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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추천 테마여행

대한민국 국가지정문화재 사적및명승

by 구석구석 2009.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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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유적과 주위환경이 어울려 아름다운 경관을 구성하고 있는 곳을 국가가 법적으로 지정한 기념물.

 

사적및명승1호 1963.03.28  경주불국사경내(慶州佛國寺境內)

경주 토함산에 자리잡은 불국사는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짓기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다. 이후 조선 선조 26년(1593)에 왜의 침입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버렸다.

이후 극락전, 자하문, 범영루 등의 일부 건물만이 그 명맥을 이어오다가 1969년에서 1973년에 걸친 발굴조사 뒤 복원을 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경내에는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다보탑과, 석가탑으로 불리는 3층 석탑, 자하문으로 오르는 청운·백운교, 극락전으로 오르는 연화·칠보교가 국보로 지정, 보존되어 있다. 이러한 문화재는 당시 신라 사람들의 돌을 다루는 훌륭한 솜씨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아울러 비로전에 모신 금동비로자나불좌상과 극락전에 모신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을 비롯한 다수의 문화유산도 당시의 찬란했던 불교문화를 되새기게 한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1995년 12월에 석굴암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사적및명승2호 1963.03.28 내물왕릉계림월성지대(奈勿王陵鷄林月城地帶)

 신라 17대 왕인 내물왕(재위 356∼402)의 무덤은 약 1500여 년의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사적 제188호로 지정되어 있다. 무덤의 모습은 땅 위에 둥근 봉분만 갖춘 신라 초기의 양식이며 근처에 있는 신라 13대왕인 미추왕의 무덤과 같은 양식이다.

계림은 고목이 무성한 숲으로, 무덤의 동쪽에 있으며, 첨성대와 가까운 곳에 있다. 또한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태어난 장소로도 전해지며, 사적 제19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래 계림은 ‘시림’이었지만 김알지가 태어난 뒤 계림으로 바꾸었고, 나라 이름으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숲속에는 조선 순조 3년(1803)에 세운 계림의 전설이 적힌 비석과 비각이 있다.

무덤의 남쪽으로는 모양이 반달같아 반월성이라고도 부르는 월성이 있다. 이는 신라시대의 도성으로 성안이 넓고 자연경관이 좋아, 궁성으로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었으며 사적 제16호로 지정되었다.

이 지대는 신라 왕궁지역의 역사와 아름다운 자연이 조화를 이루어 편안하고 조용하게 역사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유적이다.

 

사적및명승3호 1963.03.28 내성유곡권충재관계유적(乃城酉谷權沖齋關係遺蹟)

 

조선 중종 때의 문신인 충재 권벌(1478∼1548)선생의 유적지이다.
권벌은 안동출신으로 연산군 2년(1496)에 진사가 되고 중종 2년(1507)에 문과에 급제하여 대간, 정원과 각 조의 판서 등 여러 벼슬을 지냈다. 인종 1년(1545)에 우찬성과 판의금부사를 지냈으며, 을사사화 때 소윤일파에 의하여 삭주로 유배가서 그곳에서 죽었다. 선조 때 억울함이 풀어져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봉화의 삼계서원에 모셔졌다.

이곳에는 선생의 뜻을 기념하기 위한 청암정과 석천정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큰아들 청암 권동보가 지은 것으로 지금까지 보존되어 왔다. 남서쪽으로 1㎞쯤 되는 곳의 냇가에는 수명루라는 누각이 있다.

실학자 이중환이 지은 『택리지』에서 우리나라의 빼어난 명승지로 손꼽고 있는 곳으로, 주위의 울창한 소나무숲과 자연경관이 아름답게 어우러져 있는 명승지이다.

 

 

 

 

사적및명승4호 1966.06.24 속리산법주사일원(俗離山法住寺一圓)

 법주사를 중심으로 속리산의 천황봉과 관음봉을 연결하는 일대를 말한다.

속리산은 해발 1,057m의 천황봉을 비롯해 9개의 봉우리가 있어 원래는 구봉산이라 불렀으나, 신라 때부터 속리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법주사는 553년 의신(義信)이 인도에서 불경을 가져와 이곳 산세의 웅장함과 험준함을 보고 불도(佛道)를 펼 곳이라 생각하고, 큰 절을 세워 법주사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문화유산으로는 법주사 안의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팔상전(국보 제55호)·석련지(국보 제64호)·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이 있으며, 주변에는 삼년산성(사적 제235호)·정이품송(천연기념물 제103호)·백송(천연기념물 제104호)·망개나무(천연기념물 제207호) 등이 있다.

