진 일본식 화강암 석조 건물로 본래 금광재벌 최창학의 집이었다. 하지만 해방 후에는 백범의 직무실로 쓰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회의도 개최한 유서 깊은 장소다. 1949년 백범이 서거한 후에는 다시 최창학의 집으로, 타이완 대사관저로, 미군특수부대의 거처로도 쓰였다.



금강변에서 넉넉하게 즐기는 빈티지풍 시간여행

 

논산시 남부에 위치한 강경은 금강 하류의 조수가 밀려드는 곳으로 예전에는 갈대밭으로 뒤덮인 자그마한 강변 갯마을이었다. 그러나 주변에 평야가 발달, 곡창지대를 이루게 됐으며 서해로 통하는 금강이 흘러 강경포구는 천혜적인 내륙항이 될 수 있었고 수운기지 또는 수산항으로 오래 전부터 명성을 떨쳤다.



조선 중기 무렵부터는 제주도에서 미역과 고구마, 좁쌀 등을 실은 배들이 강경포구까지 드나들었고 중국의 무역선들이 비단, 소금을 싣고 들어와 교역을 했다. 그 뒤 객주가 등장하면서 강경은 수산물 시장으로 번성했으나 일제강점기로 들어와서는 수탈기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강경은 경술국치의 해(1910) 이전부터 일본인들에게 상권이 넘어가는 비운을 맛보기 시작했다. 1899년 한 일본인은 강경에 와서 해산물 도매상, 잡화상을 개설했고 1905년에는 일본인들이 대거 몰려와서 학교를 세우는 등 농업과 상업 부문을 장악해갔다.



이같은 역사가 있었기에 강경읍내에는 근대문화유산인 등록문화재들이 많이 남아있게 됐다.


강경역이나 시외버스터미널, 강경읍사무소 등에서 출발, 강경읍내의 등록문화재 탐방 여행에 나선 사람들이 가장 먼저 찾아가게 되는 곳은 강경여중고 맞은편에 자리한 강경중앙초등학교의 강당(강경읍 중앙리 155, 등록문화재 제60호)이다. 콘크리트 기단 위에 붉은 벽돌을 쌓아올린 이 건물은 1937년 6월에 건축됐다. 좌우대칭감이 정확하면서 단아한 느낌을 주는 건물 외관에는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함인 듯 창문을 많이 냈다. 강당 건물 앞에는 오석에 개교 1백주년 기념비가 세워져 있어 눈길을 끈다. ‘그대 영원하라! 우리 그리움과 함께’라는 제목의 기념비 본문에는 이런 구절이 새겨져 보는이의 가슴을 뜨겁게 달군다.

 

강경중앙초등학교 맞은편으로는 강경여중고가 있고 바로 그 위편에 강경정보산업고가 자리를 잡았다. 그 학교 정문으로 들어가서 왼편을 보면 구 강경공립상업학교 관사(강경읍 남교리 1, 등록문화재 제322호)가 눈에 들어온다. 1931년 12월에 건축된 것으로 지상 1층의 붉은 벽돌 건물이며 그동안 강경상고 교장 관사로 쓰였다고 한다. 급경사 지붕이나 창문 등을 통해서 일본풍의 건축임을 단박에 알 수 있다.

 

다시 중앙리로 발길을 돌리면 주택가 안에 들어선 구 남일당한약방(강경읍 중앙리 88-1, 등록문화재 제10호) 앞에 발길이 머문다. 한식 목조 건물로 1923년에 건축되었고 지상 2층 규모이다. 구조는 비록 한식이나 1층의 차양지붕, 지붕 장식재, 변화된 툇마루 등에서 일본풍이 보이는 특이한 건축물로 대접받고 있다. 1920년대에 촬영된 강경시장 전경사진 속의 건물들 중에서 지금까지 남아있는 유일한 건물이라고 한다.

