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시리전통마을
200여년 된 고가옥들이 30여동이나 즐비한 괴시리 전통마을은 영양 남씨 집성촌으로 400여 년간 세거를 누리며 살고 있는 팔자 형국의 마을이다. 마을 전면에는 영해 평야가 광할하게 전개되어 있고, 옛날에 호지가 있었다고 하여 호지골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일명 호지마을로도 불리워지고 있다.
그리고 괴시라는 현마을 명칭은 고려 공민왕 8년 때 목은 이색 선생과 교분이 두터운 중국사신 래왕 시가 마을을 방문하다 마을 형상이 괴시리 수구 풍면의 호지촌과 비슷하다하여 괴시리라 칭하게 되었다. 도내에서도 보기 힘든 고가옥들로 남씨 괴시파종택외 6점의 고택이 지정되어 문화재로 관리되고 있다.
■흙담 너머 고택…양반 기풍 느껴져
영덕군의 북쪽인 영해면 면소재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조선 시대 전통가옥 수십 채가 마을을 이룬 곳이 있다. 행정구역상 영해면 괴시리, ‘괴시전통마을’로 불린다. 고려 말의 대학자 목은 이색(1328~1396년) 선생이 태어난 마을이기도 하다. 마을 이름도 이색 선생이 지었다고 한다.
마을 근처를 지나 동해로 흘러드는 송천(松川) 주위에 늪이 많고 북쪽에 호지(濠池)가 있어 호지촌이라 부르다가, 목은 선생이 문장으로서 원나라에서 이름을 떨치고, 고국으로 오는 길에 들른 중국 괴시마을과 자신이 태어난 호지촌이 시야가 넓고 아름다운 풍경이 비슷해, 귀국 후 괴시(槐市)라고 고쳐지었다고 전한다.
마을 유래를 좀 더 살펴보자. 고려 말에 함창 김씨(咸昌金氏, 목은 선생의 외가)가 처음 입주한 이래, 조선 명종 연간에는 수안 김씨(遂安金氏), 영해 신씨(寧海申氏), 신안 주씨(新安 朱氏) 등이 거주하다가, 인조 8년(1630년)부터 영양 남씨(英陽南氏)가 처음 정착했다. 그 후 타성(他姓)은 점차 다른 곳으로 이주하여, 조선 중기 이후부터는 영양 남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문벌을 형성했다.
마을은 평지를 이루고 있으며, 조그마한 야산이 뒷배경을 이루고 있다. 골목길을 통해 마을 안으로 들어가봤다. 집집마다 반듯하게 쌓아올린 흙담이 골목을 이루고 있고, 길 너비도 꽤 넓다.
흙담은 하나같이 아래 부분에 넓적한 돌로 기초를 해 튼튼해 보였다. 그리 높지 않은 담장 너머로 보이는 기와집은 한눈에 봐도 당당해 보였다. 괴시 전통마을의 고가는 대락 30여 채다.
경북 민속자료 제75호인 영양남씨 괴시파종택을 비롯한 대부분의 집 앞에는 대남댁, 해촌고택, 물소와고택, 경주댁, 영감댁 등 ‘이름표’가 붙어 있다. 이곳 집들은 200~300년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데, 집 앞 이름표에는 친절하게 관련 설명이 있다.
영양 남씨 괴시파종택은 마을을 대표하는 가옥답게 규모면에서나 자태면에서나 양반 가문의 기풍이 느껴졌다. 지금도 집주인인 종손이 일주일에 한 두 번씩 들러 꼼꼼히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마을 한가운데 괴정이라는 정자도 있다.
마루에 앉은 아주머니가 근처를 기웃거리며 궁금해하는 손님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아주머니는 전통차를 권하며 괴시 전통마을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도 해줬다.
자신은 이 마을 주민으로 주말이면 이곳에서 방문객들에게 차를 대접하는 일을 한다고 한다. 순수한 자원봉사다. 아주머니는 차를 한 잔 더 권하며, 차값을 대신해 방명록에 서명을 하고 가라고 한다.
