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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전라남도

화순 능주-822번지방도-영벽정 삼충각

by 구석구석 2009. 8.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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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주면 관영리 산 1 전남문화재자료67호 영벽정 

 

영벽정이란 계절따라 변모되는 연주산의 경치를 맑은 지석강물에 투영되어 운치있게 바라볼 수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연주산 아래 지석강의 상류 영벽강변에 있다. 주변 경관이 아름다운 경승지에 있기 때문에 행락객들이 널리 이용하고 있다. 2층 팔작지붕에 기와를 얹은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각형이다. 

 

건립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양팽손 등이 쓴 제영으로 보아 조선 명종때나 선조때(16세기 후반)인 것 같다. 건립자는 능 주목(군), 즉 관청이 건립의 주체였었다고 생각된다. 인조의 모후인 인헌왕후의 고향이라 하여 목사골이 되고 목사 정윤이 아전들의 휴식처로 정자를 개수하였다고 한다. 후일 고종 9년(1872)에 화재로 인해 소실됨에 따라 다음 해인 1873년 계유에 능주목사인 한치조가 중건하였고, 1920년 군민의 출연으로 중수하였다.

 

정자 안에는 9개의 현판이 있다. 기단위에 주춧돌을 넣고 원형기둥으로 세웠다. 이 기둥 위에 마루를 깔아 중층 누각형 정자를 만들었다. 마루의 사방에는 계자 난간을 돌려 장식하였고 처마밑에는 활주를 세웠다. 누 위의 기둥머리에는 익공형식의 공포를 하였고 천정은 연등천정이나 중앙부는 우물천장을 설치하였다. 지붕을 3겹으로 한 것은 아주 보기드문 예로 주목된다.

 

석고리 254-1 전남문화재자료61호 죽수절제아문

동헌은 수령이 공사를 처리하는 대청인데 죽수절제아문은 바로 능성현(1143년 현령파견∼1632년)의 동헌인 녹의당(綠倚堂)의 정문으로 지어 진 관아의 대문이다.

최초의 건립은 언제인지 알수 없으나 다만 녹의당(綠倚堂) 건립과 함께 지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1599년(선조 32)에 아문을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전해에 끝난 정유재란의 피해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1602년(선조 35)에는 당대의 문필가이던 하동정씨 정이 (1568∼1625)가 객관인 능성관의 현판과 함께 쓴 죽수절제아문 현판이 오늘에 전한다. 1632년 능주목으로 승격된 뒤에도 동헌의 정문으로 사용되었고 수차에 걸친 보수와 단청을 거쳐 오늘에 이른다.

아문의 구조는 막돌초석에 민흘림 기둥을 세웠고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지붕이다. 1983년 보수하였으며 1989년 드잡이 및 번와공사를 하였고 1994년에 해체 복원하였다.

(건축구조 및 의장 : 이 문은 정면 3칸, 측면2칸의 단층 팔각집이다. 중앙칸은 옆보다 넓게 꾸며 2짝 판자문을 달았고 그 앞으로는 외짝 문을 달았다. 문 상부에는 홍살을 꽂았다. 기단은 막돌로 낮게 축조되어 있고 초석은 큼직한 덤벙주초를 사용하였다. 기둥은 자연스럽게 휜 두리기둥을 사용하였고 그 위에 주두를 얹고 횡으로 창방을걸었다. 창방위에는 중앙칸에만 3소로 화반 1구를 배치하였다. 공포는 주두 부근에서 이익공식으로 꾸몄는데 쇠서 아래에는 연봉이 조각되어 있는 등 비교적 화려하다. 가구는 단순한 3량구조로서 대량위에는 판대공을 놓았고 종도리와 주심도리는모두 장혀받침이 있는 굴도리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측면의 중심기둥으로부터 대량위로 충량을 걸었다.)

 

잠정리 산33-1 전남기념물77호 삼충각

 

 

삼충각은 조선 선조 26년(1593)에 진주성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장렬히 순절한 충의공 최경회와 지평 문홍헌 장군과 명종 10년(1555) 을묘왜변때 전라남도 해남지방에 침입한 왜적과 싸우다 전사한 조현장군 등 세 충신의 애국충정을 추모하기 위하여 숙종11년(1685) 능주 향교 유림들이 건물 3동을 건립한 것으로, 현재 전라남도 지방기념물 제77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남기념물162호(85.12.26) 성화명 도로수축시주목록 암각기문 충신강변에 있는 삼충각 중 최경회 선생 정각(旌閣)이 있는 석대 아래에 새겨져 있는 기문으로 바로 위에는 목사송후유룡청덕애민비(牧使宋候儒龍淸德愛民碑)가 있다. 
 

 전체적으로 가로 150cm, 세로 80cm 가량의 면을 이용하여 약 5cm의 크기로 25행 180여자를 새겨 놓았는데 석질이 좋지않고 풍화가 심하여 왼편으로 갈수록 판독이 곤란하다. 이 기문은 각행의 글자수나 줄 등이 나란하지 않고 매우 불규칙한 형태로 새겨져 있다. 판독 가능한 부분을 통해 보면 이 기문은 성화 21년에 능성현의 남쪽 오리정(五里亭)앞에서 구질건연(仇叱健硯=거치른벼랑)까지 도로수축 사업에 시주한 사람들의 이름을 새긴 것이다. 성화21년 을사년은 조선성종 16년(1485)에 해당된다. 도로수축의 시주자들은 대시주, --시주, 상-시주, 대화주, 몽민화주 등으로 구분되어 있고, 각장의 이름도 나온다. 기문의 두곳에 여고리라는 지명이 보이나 의미는 잘 알 수 없다.  

이 기문에 보이는 여러 인명들 자료에서 그 존재가 확인되는 사람은 대시주로 기록된 장사랑(將仕郞) 구용연(具龍淵)뿐이다. 구용연은 본관이 능성, 자는 회관, 호는 농포로 고려때 평장사를 지낸 구민첨(具民瞻)의 후손이며 구득인(具得仁)의 아들이다. 1450년(세종32)에 태어나 1534년(중종29)에 85세로 졸하였다. 이를 보면 도로수축에의 시주는 그의 나이 36세의 일이다. 효행이 뛰어났다 하며 문행이 있어 음직으로 장사랑을 지냈다. 부인은 우산송씨 중인의 딸로 그와 동갑이며, 그보다 2년 앞서 졸하였다. 한편 이들 인명들이 모두 시주, 화주, 거사 등 불교적 용어로 표현되고 있는데 이로 보아 불교 신앙단체가 도로수축에 관여했거나, 절에서 도로수축사업을 주관하였을 추측이 들기도 하지만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이 암각기문은 조선초기에 도로를 수축하는 사업에 지방민들(혹 불교의 신앙단체)의 많은 경제적 도움을 얻었다는 구체적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는 점, 성화 21년이라는 절대연기가 명기된 점, 오리정 및 구질건연, 여고리와 같은 지명이나 시주한 인물들의 구체적 이름 및 시주의 등급 등이 명기되어 있다는 점에서 지방사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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