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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전라북도

고창-고인돌과 질마재따라100리길

by 구석구석 2009. 1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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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고인돌과 질마재 따라 100리 길’

 

선운사 동백·복분자·꽃무릇·고인돌…
고창의 명물 두루 꿰는 43.7km 낭만 길
강둑 길, 호반 지나 국가지정 명승 선운산 계곡으로

 

 

 

고창엔 유명인사와 명소, 맛집 등이 너무 많다. 가장 아름다운 시어를 썼다는 미당 서정주 선생은 그의 시집 <질마재 신화>에서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라고 할 정도로 서해에서 질마재로 넘어오는 코끝 찡한 바람이 부는 고창을 사랑했다. 지난 2000년 유네스코로부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고인돌 고분군이 있는 곳도 고창이다. 또 지난 9월 말 국가지정 문화재 명승으로 지정된 선운산도 여기 있다.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에서 특유의 맛을 내는 풍천 장어로도 유명하다. 그 외에도 판소리 신재효 선생의 생가, 고창읍성, 인촌 김성수 선생과 LG 창업주의 묘지, 복분자 등 고창의 명물들은 어디 내놔도 손색없는 자랑거리들이다.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길이 있다. 방법으로서의 길이 아니라 실제의 길이다. 단절된 옛길을 ‘고인돌과 질마재 따라 100리 길’로 연결시켰다. 전체 길이가 무려 43.7㎞에 달한다. 길이 긴 만큼 유적과 볼거리, 먹을거리도 가득하다. 제1 코스는 고인돌박물관~생태습지~원평마을로 8.8㎞에 이르는 ‘세계문화유산 고인돌길’이다. 2코스는 원평마을~연기마을의 7.7㎞ 구간 ‘인천강 풍천장어와 복분자길’이다. 3코스는 연기마을~검당소금전시관으로 14.5㎞ 거리의 ‘시와 차와 국화꽃이 있는 질마재길’이다. 4코스는 검당소금전시관~선운산관광안내소 12.7㎞ 거리의 ‘천오백년 화염(火鹽)의 역사가 살아있는 선운산 보은길’이다. 전부 수백 년 이상 된 옛길이다.

 

▲ 1 고인돌박물관 인근에 있는 고인돌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인돌”이라고 칭송 받았고, 교과서에도 실렸다. 2 매산마을에 있는 고인돌 고분군. 3 선운사 보은길로 가는 길에 있는 참당암 녹차밭. 안개가 서린 듯한 밭과 햇빛에 반짝이는 찻잎이 운치를 자아내고 있다.

 

어느 길로 먼저 돌아도 상관없다. 각 길마다 고유의 특색을 지닌 길이 있기 때문이다. 가장 쉬운 방법은 고창읍에서 가장 가까운 고인돌박물관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고인돌박물관에는 넓은 주차장이 있어 누구나 쉽게 방문할 수 있도록 했다.

고인돌은 지석묘(支石墓)로서 수천 년 전 청동기시대의 사람 무덤이다. 고창 죽림리 일대는 ‘고인돌 떼무덤’일 정도다. 죽림리 매산마을에 있는 크고 작은 바윗덩이는 전부 고인돌이다. 고창군에 분포돼 있는 고인돌의 정확한 수는 현재 대략 85곳에 2000기 이상 되는 것으로 파악된다. 바둑판형인 남방식, 탁자형인 북방식 등 그 형태도 다양하다. 고인돌마다 각각의 번호를 붙여 관리하고 있다.

인근 지동마을 외딴 집에 있는 고인돌은 전형적인 북방식 지석묘로 미국의 고인돌 전문가가 와서 감탄하며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인돌”이라고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 가 보니 교과서에서 본 아름답고 제단 같은 그 고인돌이었다. 매산마을의 고인돌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니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이라 하루 종일 살펴봐도 다 못 볼 것 같았다. 갈 길이 멀어 바쁜 걸음을 재촉했다.

오베이골로 넘어가는 매산재를 넘었다. 재 넘어 운곡마을 사람들이 닥나무를 재배해서 고창읍에 내다 팔기 위해 한지를 지고 넘나들었다는 고개다. 매산재를 서낭재, 쥐겁재라고 부르기도 했다. 서낭은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 있었다고 불렀을 법하지만 쥐겁재는 또 뭘까?