■고려 학자이자 충신의 면모 오롯이
마을을 그냥 둘러보는 것이 아쉬우면 ‘양반댁’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양반 생활을 몸소 느껴볼 수도 있다. 대남댁 주곡댁 천전댁 영감댁 등에서는 민박 체험이 가능하다. 민박을 실시하는 집은 손님들의 불편을 덜기 위해 화장실을 실내에 배치하는 등 구조를 일부 변경했다.
영감댁이라는 이름표가 붙은 집은 내부 수리 공사가 한창이다. 집 내부를 살짝 엿보니 마당이 널찍하고 파란 잔디도 심겨져 있어, 애들이 뛰놀기에도 좋을 듯했다. 민박체험을 원하면 영해면사무소로 문의하면 된다.
‘백설이 자자진 골에 구름이 머흐레라/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가/ 석양에 홀로 서서 갈 곳 몰라 하노라’. 마을 뒷산 중턱의 목은이색기념관 입구에 돌로 만든 탑이 여러 개 있는데, 여기에는 목은 선생이 직접 지은 시가 새겨져 있다.
이 시는 목은 선생이 새 왕조를 이룩하고자 하는 급진파가 득세하고 있을 때, 심산유곡으로 몸을 숨긴 고려 충신들을 그리워하고 점점 허물어지고 있는 고려 왕조와 무력해진 자신을 한없이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나타낸 시라는 설명도 곁들여져 있다.
목은 선생은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함께 ‘삼은’의 한 사람으로, 고려 말 커다란 업적을 남긴 학자다. 목은 선생의 문하에서는 고려 왕조에 충절을 지킨 명사와 조선 왕조 창업에 공헌한 사대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목은 선생 자신은 고려 왕조에 충절을 끝까지 지켰다. 영덕군이 목은 선생 생가터에 조성한 기념관에서는 선생의 활약상을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수 있다.
목은이색기념관 옆 숲속에는 선생이 생전에 다녔다는 산책로도 조성돼 있다. 산책로는 곧게 뻗은 소나무가 울창하다. 산책로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니 남동쪽의 망일봉에서 뻗어내려온 산세가 마을을 입(入)자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다. 가옥들은 이 같은 자연 지형에 맞춰 서남향을 하고 있다. 마을 건너편으로는 동해안의 3대 평야인 기름진 영해평야가 펼쳐져 있다.
영해면 성내1리 408 영해향교 054-733-5775
고려 충목왕 2년(1346)에 작지산 아래에 세워진 영해부 소학의 후신. 조선 중종 24년(1529)에 현재 위치로 이전, 이후 여러 번의 중수와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된다. 일제강점기에는 1914년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영덕향교에 합병되었다.
고려 설립당시에는 대성전과 동서무, 행랑, 담으로 이루어졌다. 이후 조선 선조때 누각인 태화루가 건립되었고 숙종 45년(1706)에는 경각, 전사청, 주방, 별고, 하인청 등이 건립되었다. 현재는 대성전과 명륜당, 태화루, 동재, 서재, 그리고 관리사가 남아있다.
괴시리전통마을과 멀지 않은 곳에 강구항과 함께 영덕을 대표하는 항구인 축산항이 있다.
축산항도 강구항과 마찬가지로 대게로 유명하다. 가자미 문어 오징어도 많이 잡힌다. 축산항은 새벽부터 밤까지 분주히 출입하는 어선들로 항상 활기가 넘친다. 부지런한 어촌의 삶을 느껴볼 수 있다. 강릉의 정동진이 서울의 정동쪽인 것처럼 축산항은 세종시의 정동쪽으로 신(新)정동진으로 불린다.
축산항의 죽도는 대나무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죽도산전망대에서는 동해안 푸른 바다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대게원조마을도 근처에 있다. 죽도산이 보이는 이곳 대게가 대나무를 닮아 옛부터 대게라고 불렀고, 이런 연유로 마을 이름이 대게원조마을이 됐다. 고려 말 영해 부사 정방필이 대게 산지인 이곳을 순시하기 위해 마차를 타고 넘어왔다 하여 차유마을로 부르기도 한다.
보고 먹고 즐길거리가 풍부한 어촌체험마을이다. 괴시리전통마을과 축산항 일원은 해파랑길(부산~강원도 고성)의 영덕 구간인 블루로드로도 연결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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