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탔을 땐 문경새재IC에서 나와 점촌 방향으로 3번 국도로 가야 한다. 3번 국도로 가다 10분도 채 안 돼 왼쪽에 진남교반 시작지점인 진남휴게소가 나온다. 이곳에 주차하고 고모산성과 석현성, 토끼비리 등을 둘러볼 수 있고, 진남휴게소에서 유턴하여 성황당까지 가서 그곳에 주차하고 출발할 수 있다. 성황당은 3번 국도로 가다 환경관리사업소 폐수처리장에서 마을길로 접어들어 길을 따라 잠시 올라가면 찾을 수 있다.
우리의 옛길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묻힐 뻔했던 문화와 역사와 사람이 우리 앞으로 뚜벅뚜벅 살아서 돌아오고 있다. 이젠 역사를 되돌아볼 여유를 찾았는가 여겨진다.
그 대표적인 길이 문경의 토끼비리다. 한때 360㎞에 이르는 동래에서 서울까지의 영남대로 중에 가장 험한 길로 유명했던 토끼비리는 <영남대로>를 쓴 고려대 최영준 명예교수에 의해 1980년대 재발견되기까지 역사의 뒤안길에 내버려져 있었다. 최 교수는 토끼비리를 발견하고 “이 길에 한국의 모든 옛길 역사가 녹아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길이는 길지 않지만 길이 보여줄 수 있는 역사, 축대공법, 사연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길은 국가지정 문화재 명승 31호로 지정될 정도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문경새재와는 15㎞ 거리에 있는 문경의 토끼비리는 이름도 사연만큼이나 많다. 토끼길이라고 해서 토천(兎遷)이라 불린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유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과 전투를 벌이며 남하하다 이곳에 이르렀다. 절벽과 낭떠러지에 길이 막혀 여기저기를 헤매고 있었다. 그때 마침 토끼 한 마리가 벼랑을 따라 달아나는 걸 보고 쫓아가보니 길을 낼 만한 곳이 보였다. 토끼가 지나간 길을 따라 벼랑을 잘라 길을 냈다.”
토끼가 지나간 길, 즉 토끼길이며 그것을 한자로 토천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비리’는 ‘벼루’의 문경 방언으로서 강이나 바닷가의 위험한 낭떠러지를 말하며, 벼랑의 개념과 비슷하게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절벽과도 같은 산허리를 따라 굽이굽이 이어진 길이 토끼비리다.
이 길은 관갑천잔도, 곶갑천잔도, 토잔 등으로도 불렸다. 잔도(棧道)는 험한 벼랑에 나무를 선반처럼 내매어 만든 나무사다리길을 말하며, 천도는 하천변의 절벽을 파내고 만든 벼랑길을 뜻한다. 용어로 볼 때 강가의 벼랑을 이루는 절벽을 깎아낸 길과 나무 등을 이용해서 만든 길이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 말 조선 초 명문장가였던 권근의 기문(記文)에도 관갑천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관갑(串岬)이 가장 험하여 벼랑에 의지해서 사다리길을 만들었고, 관갑천(串岬遷)은 용연(龍淵)의 동쪽 언덕이며 토천이라고도 한다. 경상도는 남쪽에서 가장 크며, 서울에서 경상도로 가려면 반드시 큰 재를 넘는다. 그 재를 넘어서 약 100리 길은 모두 큰 산 사이를 가야 한다. 여러 골짜기의 물이 모여 내를 이루어 곶갑(관갑·串岬)에 이르러 비로소 커진다. 이 곶갑(관갑)이 가장 험한 곳이어서 낭떠러지를 따라 사다리로 길을 열어서 사람과 말들이 겨우 통행한다. 위에는 험한 절벽이 둘러 있고, 아래는 깊은 시내가 있어 길이 좁고 위험하여 지나는 사람들이 모두 떨고 무서워한다. 몇 리를 나아간 뒤에야 평탄한 길이 되어 그 내를 건넌다. 그것이 견탄(犬灘)이다. 견탄은 호계현의 북쪽에 있는데, 나라에서 제일가는 요충이요, 경상도에서 가장 험한 곳이다.”
여기에서 관갑은 경사가 급하고 험한 산허리를 뜻하며, 관갑천은 산허리에 난 길을 뜻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용연은 관갑 바로 밑에 흐르는 영강을 가리킨다. 토잔은 토끼비리와 잔도의 합성어로 볼 수 있다.