 

구 한일은행 강경지점(강경읍 서창리 51-1, 등록문화재 제324호)은 일제강점기 때만 해도 강경읍이 얼마나 번성했던 곳인지를 잘 드러내주는 건축물이다. 1905년에 붉은 벽돌을 이용, 르네상스풍으로 지어졌다. 한국전쟁 때 지붕이 파괴되기도 하는 아픔을 겪었다. 이 건물은 한일은행 강경지점, 동일은행 강경지점, 조흥은행 강경지점, 충청은행, 사유건물(중앙도서관), 젓갈창고 등으로 쓰이다가 최근 논산시에서 매입, 문화재로 보존 중이다. 바로 곁에는 몇 개 버스 노선의 공용 종점이 있고 공중화장실도 잘 만들어져 있다.

 

강경읍내 전경을 내려다보기 좋은 곳은 옥녀봉이고 그 초입에 강경북옥감리교회(강경읍 북옥리 96, 등록문화재 제42호)가 세월의 흐름을 지켜보고 있다. 건물 앞에 세워진 안내판을 보면 ‘한옥교회는 기독교의 토착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건축 양식으로 매우 독특한 건축 구조와 평면성을 보여준다. …한옥교회의 현존 사례가 극히 드문 현실을 감안하면 이 건물의 희소가치가 매우 높다…’라고 적혀 있다.

 

한편 북옥감리교회에서 좁은 찻길을 따라 조금만 가면 옥녀봉으로 오를 수 있다. 옥녀봉(일명 강경산)에서는 강경읍내, 금강과 강경포구가 시원하게 조망된다. 정상에는 봉수대가 복원됐다. 이곳의 봉수대는 전북 익산 광두원산의 봉수를 받아 황화산성, 노성봉수로 연락을 취했다고 한다.

 

강경읍내의 등록문화재를 찾아가는 답사여행은 빈티지 출사여행으로 이어진다. 중앙초등학교 뒤편 중앙리에서 북옥리의 옥녀봉으로 이어지는 도로 양편에 흘러간 시대의 자화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직선거리로 따지면 고작 1km 내외에 불과하나 평지 골목길을 샅샅이 누비자면 넉넉히 반나절은 잡아야 한다.

 

가로세로 길이 갈리는 지점마다 길의 이름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잘 세워져 있다. 양조장길, 아래장터길, 윗장터길, 양지뜸길, 우체국길, 홍교길 등등. 동행자끼리 함께 가서 각자 흩어져 세월 구경을 겸한 디카 촬영을 즐긴다 해도 중앙초등학교나 강경읍사무소로 다시 모이면 된다.

 

논산시의 마지막 등록문화재는 호남선 계룡역과 논산역 중간의 연산역에 남아있는 급수탑(연산면 청동리 127-74, 등록문화재 제48호)이다. 연산역 역무원은 높이 16.2m의 연산역 급수탑 역사에 대해 ‘호남선의 개통과 함께 증기기관차의 물을 공급하기 위해 1911년 12월에 설치되어 1970년대까지 약 60여년 간 사용되었다’고 설명한다. 급수탑 옆의 우물은 급수탑 급수용으로 축조된 것이다.

 

인천 개항 120년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여행

 

인천광역시 중구 일원 인천항은 1883년에 개항했다. 부산(1876년)과 원산(1881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다. 그래서 인천항을 품고 있는 인천시 중구에는 당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많은 근대문화유적이 남아있다. 흥미로운 건 부산항보다 7년, 그리고 원산항보다 2년 늦게 개항한 인천항 주변 유적들에서 유독 '최초'라는 수식어가 눈에 많이 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인천 근대문화유적을 찾아 나서는 길에 다른 어떤 교통수단 보다 지하철을 이용하길 권하고 싶다.

 

인천과 노량진을 오가던 경인선이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이기 때문이다. 물론 동선과 여행의 편의를 고려해도 자가용보다는 지하철이 훨씬 수월하다. 답동성당과 내동교회 그리고 자유공원과 일본은행거리 등 인천의 근대문화유적 대부분이 국철 1호선 동인천역과 인천역 사이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탓이다.

 

인천으로 떠나는 근대 문화유적답사는 인천 최초의 천주교 성당인 답동성당(사적 제287호)에서 시작한다. 답동성당은 동인천역에서 우현로를 따라 500m 쯤 떨어진 카톨릭 회관 뒤편 언덕 위에 자리해 있다.