 

 

 

 

▲ 1 나무가 우거진 고인돌길을 김동식 문화관광해설사가 설명하며 걷고 있다. 2 옛날 운곡마을 사람들이 한지를 팔러 다니던 길에 운곡저수지가 들어서 한지는 사라지고 길만 남아 있다. 3 운곡 용계마을 사람들이 수몰 이후 실향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운곡저수지 옆에 망향정을 세웠다. 4 가로·세로 5m 크기에 달하는 동양 최대의 고인돌을 김동식 해설사가 가리키고 있다.

 

고인돌박물관이 1구간 출발지점

동행한 김동식(60) 문화관광해설가는 “지금 고인돌박물관이 있는 자리가 과거엔 더 넓은 평야라 아마 쥐들이 많았을 것 같다. 사람들이 고개를 넘으면 그 소리에 쥐들이 겁을 내 소란스럽게 울어 그렇게 부르지 않았나 여겨진다”고 했다. 김동식 해설가는 30년간 교직생활을 하다 지난해 교장으로 퇴직한 분이다. 8년간의 교장 생활을 명퇴하고 문화해설가와 숲해설 겸 등산안내인을 하고 있으니 오히려 교직생활할 때보다 더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했다. 보람 있는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고 한다.


“오베이골은 오방곡의 전라도 사투리로, 다섯 방향으로 고개를 넘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오베이재(운곡~아산), 백운재(운곡~부안 사창), 행정재(운곡~고창 송암), 쥐겁재(운곡~고창고인돌), 해암골(운곡~신림 해암)로 빠져나가는 오거리 역할을 한 골짜기지요. 지금은 지난 1981년 운곡댐이 생긴 이래 사람들 통행이 뜸해졌어요.”

옛날 오베이골 사람들이 한지를 팔러 장에 다닌 길로 걷고 있다. 작은 돌길로 만든 걷기 좋은 길이다. 조금 더 가니 흙길이다. 맨발로 걸으면 더 좋겠다. 외국인들이 조깅하러 자주 찾는다고 했다. 1구간 8.8㎞를 왕복하더라도 4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갑자기 눈앞에 그림 같은 연못이 펼쳐졌다. 생태습지연못이다. 운곡댐이 생긴 이래 30여 년간 거의 사람이 다니지 않아 물이 고여 좋은 습지가 형성됐다. 환경부에서 생태조사를 나와 습지보존지구로 지정할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수양버들과 연꽃·습지식물이 붉나무·얼음나무·참나무와 적절히 조화를 이뤄 향긋한 숲 냄새가 코를 찌른다. 숲 향기를 가장 많이 내는 나무가 비목이라 한다. 비목 잎을 잘라 비벼서 코에 갖다댔다. ‘아하, 이 향기였구나!’ 숲속에 나는 그 냄새보다 더 진하다. 비목이 눈에 자주 띄었다.

수많은 실향민을 만든 운곡댐에 이르렀다. 운곡, 용계리 158세대가 운곡댐으로 인해 고향을 떠났다. 운곡마을은 원래 아름다운 지역이었다. 예로부터 심산유곡이라 마을 주변이 봉우리로 둘러싸여 아침저녁으로 안개가 덮여 운곡이라 불렸다고 한다. 청정 골짜기에 수질이 좋아 영광 원자력발전소가 건설되면서 용수로 쓰기 위해 운곡댐을 만들었다.

수백 명의 실향민을 만든 운곡댐은 두루미 등 새들의 낙원으로 변해 있었다. 실향민들은 가슴 아프겠지만 175만㎡(53만 평)의 면적을 자연에 양보했다고 하면 어떨까.

적적한 운곡마을엔 수백 년 된 보호수가 1세대만 남은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보호수에서 250m 동쪽으로 올라가면 동양에서 제일 큰 고인돌이 나온다. 가로·세로 약 5m 크기에 무게는 300t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다. 이곳 주변에서는 수백 년 전부터 닥나무를 재배해 7개의 한지공장에서 생산한 한지를 쥐겁재를 통해 내다 팔았으나 수몰 이후 흔적도 없이 모두 사라졌다. 흔적만이라도 남겨 유산으로 보여줄 수 있었을 텐데….