자연이 물려준 속리산의 아름다운 경치와 바위들, 그리고 법주사 지역에 있는 역사 깊은 문화유산들이 어우러져 펼쳐져 있는 가치가 뛰어난 명승지이다.

 

사적및명승5호 1966.06.24 가야산해인사일원(伽倻山海印寺一圓)

 해인사를 두고 있는 가야산은 높이가 해발 1,430m이며, 우뚝하고 기이한 모습으로 우리나라 8경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신령스러운 산이다. 이곳의 돌과 물, 붉은 소나무숲은 다른 절이나 명산에서도 보기 힘든 자연경관을 갖고 있다.

해인사는 가야산의 서남쪽 기슭에 있는 절로, 신라 애장왕 2년(802)에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순응과 이정, 두 대사가 세웠다고 한다. 조선 숙종 때부터 고종 때까지 2백여 년간 7차례나 불이 나서 건물 대부분이 타버렸고, 지금의 건물들은 대부분 조선시대 후기에 세운 것들이다.

현재 절 안에는 고려 고종 23년(1236)에서 1251년까지 15년간에 걸쳐 완성된 호국안민의 염원이 담긴 고려대장경판(국보 제32호)이 있다. 그 밖에 장경판전(국보 제52호), 반야사원경왕사비(보물 제128호), 석조여래입상(보물 제264호), 원당암다층석탑 및 석등(보물 제518호), 합천 치인리마애불입상(보물 제222호)이 있다.


뛰어난 가야산의 자연경관과 역사의 숨소리가 살아 있는 해인사 지역의 문화유산이 어우러져 있는 곳이다.

 

 

사적및명승6호 1984.12.06 부여구두래일원(扶餘구두래一圓)

 구두래는 부소산 서쪽 기슭의 백마강 가에 있는 나루터 일대를 말한다.

이 명칭은 ‘구들돌’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추측하는데,『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왕이 왕흥사에 예불을 드리러 가다 사비수 언덕 바위에 올라 부처님을 향해 절을 하자,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져서 이 곳을 ‘자온대(自溫臺)’라 부르게 되었고, 그 이름에서 구들돌, 그리고 다시 구두래로 변하여 구두래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또한 백제를 오가는 왜의 배들이 구두래 나루터를 통해 백제의 수도인 사비에 들어 왔는데, 왜에서 백제를 부를 때 ‘구다라’라고 부른 것은 ‘구두래’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구두래 나루를 건너 울성산 남쪽 기슭에는 백제 법왕 2년(600)에 세운 왕흥사가 있고, 옛 문헌에 ‘사비의 강’으로 기록된 백마강이 부소산 기슭을 따라 흐르고 있다. 백마강 양쪽에는 왕흥사와 호함리절터, 부소산성, 부여나성을 비롯한 당시의 유적들이 많이 분포되어 있는데,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소중한 문화유산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곳으로 중요한 유적이다.

 

사적및명승7호 1998.12.23 지리산화엄사일원(智異山華嚴寺一圓)

 지리산은 백두산의 정기가 남으로 흘러 내려오다 다시 솟았다 하여 두류산이라고 불리는 민족의 영산이다. 산기슭에는 실상사, 연곡사, 화엄사를 비롯하여 많은 절과 유적이 있다. 또한 지리산 일원은 우리나라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화엄사는 지리산 반야봉과 노고단 자락의 남쪽 기슭 계곡에 위치하며 해발 250m 정도의 산간 구릉지에 자리잡고 있다. 주변의 아름답고 화려한 자연경관과 함께 화엄종의 맏형격인 큰 절로서 장엄한 품격을 갖추고 있다. 임진왜란(1592) 당시 완전히 불타버린 것을 1630년에 각성스님이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의 대부분을 다시 세웠다.

현재 화엄사에는 화엄사 각황전(국보 제67호),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국보 제12호), 화엄사 4사자 3층석탑(국보 제35호) 등의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는데, 지리산의 아름다운 경관과 잘 어우러져 뛰어난 사적 및 명승지로 자리잡고 있다.