영남대로상에 주요 천도는 충주 남쪽의 달천 좌안, 문경새재 제2관문인 조곡관 아래의 용추 부근, 밀양의 작천, 양산의 황산천 등에 있었으나 지금은 문경의 토끼비리와 밀양의 작천잔도 등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 나머지는 사라지고 없다.
관갑천잔도는 영강 수면으로부터 10~20m 위의 석회암 절벽을 깎아서 만들었다. 총연장 2㎞를 조금 넘는 이 잔도는 세 가지 공법을 이용해 건설했다. 1구간은 급한 암벽을 깎아내어 그 토석을 다져 평탄하게 만들었으며, 토석의 유실을 방지하기 위해 약 3m 높이의 축대를 쌓았다.
2구간은 벼랑이 가장 가파른 곳으로, 석회암과 역암을 절단한 흔적이 뚜렷하게 보인다. 잔도의 폭이 급히 좁아지는 지점에는 축대를 쌓아 길폭을 넓히거나 길 가장자리에 말뚝을 박고 그 위에 나무로 만든 난간을 설치해 길을 넓혔음을 입증하는 흔적들이 많이 발견된다.
3구간은 산줄기가 뻗어 내려와 고갯마루를 이루는 부분으로 석회암맥이 돌출한 부분으로 인공으로 암석 안부를 만들었다. 이 안부는 영남대로상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보존상태도 양호하다고 권근의 기문에 기록돼 있다.
그러나 인간이 바꾸었을까? 홍수와 같은 자연의 순리로 변했을까? 현재 그 길이는 절반으로 줄어 있다. 암벽을 깎아 만든 천도와 절벽에 나무사다리길을 놓은 잔도길은 그나마 형체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사고 방지를 위해 문경시청과 옛길박물관에서 탐방로 형태의 나무데크를 덧대어두었다. 운치와 사고 위험을 동시에 줄여놓은 셈이었다. 옛길인 전통 도로와 근대 도로의 부조화인지, 조화 내지 화해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토끼비리로 접근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문경새재에서 영남대로를 따라 계속 내려와 성황당이 있는 돌고개마을, 일명 석현마을 고갯길에서 출발할 수 있고, 고모산성 바로 아래 3번 국도변에 있는 진남휴게소에서도 원점회귀할 수 있다.
첫날은 옛길박물관 안태현 학예연구사와 함께 성황당에서 출발했다. 돌고개마을 입구에 있는 성황당은 마을 수호신이자 한양으로 과거시험 보러 가던 선비와 보부상이 토끼비리를 넘어와 쉬어가던 쉼터 역할도 했다. 문경시청에서 주막 2채를 지어 옛날 분위기를 재현했다.
▲ 돌고개마을 성황당과 당산나무, 돌탑 옆으로 영남대로 길이 있고, 바로 그 앞에 주막을 만들어 과거를 재현하고 있다.
성황당 바로 앞 돌고개 고갯길을 꿀떡고개 혹은 꼴딱고개라고도 한다. 과거를 보러 가던 선비들이 이 꿀떡고개에서 반드시 꿀떡을 먹어야만 과거에 급제한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꿀떡같이 과거에 착 달라붙으라는 의미다. 꼴딱고개는 험한 토끼비리를 넘어오면서 숨이 턱밑까지 차올라 꼴딱고개라 했다고 한다. 코재나 깔딱고개와 비슷한 개념이다.
▲석현성 중앙문인 진남문/월간산
성황당을 지나면 바로 눈앞에 석현성이 펼쳐진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이후 축성한 성이다. 바로 옆 고모산성 남문과 연결돼 있다. 임진왜란 때 문경새재 3개의 성이 바로 뚫리는 비극을 교훈 삼아 외적을 사전에 막기 위해 성을 쌓았다고 한다. 일자형 성이며, 중앙 성문엔 진남문(鎭南門)이라 쓰여 있다. ‘남쪽을 진압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축성 이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석현성 왼쪽을 따라 토끼비리길로 접어들었다. 잠시 숲속 길이 나오는가 싶더니 이내 오솔길이 나왔다. 길 폭은 매우 좁았다. 나무가 무성할 땐 길을 찾기 힘들 정도였다. 바위를 깎아 만든 천도가 이어졌다. 바닥이 반들반들한 바위는 세월이 흘러도 그 옛날 사람들이 다닌 흔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잔도는 붕괴 위험이 있어 나무데크로 교체했다. 안태현 학예사는 “길 폭은 옛날엔 두 사람이 지나갈 정도의 2~3m로 추정되나 지금은 1m도 채 되지 않아 정비하고 있다”고 했다. 정비가 끝나고 나면 노새를 끌고 이 길을 가볼까 생각 중이라고 했다. 재미있을 것 같지만 현재의 길 같은 모습으로는 불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천도와 잔도를 지나니 거의 60~70도의 각도에 깎아 만든 아슬아슬한 길이 나왔다. 아래는 기록에 나온 대로 20~30m의 낭떠러지였다. 내려다보면 아찔했다. 몇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왜 이렇게 험한 낭떠러지에 길을 닦았을까.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옛날 길을 간 사람은 무심코 이 길을 지났을까.