가파르지 않은 경사로를 지나 마주한 답동성당은 둥근 지붕의 종탑과 고풍스러운 자태에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읽힌다. 답동성당 건립은 1886년 한․불 조약 직후 입국한 코스트 신부(1842∼1896년)의 주도로 진행되었고, 코스트 신부의 후임이었던 빌렘(홍 요셉, 1860∼1938년)신부에 의해 결실을 맺었다. 1889년 7월 1일의 일이다.



단출한 가옥의 형태에서 시작한 답동성당은 이후 첨탑을 갖춘 고딕 양식의 단층 건물을 거쳐 1937년 제4대 드뇌(전 으제니오 1904∼1937년)신부 대에 이르러 지금과 같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웅장한 모습으로 거듭났다. 답동성당은 내년이면 건립 120주년은 맞는다.

 

 

답동성당에서 우현로를 200m 정도 거슬러 오르면 우리나라 최초의 감리교회인 내리교회를 만날 수 있다. 1885년 4월 제물포항을 통해 국내로 들어온 미국 감리교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1858~1902)에 의해 세워진 교회다. 초기 내리교회는 지금의 자리가 아닌 중구 중앙동 1가, 현 파라다이스호텔 근처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내리교회가 지금의 내동에 자리를 잡은 건 한성으로 거처를 옮긴 아펜젤러가 자신이 세운 배재학당 출신 노병일을 인천으로 내려 보낸 1901년의 일이다. 하지만 당시 지어진 교회는 1964년 화재로 전소되었고, 지금의 건물은 1966년 개축한 것이다. 내리교회의 역사에서도 '최초'라는 단어가 여럿 눈에 띈다.



내리교회는 1899년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를 설립했으며, 이 학교를 통해 한국인 최초의 목사였던 김기범 목사를 배출했다. 또한 1903년에 설립한 인천 지역 최초의 사립학교인 영화학교도 내리교회 역사에 담긴 '최초'에서 빼놓을 수 없다. 교회 1층 복도에는 아펜젤러와 김기범 목사의 초상사진을 비롯해 초창기 내리교회의 역사를 기록한 흑백사진들이 전시돼 있다.

 

내리교회 후문에서 좁은 골목을 50m 정도만 오르면 성공회 내동성당(인천시 유형문화재 제51호)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은 1890년 9월29일 인천으로 들어온 코르페(한국명 고요한)주교에 의해 건축된 한국 최초의 성공회 성당이다.



한때 러시아 영사관으로 활용되기도 했지만 1904년부터 1956년까지 성공회 신학원으로 운영되었던 곳이다. 초창기 건물은 한국전쟁 때 소실 됐으며, 지금의 건물은 1956년 6월23일 복원한 것이다. 코르페 신부는 자신과 함께 입국한 랜디스 박사를 도와 1891년 4월2일, 내동성당 인근에 인천 최초의 서구식 병원인 성누가병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내동성당이 위치한 내동일대를 오래 전부터 '약대이산'이라 부른 것은 '약대인(藥大人)' 즉 '약을 주는 서양인'이라는 말에서 와전된 것이라 한다.

 

내동성공회성당에서 자유공원으로 가는 길목에 홍예문(인천시 유형문화재 제49호)이 있다. 개항 당시 인천항과 인접한 중앙동과 관동 등지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전동과 만석동으로 자신들의 거류지를 확대하기 위해 뚫은 석문이다. 폭 4.5m, 높이 13m, 통과길이 13m의 홍예문은 1905년에 착공해 1908년에 준공했다. 일본인들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곳이지만 해방 후에는 여름철 피서지로 그리고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사랑을 받던 곳이기도 하다.

 

홍예문을 지나 300m 남짓 가면 자유공원이 나온다. 1889년 조성된 자유공원은 탑골공원(1897년)보다 9년이나 빨리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다. 학도의용대호국기념탑이 있는 공원 입구를 지나면 이내 맥아더 장군 동상이 보인다.



조성 당시 각국공원이라 불리던 이곳이 자유공원이란 이름을 얻게 된 데에는 한국전쟁의 전세를 뒤집은 인천상륙작전의 영향이 적지 않다. 자유공원은 일제강점기 때는 서공원으로 그리고 해방직후에는 만국공원으로 불리기도 했다. 맥아더 장군 동상에서 좌측 계단으로 내려서면 제물포구락부가 그리고 직진을 하면 한미수교100주년 기념탑과 팔각정이 나온다. 동선 상으로 제물포구락부부터 돌아보는 게 좋을 것 같다.