운곡서원과 운곡샘을 지나 망향정에 다다랐다. 운곡, 용계리 주민 수백 명이 실향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지난 1987년 지은 정자와 비석이 있다. 여기서부터 734번 군도로 잠시 연결된다. 운곡저수지 끝 지점에 있는 원평마을이 1코스 마지막이다.

2코스는 고창의 대표적 먹거리인 인천강 풍천장어와 복분자길이다. 서해로 흘러가는 인천강을 따라 걷는 길이다. 고창의 수많은 역사를 담고 흐르는 인천강은 고창의 대표적인 참게, 가물치 등 민물어종이 풍부하여 왜가리, 백로, 두루미, 청둥오리 등 다양한 철새들이 날아든다.

 

 

 

 

▲ 1 페교가 된 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해서 미당 시문학관으로 만들었다. 2 미당 서정주 선생의 생가. 3 선운사 뒤편에 있는 500년 이상 된 동백나무 숲. 4 코스모스 우거진 인천강 강둑길을 김동식 해설사가 걷고 있다. 이 주변이 명당으로 꼽히는 지역이다.

 

풍천장어와 복분자길로도 유명

 

 

 

인천강의 대표적인 어종인 풍천장어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지역에서 잡히는 장어를 가리키는 말이다. 풍천이란 고유지명은 안동 지방에 있다. 일부 풍수가들은 동출서류한 인천강이 선운산을 앞에 두고 다시 서출동류로 역류해 서해 북쪽 바다로 흘러드는 명당수인 인천강에서만 잡히는 장어를 풍천장어라고 주장한다.

이 길을 따라가면 복분자 공장들도 몇 곳 눈에 띈다. 고창에서 생산되는 복분자 관련 상품이 전국 시장의 30~40%를 점유하고 있다고 했다. 복분자 공장을 지나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산초등학교가 나온다. 폐교 직전인지 ‘폐교 반대’ 플래카드가 붙어 있다. 일부에서는 수련관이나 펜션 등으로 활용하기 위해 찬성한다고 한다. 자리는 좋아 보였다.  

아산초등학교 뒤를 지나 인천강 강둑길로 따라가다 보면 풍수가들이 금반옥호(金盤玉壺)와 선인취와(仙人醉臥)라고 주장하는 명당을 만나게 된다. 신선이 말을 타고 내려와 금반옥호의 술상을 차려 놓고 예쁜 옥녀와 술을 마시다 취해 술병을 엎어놓고 누워 있는 형국이란다. 명당인지 아닌지 비전문가는 봐도 잘 모르지만 풍수가들이 그렇다고 전하니 ‘그러려니’ 하고 지나쳤다. 실제 이 부근에 인촌 김성수 선생과 LG 창업주의 묘지가 있다.

강둑길을 지나 산과 접해 있는 인천강 옆 나무 데크 길로 접어들었다. 게가 눈에 언뜻언뜻 보였다. 산길인지 강길인지, 바닷길인지 분간이 안 됐다. 영락없이 ‘게가 산으로 가는’ 형국이다. 산에서 게를 보는 드문 지역이다. 이곳 마을 이름도 연기마을이다. 연기처럼 사라지고 신출귀몰하는 대사가 있어 이름 붙여졌다고 전한다. ‘신출귀몰한 연기마을의 산에서 게를 보는’ 묘한 분위기다. 연기마을이 2코스 끝이고 3코스 시작 지점이다.

2코스에서 바로 선운산 방향으로 넘어갈 수 있지만 3코스인 질마재를 빠트릴 수 없다. 바로 미당 서정주의 생가와 시문학관이 있는 곳이고, 가을에 수만 송이의 국화꽃이 만발하는 그 질마재 아닌가.

질마재는 고개 모양이 ‘길마(수레를 끌 때 말이나 소 등에 안장같이 얹는 도구. 질마는 구개음화가 안 된 상태)’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질마재는 수천 년 동안 이 지역 사람들이 정읍이나 장성으로 소금을 팔러 나갈 때 이용하던 길이다. 동시에 미당이 서울로 길을 떠날 때 넘었던 고갯길이다. 