여기저기 책을 뒤져봤다. <영남대로>와 <삼남대로> <관동대로> 등의 책을 쓴 옛길 전문가 신정일씨가 그 답을 줬다. “옛길을 보면 선조들의 지혜를 느낄 수 있다. 동래에서 한양까지 가장 빠른 길을 닦은 게 영남대로이고 옛길”이라고 말했다. 지금 경부고속도로는 450㎞ 정도 되지만 영남대로는 직접 걸어본 결과 대략 360㎞가 된다고 했다. 거의 90㎞ 차다. 자연을 파괴하면서 닦은 길과 자연을 적절히 이용하면서 걷는 길의 차이다. 새삼 선조들의 지혜가 느껴졌다.
태극 모양의 잔도를 지나니 조그만 묘가 나왔다. 묘 바로 옆으로 토끼비리 마지막 구간인 천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도저히 사람 손으로 다듬었으리라고 믿어지지 않는, 두 사람이 다닐 만한 길이 바위 위에 나 있었다. ‘야, 이런 길이 있었다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왼쪽으로는 오정산 정상 2.5㎞라는 이정표가 있었다. 오늘은 이 정도 둘러보기로 하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 석현성에서 고모산성 방향으로 한 바퀴 돌았다.
이날 동행한 옛길박물관 안태현 학예연구사는 민속학 박사과정 수료자로 우리 민족의 신화와 설화, 민속에 관한 전문가다. 다음날 만날 문경시청 문화예술과 문화재담당 엄원식씨는 산성 관련 박사과정을 수료했다고 한다. 문경에 있는 설화와 민속, 산성에 관한 모든 얘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둘쨋날인 6월 6일. 진남휴게소에서 오전 9시 문경시청 엄원식씨와 다른 직원 한 명을 만나 동행키로 했다. 이날은 진남휴게소를 기점으로 진남팔경 중 으뜸이라는 진남교반의 비석을 보고 고모산성→석현성→토끼비리→영강→진남역→진남휴게소→신현리 고분군→진남휴게소로 회귀하기로 했다.
진남교반은 길 박물관이고 경북팔경 중 제1경
진남휴게소 바로 위쪽 숲속을 헤치고 조금 지나자 숲속에 묻혀 있던 비석이 눈에 확 들어왔다. 전면은 ‘慶北八景之一(경북팔경지일, 경북팔경 중 제일)’이라 새겨져 있었다. 뒷면은 ‘소화(昭和) 8년 10월에 대구일보사 주최로 경북 주민대상 명승지 투표를 한 결과, 진남교반이 으뜸으로 1경을 차지했다’고 전하고 있다.
비석은 소화 13년 가을에 마성면장이 세운 것으로 돼 있다. 소화 1년은 1926년이다. 따라서 1933년에 진남교반이 경북팔경 중 1경으로 꼽혔으며, 그로부터 5년 뒤인 1938년에 1경을 기념하기 위해 비석을 세운 것이다. 교반이라는 말은 다리 주변을 뜻하며, 진남교반은 진남교 다리를 중심으로 한 지역을 말한다. 현재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문경새재가 제2경이다. 진남교반이 그만큼 더 아름다웠다는 얘기다.
아직 이 길은 제대로 닦여 있지 않았다. 문경시청에서도 고모산성과 토끼비리길을 연계해 관광코스로 개발하기 위해 부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진남휴게소 주변 땅을 매입하지 못해 제대로 정비를 못하고 있다 한다.
안타까움을 뒤로 하고 신라시대 축성한 고모산성(姑母山城) 으로 올라갔다. 고모산성은 일명 할매산성, 할미산성이라고도 한다. 고모산성은 2000년부터 시작된 유교문화권 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정비가 시작됐다.
