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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전라남도

나주 남내동-나주읍성 박경중가옥

by 구석구석 2009.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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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읍성의 남문 남고문 사적337호

 

나주의 길가에서 볼 수 있는 안내판 중 하나가 '천년 목사고을 나주' 라는 것이다. 나주는 고려 성종 때부터 조선 말기까지 2군 8현을 거느린 커다란 고을이었다. 나주가 큰 고을이 된 것은 고려 왕건이 나라를 세울 때 이곳 사람들의 덕을 보기도 했거니와 영산강 덕도 간과할 수 없다.

 

영산강이 나주평야를 풍요롭게 적셔준데다가 목포에서부터 뱃길이 이곳까지 이어졌기 때문이다. 나주시 남내, 성북, 금남, 향교동 일대 돌로 쌓은 성이 나주읍성인데 나주읍성은 동·서·남·북 4개의 성문을 설치하고 성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현재의 성터 길이는 3,300m이며 조선초기 김계희 목사가 부임하던 때인 1457~1459년 사이에 축성한 것이다.

나주읍성 사대문 명칭 - 동문/동점문, 서문/서성문, 남문/남고문, 북문/북망문

 

남내동 95-7 박경중가옥 061-332-6100

전남문화재자료 제153호로 1987년 6월 1일 지정되었다. 평탄한 지형에 남향으로 지어진 이곳은 전남지역에서 단일 건물로 최대 규모를 자랑하고 있으며 관청으로 사용될 것을 감안하여 지은 건축물이다. 초당은 1884년, 안채는 1910년, 아래채는 1917년, 바깥채는 1930년에 건립 되었다고 전해진다.  

 사진출처 : 한국관광공사

 

밖에서 본 박경중 가옥은 기와로 된 문간채와 초가인 바깥행랑채만 보이기 때문에 규모를 짐작할 수 없으나, 내부로 들어가 보면 새롭게 건물들이 나타나며 안채, 초당, 바깥사랑채, 아래채, 헛간채, 바깥행랑채, 문간채 등의 7동으로 이루어진 큰 규모의 가옥임을 알게 된다. 팔작지붕 문간채를 지나면 초당이 자리잡고 있고 아래채는 안채에서 오른쪽으로 위치해 있다.

 

바깥사랑채는 안채와 일직선상으로 맨 앞에 지어져 있으며 두 건물 사이는 담장으로 경계를 이루고 있지만 담장 한쪽에 좁은문이 설치되어 왕래 하는데 불편함은 없다. 안채는 정면 7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규모가 작지 않으며 우측으로 마루가 이어지고 두번에 걸쳐 기단을 높여 조망권을 좋게 하였다. 또 안채 후면에는 굴뚝과 함께 돌확이라는 우수시설을 갖추고 있는데 돌확에 빗물이 고이는 양으로 침수지역을 판단하고 대비하였다.

 

 사진출처 : 한국관광공사

 

고택에서 특이한 시설로 방문자들의 눈길을 끌고 있으며 정원에는 잘 다듬어진 잔디밭과 민예품들로 고택의 운치를 더해 주고 있다. 초당은 일자형 초가집으로 대청이 있고 안방과 건넌방, 부엌이 딸린 아담하면서 정겨움이 가득한 건물이다. 안방 뒤쪽으로는 작은방이 하나 있고 앞쪽으로는 건넌방까지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어 이동하는데 불편함이 없게 하였다. 막돌로 기단을 쌓은 사모기둥의 건물이다.

 

바깥사랑채는 팔작지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면 4칸 측면 1칸으로 구성되었고 아래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일자형 팔작집이다. 조선말기 상류층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고택으로 그 시설 생활용품이나 농기구들이 남아있어 아이들 역사 교육의 장소로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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