소요산 소요사를 지나쳐 질마재에 올라섰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휙 하니 불어왔다. 저 멀리 변산반도를 마주보며 바닷가에 넓게 형성된 갯벌이 보였다. 바다와 접한 고창은 전형적 만(灣)의 형태다. 그 바닷바람으로 시적 영감을 얻은 미당은 주옥같은 시를 많이 남겼다.

시문학관에 들러 그의 작품을 죽 둘러봤다. 문학관 계단 올라가는 벽엔 특이한 그림이 걸려 있다. 세계의 산 그림들이다. 웬 산 그림인지 궁금했는데, 미당은 말기에 치매에 걸리지 않기 위해 세계의 유명 산 이름과 높이를 줄줄 외웠다고 한다.

주변에 있는 국화는 9월 말, 10월 초라 아직 계절이 이른지 꽃봉오리조차 보여주질 않았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고 발길을 돌렸다.

동행한 김동식 해설가는 “고창은 겨울과 초봄엔 선운사 동백, 여름 해수욕장과 복분자, 초가을 꽃무릇(상사화), 늦가을 국화와 단풍, 계절에 상관없는 고인돌 등 사계절 내내 즐기고 볼거리가 풍성한 지역”이라고 자랑을 아끼지 않았다. 거기에 풍천장어까지 있다고 강조했다.

 

▲ 1 용이 바위를 뚫고 지나갔다는 선운산에 있는 용바위. 2 지난 9월 22일 국가문화재명승으로 지정된 선운산. 3 선운사 일주문과 대웅전 사이에 있는 꽃무릇 군락지. 길 옆으로 아름다운 풍광을 자아내고 있다. 4 질마재 길 옆에 있는 돌무더기에 돌을 얹고 있는 김동식 해설사.

 

보은염 부처님께 공양하러 가던 길

민물과 바닷물이 합쳐지는 좌치나루터에 도착했다. 백로, 두루미, 왜가리 등이 날갯짓을 했다. 아름답고 우아한 풍경이다. 그러나 나루터에 있어야 할 뱃사공은 없고 나룻배 한 척만 덩그러니 있다. 한때 고창 서부와 영광 법성포 사람들이 넘나들던 교통의 요충지였으나 22번 국도가 확포장되면서 승용차가 늘고, 급기야 1995년 영선교가 건설되면서 나루터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1980년대까지 주변에 주막이 있었으며 미당, 인촌 등과 시인묵객들이 자주 애용했다고 한다. 시대에 밀려난 처량한 모습이다. 이것도 우리의 사라지는 옛길이다. 정취 있게 되살아난 좌치나루터를 다시 볼 수 있는 날이 올까?


마지막 코스인 1500년 화염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선운산 길이다. 1400여 년 전 검단선사가 선운사를 창건할 즈음 선운산 계곡에 많은 도적이 민폐를 끼치고 있었다고 한다. 검단선사가 이들을 제압하고 불로 소금을 만드는 방법을 가르쳤다. 이에 도적들은 양민으로 개과천선한 뒤 마을을 형성해 부유한 생활을 영위했고, 이들이 검단선사의 은혜를 못 잊어 매년 보은염을 부처님께 공양했다. 그 보은염을 부처님께 공양하러 가던 길이 지금 걷는 이 길이다.

선운산 들머리인 연천마을에 있는 느티나무는 고창에서 가장 크고 오래됐다. 나무 밑동만 하더라도 성인 10명이 둘러쌀 정도의 둘레다. 이곳부터 산길로 이어진다. 곧이어 참당암 녹차밭이 나왔다. 희미한 안개가 서린 듯한 녹차밭과 반짝이는 찻잎이 잘 어울려 운치를 자아냈다. 연화봉, 소리봉, 낙조대를 거쳐 병풍바위에 이르렀다. 저 아래 도솔암과 바위 틈에 있는 듯한 도솔천 내원궁, 도솔암 마애불, 도솔계곡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난 9월 말 국가문화재명승으로 지정된 선운산이다. 맞은편 거대한 암벽엔 마애석불이 바라보고 있다. 20m는 족히 될 듯싶었다. 주위엔 울창한 숲이다. 단풍 시즌이 되면 정말 온 산을 뻘겋게 물들일 것 같았다. 도솔암을 거쳐 선운사로 내려왔다. 선운사 뒤쪽 500년 이상 된 동백나무는 천연기념물이다. 꽃은 없어도 그 규모가 장관이다. 꽃이 없을 때도 이 정도인데, 만발했을 때는 과연 어느 정도일까? 꼭 다시 한 번 찾을 것을 유혹하는 듯했다.