 

 개항 당시 제물포 지역에 모여 살던 외국인들의 사교장이었던 제물포구락부(인천시 유형문화재 제17호)는 현재 개항기 인천에서 거주했던 인물들의 활동상을 영상으로 만날 수 있는 영상 스토리텔링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관람시간 09:00~18:00, 관람료 무료, 월요일 휴무) 오픈 당시 사교장과 도서실 그리고 당구장이 있던 내부 공간은 미국, 영국, 독일 등 회원국에서 보내온 다양한 전시물로 채워져 있고, 정면 벽에 설치된 대형 TV에서는 제물포구락부의 역사를 한눈에 살필 수 있는 영상물을 보여주고 있다.



제물포구락부의 전신은 1889년 3월 출범한 신동공사(紳董公司)였다. 조계지 의회라고도 불리던 이 기구는 각국 조계가 설치된 뒤 조계 당사자들의 공동이익을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제물포구락부는 신동공사 출범 2년 뒤인 1891년 9월에 조직되었다. 조계(租界)란 국내로 들어온 외국인들이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도록 설정한 구역을 가리키는 말로 각국 조계는 1884년 10월3일 조선의 서리독판교섭통상사무 김홍집과 미국, 영국, 청국, 독일, 일본 등 5개국 대표들이 '인천제물포각국조계장정'에 서명함으로써 설치됐다. 구락부는 클럽(Club)의 일본식 발음이다.

 

 제물포구락부를 지나 팔각정에 오르면 인천항이 한눈에 들어온다. 자유공원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이다. 팔각정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제3패루를 통해 차이나타운으로 갈 수 있는 좌측 길과 청일 조계지 경계 계단으로 이어지는 우측 길이다. 일본은행 건물들이 모여 있는 테마박물관거리로 가기 위해서는 청일 조계지 경계 계단이 있는 우측 길로 방향을 잡는 게 좋다.



청일 조계지 경계 계단은 말 그대로 일본 조계와 청국 조계가 경계를 이루던 지점으로 공자상이 서있는 계단 상부는 차이나타운의 명물인 삼국지 벽화 거리가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청일 조계지 경계 계단에서 일본제1은행(인천시 유형문화재 제7호), 제18은행(인천시 유형문화재 제50호), 제58은행(인천시 유형문화재 제19호)이 모여 있는 테마박물관거리는 지척이다. 계단 하부에서 한 구역을 내려가면 '구 일본제1은행' 이정표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좌측으로 방향을 잡으면 된다. 이정표 우측 대각선 방향의 공터는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인 대불호텔 터다.

 

 테마박물관거리에는 조선은행이란 이름이 붙은 일본제1은행을 시작으로 제18은행, 제58은행이 나란히 자리해 있다. 청일전쟁 후 경제 수탈의 첨병역할을 했던 이들 일본은행 건물들은 현재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일본제18은행은 인천개항장근대건축 전시관(관람시간 09:00~18:00, 관람료 무료, 월요일 휴관)으로 운영 중이며, 일본제1은행은 오는 5월 인천한국근대최초사 박물관으로 다시 태어날 예정이다.



특히 인천개항장근대건축 전시관으로 활용되는 일본제18은행에서는 답사를 통해 돌아본 인천 중구 내 모든 근대 건축물을 모형으로 다시 만날 수 있어 답사여행을 되짚어 보기에 더없이 좋다. 개항 당시 만들어진 부둣가 창고를 지역 예술인들의 창작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는 인천아트플랫폼과 중국의 문화와 역사를 한눈에 살필 수 있는 한중문화관 그리고 인천의 대표 관광지인 차이나타운도 인천 중구로 떠나는 여행에 놓치기 아까운 곳들이다.