 

사적및명승8호 1998.12.23 조계산송광사·선암사일원(曹溪山松廣寺·仙岩寺一圓)

  조계산은 소백산맥 줄기의 끝부분에 해당하며, 해발 889m의 높지 않은 산이다. 산세는 험하지 않으며, 산 전체가 넓은잎나무로 덮여 있어 철따라 계절의 변화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솟구친 절벽은 비룡폭포, 감초암폭포와 같은 명산의 경관도 지니고 있다.

선암사쪽은 나이가 수십년이 넘는 나무들로 차 있는데 도토리나무, 동백나무, 단풍나무, 밤나무, 느티나무 등이 울창하게 있어 사계절 훌륭한 경관을 연출해 낸다. 그 중턱에는 대각국사 의천 이후 16명의 국사를 배출한 송광사와 선·교종의 중심사찰인 선암사가 자리잡고 있다.

우리나라 삼보사찰<불보(통도사), 법보(해인사), 승보(송광사)> 중 하나인 송광사는 혜린대사가 770년경 처음 세운 뒤 건물이 80여 동에 이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의 사찰이었는데, 한국전쟁 후 지금은 50여 동만이 남아 있다. 송광사 일대는 연산봉을 비롯하여 여러 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어, 송광사 내8경과 외8경이 전해질 정도이다.

아름다운 조계산의 경관과 조계산을 사이에 두고 있는 송광사와 선암사 일원은 울창한 숲과 조화를 이루며 수많은 문화재가 간직된 곳이다.

 

사적및명승9호 1998.12.23 대둔산대흥사일원(大屯山大興寺一圓)

 대둔산은 천연기념물 왕벚나무를 비롯하여 상록활엽수인 후박나무·동백나무·비자나무와 물푸레나무·박달나무 등 많은 양의 낙엽활엽수로 구성된 경치가 뛰어난 삼림지역이다.

대흥사는 고려 이전에 처음 지어진 절로서, 임진왜란 이후에 서산대사에 의해 많은 인재를 배출하는 큰 절로 성장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대흥사는 북쪽에서 흘러내리는 금당천의 냇물을 중심으로 절이 남북으로 나뉘어 남원·북원이라고 불리는데, 이 법당들은 나름대로 특징을 지닌 별원(別院)의 성격을 지닌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하는 북원과 천불전·대광명전을 중심으로 하는 남원의 구조는 다른 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구조이다. 대웅전 앞쪽의 백설당에는 김정희가 쓴 ‘무량수전’현판이 걸려 있다.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보물 제48호), 탑산사 동종(보물 제88호), 대흥사 북미륵암 3층석탑(보물 제301호) 등 많은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어, 대둔산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따라 우리의 유서 깊은 문화유산을 돌아볼 수 있는 곳이다.

 

사적및명승10호 2007.04.02 서울백악산(북악산)일원(서울 白岳山 一圓)        


백악산(북악산) 일원에는 현재 사적으로 지정된 서울성곽(사적 제10호)과 서울부암동백석동천 유적(사적 제462호), 대은암(大隱岩)과 부아암(負兒岩) 등이 있으며, 한양(漢陽)의 후현무(後玄武), 북쪽 주산(主山)으로서 조선왕조가 도성을 정하였던 정치적 사상과 지형적 기본원리를 보여주고 있다.

이 지역에는 국방·정치유적으로서의 역사적·문화적 가치와 아울러 서울이라는 고도(古都)의 체계적인 도성조형원리, 풍수로 상징되는 사상적 체계를 구체화한 역사적 유적으로서의 가치가 잘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정궁인 경복궁의 후원으로서 소나무를 중심으로 하는 조선시대의 경관조성의 원리를 간직하고 있는 귀중한 식생경관을 유지하고 있어, 수려한 자연과 문화적 요소가 결합되어있어 문화재적 보존가치가 매우 큰 문화유산이다

지정 명칭은 현재는 북악산으로 불리우고 있으나 조선시대 도성과 도성 축성의 개념인 내사산(內四山, 四神沙) 보존의 의미를 되살리고 조선시대 각종 고지도 및 문헌 등 사료에 전하는 “백악(白岳)”의 지명을 살리기 위해 『서울 백악산(북악산) 일원(서울 白岳山(北岳山 )一圓)』으로 명명하였으며 지정구역은 기 개발된 지역의 사유지는 제외하고 국·공유지(170필지 3,682,738㎡)를 중심으로 지정하였다.

 

자료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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