 

선운사에는 세 가지의 천연기념물이 있다. 동백나무와 관광단지로 조금 내려가면 나오는 장사송, 그리고 관광단지 바로 옆에 있는 송악이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그에 버금가는 나무가 또 있다. 바로 꽃무릇, 일명 상사화다. 잎과 꽃이 절대로 같이 피지 않아 서로 생각만 한다고 해서 상사화라 붙여졌다.

선운사에서 관광단지로 내려가는 길은 은행나무와 왕벚꽃나무, 꽃무릇이 지천에 늘렸다. 다양한 수종에 이름 모를 야생화도 더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숲길이 또 있을까 싶다.

걷는 행위는 목적이 아닌 그 과정 자체에 몰입하게 하는 묘한 힘이 있다. 프랑스 사회학자 다비드 르 브르통은 <걷기예찬>에서 “정신적인 시련은 걷기라는 육체적 시련을 통해 치료할 수 있다”고 극찬했다. 그는 “걷는 사람은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다 손에 잡을 수 있는 마음으로 세상의 구불구불한 길을, 그리고 자신의 내면의 길을 다듬어간다”고 했다.
고창의 구불구불한 옛길은 시대를 거듭나 고인돌을 말하고, 복분자를 말하고, 질마재를 말하고, 선운산을 말하며 고창의 내면을 다듬어 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고창 문화관광해설사 김동식씨
“문헌 참고하고 전문가·마을 노인 의견 수렴해 복원”

 

 

▲ 고창읍성 위로 주민들이 걷고 있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로 선정된 길이다.

“고창의 모든 것을 담으려고 했습니다. 아직 완성된 길은 아니고요. 군데군데 도로로 연결되는 길은 자전거를 무료로 빌려 운영하는 방법과 아예 산길이나 인도로 새로운 길을 내는 방법 등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고창 문화관광해설사 겸 숲해설가, 등산안내인 자격을 갖고 있는 김동식(60·사진)씨는 지난 1년간 고창의 옛길을 다시 복원하기 위해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정확한 옛길을 만들기 위해 문헌을 참고하고 전문가와 마을 노인들의 의견을 수렴했다. 또 실제 사람이 다닐 만한지 직접 수차례 왕복하는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고창의 모든 문화와 역사를 담을 수 있었다.

“고창은 정말 풍부하고 자부심이 대단한 고장입니다. 풍천장어, 복분자, 참게, 꽃게 등 민물과 바닷물이 접해 먹을거리가 다양하고, 일제강점기 때 곡창을 수탈하지 못하도록 길을 내지 못하게 막았던 지역입니다. 그래서 일본으로 방출될 곡식을 지켜냈던 것이죠. 거기에 인심까지 후합니다.”

후덕한 인상의 김동식씨는 대학 산악부 출신에 전직 교장이었다. 김씨는 대학 졸업 후 가진 첫 직장이 농약회사였다. 대학교 때 획득한 농촌지도사 지도직으로 취직한 농약회사에서 연구직으로 근무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 영업직으로 발령이 났다. 술을 전혀 못하는 체질상 영업직은 한마디로 ‘고문’이었다. 1년 만에 사표를 내고 나와 교사생활을 시작했다. 대도시 전주에서 근무하다 자원하여 1978년 고향 고창 영신고로 자리를 옮겼다.

영신고로 부임하자마자 등산부를 만들었다. 시골 학교에서 공부에 마음을 두지 못한 학생들을 모아 산으로 데리고 가 호연지기를 키울 의도였다. 수학여행도 여행지를 돌아다니는 것보다 교장에게 건의해 등산 위주로 계획을 세웠다. 여러 모로 반응이 좋았다. 산에 갔다 온 학생들은 피곤해서 그냥 자느라 문제가 생길 틈이 없었다. 이때 키운 대표적인 학생이 최오순이라고 자랑했다. 지현옥 등과 함께 에베레스트를 초등한 한국의 대표적 여성 산악인 중의 한 명이다.