 

근대문화유산, 군산의 '그' 날을 이야기하다

 

전북 군산시는 금강과 서해바다가 만나는 호남의 곡창지대이자 해상교통중심지다. 곡식이 많고 물길이 편해 살림살이가 넉넉했지만 반대로 외세의 침략도 많았다. 고려시대, 호남 조창인 진성창을 노린 왜구의 침략이 끊임없었던 것. 그들을 화포로 물리친 진포대첩비가 당시의 상황을 말해주듯 금강 변에 우뚝 서 있다. 금강 변에는 군산의 외세침략을 기억하는 공간들이 즐비하다. 1900년대 군산을 점령한 일본인들을 기억하는 공간과 그에 맞서 우리의 정신을 이어온 사람들의 기록이 담긴 공간들이다.

 

먼저 살펴볼 것은 일본인들이 누린 부의 공간이다. 첫 번째 장소는 당시 군산으로 모여든 돈의 규모를 짐작케 하는 구)조선은행(국가지정등록문화재 제374호)이다. 2층 건물이지만 실제 높이는 4층 건물과 같은 이 건물은 지을 당시 군산 최대의 건물이었다고. 동판을 이어 붙여 일본무사의 투구처럼 뾰족하게 만든 지붕이 인상적이다.



당시 군산 거주 일본인의 돈은 군산의 쌀에서 비롯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군산에서 생산하고 군산으로 모여든 수많은 쌀을 일본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 언제든 배가 닿을 수 있도록 뜬다리를 만든 내항, 교역 물품을 관리하던 세관, 거대한 규모의 창고들, 화물운반을 손쉽게 하기 위해 항구까지 이어진 철로 등이 모두 쌀과 연관된 것. 구)군산세관 본관(도지정기념물 제87호) 전시실에서는 당시, 쌀의 거래량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사진들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부를 쌓은 일본인들은 군산에 그들만의 주거공간을 만들었다. 월명산이 바닷바람을 막아주어 아늑한 월명동, 신흥동, 금동, 금광동, 영화동, 장미동 일대가 그곳. 이곳에 히로쓰가옥(국가지정등록문화재 제183호)과 동국사(국가지정등록문화재 제64호)가 있다. 신흥동에 자리한 히로쓰가옥은 일본 무사의 고급주택을 그대로 본 따지은 목조주택으로 가옥의 보존상태가 우수하다. 부엌과 방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등 실내의 모든 목재는 백두산에서 가져다 지은 것이라고. 영화 타짜가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금광동에 자리한 월명산 동국사는 국내 유일의 일본사찰형식으로 지은 절집이다. 일본 조동종 승려 우치다가 1909년, 금강사라는 이름으로 세운 후 1913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일본 에도시대 건축양식으로 지은 사찰의 외관은 수수하다. 지붕이 높고 단청을 하지 않았으며 내부로 들어가는 문이 대웅전과 요사채를 연결한 복도 가운데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곳에 모셔진 석가삼존불(도지정유형문화재 제213호)은 해방 후, 일본사람들이 모시던 부처를 모실 수 없다는 신도들을 위해 김제 금산사 대장전에 있던 불상을 옮겨 온 것이라 한다. 임진왜란 때 승병장을 지낸 벽암 각성스님이 만든 삼존불상은 일본의 번영을 빌던 사찰과 묘한 대조를 보인다. 2년 전 문화재청의 전국 사찰문화재 조사과정에서 삼존불상 안에 복장유물 333점이 들어있음이 확인된 이 불상들은 문화재지정 심의중이다.

 

일본인들은 우리 문화재를 수집, 자신의 집을 꾸미는데 사용하곤 했다. 적산가옥 곳곳에서 우리 석물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그런 까닭이다. 군산의 대표적인 문화재 수집상은 시마타니 농장주였던 시마타니 야소야이다. 시마타니 농장의 곡물건조장 터에 세워진 발산초등학교의 뒤편으로 가면 그가 문화재를 모아두었던 시마타니 금고(국가지정등록문화재 제182호)를 볼 수 있다.



육중한 철제금고문이 달린 것은 물론, 창문에도 창살이 달려 외부로부터 차단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헐려진 본채와 연결되었던 흔적도 건물 외벽에 남아있다. 해방 후 그가 수집한 수많은 보물급 문화재가 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다 한다. 옮길 수 없어 그대로 둔 수집품도 있다. 금고 옆에 자리한 발산리 5층 석탑(보물 제276호)과 발산리 석등(보물 제234호) 등, 어느 곳에서 옮겨졌는지 알 수 없는 석물들이 십여 점 자리하고 있다.