서문에 다다랐다. 성의 높이만 10m 이상이었다. 높이가 10m 이상 되려면 하단부의 폭도 그 정도는 충분히 될 것 같았다. 서문은 아직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곧 허물어질 것 같은 모습이다. 바로 그 옆으로 새로 축성한 성벽이 웅장한 위용을 뽐내는 듯했다. 성벽 위로 올라서자 발아래 진남교반의 아름다운 경관이 한눈에 들어왔다. 맞은편으로는 병풍바위, 발아래는 절벽을 휘돌아가는 영강 물줄기, 탄광철도, 신작로, 2차선 국도, 4차선 국도, 고속도로가 이어지고, 병풍바위 위로는 영남대로 옛길이다. 한마디로 여기는‘길박물관’이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전통과 근대의 만남이라고나 할까.
조금 나쁘게 보자면 길들의 전쟁이었다. 근대 도로는 자연의 길, 인간의 길, 역사의 길을 배려하지 않는다. 오직 통로의 논리만 관철시키려 할 뿐 전통 도로가 지녀온 도리, 즉 길의 이치를 압살시킨다. 산이 막히면 터널을 뚫고, 물이 막히면 콘크리트 교량을 놓는다. 근대 도로는 마치 일사불란한 명령체계의 권력구조와 흡사하다.
만남은 상생할 수 있지만 때로는 서로에게 상처를 남길 수 있다. 새로 닦은 4차선 3번 국도는 병풍바위를 관통하며 작살냈고, 중부내륙고속도로는 오정산을 관통했다. 전통과 근대의 부조화의 단면이다. 그 옆으로 일제강점기 때부터 있었던 탄광철로와 왕복 2차선이 채 안 되는 구 도로가 영강을 건너 마주 달리고 있었다. 바로 인근엔 3번 국도 구 도로인 왕복 2차선도 엉켜 있었다. 문경이 교통의 요충지임을 실감케 하는 장면이다.
남문으로 내려와 다시 석현성으로 갔다. 어제 갔던 토끼비리 그 길이다. 한 번 더 가보자.
마지막 천도구간을 지나 호젓한 오솔길이 이어졌다. 영남대로는 영강을 따라 계속 가지만 진남휴게소로 돌아가기 위해 방향을 북쪽으로 틀었다. 영강을 따라 거슬러 조금 올라가다 대교를 지나 진남역으로 갔다. 진남역에선 철로바이크를 타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슬슬 시장기가 느껴졌다. 문득 시계를 보니 어느덧 12시를 넘고 있었다. 식당에 예약을 해놓고 잠시 문경 신현리 고분군에 다녀오기로 했다. 신현리 고분군은 2000년부터 시작된 유교문화권 개발사업의 일환으로 고모산성과 신라시대 고분을 집중 발굴했다. 금동제 귀걸이, 화살촉, 낫 등 신라시대 유물이 대거 출토됐다. 유물은 곧 대구박물관에 전시될 예정이라고 했다.
고분군에서 내려오는 길에 다시 길에 대한 상념이 떠올랐다. 인간에게 걷는다는 것은 확실히 단순한 행위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듯했다. <나는 걷는다>를 쓴 베르나르 모리비에르는 “홀로 걸으며 생각을 하는 동안 근본적인 것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걷는다”고 했다. 걷는 것은 곧 생각하는 것이요, 곧 철학하는 것이라는 의미다. 루소도 “산보를 즐기는 동안에는 그날 중 가장 자유롭고 안전한 ‘나’라는 자아 속으로 되돌아가 나만을 위하여 즐길 수 있고, 빈틈없이 인간의 진실과 자연이 소망하는 그대로의 존재로 되어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라고 했다. 월간산 2009.7 박정원차장
.선비 원망하며 자결한 처녀, 구렁이가 되어…
옛날 과거길에 오른 어느 선비가 이곳 초가집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다. 그 집에는 부녀가 살고 있었으며, 아버지는 그 선비의 인품이 범상치 않음을 알고 자기 딸을 맡아 달라고 간청했다. 선비는 며칠을 머물다가 과거길을 떠나며 급제한 후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다. 처녀는 매일 치성을 올리며 기다렸으나 선비는 끝내 오지 않았다. 선비는 당당히 급제했으나 그 약속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수년을 보냈다. 아버지마저 죽고 선비를 기다리다 지친 처녀는 선비를 원망하며 자결한 후 큰 구렁이로 변했다.
그 후 이곳을 지나는 행인들이 구렁이에게 자주 피해를 입는다는 소문이 사방으로 퍼졌다. 선비는 그제야 구렁이가 그 처녀의 원귀임을 알고,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제사를 올렸다. 천둥번개와 함께 구렁이가 나타나 눈물을 흘리며 사라진 뒤론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이 처녀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이곳에 성황당을 짓고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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