김 해설사는 대학시절 산악회장을 맡기 직전 선배가 “회장직을 목에 걸지 말고 발목에 차라”고 한 교훈이 아직까지 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한다. 30여 년의 교직생활 동안 매로 다스린 학생은 단 둘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다. 모든 일을 솔선수범하며 학생들에게는 친구 같은 교사로 다가서니 매를 들 일이 없었다. 고창에서만 14년간 교사, 8년간 교감, 8년간 교장직을 맡았다. 지금도 만나는 사람마다 그를 ‘김 교장 선생님’ ‘김 교장’ 등으로 부른다.

“문화관광해설사를 제2의 천직으로 여기며 고창을 알리는 데 최선을 다할 겁니다. 고창의 역사는 알면 알수록 재미가 쏠쏠한 그런 지역입니다. 와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질마재 100리 길 탐방 가이드
완주는 최소 2박3일 잡아야…원하는 구간만 끊어서 할 수도

‘고인돌과 질마재 100리 길’은 총 4구간, 43.7㎞로 이뤄져 종주하기엔 조금 무리일 수 있다. 며칠 묶으며 구간을 나눠서 갈 수 있지만 여유가 없으면 중간에 가고 싶은 구간만 끊어서 가도 상관없다. 완주하려면 최소 2박3일은 잡아야 한다.


고창읍에서 승용차로 1구간 출발지점인 고인돌박물관까지는 불과 10분 남짓 걸린다. 고인돌박물관에는 대형 주차장이 있어 차를 두기에도 편리하다.

고인돌박물관에 차를 두고 출발해 선운사 입구나 미당 시문학관까지 갔으면 택시를 부를 수밖에 없다. 콜택시 비용은 선운사에서 2만 원, 시문학관에서 2만5,000원 정도. 문의 063-564-3822, 080-564-6200.

그 외에 고창 옛길이나 관광 관련 궁금한 사항이 있으면 김동식 문화관광해설사(010-5650-6145)나 고창문화원(063-564-2340), 고창군 문화관광과(063-560-2456), 고창 군내버스터미널(063-564-3943), 고창 직행버스터미널(063-563-3388)로 문의.

>>교통

서해안고속도로 선운산IC에서 고인돌박물관까지는 20분도 채 안 걸린다. 이정표가 워낙 눈에 띄게 표시돼 있어 내비게이션 없이도 쉽게 찾아갈 수 있다. 호남고속도로를 탔을 경우엔 정읍IC에서 빠져 22번 국도를 직진하면 된다. 22번 국도는 선운산도립공원까지 이어지며, 고인돌박물관 바로 옆을 지난다. 

서울~고창=고속버스 40분 간격으로 하루 16회 운행. 3시간30분 소요.
고창터미널~고인돌박물관=군내버스 수시 운행. 700원. 택시 7,000원.

>>숙박

선운사 관광단지와 고창읍내에는 숙박 장소가 많다. 고창읍내에 군 지정업소로 아리랑모텔(063-561-5595), 가든장여관(063-564-1100) 등이 있고, 선운사에는 선운산관광호텔(063-561-3377), 유스호스텔(063-561-3333) 등이 있다. 2구간 끝 지점 근처에는 동원모텔(063-561-3372, 010-3977-3818)이 있어 옛길 순례 중 이용할 만하다.

 

>>맛집

2구간이 끝나는 지점에 강나루 풍천장어식당(063-561-5592)이 있다. 문화관광해설사 김동식씨의 옛 제자가 운영하는 식당이다. 가격은 1만6,000~1만8,000원 선. 셀프는 1만2,000원 선. 셀프는 고기를 받아와 본인이 직접 구워야 한다. 구울 때도 숯불이나 옥수수 등을 다양하게 사용한다. 또 다른 별미인 꽃게정식과 참게탕이 있다. 수궁회관(063-564-5035)의 꽃게정식은 맛이 일품이다.
 
 
 
월간산 2009 글 박정원 차장 /   사진 정복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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