 

한국인의 삶의 이야기가 담긴 첫 번째 장소는 채만식문학관이다. 채만식이 1937년 10월부터 1938년 5월까지 조선일보에 연재했던 소설<탁류>는 일본강점기 군산사람들의 생활을 세세히 기록했던 작품. 그의 친필원고와 수많은 작품들을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다.

 

군산은 한강 이남에서 제일 먼저 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이자 호남 만세운동의 촉발지이다. 1919년 3월 5일에 1천여 명이 모인 첫 만세운동 이후 무려 27번이나 계속되었다. 한국인(6,581명)보다 일본인(6,809명)이 더 많이 살고 있던 군산의 당시 상황으로 볼 때 매번 주모자가 잡혀 들어가면서도 28번이나 만세운동을 했다는 것은 모든 군산사람이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정도며, 이 만세운동의 중심에 구암교회가 있었다. 구암교회 교인들과 교회가 설립한 영명학교(현 제일중고등학교)의 교사들이 만세운동의 주축이 된 것. 구암교회의 옛 건물에 자리한 3·1운동기념관에 당시 사용했던 태극기 목판 복제본을 비롯해 독립운동연표 등이 전시되어있다.

 

군산의 근대문화유적을 이야기하며 빼놓을 수 없는 곳이 개정동의 이영춘가옥(도지정유형문화재 제200호)이다. 일본강점기 국내 최대의 농장주였던 구마모토가 봄·가을에 머물 자신의 별장으로 지은 이 집은 조선총독의 관사와 견주어질 만큼 공들여 지었다한다. 사방으로 출입문이 나 있는 것과 일본식 아기자기한 정원을 만들지 않고 큰 나무들이 둘러싼 자연스런 정원을 가진 것이 특징이다. 실내에는 자신의 부를 과시하듯 수집한 고종황제가 사용했던 의자와 침대가 놓여있었다고.



구마모토가 지은 집에 이영춘가옥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은 해방이후이다. 구마모토가 소작인들의 건강을 책임질 이영춘 박사를 초빙해오면서 약속한 농촌보건위생연구소를 지어주지 못해 집과 의료장비 일체를 이박사에게 준 것.



해방 이전, 이영춘 박사는 구마모토의 지원을 받아 마음껏 소작인들의 건강을 돌보았다. 소작인들을 무료 진료한 것은 물론, 춘궁기에 먹을 것이 없는 아이들을 위해 싸라기를 받아 초등학교에 급식을 하기도 한 것. 초등학교에 양호실을 만들어 양호교사를 둔 것도 그가 처음이라고 한다. 이런 노력으로 개정의 한국인들은 일본 본토 사람들보다 건강상태가 좋았다 한다.

 

이영춘 박사는 해방 이후 자신의 자혜의원을 개정중앙병원으로 확장해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의료보험제도를 실시했다. 농민들이 보리수확 철과 쌀수확 철에 일정한 돈을 내고 일 년 내내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한 것. 우리나라 국민의료보험이 시작되던 시기, 이 지역이 시범지역으로 선정되어 실시되었던 것도 그런 까닭이라고. 그의 노력이 담긴 개정병원과 교육시설들은 이제 찾아볼 수 없지만 몸과 마음을 모두 치료하고자 했던 이영춘박사의 정신만은 그가 남긴 유품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현재 이영춘가옥은 기념관으로 변신 중이다.



군산시는 문화유적을 걸으면서 돌아볼 수 있는 구불길을 만들었다. 현재 비단강길, 햇빛길, 큰들길, 구슬뫼길 등 4개의 코스가 완성되었다. 구불1길인 비단강길에서는 채만식문학관과 금강의 아름다움을, 구불 3길에서는 발산리유적지를, 구불4길에서는 이영춘가옥을 돌아볼 수 있다. 군산의 밤풍경을 만끽할 수 있는 구불길도 만들어지고 있다. 금강하굿둑에서 째보선창, 내항을 거처 월명공원 수시탑까지 이어지는 약 3시간 코스의 야간도보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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